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신 하나님을 만나자
시편 89장1~8편
"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2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5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6 대저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권능 있는 자 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7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
8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어느 분이 시골을 떠나 서울에 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실패를 거듭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고향 가는 기차를 타고 가는데
계속인생을 실패하다보니 머릿속에서
'산다는 게 뭔가', '삶이 뭔가' 이러한 말이 맴돌았다.
그런데 기차에서 갑자기 음식 파는 분이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순간 이 사람은 다른 말은 안 들리고
'삶은 계란이구나' 라는 말만 들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기독교인의 인생이 무엇일까?
사막과 광야를 횡단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적인 인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사막을 지나가게 된다.
광야를 횡단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이 사막과 광야를 지나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한 게 있는데 그것은 오아시스이다.
오아시스가 없으면 중간 중간 쉬어서 짐승들에게
물도 먹이고 쉬게 할 수 없어 사막을 지나갈 수 없다.
기독교인인 우리의 인생이 사막을 지나는 것이라면
이 오아시스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오아시스이다.
시편 107편 4~7절 말씀에 보니까
"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이렇게 인생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고 거할 성이 없어
주리고 목마름으로 매우 피곤할 때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바른 길로 인도해 주셔서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오아시스이다.
광야 사막 길을 방황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이 거할 성을 예비하셔서 그 거할 성에
들어가게 하는 이것이 광야 가운데 오아시스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 사막과 같은 인생을 지나가면서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이것이 우리의 광야 삶의
오아시스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계신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때에 따라 질투의 하나님으로
또 우리에게 위로하시는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또 거룩한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영광의 하나님으로 말이다.
이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시편 기자는
본문 가운데서 그 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 성실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고 우리가 본받아야 될
하나님의 성품 중에 하나이며 우리의 광야의 삶 속에서
만나야 할 그러한 하나님 중에 한 분이다.
창세기 24장 27절 말씀에 보면
"27 가로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삭의 아내를 준비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고향 땅으로 갔을 때 그 광야 사막 길을 지나야
아브라함의 고향에 가는데 그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 27절에 나와 있다.
늙은 종이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와야 되는데 이 광야
사막 길을 다 지나서 리브가의 집에 이르렀을 때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인데 그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다" 고 하였다.
그러니까 성실하신 하나님이 나의 이 사명을 감당하는 길에도
평탄한 길을 주시라고 한 기도한 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본문 가운데 시편 기자는 89편 1, 2, 5, 8절에
"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2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5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8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이 짧은 본문 가운데 네 번씩이나 주의 성실하심을 말하고 있다.
49절에도 말씀하신다.
"49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이 외에도 시편에 92편, 100편에도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수많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성실하신 하나님을 만나 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처럼 이 가운데서 위로받고 응답받고
또 쉬고 또 남은 광야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성실하시다" 라는 말은
하나님이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사람 중에도 '아 저 사람은 참 성실한 사람이야'
이 말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성실하신 하나님은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를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고 성경의 예언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인류 전체뿐 아니라 우리 각 개인 개인의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계속 일을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
요한복음 21장 25절 말씀
"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사셨는데 그 하신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이 세상에 책으로 둔다고 해도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5장에 주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시공간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만 하시고 하나님의 시공간을 초월한
그 세계 속에서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수많은 초월적인 능력이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금 일을 하시고 그분이 성실하신 분이니까
나도 일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책으로 두기에도 부족할 만큼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다 성경에
기록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데 그 하나님은 각 사람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일을 하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성실해도 각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따라 그렇게 일할 수가 없다.
은밀하게 마음속에 감춰진 그들의 비밀을
어떻게 우리가 다 알 수가 있겠는가?
그 사람의 속사정을 어떻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영이신 하나님은 각 사람을 다 꿰뚫어서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와 사정과 그 사람의 체질까지 그 모든 걸
다 알고 거기에 맞춰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실하신 것이다.
두아디라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불꽃같은 눈을 가지고
나타나셔서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하였다.
성경에는 우리의 신음까지도 들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말라기 3장 3절에 보면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하나님을 마치 숙달된 조련사같이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들 때 그 용광로 속에서
막 그 광물을 끓이다가 정확한 시간에 불을 꺼서
가장 좋은 품질의 금이 나오게 한다.
미리 불을 끄면 그 금은 나오지 않는다.
너무 오래 끓여도 좋은 금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숙달된 조련사처럼 언제 연단의
불을 꺼야 하는지 언제 시험의 불을 꺼야 하는지
이것을 정확하게 아셔서 용광로 앞에 앉아서
불을 끄시는 분이라고 말라기 3장에 분명히
그렇게 말씀 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인생 가운데 가장 영적인 유익인지를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영혼의 사정에 맞추어서 때에 따라 용광로에 불을
높이는 것처럼 시험의 불을 높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
불을 끄기도 하고 때에 따라 위로하고 책망하고
어떤 때는 모른 척하시고 때에 따라 권면하시고
어떤 때는 은혜를 주신다.
이 모든 것을 그 영혼의 사정에 맞춰서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일을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하시며 중심을 보시고 일하시고
또 우리의 믿음도 보시고 여러 가지 다 보고 계신다.
저와 여러분이 실망할 이유가 없는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좌절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분이 알고
계시고 계속해서 우리를 위해서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성경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야곱의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났을 때는
그 여인의 형편에 맞는 생수 문답을 하셨다.
남편 이야기를 하셨을 때 참 남편이 누구이고
진짜 내가 찾는 그 생수가 무엇인지 그 영혼 문제를
그 사람의 형편에 맞춰 하고 있다.
한밤중에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니고데모에겐
이에 맞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니까 각 사람의 영혼의 정도와 그 모든 환경에 맞춰서
주님은 일 하고 계신다.
이것이 성실하신 하나님인 것이다.
금년 안에 여러분이 성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린다.
나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나의 가는 이 사막과
같은 인생 속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처럼
그 성실하게 일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야 된다.
이것이 우리가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럼 이 성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여러분 성실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길 원하는가?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버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 말씀하셨다.
그러면 아버지가 성실한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그 아버지를 본받아 성실한 삶을 살아야 된다.
그래야 그분이 우리 가운데 만나주신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것이 주의 일이라고 성경에 말하고
있는데 예수 믿는 이 일을 우리는 성실하게 해야 된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 중심의 삶을 성실하게 해야 된다.
다른 사람을 기도로 섬기는 것도 성실하게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섬기는 것도 성실하게
이 모든 것을 우리도 하나님처럼 성실하게 해 나갈 때
성실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만나주신다.
우리가 성실하게 우리의 일을 감당한다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각 사람의 형편에 맞춰서 성실하게 역사하는
것처럼 우리도 각 사람 형편에 맞춰서 합당한 말씀을
전하고 합당한 기도를 해주듯 합당한 일을 해야 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각 사람의 형편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성실한 하나님은 영으로 계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다 아셔서 하시는데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면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성실하게 기도할 수 없다.
성실하게 사역할 수 없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6학년 때 장기 두는 걸 배웠다.
그때는 뭐 총명하고 머리가 좋으니까 장기를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동네 노인들을 다 정복해서
이제 도장 깨기처럼 다 이겨 장기 초단이 됐었다.
그 다음에는 중학교 2학년 때 바둑을 배웠는데 동네
후배한테 바둑을 져서 화가 나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바둑을 열심히 배우니까 누구 말 따라 천장이 다
바둑판으로 보이고 그런 때가 있었다.
바둑책도 사다가 보기도 했는데 일본의 판전이라고 하는
프로 바둑기사가 있었다.
이분이 바둑책을 해석하면서
이 사람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사람의 별명이 여기에 나왔다.
이 사람의 별명이 무엇인가하면 면도칼이었다.
얼마나 날카롭게 수를 두는지 면도칼처럼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어린 마음에 그 사람의 별명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속에는 '아 나는 큰 칼이면서 면도칼로도
동시에 쓸 수 있는 칼이 돼야 되겠다' 라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그런 소원이 들었다.
왜냐하면 면도칼은 너무 얇아 부러지기 쉽고 큰 칼은
부러지지 않지만 날카로운 면이 덜 하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그런 칼이 돼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쓴 책을 보면 이런 걸 조금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리하면서 자세하게 그리고 전체적인 흐름과 대세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며 쓰고 있다.
이유는 바로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게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제가 여러 번 그랜드캐년 이야기를 하였다.
높이가 100m가 넘는 그 골짜기가 저 부산까지와 같은
400km정도의 그런 거리인데 이것을 어떻게
하루에 다 보겠는가?
보는 방법은 헬리콥터를 타고 보는 것이다.
헬리콥터를 타고 부산까지 가는 것처럼 전체를
하루 만에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그 골짜기 400km를 자세히 보려면 몇 년이고
거기에 살면서 골짜기 골짜기를 다 뒤져야 된다.
그래야 그랜드캐년을 봤다고 말할 수 있다.
헬리콥터 타고 하루 만에 보는 것은 누군들 못 보겠는가?
성경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전체적인 흐름과 대세를 잃지 않으면서도
골짜기 골짜기 하나를 자세히 자세히 봐야 된다.
각 사람의 사정도 이렇게 알아야 한다.
외형적인 흐름을 보고는 모른다.
겉으로 그 사람이 울고 있는데 그 사람의 아픔이 뭔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 그 사람의 속사정이 뭔지 모른다.
그런데 면도칼로 쪼개듯이 그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쪼개고 하나님 말씀이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고
하시니까 이것이 성령 충만하여야만 보여지고
성령 충만하여야만 알게 된다.
사도행전 3장에 초대교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작정 기도하러 올라갈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나타났다.
작정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미 오순절을 경험하여 얼마나 놀라운
성령의 충만을 받았는가?
남들은 동전 한 번 던져주는 걸로 끝나는 앉은뱅이지만
그 영혼을 끌어 일으켜서 성전으로 함께 들어가서 찬양하는
그것이 앉은뱅이의 근본적인 문제이고 그것이 원인 치료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할 때 그 영혼의 문제가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성실하게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막연하게 기도해 주는 게 아니다.
그 영혼의 속사정이 뭔지 예수님을 따라서 그렇게
그 사람에게 합당한 기도 제목으로 합당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왜 명의를 찾는가?
섬세하게 누구보다도 수술을 잘하니까 명의를 찾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가짜 의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실하신 하나님이 되어서 우리의 영혼의
속사정에 따라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처럼
그 하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
많은 영혼을 그렇게 섬기면서 말씀과 기도로 성실하게
모든 믿는 일에 모든 신령한 일에 성실하게 살려고 하는
그 사람을 도와주시고 성실 하나님이 나타나 주시는 것이다.
시편 31편 23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성실한 자는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시편 7편 8절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성실하심을 따라 판단하신다.
잠언 28장 10절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잠언 28장 18절 말씀
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하나님이 성실한 성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도와주시고 성실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그냥 막연하게 기도하는 거 아니다.
정말 그 사람을 위해서 성령 충만을 구하고
그에게 필요한 말씀이 뭔가?
무슨 말로 권면을 해야 되는지,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되는지,
이런 것들을 구하면서 성실한 하나님을 본받아서
우리가 이렇게 성실하게 믿는 일에 신령한 일을 이렇게
해나가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그런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다.
세 번째는,
성실한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면 오아시스를 경험하는 건데
그런 사막과 광야를 지나가는 다른 대상들에게 오아시스가
어디에 있다고 이렇게 전해야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 성실한 사람을 만나면 그 하나님을 찬양하여
높여드리고 그 사람을 그 사람들에게 간증의 삶으로
그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간증의 삶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역사하셔서,
광야 사막 길을 건너가는 나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만나주서,
나는 정말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통해서
이렇게 문제가 해결 되었어,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시고
나의 사랑을 이렇게 알았던 분이야,
이것을 자꾸만 찬양하고 높여드리고
그걸 간증해야 된다는 것이다.
제가 미국에서 구세군교회에 있을 때 그곳은 예배 프로그램
중에 꼭 매 예배마다 간증하는 사람이 하나씩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개입하셔서
어떻게 역사했는지 간증을 시킨단 말이다.
그 많지 않은 인원인데도 매주 마다 간증거리가 있다.
매 삶의 나의 구석구석에서 이 성실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역사를 하셨는지 우리가 그것을 높여드리고
찬양하고 간증해야 된다.
시편 40편 10절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우리가 숨기면 안 되는 것이다.
그걸 드러내야 된다.
그분의 성실하심을 선포해야 되는 것이다.
89편 본문 가운데도 1절 다시 한 번 보면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그 성실하심을 대대에 알게 하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선포하고 드러내야 되는 것이다.
시편 71편 22절 말씀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주의 성실하심을 찬양으로 올려드리는 것이다.
계속해서 우리가 선포하고 이 신앙을 고백하고
이걸 자랑하고 높여드려야 된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위해 죄악 세상 어두운 데서 왜 불러내셨느냐?
왜 우리를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느냐?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고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드러내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고 우리를 간증의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고 우리를 불러내셨다는 것이다.
지금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을 해야 된다.
계속해서 드러내야 된다.
마태복음 7장 7~12절 말씀이다.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구하고 찾으라 이 말씀이 얼마나 좋은 말씀인가?
구하는 이마다 얻고 찾는 일마다 찾고 두드리는 게 열릴
것이고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누가 아버지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줄 좋은 걸로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좋은 걸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이 결론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데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는데 이 남을 우리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대접을 받고 구하고 찾는 것을 응답받고 이렇게
대접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먼저 하나님께 대접을 하라는 것이다.
그 성실하신 하나님을 성실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높여드리라는 것이다.
그분이 나의 아버지인 것을 믿고 그 아버지 됨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란다.
기도 받는 비결 중에 하나가 이런 것이다.
그분은 성실하신 하나님이고 나의 형편 처지를 따라
일을 하시는 분이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고
내가 부르짖으면 듣는 분이시고 그 하나님을 계속해서
하나님답게 대접하고 하나님 답에 높여드리고
그분을 찬양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대접을 받고 이 말씀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대로 찾아지고 열려지고 얻어지고
이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날 제가 복음 성가를 듣는데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그 찬양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치는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어부들의 찬양이라고 목사님들이 모여서 찬양을 만들어
그것이 판으로 나와 그걸 듣다가
‘아 그래 정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야
그분은 성실하신 분이야
지나온 모든 삶을 다 돌아봐도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
이 찬양 자체가 그 목사님들이 그 찬양할 때
자기감정인 것이다.
그분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고 나를 언제나 지키셨고
언제나 은혜를 냈고 나를 버리지도 않고 말이다.
계속해서 그런 걸 나는 확신한다고 말이다.
얼마나 멋진 가사인가?
그날 그걸 들으면서 가슴이 울고 하면서
정말 그래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가?
한 번도 나를 버리신 적이 없어
큰 은혜를 체험하는 그런 날이 있었다.
여러분 남은 생애를 통해서 광야 사막 길을
우리는 금년 한 해도 또 지나갈 것이다.
이 사막 광야 길에서 무슨 일이 닥칠지
우리는 또 금년 한해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찬양을
부른 것처럼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당장 2월 달에 무슨 일이 터질지,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될지,
온 세계가 어떤 길을 갈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그런 암흑의 시대를
우리가 건너가고 있다.
이 사막 길을 지나가면서 우리가 금년 한해 또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오아시스가 필요한 것이다.
잠깐 잠깐 위로 받고 응답받고 하나님이 함께 가신
그 오아시스가 필요한데 수많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여러분 성실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축원한다.
그분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형편 저지 나의 신음까지 보시고
눈물을 보시고 나의 모든 형편에 맞춰 역사하는
그 성실의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하나님은 그런 성실한 자를 만나주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영혼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끌어안고
그 영혼을 위해서 정말 성령 충만을 구하며
가슴 아파하며 구하고 정말 하나님처럼 성실함을 따라
우리의 신령한 일을 이렇게 감당해보려고 하는
이런 성실한 자에게 하나님 만나주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금년 한해 성실한 자에 하나님 만나주시고
여러분 자신이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감당하여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는 금년 한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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