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본향
히브리서 11장13~17절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명절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고향이다.
고속도로가 정체 되고 길이 막혀도 민족이 대 이동하는
것은 명절에 고향을 찾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고향이 있다.
고향은 부모님이 있고 추억이 있는 곳이고
또 포근함이 있고 우리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오늘 설교 제목은 "더 나은 본향"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 한다.
첫 번째,
성도들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된다.
본문11장 13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이렇게 말씀했는데
이 사람들이 다 누구인가?
앞에 11장 처음부터 나오는 사람들이다.
11장 4절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또 11장 5절에 보니까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이들이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고
11장 7절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11장 8절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라고 하였다.
함께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이삭과 야곱도 함께 갔고
그리고 1장 11절에 보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사라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지만 함께 믿음을 따라
갔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갔는데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라고 하였다.
무슨 약속인가?
가나안 땅 일경을 주겠다는 그런 약속이다.
창세기 13장 14~15절 말씀을 보면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일경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창세기 13장, 17장에도 또 약속을 하셨고
이삭에게는 26장에 야곱에게는 28장에 약속 하셨다.
그래서 이 모든 족장들에게 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 했는데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받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면
실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니까 이미 가나안 7족이
자리 잡고 있었고 자기들은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이는 가나안 땅은 실제적인 천국이 아니었다는 사실로
이것은 모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땅에 있는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 하늘에 있는 걸 보면서 환영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사모하고 더 나은 본향을 찾게 되었다.
성도들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림자임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고 그림자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영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어떠한 일이 나타나는지는
땅에서 되어 진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하늘나라의 모형이고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사람들은 다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바라보고 환영하며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그럼 더 나은 본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모하며
믿음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이 하나님 나라가 왜 우리의 본향이고
더 나은 본향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뿌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고
우리의 생명의 근원은 그 아버지 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을 가르쳐주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요한복음 5장 18절에 보면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더 죽이려고 애를 쓰게 된 원인은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더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5장 17절에 말씀하고 있다.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자신의 일을 한 적이 없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의 시공간에 들어왔지만 이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계속해서
초월적인 삶을 하나님처럼 사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물론 이사야 63장 16절에 이사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있다.
63장 16절 말씀에 보면
"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하나님이 토기장이처럼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그릇으로
만드셨는데 이 분이 아버지시인 것이다.
이 세상에 우리의 뿌리가 있고 조상이 있는 곳이 고향인데
이 육신적인 부모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출생한 것처럼
우리는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으려고 하는 인생들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형상대로 우리가 점점 지음을 받아가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썩어질 존재도
허무한 인생도 아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영이 충만하고 생명을 얻게 되고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한 자리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 완전의 길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고향인 것은
그들의 뿌리가 가나안 땅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독립을 하게 되었다.
AD70년에 나라가 멸망하고 1900년 만에 땅을 되찾게 되었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왜 이들이 여기가 우리 땅이고 우리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3대가
막벨라 굴에 장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고향에 가면 선영이 있어서 조상들이
거기에 묻혀 있다.
이것처럼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영이다.
성지순례 가면 막벨라를 반드시 가보게 돼 있다.
말씀 한번 같이 찾아보겠다.
창세기 25장 7~10절
"7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8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9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아브라함이 선영을 준비해 놓았다.
돈을 주고 그 땅을 사서 막벨라 굴을 준비해놨는데
정작 아브라함이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
창세기 49장 29~31절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도 그 선영에 묻혔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묻혔고 그리고 레아도 그곳에 장사하였고
야곱 자신도 거기에 묻혀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3대가 막벨라 굴에 묻혀 있다.
창세기 47장 29~30절
"29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이렇게 요셉에게 맹세를 시키고 있다.
애굽 땅에 나를 묻지 말고 저 가나안 땅 우리 조상의
선영에 묻으라고 맹세시켰다.
이것이 막벨라 굴이었다.
창세기 50장 12~13절
"12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그러니까 아버지 야곱의 명령을 쫓아서 그 옛날 교통도
나쁜데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메고 갔다.
지금도 가끔 보면 이민 가서 미국에서 죽은 분들이
자녀들에게 부탁한다.
나를 여기 낯선 미국 땅에 묻지 말고 내 고향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그래서 미국에서 화장해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와서 납골당에 모시는 이런 일들도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선영이 있기
때문에 1900년 만에 들어 간 것 것처럼 하늘나라
본향에는 우리의 뿌리인 아버지가 계시고
믿음의 조상들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더 나은 본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거기에는
가나안 7족이 살고 있어서 나그네처럼 외국인처럼
대접받으면서 살았지만 10절에 있는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모형이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성이 더 나은
본향이라는 것을 알고 그 성을 바라며 살았다고 하였다.
본문 16절에 뭐라고 말씀하였는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 한 성은 예루살렘성이다.
히브리서 12장 22~23절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초대교회 히브리서 기자가 이 히브리서를 쓸 그때에
이미 하늘에 시온 산이 있고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있다고 하였다.
아브라함과 그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하였다.
이것이 하늘에 있는 성 예루살렘이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성이 있고 시온산이 또 있다.
시온산과 예루살렘은 같은 장소가 아니다.
다른 장소이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이 예루살렘과 시온산이 합쳐져서
새 예루살렘성이 내려온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 하는가?
갈라디아서 4장 26절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신약의 모든 성도와 신약의 예수님의 신부
그리고 모든 신약의 구원받는 성도들이 나타나기 위해서
구약의 어머니처럼 역할을 한 분들은
여기 히브리서 12장 23절에 있는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구약의 24장로들을 말한다.
이것이 신약의 교회가 나타나도록 준비된 구약시대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한 이들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예루살렘이라고 하고
시온을 딸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머니인 구약의 성도들에 의해서 신약의 딸들인 신부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이 함께 새 예루살렘 성으로 나오는 것이다.
세 번째,
결론으로 이 땅에서 우리도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이 이들에게
성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늘의 도성,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외국인처럼 살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여기 이들이 다 나그네이다.
베드로는 철저하게 이것을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다.
17절에도 또 말씀하고 있다.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육신을 갖고 사는 동안에 우리는 나그네이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아브라함과 그 믿음의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살면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경영하는 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도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서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정말 나그네 인생인 걸 깨닫게 되면
이 다섯 가지를 꼭 알고 살아가야 된다.
첫째,
나그네는 반드시 목적지가 있어야 된다.
목적지가 없으면 그것은 떠돌이이다.
길 가는 나그네는 반드시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다 목적지가 있다.
우리는 명절에 고향집을 목적지로 해서 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가는 나그네이고 여행객이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를 가려고 하는 영적 나그네인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목적지로 해서 살아가야 된다.
목적지가 없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은 철저하게 잠깐 안개가 모였다가 없어지는 것처럼
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한다.
특별히 영적인 나그네로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분명한 목적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둘째,
나그네는 반드시 동반자가 있어야 된다.
이 길은 혼자서 갈 수 없다.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된다.
함께 도를 닦는 사람들을 도반이라고 한다.
도의 반려자들과 함께 가야 된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서로 사랑으로
이 길을 함께 하면서 손을 이끌어 줘야 한다.
오래전에 이삭목사님이 북한의 스파이가 되는 게
목적이었는데 영적 스파이가 되었다.
북한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뿌리며 사역 하였다.
어느 날 성탄절이 되어서 북한 성도들을 만나 물어보았다.
"북한에서는 성탄절이 되면 무슨 노래를 부릅니까?",
"무슨 찬양을 부릅니까?"
그런데 북한 성도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예 우리는 성탄절이 오면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을 지켰네" 이 찬양을 한다고 하였다.
여기는 찬송가가 없다.
옛날에 시멘트포대 같은 종이에 생각나는 대로 찬송가를
적어놓고 이곳에서는 성탄절이 와도 떳떳하게 찬송을
못하니까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을 지켰네"
이렇게 써놓고 돌아가면서 성도들이 불렀다고 한다.
'지금쯤 남한에서는 새벽송을 돌겠지' 하며
마음대로 찬양을 부를 수 없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도들은 지하교회에 모여 서로 위로하며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이순옥여사라는 분이 미국 하원에서 몇 시간 동안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분은 북한에서 고위층이었는데 뭐가 잘못돼서
잡혀가게 되었다.
이 분이 간 곳이 기독교인들을 잡아놓은 곳이었는데
여기는 용광로 작업하는 곳이었다.
이 곳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하다보니 머리가
다 타버리고 피부도 이상하게 되고 사람들이 쭈그러져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열 속에서 오랫동안 작업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밤중이 됐는데 간수가 다 가니까 자기네끼리
손을 잡고 찬양을 하면서 남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여기 사람들이 이곳의 실상을 서방 세계에 가서 전해달라고
이순옥여사한테 부탁을 했는데 이 이순옥여사가 나중에
이 곳을 나와서 한국에 오게 되었고 미국에 가서
북한의 실상에 대해 연설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 북한을 악의 축이라 말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렇게 한 밤중이 되면 서로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함께하는 도의 반려자들이 있기 때문에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감당할 수 있었다.
북한에도 중국에도 공산당이 만든 삼자교회가 있다.
지하교회 성도들이 이 교회를 간다.
부활절이 됐는데 부활절 설교가 이러하였다.
"예수님이 부활했으니까 우리도 열심히 일합시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삭목사님이 궁금해서 성도에게
이 교회에 왜 나옵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이들의 대답은 어디서든 찬송을 부르면 잡혀가는데
이곳에 오면 공식적으로 찬송을 합법적으로 부를 수가
있기 때문에 온다고 하였다.
찬송을 불러보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자유스럽게 신앙생활을 하고
얼마나 좋은 세상을 살고 있는가?
찬양도 기도도 우리의 나그네 된 삶은
사랑으로 서로가 끈끈하게 이어주는 동반자가 있어야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셋째,
나그네는 최대한 짐을 가볍게 해야 된다.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많이 지면 그 목적지를 향해
오랫동안 길을 갈 수 없다.
셰익스피어가 아프리카의 뜨거운 사막을 지나간 일이 있었다.
뜨거운 사막을 지나다 보니까 나중에는
책 두권만 남았다고 한다.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책 두 권외에는 짐이 없었다.
이 책 두 권중 하나가 성경이었다.
나그네는 천국이라고 하는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최대한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나그네는 반드시 삶의 방향 감각이 있어야 한다.
한밤중에 길을 잃어버리면 나그네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밤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본다.
방향을 보기 위해서 나침판을 가지고 간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짐승들은 얼마나 감각이 뛰어난가?
지진이 오려 하면 벌써 동물들은 살길을 찾아서 도망간다.
영적인 감각도 마찬가지다.
시대적인 감각이 있어야 된다.
모든 감각은 우리의 북극성이 되고 나침판이 되는
성경에 반응해야 한다.
방향감각이 있지 않으면 나그네는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나그네는 반드시 믿음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아브라함과 같은 이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것은 모형이고 더 나은 본향은 하나님 나라이고
그분이 경영하시는 성이 하늘에 있다고 하며
이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살아갔다.
지금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사실은
하늘의 가나안을 주겠다는 약속임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주님이 다시 오시고 새 하늘 새 땅은 가나안이
실제로 우리가 부활하듯 새로운 땅이 돼서 이것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는 일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고 만국이 나타나면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새로운 새 하늘 새 땅이 나타나는
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성경 전부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가 이 약속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했고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돼서
우리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고 하였고
이기는 자는 새 하늘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고
약속 해 주셨다.
우리는 이 수많은 약속을 붙잡고 지금 믿음으로 가고 있다.
약속이 없으면 믿음의 근거는 없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고 성실하신 분이고 거짓이 없는
분이시기에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이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이 나그네 삶인 것이다.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앞으로도 수많은 명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여러 차례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이 세상에 고향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더 생각하고 우리에겐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림자고 모형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이방인처럼 이렇게 살아간 이들과
같이 우리가 지혜를 받아서 우리의 삶이 철저한 나그네
인생임을 깨닫고 나그네와 같이 분명한 목적지를 가지고
동반자들과 함께 짐을 가볍게 하고 약속을 믿고 갈 수 있는
영적인 나그네,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여러 번 예루살렘 성을
시편을 노래하면서 순례하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순례자로서 분명한 하늘에 있는 본향을
목적지로 삼고 걸어가길 바란다.
끝으로 명절을 향할 때마다
오늘 들은 이 말씀들을 상기하면서 더 나은 본향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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