교회의 정의와 비젼
요한계시록 21장 1~7절
교회 생활 수십 년 동안 하셨고
우리가 다 이제 교회 가운데 있는데
정말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그 뜻이 뭐고
교회의 정의가 뭔가? 다시 한 번쯤 우리가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눠보려고 한다.
첫 번째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곳이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받으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도중에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예레미야다
어떤 사람은 오리라 한 세례 요한이다.
또는 엘리아다 여러 가지 말이 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수제자가 베드로가
주는 바로 그리스도, 메시아, 기름 부은 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이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라고 하는 이름 자체가 반석이라는 뜻이다.
개신교회에서는 대부분
베드로의 신앙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고백이 반석이 돼서 교회를 그 후에 세운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 해석을 한다.
또 카톨릭 교회에서는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다
그러면서 베드로 수제자를 반석으로 해서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렇게 해석들을 많이 한다.
그런데 사실 반석은 곧 예수님이다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조금 아까 말씀드린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고백을 한 이 고백도 중요하지만
로마서 9장 33절에 보면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돌로 오셨다.
예수님이 부딪히는 돌,
길거리에 가다가 돌이 뾰족하게 튀어나왔으면
그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고
그 돌에 부딪히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은 돌인데 거치는 반석이다 그랬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거치는 반석인 예수님을 버렸지만
교회 시대에 예수님은 반석이 되어서
교회의 기초가 되신 것이다.
이 반석은 먼저 예수님이다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교회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라고 하는 반석 위에
우리는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님이 그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겠다
그래서 이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말씀하시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인가? 미련한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다
미련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이다 그랬다.
모래 위에 세웠는지 반석 위에 세웠는지
평상시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난다.
지금 집이 막 물에 잠기고 또 옆에서 바람이 불고
그게 바로 우리를 심판하는 7년 대환란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환란이 와 보면 그때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의 집이
반석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세워진 견고한 집인지,
모래 위에 세워져서 그냥 무너져 내리는 집인지
그때 결판이 난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다 알 수가 없다.
대한민국에만도 5만 개의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들이 다 반석에 세운 교회들인지
아니면 모래 위에 세운 교회들인지
우리가 주님의 심판의 때가 되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우리 개인적으로도 나의 신앙이
반석 위에 예수님 위에 세워진 그런 신앙인지
모래 위에 세워진 신앙인지
각각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점검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반석은 예수님 자신이다 하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이 바로 내가 반석이 되어서
이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그래서 이 교회는 사람들이 세우는 게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초대교회부터 이제 주님이 다시 한 번 오실 때까지
교회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다’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6장 20~22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으로 만들어져 가는 비유를 통해서
이 성전은 무형의 교회이다.
그러니까 이 지구상과 초대 2천 년 전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 지구상에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아시아 7개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이건 전부 유형 교회, 모습이 보이는 교회이다.
그런데 무형교회는 세계 도처에 시대 시대마다 있는
교회에 모든 성도들이 단 하나로 맺어진
그런 완성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주님은 성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영의 교회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예수님이 무형의 성전에
모퉁이 돌이 되셨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이 반석도 되시지만
또 주님은 친히 이 성전으로 교회를 말할 때
모퉁이 돌이 되셨다.
건물마다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가 건물을 지으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기둥도 필요하고 벽도 필요하고 석가래도 필요하고
지붕도 필요하고 많은 필요한 것들이 많은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성전이 지어지는
그 일에 어떤 역할을 하면서 우리가 성전에 함께 붙은
그런 우리가 됐느냐?
행한 대로 갚으신 원리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교회를 통하여 성전을 세우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면 기둥과 같이 세워지는 것이고
그렇게 행한 대로 그대로 갚아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성전이 되어지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인 성전이 완성이 돼야 하나님이 완전히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내 안에 하나님이 완전히 거하시는 성전이 이루어진
그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또 하나의 몸을 이루어서
교회를 세우는데 그 완성된 성전이 바로 하늘 날에
나타나는 무용의 교회, 완성된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성전을 완성해 가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실 초소를
마련해 드려야 한다.
저는 오래 전에 광명시에 있는 하안동에서
뚝방 생활을 좀 한 적이 있다.
목회에도 실패하고 오갈 데가 없고 그래서
누가 방 한 칸을 주어서 뚝방 거기서 생활을 했는데
그 뚝방에 방 하나라고 내 집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발 뻗고 잘 수도 있고 말이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오셔서
우리의 심령을 거처로 삼아서
예수님이 우리 심령 안에 거하셔야 되는데
인류에게 좋은 방을 마련해 드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렇게 조그마한 학고방과 같은 이런 뚝방에
작은 방처럼 내 심령에 그래도 주님이 발 벗고
서 오실 그 방 하나 정도를 마련해 드려야 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님이 우리 신령 안에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주무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배척받으시고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니까
사람의 심령이 거하실 초소인데 그 심령 안에
거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인자가 눌 곳이 없고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탄식을 하신 것이다.
이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주님은 내가 올 때에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셨다.
한국에도 5만 개의 교회가 있고
온 세계에 그렇게 많은 교회가 있고
수억의 사람들이 예수 믿는데
그런데 주님은 정작 믿음을 보겠느냐 그랬다.
우리의 심령의 성전 안에 이 성전이 각각 완성이 되어서
주님이 완전히 거하실 처소로서 그런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음에서 시작하는 출애굽의
믿음이 있지만 완성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날마다 이 믿음에 힘써서
주님이 내 안에 성전이 되어서
내가 주님을 그 안에 모시고
주님이 완전히 내 안에 모셔 오기 전에는
언제든지 떠날 가능성을 갖고 계신
그런 주님이신 것이다.
성경은 언제든지 떠날 수가 있다.
옛날에 사랑방에서 손님이 오면 사랑방에다가
아궁에 불을 뗐는데 그 연기가 자욱하니까
사람이 숨을 쉴 수가 없다.
사랑방에서 잠시 나와서 연기가 가실 때까지
잠깐 공기를 정화시키고 들어가서 자야 되는데
연기가 너무너무 매우면 거기서 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 심령에 잠깐 오셔서
사랑방 제 손님처럼 우리 안에 계시는데
오늘 주님이 내 안에 거시도록
이 사랑방에 잘 주무시도록 대접해야 되는데
나의 정욕의 냄새, 내가 세상을 향한 그런 냄새,
믿음이 없는 이런 삶 때문에
주님을 역겨워 견딜 수가 없게 되면
그 사랑방에서 연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처럼
떠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믿음이 없는 거고
그런 세상과 정력적인 냄새들로 주님은
견딜 수가 없으면 떠나신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 가라지고 이단교주고
그렇게 타락한 사람들이고
환란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 표를 받고
그렇게 다 떠나가는 것이다.
정말 그 주님 한 분을 내 심령에 모시고
거하실 철소가 되고 그 성전으로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고 그런 성전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완전한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을 만들어가고
그것이 완성될 때 무용으로서의 교회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만드시고
이 교회를 지금도 이제 완성해 가시면서
그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다.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길 수가 없다고
말씀 하신다.
교회는 결코 음부의 권세가 틈타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정의로 두 번째 교회가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유일하게
교회를 정의해 놓았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교회는 딱 구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거룩해진 성도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나 죽으면
교회에 잠깐 발을 들여놨다가 죽었다고
거기다 성도라고 쓰는 그게 말이 안 된다.
성도는 거룩해진 사람이다.
그리고 아직 성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합쳐 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이 교회는 우리가 거룩한 사람들만
있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을 받아보려고 하는
준비된 사람들과 거룩해진 성도들과 합쳐 있는 것이
교회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태복음 13장 47절에
그물 비유에서도 알 수가 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랬다.
오순절날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이 땅에 세웠을 때
그게 그물을 친 것이다.
그럼 그 교회라고 하는 그물 속에 많은 물고기가
들어올 거 아닌가?
그래서 이 물고기가 가득한데 그것이 다 송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물가로 끌어내어서
물가로 끌어내는 것이 7년 대환란인 것이다.
거기서 좋은 물고기, 좋은 것 이것만 그릇에 담고
나머지 못된 것은 전부 떼어버리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그릇에 담겨질 만한 좋은 것
이 그릇이 바로 청년 왕국이다 그 말이다.
천년왕국에 들어갈 만한 좋은 성도들도 있지만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그랬다.
못된 것은 천년왕국이라는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고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교회는 좋은 고기도 있고
못된 물고기도 있고 섞여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10절에 혼인 잔치에 비유해서도
말씀하셨다.
먼저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혼인자치에
청원을 받았는데 전부 참여를 안 하였다.
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나는 소 다섯 마리 샀기 때문에,
나는 상업차, 나는 장가들었기 때문에
구약시대 사람들이
아무도 혼인 잔치에 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 잔치에 오라고 초청을 하는데
사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여기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다
교회라고 하는 그물에 들어오고 잔칫집에 들어왔다고
전부 그게 축하객이 되고 혼인잔치에
나갈 수 있느냐 그게 아니다.
이 혼인 잔치의 비유의 말씀의 결론은 뭔가?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나와서
예복을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의의 거룩한 흰 옷인 예복이 입혀져야
그 혼인 잔치에 들어갈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비유들의 말씀을 보면
교회는 거룩해진 성도들도 있는 것이지만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의 길을 가고 있는
이런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교회는
모임, 가르치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다.
장소가 아닌 것이다.
커다란 건물을 세워놨다고 그것만이 교회가 아닌 것이다.
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제 핍박을 받으며
쫓기면서 카타콤 그 동물 속에 들어가서도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
그것이 교회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장소를 교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어떤 카페에 들어가서 보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예배당 여기가 지금 성전이냐?
아니냐? 막 욕을 해가면서 사람들이 싸운다.
의미를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교회는 한문으로 보면 ‘가르칠 교’다.
‘가르칠 교’ ‘모일 회’
가르치려고 모이는 것이다.
여기는 가르침을 받는 곳이다.
뭐를 가르치고 뭐를 배운가?
하나님을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것을 현재적으로 맛보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마다 모여서 예배하면서 기도하며 찬양하면서
이후로 천상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천상의 예배를
현재적으로 지금 맛보는 것이다.
그것을 배워가는 것이다.
교회 예배 속에는 여러 가지 찬양도 있고 기도도 있고
말씀도 있고 양육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전도도 있고
사랑 실천도 있고 그 외에 성경 공부도 있고
많은 것이 있다.
전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그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들을 가르치고
그렇게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서로 교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기도가 다른 게 아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나의 피로를 그분으로부터 공급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영원한 천국에서도 영원히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공급을 받으면서 영원히 살아가는데
지금 현재 그 천국의 영원한 생명 공급 받는
그걸 지금 배우는 것이다.
나의 모든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있는
그것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고
그 통로를 배우고 응답받는 걸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고 그것이 교회 생활인 것이다.
캐톨릭 교회는 의식의 예배를 많이 드리기 때문에
말씀이 약하지만 개신교에서 종교를 하면서
예배의 절반 이상이 말씀인 것은 무엇인가?
전부 가르치는 의미의 교회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그분을 어떻게 높여드리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그걸 연습하는 것이다.
그걸 현재적으로 맛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겸손하고 마음이 온유하니까
내게로 와서 배우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삶을 배우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다.
디모데서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 이니라
예수님 자신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인데
기둥도 진리로 세워져야 되고
그 터도 진리라고 하는 예수님의 터에 세워져서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교회이다.
왜 그런가?
요한복음 8장에 있는 말씀처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우리는 다 노예의 삶을 산다.
아담 타락 이후에 죄의 노예 하에 살고 있다.
다 노예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죄를 짓는 죄의 노예가 돼 있다.
세상 여러 가지 것들에 다 노예가 돼 있다.
어떤 사람은 술의 노예가 되고
어떤 사람은 도박에 노예 되고
어떤 사람은 음욕의 노예가 되고
우리 전부 노예 생활하는데
그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고 끝내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게
진리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하여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서
우리를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가는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다.
그래서 이 교회는
진리만 선포되고 진리로만 가르치고
진리만을 배우는 곳이 교회이다.
오늘날 이 교회 안에 많은 세상적인
프로그램들이 만연하다.
어떻게 하면 더 사람들한테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더 불러 모을까?
그건 교회가 아니다.
진리가 아닌 것이 선포되고 진리가 아닌 걸 가르치면
그건 교회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빌딩을 더 높이 세우고
어떻게 하면 이 교회를 살찌게 하고
우리 안에 이것이 어떻게 하면 더 이렇게 잘 될까?
교회가 기업인가?
교회는 진리 외에는 말해서는 안 되고
진리 외에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섬기는 걸 가르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법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응답받는 법을 가르치고
우리가 성도가 양육되는 걸 가르치고
전도는 무엇인가?
그것도 하나님을 소개하며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서
사랑 실천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그걸 가르치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교회는 성전을 이루는 곳이다.
아까도 잠깐 말씀 드렸지만
구약 시대에는 건물 성전을 만들었다.
온 우주 밖에 계시고 안에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
솔로몬이 만들어놓은 그 성전 안에 거기만 계시겠는가?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었기 때문에
거기 와서 기도하면 하늘에서 응답하셔 역사를 하셨다.
구약에는 건물 성전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곧 성전으로 오셨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예수님이 성전이 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수 믿는 자를 성전이라고
그때부터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있는 것처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 믿는 순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지금 세워진 것이다.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어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전이 완성이 돼야 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실 초소가 완성돼야 되고
그런 성전이 완성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모여 있는 거기가 완성된 교회이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것이 완성된 성전을 말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 12절에 보면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이런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공중 강림하기 위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을 미가엘 천사장을 통해서 쫓아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휴거 되신 분들
그분들이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다.
그분들은 하늘 장막 성전의 지성소인
시온산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7장 15절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무슨 말씀인가?
큰 환란을 통하여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만든 자들
처음부터 말씀드렸다.
교회가 거룩한 자들이 있고
예수님을 부르는 자들이 있는데
이 땅에서 거룩해진 사람들은 시온산이라고 하는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고
나머지는 다 성소에 들어가는데
하나님이 그 성소에 들어가는 그들에게도
장막을 쳐주시겠다.
이렇게 완전히 구분돼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천국 생활이고
완성된 천국이고 이것이 완성된 교회인데
그것이 분명하게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모세를 통하여 나타난 그 성막을 통해서 볼 때
지성소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성소에 들어가는 성도로 구분이 되어서
행한 대로 주님이 그렇게 갚아주시는데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 세상을 살 때
거룩해져서 휴거되는 그분들이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나머지는 다 축하객이 되는 것이다.
그분들이 왕이 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백성이고
그분들이 제사장이고 나머지는 백성들이 되고
이게 그대로 갈라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심령 안에
그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부활체를 이루어서 영육 간에 완전한 성전을 이룬
거기에 구원에 개인의 완성이 있는 것이고
그러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들어온 성령님을 통하여
내 안에 성전을 완성하고
끝내 사도 바울이 그토록 기다렸던 몸의 구속에
평화를 이루어서 내 안에 성전이 이루어지고
그런 성전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완전한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나라,
그걸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성채교회 6주년을 맞으면서 우리의 비전
이것은 성채교회의 비전만이 아니고
이 우주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비전이
이렇게 돼야 된다.
요한계시록 21장 본문의 말씀을 하고 있다.
계시록 21장 완성된 성전을 보니까
하나님이 그 장막을 쳐서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셨다.
그게 하나님 나라이다.
우린 지금 그걸 맛보고 연습하고
그것을 목표로 해서 가는 건데
그게 완성이 되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셨다.
그럼 우리가 현재적으로도 교회는 뭔가?
하나님이 현재적으로도 함께 해야
그걸 맛볼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우리가 거기에 소망이 있고
비전이 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이 늘 함께 운행하시는 교회와
비전이 돼야 되는 것이다.
성채교회의 비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
제가 주보에 기도문을 올려놓았는데
6주년을 맞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가 존속되도록 이제 수고하시는 손길을
이 시간을 통해서 기억해 주시고 축복하고
사랑해 달라고...
교회가 존속되도록 수고하고 애쓴 그런 손길인데
그 모든 게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게 교회의 비전인 것이다.
그 하나님이 장막을 함께하셔서
이제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니까
눈물을 다 씻어주시고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는
그런 완성된 생존이다.
우린 지금 그걸 바라보면서 연습하면서
맛보면서 가자는 것이 교회의 비전이라면
이 성도들이 이곳에 올 때마다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그런 교회들이 되어야
이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 교회의 비전들이다.
참 빛 기도원도 그렇게 될 줄로 믿는다.
그 기도원에 갈급한 심령들이 와서 눈물을 씻어주는
그런 기도원이 되고 그런 주님을 함께하고 만나는
그런 장소가 돼야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빛이 없는 어두운 세상에서 그것에 어둔 사람들이
‘아 이것이 빛이구나’ ‘이게 빛이 였구나’
그걸 보여주는 그런 기도가 돼야 한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한다고 했다.
처음 하늘 처음 땅도 다 없어졌다.
예수 믿기 전에 처음 사람의 이 안,밖도 다 없어졌다.
그러니까 몸도 부활하고 영혼도 새롭게 돼갖고
모든 걸 새롭게 새롭게 하는 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교회의 비전이 뭔가?
날마다 새로워져야 된다.
나의 겉사람은 후퇴하지만 나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속사람이 강건해지면서
날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그게 교회 비전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교회이다.
본문 가운데 마지막에 7절 가운데 보면
하나님이 이기는 자들에게 내 아들이 되리라
미안하지만 다 아들이 아니다.
이기는 자들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예수 믿자마자 다 뭐 공주 되고 왕자 되고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이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들만의 신부가 돼서
그걸 유업으로 받고 우리는 거기에 함께 붙어서
그걸 유업으로 받긴 하지만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정말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그런 교회로 이게 교회의 비전이고
오늘 이것이 우리 꿈인 것이다.
성채 6주년을 우리가 기념하면서
교회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교회의 비전들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런 교회,
모든 눈물을 씻어주는 그런 교회,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교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교회
이것이 없으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런 교회로 세워지고
또 그런 소망과 비전속에서 달려가게 되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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