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주의 뜻대로 사는 삶

by Andrew Y Lee 2023. 1. 11.

주의 뜻대로 사는 삶

 

야고보서 4장 13~17절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오늘은 신년 주일이다.

1월 1일 새해 첫 주가 됐다.

여러분 모두가 새해 형통하는 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형통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창세기 39 2~3 말씀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즉, 형통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요셉이 형통해서

'요셉은 형통한 자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도 다 알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됐다.

 

4~5 계속해서 보면

"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누군가가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형통한 자가 되면

주변 사람들도 함께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요셉으로 인하여서 보디발 가정을 축복하고 있다.

 

조금 더 나가서 23 말씀을 보면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23에는 요셉이 감옥에 가 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 때문에 동침을 거부하니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 있는데 이 환경 속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는 것이 형통이다.

 

이 형통은 세상 기준의 만사형통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형통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형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는 것이다.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돼서 그 살림을 다 하려면

먼저 가정 총무로서 연습을 해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디발의 집에 가게 하셨다.

그 보디발의 집에 가서 하나님이 그 가정에 복을 주니까

총무를 하게 되었다.

 

보디발의 복을 받지 못했으면 총무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보디발의 가정에 복을 내리시니까 총무연습을

하게 되고 그리고 감옥에 가게 하셔서 연단을 받는데

그 감옥에 가서도 제반 사무를 전부 요셉에게 맡기게 되었다.

더 큰 살림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애굽에 가서 국무총리가 되었다.

 

가정 총무라고 하는 그 기간이 없으면

어떻게 애굽의 총리가 됐겠는가?

감옥에 가서 총리하는 그 과정이 없다면

어떻게 애굽에서 총리가 됐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 땅에 심어 애굽의 총리로

삼아서 야곱의 70인이 이주하여 인류 전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이 모형적인 진리를 이루시고

또 야곱과 70인을 통해서 언젠가 출애굽하여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그 모든

하나님의 뜻을 요셉에게 이루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요셉의 7년 풍년, 7년 흉년

이것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 비밀인데

7년 흉년이라고 하는 큰 환란을 만나기 전에

7년 풍년이 곧 가까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그 비밀을 보이지 않고는 행하신 적이 없다고

아모스에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요셉을 통하여 인류 전체를 나갈 계획을

요셉을 통해서 보이셨다.

얼마나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가?

 

그런데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는 여러 가지

연단 과정을 지났는데 그때마다 그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성경적인 의미의 형통이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가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형통이 오는 것이다.

 

본문에 야고보 사도는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되고 행함을

보이라고 계속 이 행함을 강조한 것이 야고보 사도의

말씀인데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이

본문에 있다.

 

그래서 주의 뜻이 무엇이고 주의 뜻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또 우리가 깨달은 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해서

실제 2023년 새해에는 형통한 모든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첫째로

15 말씀을 보니까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제일 먼저 우리는 주의 뜻대로 해야 된다.

 

우리가 뜻대로 해야 산다.

뜻대로 해야 이것 저것도 하게 된다.

 

우리가 주의 뜻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매 순간에 성도의 삶은 주의 뜻을 살펴야 한다.

 

로마서 12 2에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선한 뜻이 무엇인지?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되는데

이러한 경지에 가려면 이 세대를 본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그러니까 변화 받지 않으면 온전한 뜻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분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된다.

성경 전체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인생에게 주신

하나님 뜻이다.

 

하나님이 이미 성경을 통하여 그분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다 나타냈다.

 

대부분의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이

성경 안에 이미 다 나와 있다.

 

그런데 각 사람을 향한 구체적인 뜻이 없다.

각 사람의 구체적인 뜻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기도하면서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가 필요한 것이고

은사가 필요한 것이다.

 

주의 뜻을 우리가 찾고 주의 뜻대로 살아야 되는데

본문 가운데 13 말씀에 보면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사람의 계획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육하원칙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이런 육하원칙이

있는데 여기서 "언제"라고 하는 게 나온다.

 

오늘, 내일 그리고 1년이라는 기간을 유하라 고 나온다.

그리고 "어디서"는 어느 도시에 가서

"무엇을"은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은 "왜"라고 하는 것이 빠져있다.

오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간 장사를 하여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중요한 것은 "왜"이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의 의도는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고

하나님 뜻이 없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세상 정욕만

추구하는 것 일뿐 이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는

그걸 왜 해야 하는지,

그 중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다.

 

계속해서 14 말씀을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는 무엇인가?

잠깐 보이다가 흩어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욥기에 보면 "인생을 그림자 같다" 그랬고

야고보서 1 10~11 말씀에 보면

"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세상에서 부한 것 같은데 자랑하지 말고

인생은 다 풀의 꽃과 같이 잠깐 이렇게 피는 거 같은데

바람이 불면 풀이 다 말라버리고 꽃은 떨어지고

아름다움도 없어지고 아무리 부해도 이와 같이

모든 인생은 전부 쇠자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인생관이 돼야 한다.

 

언젠가는 이렇게 다 풀의 꽃과 같이 그림자와 같이

안개와 같이 뜬구름과 같이 다 없어지는 인생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왜 하면서 이 길을 가고 있느냐

그 목적과 중심이 어디 있는지 이런 인생관을 가져야

우리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왜 이걸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

본문 17 말씀에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의 뜻은 선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죄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뜻대로 안 하면 죄를 짓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해야 선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한 이 선은

세상 도덕과 윤리와 세상 기준의 법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 선의 주체가 되신다.

 

마태복은 19에 부자 청년이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나?

"하나님만 절대 선하시다."

 

하나님이 보시는 성경 기준의 선을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것이지 세상 도덕과 윤리 기준의 이 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32 25~29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출애굽기 32은 무슨 장면인가?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는 모세가 산에서 더디 오니까

인도할 인도자가 없어져 아론과 그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이다.

지금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십계명 중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이것을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우상 숭배하는 것 자체가 악이고 죄이다.

 

하나님이 그 우상숭배한 자들을 레위지파 사람들을 통하여

삼천 명을 죽였는데 인간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무자비한

하나님이고 질투하는 하나님이고 피를 보고여 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악과 함께 할 수 없고

우상과 함께 할 수 없는 분이다.

 

이 레위지파는 성질이 굉장히 급한 사람들이다.

창세기에 레위지파 사람들을 쭉 보면 이웃을 도륙하고

칼을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날만큼은 레위지파가 하나님 앞에 헌신을

하였다고 하였다.

 

형제를 치고 자기 민족을 죽이러 칼을 잡고 나온 자들이

레위지파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복을 내렸다고 하였다.

 

잔악한 레위지파 사람들이 후에 성전 봉사에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선을 잘 깨달아야 된다.

 

로마서 14 23 말씀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여기는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다 죄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의 뜻을 분별하면서 거기에 알파로

믿음을 더하여 믿음을 따라가는 것이 뜻대로 사는 삶이다.

 

로마서 4 17~22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나와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을 제일 먼저 선구자처럼

샘플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부르셔서 네 몸에서

많은 민족이 나고 후사가 날 것이라고 약속 하셨다.

이 약속이 현재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100세가 다 됐는데도 몸은 자손을 낳을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아내 사라도 경수가 끊어지고 인간적으로는

바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따라가는 삶이

믿음대로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낙심하고 좌절하여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손을 내팽개치면 이것이 악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뜻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그 뜻을 추구함을 깨달아야 된다.

 

나를 부르신 그분의 뜻을 살피고 그 뜻이 하나님께서

정해지면 현재 바랄 수 없는 가운데라도 그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걸 믿음으로 잡고 끝까지 이어 나가야 한다.

 

현실은 어렵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자녀를 낳으려고 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래서 사라와 하갈의 사이에 끼어서 얼마나 인간적인

갈등과 고통이 많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끝까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그것을 믿고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도 않았고 믿음이 견고하여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것을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믿음이 이러한 믿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하여 몸에서 날 후사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 반면

우리는 시시하게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의식주에 관한

이런 뜻을 찾지 말고 나의 일생을 통하여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고 나를 무슨 그릇으로 만들었고 하나님이 무슨

용도로 나를 부르셨는지 전체적인 큰 맥락의 뜻을 찾아야 된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기까지 매일매일 주의 뜻을 살피면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아브라함처럼 걸어갈 때에

그것이 이루어지는 된다.

 

하지만 이렇게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다 죄고 악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여러분 모두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발견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말씀인데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볼 때 어느 날 눈이 열려져서 그 성경의 말씀이

내 마음을 꽂히든지 글자가 크게 보이든지

내 양심 속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든지

뭔가 주님과 교통하고 그 뜻을 발견하는 체험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뭘 붙잡고 그 약속을 잡겠는가?

성경은 막연하게 믿는 미신이 아니다.

 

나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경험적으로 만나져야 그것이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이 되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하면

그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 순간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나고

어떻게 나를 부르시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가?

이것에 초점을 맞춰서 일생 살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새해에는 새로운 각오와 결단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뜻을 살피고 그 뜻만이 선한 것이고

뜻대로 하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 뜻은 결국 믿음으로 이루어 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음 16 말씀을 보면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세 번째는,

주의 뜻이 아닌 것은 전부 다 허탄한 자랑이라는 것이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계획이라면

이것은 허탈한 자랑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곧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떠난 인생은

허탄한 인생이고 결과가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시편 1 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모든 것은 성경도 그렇지만 제일 첫 편에 나오는 것이

전체 내용을 다 갖고 있다.

 

그러니까 계란 하나에 닭이 되는 요소를 다 갖고 있는 것처럼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사상이 다 여기에 들어가 있다.

 

또 창세기 1장에 성경 전체의 사상이 들어가 있다.

제일 첫 번째가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1편에 나와 있는 것이

복이 있는 사람과 복이 없는 사람,

악한 사람과 죄인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자녀들을 딱 구분해 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악한 사람은 바로 꾀를 쫒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허탄한 자랑이고 아무 도시에 가서 이를 보려는

인간의 계획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다 보니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시편 1 2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쫒고 그 율법을 따라 살아가니까

시편 1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형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뜻을 다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고 주야로 그 말씀을

즐거워해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어떻게 꾀로 살아가지 않는 인생이 되겠는가?

 

시편 1 4~5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바람이 한 번 불면 내용물이 없고 알맹이가 없는 겨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고 바람 따라간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환란의 바람이 불어오고

세상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오면

그 겨는 알맹이가 없으니까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날리다가 끝나게 된다.

 

그 안에 중심이 있고 무게가 있어야 이리저리 휩싸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악인은 결국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시편 1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였다.

 

이것이 주의 뜻대로 살고 주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살고

죄 가운데 살지 않고 말씀 중심으로 사는 인생의 모습을

이 말씀으로 기준 삼아 주셨다.

 

여러분 새해에는 정말 주의 뜻대로 살아 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길 바란다.

 

저는 성채교회를 개최하면서 하나님 앞에 약속을 했다.

은퇴해도 얼마든지 좋은 나이인데 다시 한 번 목회를

시작하면서 창립 예배할 때 120명이 왔는데

그 곳에서 선언을 했다.

 

30여년 40년 가까이 목회를 했는데 하나님 뜻대로 살았던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서 마지막 한 번 뜻대로

살아보려고 다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하나 둘 나타나면서

그 뜻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 치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어느 정도 때가 됐기 때문에 성채교회는

형통한 때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에게 많은 감동도 있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금년에는 성채교회가 뜻대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고

형통하리라는 이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 됐구나!

이것이 확신하기 때문에 이런 8행시도 써보고

우리 교회가 잘 되는 것처럼 여러분의 지체와 가정이

다 이렇게 뜻대로 살아서

뭔가 정말 그 형통을 한번 진짜로 맛보자,

그 뜻을 한번 좀 이루어보자,

이것이 새해를 시작하는 제 마음 가운데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이런 설교를 이 아침에 여러분들께 드리는 것이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형통한 해가 되자.”

 

정말 여러분이 형통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구나!

그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하니까

그 주변도 다 복을 받았다.

여러분이 한 사람 한 사람 형통한 사람이 되면

그 주변이 다 복을 받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의 뜻을 주야로 말씀 묵상하는 가운데 발견하시고

그 뜻대로 이렇게 살아가서 새해는 정말 형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한다.

'말씀의 향연 > 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브리서가 주는 교훈  (0) 2023.01.22
복음의 빚진 자  (0) 2023.01.22
성탄의 결과  (0) 2023.01.03
구유에 누인 아기  (0) 2022.12.23
십자가의 길  (0) 2022.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