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가 주는 교훈
히브리서 10장 19~25절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공기로 호흡하고 젖을 먹고 자라나는 것처럼
영적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기도로 호흡하고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고 자라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대면하고
말씀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슨 책이든 그 의미를 바로 알려면 저자의 의도를
간파해야 된다.
그리고 그 책이 쓰여 진 배경을 알아야 우리가 그 책이
원하는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도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 당시의 배경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잘 살펴서 우리가 책을 대하면
복음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가 주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하는데 히브리서는 우리가 아는 대로
저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책이다.
바울, 바나바 여러 학설이 있지만 정작 저자가 누군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등은 전부 교회에 보낸 편지이지만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는 바울의 서신처럼
어떤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보낸 글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초대교회는 유대인 얼마와
이방인으로 함께 구성이 돼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이 당시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유대인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맛보고 개종한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 신자들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가 쓰여 진 AD 50년 60년경에는
박해가 오기 시작한 때였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님도 순교 당하고 예루살렘 본교회의
야고보 사도도 순교를 당할 정도로 로마의 10대 박해는
너무나 유명하다.
AD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했는데
이때 여전히 개종하지 않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갔다.
이들은 여전히 제사 드리고
여전히 제사장이 존재하는 것이 대세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믿는 얼마의 히브리인들이
이러한 핍박과 어려움으로 인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서는 이런 때에 쓰여 진 책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1장부터
예수님은 더 우월하신 사람이다.
천사보다도 우월하고 모세보다도 우월하고
예수님이 바로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심지어 제물 자체이시고
예수님은 하늘 지성소에 가서 피를 뿌리신 분이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과 제사보다 예수님과의 새 언약이
우세하고 새 언약이 진리이고 예수님만이 참된 진리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 책이다.
이 히브리서 곳곳에는 "더욱", "더 좋은" 이런 말들이
여러 번 나온다.
히브리서 1장 4절에 보면
"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히브리서 6장 9절에 보면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히브리서 7장 19, 22절에 보면
"19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 8장 6절
"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브리서 9장 23절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히브리서 10장 34절 말씀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더 나은 산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6절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땅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외국인 취급을 나그네 취급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게 하셔서
하늘의 한 성을 예비하셨는데
이것이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성이다.
그다음에 히브리서 11장 35절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더 좋은 부활이 나왔다.
히브리서 11장 40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2장 24절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것이 히브리서에 나타난 키워드이다.
더 좋은, 더 나은 이런 말을 여러 번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새 언약을 가지고 오신 것이 구약의 율법보다
더 나은 것이고 제사보다 낫고 예수님과 새 언약의
우월성을 말하면서 흔들리는 그들에게 머뭇거리지 말고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을 히브리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경고의 말씀을 더불어 말한 것이
히브리서의 배경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히브리서가 쓰여 진 것을 깨달을 때
이 시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오실 때가 다 된 이 시대는
더 좋은 세상이 오고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그런 때인데
유대인들이 히브리서의 이 말씀들을 통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고 더 열심히 달려갈 때
이것이 격려의 말씀이 된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로 점점 진리가
더 늘어나고 계시가 더 늘어나고 더 좋은 것들이 나타나는
이런 신령할 때에 우리는 머뭇거리지 말고
다시 한 번 힘을 얻어서 재림의 주님을 준비하는
이러한 교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배경 속에서 본문을 보면
첫 번째,
19절과 20절의 말씀처럼 담력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왜인가?
18절에 있는 말씀대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들릴 것이 없느니라"
개종치 않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계속 드려야 되는데 예수님이 더 좋은 제사를 드렸고
더 좋은 제물로 이 모든 것을 완성해 놓았다.
이제는 제사가 필요 없다.
구약의 성서에는 제사장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고
제물이 아니면 피가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이제는 우리가 담력을 얻고 담대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에 이것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0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길을
열었는데 이제는 누구든지 휘장 안으로 담대히 들어가는
새로운 길을 여셨는데 이것이 우리의 살 길이라고 하였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우리가 더 담대함을 가지고
이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에 보면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보좌인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제사장만 1년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제는 마음의 성소와
그 지성소에 하나님이 계신 은혜의 보좌에 누구든지
예수님의 힘을 입어서 그 피를 힘입어서 담대히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우리가 이것을 붙잡아야 된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역사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란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분명히 말씀하셨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 다 시행하겠다고
우리게 약속해 주셨다.
그런데 이 말씀이 의식주에 관련한 것을 구하는 것이냐
이 말이다.
먹고 마시는 건 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고
광야 40년을 책임져준 것처럼 의식주는 구할 필요도
없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게 또 뭐가 있겠는가?
죄사함을 구해야 한다.
죄사함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이루어주시는데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그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사함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여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 필요한 게 아니다.
이 악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권세가 필요하다.
권세와 권능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려면
예레미야, 에스겔서에 나와 있듯 유대인들은
얼마나 강퍅하고 이마가 뻔뻔한가?
그러니까 금강석과 같은 그런 뻔뻔한 그들에게 더한 것이
아니면 이길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
다이아몬드가 왜 비싼가?
더 높은 고열에 만들어진 보물인 다이아몬드는
여러 가지 금, 은, 보석을 가공할 때 마치 유리칼처럼
이것을 재단하는 칼로 사용한다.
다이아몬드가 아니면 세공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강퍅하고 뻔뻔한 많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할 때 그것보다도 더 강한
금강석과 같은 다이아몬드 같은 그런 도구가 있어야 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권세, 능력이다.
그런데 이것도 여전히 죄사함을 구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은혜로 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내 마음의 보좌에 있는 주님을 향해서 담대히 나갈 수 있다.
여러분 금년 안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의 보좌로
담대히 나가 담대함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시기를 바란다.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다.
특별히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권세, 능력을 더 구해서
정말 능력 있는 그런 신자로서 변해가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두 번째는,
21~22절에 있는 말씀인데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다음에 필요한 것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다.
여기에 맑은 물은 바로 성령이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로 우리의 행실은
자꾸 씻어 간다.
그런데 이 행실이 나타난 동기 자체인 마음이 참 마음이
돼야 된다.
거짓이 없는 마음이 참 마음이다.
순수한 마음이다.
특별히 누룩이 섞이지 않은 마음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셨다.
세상 정욕적인 사상들이 바로 바리새인 누룩인데
이것이 들어가 있지 않는 순수한 마음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 더 나가서 온전한 믿음이라고 하였다.
율법과 유대인들로서는 가질 수 없는 그런 믿음이다.
오직 이 히브리서가 주장하는 새 언약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받을 수 있는
그런 온전한 믿음을 우리가 이제 구해야 된다.
히브리서 10장 38~39절 말씀에 보면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개종한 유대인 가운데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얼마는 흔들리며 뒤로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려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 믿음으로 살아야 되지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뒤로 물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고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하였다.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니까 히브리서 11장 전체의
믿음 장으로 이 믿음을 강조하고 있고 있다.
율법으로 나는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난 믿음이고
새 언약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이고
개종한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참 믿음,
온전한 믿음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믿음 장으로 등장을 하게 되었다.
성도들은 이 믿음의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믿음 그 믿음이 그 시작되는 믿음이 있지만
완성되는 믿음도 있다.
사랑도 시작되는 사랑이 있지만 완성되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점점 믿음이 온전해져야 된다.
그리고 그 마음도 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세 번째는
10장 23절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소망을 잡아야 한다.
히브리서 6장 11절 말씀에 보면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이 소망도 풍성해 풍성해야 한다.
이 소망이 기름이 떨어져서 깜빡깜빡하는 그런 등불이 아니고
기름이 넉넉하여 계속해서 빛을 드러내는 그러한
풍성한 소망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성도의 최대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성도의 소망은 부활에 있다.
이 부활이 살아있는 산 소망이고
이 부활만이 우리 인생의 소망이다.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전의 인생은 아무리
무엇을 해도 죽은 인생이고 썩을 인생인데
이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이 부활에 이르려면 반드시 죄에서
해방이 되는 경지에 나가야 부활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1차적인 소망이 무엇인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우리 일생의 소망이고
풍성한 소망이다.
우리는 죄에서 꼭 해방이 돼야 된다.
한번 생각해 보자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와 세 제자에게 주님이 그토록
부탁하셔서 마지막 그 밤에 그렇게 기도하기를 바라셨는데
마음은 원하는데 육신이 약하다고 그랬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성도의 삶 속에서 마음껏 봉사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제한된 그런 장애물이 우리에게 많다.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데 마음껏 사랑이 안 된다.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정말 성경대로 마음껏 사랑하기 원하는데
이것이 마음대로 안 된다.
밤새도록 밤이 맞도록 기도하며 주님과 교제하고 싶은데
육신이 있으니까 안 된다.
나의 생명을 불살라 다 하나님께 드리고 봉사하고 싶은데
이것이 안 된다.
이런 것들을 왜 하지 못하는가?
죄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죄 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죄 성에서 해방이 되면 미워하려 해도 미워할 수가 없다.
사도요한이 요한1서에서 말한 것처럼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죄를 짓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법칙이니까
원죄라고 하는 죄 자체가 떠나버렸기 때문에 죄를 지으려
해도 질 수 가 없다.
우리는 마음껏 사랑하기를 원하는 이런 소망들이 있다.
죄에서 해방되는 경지에 가면 그 다음은 몸의 구속인 부활이
따라오게 돼 있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이다.
이렇듯 우리의 최대 소망이 바로 성도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말씀대로 살아가고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데
이러한 소망이 풍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 안에 이런 소망이 차고 넘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다음 네 번째는,
10장 24절 말씀에 있는 대로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라고 하였다.
서로서로 돌아보라는 것은 한 몸이고 형제자매고
한 지체니까 서로 서로 돌아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미워하면 안 돼", "사랑해야 돼", "악행을 하면 안 돼",
" 선행을 해야 돼" 하면서 서로 격려하라고 하였다.
이 격려라고 하는 말은 바늘로 찔러 자극을 줘서
고치게 할 수 있는 그런 격려를 말한다.
자극을 주라는 것이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한테 가서 바늘을 찌르듯이
"당신 그렇게 하면 안 돼" 라고 말 할 수 있는가?
대번에 따귀 맞는다.
그런데 형제자매니까 서로 자극을 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체들 서로의 할 일이다.
제가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김우수라고 하는 사람은 학교 공부를 별로 못했다.
공부를 못하니까 장가도 갈 수도 없고
그래서 혼자 살다가 74살에 그냥 죽은 사람이다.
학력이 없으니까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배달을 하며 살았다.
짜장면 배달하다가 2011년 9월 23일 날 교통사고가 나서
25일 만에 죽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11년 그 당시에 대통령과 영부인이
그 사람의 장례식에 왔다고 한다.
짜장면 배달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왜 장례식에 그 바쁜
대통령과 영부인이 장례식장에 왜 왔겠는가?
이 분은 짜장면 배달하면서 2011년 죽을 당시 월급이
70만원 이었다.
70만원 월급을 받는 사람이 2006년부터 매달 10만원씩
아동 기금으로 기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 본인의 생명보험 4천만원도
아동재단에 기탁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아동재단을 관리하던 사람이
최불암씨였다.
이 당시 김우수씨는 자식도 없고 장가도 안 가서
장례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상주가 최불암씨였다.
그리고 장례식에는 혜택을 얻은 아이들이 수없이
많이 왔다고 한다.
짜장면 배달하는 김우수씨는 아이들에게 천사였다.
이 이야기가 기사로 나오자 대통령과 영부인이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아동재단에
많은 후원을 하게 되는 기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도 이렇게 선행을 하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며
살았는데 기독교인이 우리도 이렇게 이름을 남길 만한
거창한 일을 하지 않아도 내 현실과 나의 삶 구석에서
마음껏 사랑하는 사람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내 주어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 마음껏 선행하는 사람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인은 어두운 세상의 빛인데 나에게 주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여 선행을 하고 사랑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바늘로 찔러서 격려하듯
자극을 주는 행동들이 우리 형제, 자매 안에서만
되어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담력을 가지고 성소에 나가서
은혜의 보좌에 가서 죄사함을 구할뿐더러
능력과 권세를 구하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최대의 소망인 죄에서 해방되는 것과
그리고 부활을 얻는 이 소망과 그리고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할 수 있는 이러한 권면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론적으로 25절처럼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데 이 히브서 기자가 왜 25절에
이 말씀을 집어넣었겠는가?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의 배경을 말한 것처럼 지금 이들은 로마의 핍박에
의해서 감옥에 가기도 하고 재산을 뺏기기도 하고
히브리서 마지막 장에 가면 사랑하는 디모데도 감옥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디모데가 석방되었고 기다리는 너희에게 우리가 함께
갈 것이라고 안부 편지도 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에 핍박이 와서 사도행전 18장 2절의 말씀대로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로마에서 흩어진 그들도 편지로 문안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금 전부 핍박을 받고 환란을 당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고 소망 중에 살아가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며 담대하게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갈 수 있는
이 일을 우리가 감당하려면 함께 모이기를
힘써야 된다는 뜻이다.
모이기를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적인 힘을 공급받는 곳이다.
알지 못하는 힘이 공급되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으로 천국 생활을 우리가 연습하는 곳이다.
교회는 장차 나타날 안식을 맛보는 곳이다.
우리가 혼자 신앙생활을 잘 감당할 수만 있다면
교회 나올 일이 뭐가 있겠는가?
코로나로 인하여 지금 3분의 1정도의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대면 예배가 이제 필요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는 벌써 맥도날드의 드라이브 스루처럼 운영하는
교회들이 생겼다.
가족끼리 또는 혼자 자동차를 타고 운동장에 가서
설교 듣고 나오면서 헌금 내고 나온다고 한다.
성도의 교재도 없고 권면도 없고 사랑과 선행이 무색한
교회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
한국에도 이런 교회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대면 환경에서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냥 교회 안 나오고 대면 예배드리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히브리서 저자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핍박을 당하고 함께 어려움을 당하고
함께 같은 소망을 가지고 지낼 때 여전히 소수의 흔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더 우월하고 이 새 언약이 진리이기 때문에
여기에 굳건히 서서 더 영적으로 성장하는 힘을 얻고
더 성장하고 자라나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 곳곳에 성장의 말씀들을 하고 있다.
히브리서 6장 1~3절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완전한 데로 나가야 되는데 하나님이 허락을 하셔야 된다.
여기서 이 허락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 번 비췸을 얻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일을 말한다.
연단을 다 마치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는 성막이 세워진 이후에 나타나는
이런 일인데 거기까지 더 자라나야 이것이 완전으로
점점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곳곳에 이렇게 자라나야 한다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가 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깊이 여러분 마음속에
새겨두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히브리서가 주는 교훈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 마지막 때도 점점 주님이 다시 올 때가 가깝고
더 많은 진리와 계시들이 드러나고 새 언약이 나타난 것처럼
이 시대 곧 멀지 않아 놀라운 개혁의 역사들이 나타나는
때인데 더 좋은 것들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소망 가운데 든든히 서서 더 영적으로 성장하는
그 완전의 길을 사모하며 용사와 같이 달려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한다.
금년 안에 더 좋은 길로 용사와 같이 달려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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