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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구유에 누인 아기

by Andrew Y Lee 2022. 12. 23.

구유에 누인 아이

 

누가복음 2장 8~14절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오늘은 12절 말씀에 나온 그대로 "구유에 누인 아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 한다.

 

인류 역사가 지나가는 가운데 크고 중요한 일은

전부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

 

세상 역사가 되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은밀하게

주관하고 있다.

 

사도행전 17에 보면 인생들의 거주와 한계를 다 주님이

경계를 지키시고 한계를 정하셨다고 하였다.

 

연대를 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모든 땅의 지경을 주관하여서

한 나라가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과 모든 인생들의 삶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속하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 하나의 섭리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 되어지는 크고 중요한 일은 이미 다

성경에 예언 되어 있고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또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전부 성경에 예언 되어 있다.

 

오늘은 예언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떻게 오셨는지, 또 어떻게 오실 것인지

예수님 중심으로 살피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한다.

 

첫 번째,

예수님은 아기로 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사야 9 6 말씀에 보면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되신 그분이

아기로 오신다고 하고 있다.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했다.

 

이사야 7 14 말씀을 보면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한 아기를 보내주시는데 동정녀를 통해서 아기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이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예언대로

이 땅에 오셨다.

 

누가복음 1 30 말씀에 보면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낳을 것을 고지해 주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수태의 고지" 라고 한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래서 알려준 그대로 예수님이 잉태 되었고

누가복음 2 5, 7 말씀에 보면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베들레헴에 태어난다고 예언이 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되는데

갑작스런 호적령에 요셉은 고향인 베들레헴에 신고하러

갔다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인해 여관방을 잡을 수 없어

결국 구유 안에 예언대로 태어나셨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고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오신 모습이다.

 

누가복음 2 12절에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그리고 누가복음 2 15 말씀 이하에도 보면 천사들이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게 됐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예언에 따라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는데

왜 그 많은 장소 중에 말구유에서 태어나실 수밖에 없었는지?

왜 말구에 태어나셨는지?

우리가 함께 묵상해 보길 간절히 바란다.

 

여러분 구유에 누인 아기를 한번 상상해보자.

그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고 하나님 자신이며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로마 황제로 와도 부족한 모습인데 베들레헴에

촌구석 말구유를 침대 삼아 태어나셨다.

 

왜 예수님은 말구유에 오셨는가?

이 구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짐승의 밥그릇이다.

 

소나 말 심지어는 돼지에게 이 구유를 만들어서

여기에 짐승의 밥을 주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이 자리에 오셨다는 사실이다.

 

여러분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항상 깨달아야 될 것은

영으로 계셔서 볼 수 없고 알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이 인생 눈에 보이는 사물을 가지고 그 뜻을

자꾸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물질 세계의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영계에서 되어지는 것임을 하나님은 알려 주고 있다.

 

영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 물질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뜻을

전하여 주시는데 이것이 성경 전체의 역사이다.

 

예를 들면 머지않아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첫째에서 넷째

나팔이 불어지면서 환란의 기본 무대가 나타날 것인데

그때 땅의 소산물의 3분의 1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바다에서 나오는 소산물도 3분의 1이 없어진다.

물도 3분의 1이 써서 먹지 못하게 된다.

또 빛도 3분의 1이 없어지게 된다.

 

대단히 먹고 살기가 어려운 환경이 되니까 대환란이 되는 것인데

이것이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땅과 바다의 3분의 1의 소산물,

물의 3분의 1, 빛의 3분의 1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의 땅만이 아니고 사람의 땅인 심령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마음도 밭이고 땅이다.

 

그래서 공중에서 사탄이 내어 쫓기고 예수님이 공중강림하고

땅이 화가 있다고 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땅만이 아니고

사람의 심령의 땅도 화가 있게 된다.

 

사람의 마음에도 3분의 1 양식이 없어지는데

영혼의 양식의 3분의 1이 없어지게 된다.

여러분 이것은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호세야 4 1~3 말씀을 한번 보자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땅에게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민과 쟁변하신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속에 진실이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고

땅에 그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사람의 마음의 땅에 진실이 없고 은혜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으니까 그 땅 전체에도

이것이 없다고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다.

 

또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여서 땅이 슬퍼한다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의 땅에 이런 것 밖에 없으니까 땅이 슬퍼하는데

이것이 결국 사람의 마음이 슬픈 것과 같다.

 

3에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쇠잔할 것이고 바다의

고기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짐승과

새와 고기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물고기 같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더 성장한 새들도 없다는 것이고

더 성장한 짐승도 없다는 것이다.

전부 영적인 의미를 그 속에 다 포함해서 하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땅의 3분의 1이 없어져서 먹고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 영혼의 땅인 우리 마음에 사람이 먹는 양식,

영혼의 양식도 3분의 1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모스 8 11~12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이런 모습이 환란의 모습이다.

 

물도 마찬가지이다.

물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도 3분의 1 줄어든다.

 

하늘의 빛이 3분의 1이 없어지는 것처럼 신령한 빛,

의의 태양이신 주님을 향한 그 믿음도 3분의 1이

다 없어지게 된다.

 

영적인 것도 똑같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복음에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이것이 눈에 보이는 현상인데 사실은 영적인 현상도

똑같이 일어난다.

 

창세기 1 2, 2 3이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역사를 진행하는 설계도라고 말하였다.

 

인류 역사 속에서 되어지는 과정을 물질로 말씀하셨다.

 

눈에 보이는 땅, 하늘, 바다, 물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영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인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 역사를 이루실 것인가?

 

이것이 창세기를 통해서 처음부터 이 설계도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땅과 바다와 물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우신 모습도 우리는 단순히

말구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영적으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왜 말구유에 태어나셨는지 깨닫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이 구유가 아까 말한 대로 소나 돼지나 말에게 먹이를 담는

밥그릇인데 이 이야기는 인생의 모습이 마치 짐승과 같다는

것이다.

 

먹이를 탐하는 돼지와 같고 소나 말과 같은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이러한 짐승인데 이들에게 주님이 영혼의 양식인

밥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영혼의 양식으로 말구유에 오셨다.

짐승들의 밥인 것이다.

밥이라는 것이 우리 생존의 기본이다.

하루에 우리도 두세번의 밥을 먹어야 된다.

 

그런데 인생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의 양식도 동시에 먹어야만 된다.

 

예수님이 말구유안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이 영혼들이

말과 돼지와 똑같은 인생인데 그들의 양식으로 오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6에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오신 것은 내가 바로 너희들을 위해서

살과 피로서 너희들의 먹이가 되고 너희들의 밥이 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다.

 

성경 그대로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영생이 없다.

 

이 살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제가 제 살을 주어서 우리에게 먹게

하겠느냐" 어떻게 우리가 사람의 살을 먹을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의 살이 무엇인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고 이것이 영원한 양식이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을 그냥 들어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한 말씀 한 말씀 지켜야 하나님 자녀가 되고

천국은 말씀대로 사는 나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미워할 수도 없고 죄 질 수도 없고

용서 안 할 수도 없고 천국은 결국 말씀대로만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광야에서 우리가 말씀 지키는 훈련을

통해서 점점 변화하는데 말씀 하나를 지키면

그 살을 먹게 되는 것이다.

 

성경 말씀 전체를 다 지켜야 되니까

그 살을 전부 다 먹어야 된다.

 

또 피를 마시는 건 무엇인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흘려놓는 보혈의 은총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회개하여 깨끗해진다.

 

우리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죄의 문제는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의 은총으로 우리가

깨끗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를 다 이루어서

그 피의 은총을 다 누리게 되면 그 피를 다 마시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정결한 사람으로 변화를 받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구유에 2천 년 전에 오셨다는 말은

인생들의 밥이 되기 위해서 오셨고 그 살과 피를 다 내주고

이 죄 가운데 있는 인생은 주님이 보실 때

돼지와 소, 말과 같이 짐승 같은 이러한 인격들인데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고 살리기 위해서

그 영혼의 양식으로 오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라고 하였다.

 

여러분 이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대한민국 시민이 되려면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앞서서 시민의 의무를 다 해야만 한다.

시민의 의무를 해야 권리를 받는다.

 

지금은 미국이나 다른 나라보다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가

훨씬 좋기 때문에 미국에 살던 많은 교포들이 나이가

먹으면 역이민을 해서 한국으로 많이 들어온다.

 

미국에는 이런 의료법이 없다.

좋은 직장이 아니면 의료보험 혜택보기가 어렵다.

한국에는 의료보험이 참 잘 되어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한국으로 다시 들어온다.

 

한국에 와서 다시 시민권 같은 호적을 복구하는 의무를

다해야지 혜택을 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우리는 아들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을 상속받고 법적인 자녀가 되려면

그 의무를 다해야 된다.

 

이 의무를 다 하는 것이 말씀을 지키고

그 앞에 거룩한 인생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 권리를 받게 된다.

 

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혜택을 보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를 삼았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살과 피를 내어주면서 우리의 밥이 되시기

위해 말구유에 오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천 년 전 말구유에 오셨고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말씀이신데

우리 인생의 밥이 되기 위해 오신 그분을 이 한 주간 묵상하면서

이 연말에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결산의 달로 마무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두 번째,

말라기 4 2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예수님은 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돋는 해로

이 세상에 오신다고 예언 되어 있다.

 

이렇게 말라기의 예언을 따라서

누가복음 1 78절과 79 말씀을 보면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이것은 사가랴의 예언이다.

67에 보면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하게 지금

예언 하고 있다.

 

그런데 76에 뭐라고 말씀하는가?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이 아이는 세례요한이고

지극히 높으신 이는 바로 예수님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앞에 선지자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그리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라고 하였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세례요한이 사명이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그분이 긍휼을 베풀어서 돋는 해가

임하는 것처럼 오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돋는 해와 같이 주님이 오시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춰서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2천 년 전 돋는 해로 오셨다.

 

말라기에서 예언한 그대로 태양과 같이 나타나셔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시면 어린 송아지가 외양간에서 나와

기뻐 뛰는 것처럼 이 어둠과 죄악에 갇혀 있던 인생이

그 돋는 해로 말미암아서 죄악과의 싸움에서 벗어나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진다.

 

제가 사는 아파트는 감사하게도 앞에 막힌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 태양이 더 빛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지금은 아주 특별한 시대가 돼서 태양이 더 빛난다.

 

모든 우주의 주파수가 더 높아졌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감지해야 한다.

 

이럴 때 영적인 사람들은 더 큰 은혜를 받고 어둠으로

가는 사람들은 더 어둠으로 간다.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의의 태양이신 주님의 그 빛도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돋는 해처럼 떠올랐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다.

이 빛은 생명이다.

어둠은 죄고 사망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빛을 비춰줘서 어둠에 있던 우리를

빛으로 옮기셨다.

 

요한복음 1에 사도요한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요한복음 1 4~5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빛은 눈에 보이는 태양빛과 같은 그런 빛이 아니다.

생명의 빛이다.

영생으로 우리를 비추는 그런 빛이다.

그 빛이 바로 이 땅에 오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요한복음 8 12에도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돋는 해와 같이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빛만

따라가면 어둠을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인생이 어둡고 우울하고 죄악 가운데 불행하고

이런 것을 다 뛰어넘어서 이제는 생명으로, 빛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

 

이런 예수님을 믿고 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평강이

넘쳐 나게 된다.

 

인생 나이 40이 되면 부록이 되어서 그 얼굴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얼굴에 그 평강의 빛,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사는 그 얼굴의 빛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 빛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 빛이 있으니까 평강이 있고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요한복음 12에도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2 35~36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면

그 빛이 없어진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더 많은 사람이 그 빛을

보고 따라야 되는데 마지막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환란의 날이 오면 다시 어두워지고 세상은 3분의 1씩

없어지는 그런 시대가 오는데 그 빛도 줄어든다.

 

우리는 그 전에 빛이 있는 동안에 이 빛을 따라서

어둠에 붙잡히지 않아야 된다.

 

예수님이 돋는 해로 이렇게 예언을 따라 오셨다.

여러분 우리 몸도 햇빛을 많이 쬐야 된다.

아무리 추워도 빛을 좀 쬐야 되는데 빛을 쬐면

비타민D가 많이 생성이 되기 때문이다.

 

또 빛을 쬐면 면역 체계가 높아지게 된다.

 

마찬가지이다.

내 영혼도 하나님의 빛을 쬐지 않으면 악에 대한 면역

체계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

내 영혼도 하나님의 비타민을 먹지 않으면 약해져 버린다.

 

영혼의 문제나 육신의 문제나 똑같은 원리이다.

이 육신에는 빛을 쬐서 면역 체계를 갖고 비타민을 얻는

육신만 잘 살려고 해서는 안 되고 내 영혼도 그런 혜택을

누리게 해야 한다.

그래서 영적인 빛으로 자꾸만 나와야 한다.

똑같은 원리이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주님은 예언을 따라 다시 오실 것인데

스가랴 14 3~4 말씀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여호와의 날이 이으면 14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2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라"

여호와의 날인 주님이 공중 강림하셔서 7년 대환란 날이

오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열국과 싸우는 전쟁이 나타나는데

그 전쟁 가운데 3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나가사 열국을 치시되"

여호와가 하나님인데 어떻게 나와서 싸우겠는가?

예수님으로 오셔서 그분이 나가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4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라고 하였다. 

 

누가 감람산에 서 계셨었는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할 때 감람산에서 올라가셨다.

올라가는 그대로 내려오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올라가신 그대로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에 서신다.

 

이 말씀대로 그분이 오셔서 감람산에 다시 강림 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열국이 쳐들어오는 그 전쟁에서 열국을 다 물리치고 싸워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9 말씀 보겠다.

"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이 땅에 천하의 왕이 돼서

메시아 왕국의 왕이 되겠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메시아 왕국의 왕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입었기

때문에 영원한 중보자가 되었고 영원한 인생이지만

또 영원히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강림하셔서 예수님이 열국 백성과 싸우시고

예수님이 지상 재림 하셔서 천년왕국에서 왕이 되어서

다스리게 되고 그래서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라고 하였다.

지금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이름도 하나가 되어 진다.

 

그래서 이 말씀 그대로 주님은 다시 한 번 오신다는 것이다.

20~21 말씀 보겠다.

"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그 날에는" 무슨 날인가?

천년왕국이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머리에 띠를 띠는데 거기에

"여호와께 성결" 이렇게 띠를 띤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제사장이 되는 이기는 자들이 이마에

표를 받는 게 "여호와께 성결" 이라는 띠를 띠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천년왕국에서는 "말방울에까지도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고 하였다.

 

천년왕국은 거룩한 것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

지금 말방울까지도 여호와의 성전이다.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천년왕국에서도 제사를 드릴 것이고

천년왕국에서도 초막절을 지킨다고 16절에 말씀하셨다.

 

21에 그 제사 드릴 때 고기를 삶는 솥까지도 성물이 되고

다 거룩해 진다.

 

그리고 그 곳은 가나안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는데 

죄인은 아무도 없다는 의미이다.

 

이 약속의 말씀대로 그런 천년왕국이 오지 않겠는가?

그 약속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발이 감람산에 서지 않겠는가?

그분이 천하의 왕이 돼서 말씀대로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코앞에 두고 사는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러분이 교회 시대 끝에 사는 것을 실감하시기를 바란다.

결단하시기를 바란다.

 

이 세상 연연하여 세상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 가는데

지금 어느 시대에 무슨 예언으로 지금 어느 시대에 와 있는지

우리는 성경에 주목을 해야 된다.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라고 했다.

이 베뢰아 사람들을 사도 바울은 말씀을 전할 때

신사적이라고 하였다.

 

그건 무조건 거부하고 무조건 우기지 않고

"과연 이 말씀이 그러한가?" 말씀을 살피는 신사적인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며 신사적으로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세상에 연연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무슨 시대에 사는지 깨달아야 되고

어떻게 결단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되고

재림하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그런 때가 되었다.

 

아기 예수를 오신다고 했고 돋는 해로 오신다고 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또 빛으로 오셔서 의로운 해, 돋는 해처럼 떠오르면서

2천 년간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을 옮겨졌는가?

그리고 우리 안에 평강을 주셔서 이것이 개인적으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재림하여 오시겠다는 이 약속도

예언대로 반드시 재림주로 다시 한 번 오실 것이다.

 

이것을 잘 살펴서 우리는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주님 오시는 예언에 집중해서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으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

 

초림하여 오실 때는 십자가 달려 죽으셔서 보혈의 은총을

준비하셨지만 재림하여 다시 오실 때는 심판해 주로

오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열매 맺지 않는 사람들은 찍어 불에 던지는 심판주로 오신다.

 

우리가 이런 마지막 때를 살아가면서 2천 년 전에 오신

예언대로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서 우리를 위해서

살과 피를 다 주시려 인생의 밥으로 오셨는데

우리는 주님주시는 양식과 회개 생활 철저히 하여

그 살과 피를 다 먹고 마시므로 그토록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매일 변화되어 가는

우리가 되어 가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이시지만 여전히 말씀대로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그대로

이루신 분이시다.

 

마지막 때 예언에 집중하면서 시대의 상황을 잘 깨달아서

빛의 자녀로서 어둠의 잡혀 다니지 않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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