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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저주의 언약과 회복의 길

by Andrew Y Lee 2022. 10. 30.

저주의 언약과 회복의 길

 

 

신명기 30장 15~20절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명심보감이라는 책이 있다.

마음에 꼭 새겨야 하는 보물과 같은 교훈들을

명심보감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는데

사실은 성경이 명심보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마음에 잘 새겨야 하는

보물과 같은 것이다.

 

매주 설교를 하고 방송도 하지만 특별히 오늘 말씀은

잘 박힌 못과 같이 마음을 잘 새기기를 바란다.

 

이것이 히브리서 2 1 말씀대로

"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귀로 들어온 말씀이 한쪽 귀로 다시 흘러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말씀이 목표하는 목적지에 도달을 해야 한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면 흘러 떠내려가는 것과 같다.

손가락에 있어야 할 반지가 빗물로 흘러 떠내려가는 것처럼

말씀을 떠내려 보내면 안 된다.

우리 마음에 잘 새겨야 한다.

 

오늘 말씀이 일생 동안 여러분의 마음속에 잘 새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은 "저주의 언약과 회복의 길"

이런 특별한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다.

 

첫 번째,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종종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 여러 가지 명칭으로 말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라 하였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창세기 17에 보면

"언약의 하나님"이라 하였다.

 

아브라함에게 한 그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였다.

왜 언약이 영원한 것인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된 우리에게도 주신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성경에 나타난 약속

이것이 전부 예표고 모형이고 그림자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언약들이다.

 

모세와 함께한 피 언약, 첫 언약, 소금 언약,  샌달의 언약,

예수님을 통하여 주신 새 언약 모두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다.

 

세상 사람들은 약속할 때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갑과 을이 적당한 타협점에서 약속을 하지만

성경에 나타나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인 갑이시다.

 

하나님이 명령이고 말씀이고 우리는 다 을이다.

그래서 이런 갑을의 관계를 가지고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을 섬긴다.

 

두 번째,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고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언약은 두 가지의 길이 있다는 사실이다.

 

언약은 우리가 어떻게 이행하느냐에 따른 결과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은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가령 인터넷을 3년간 약정을 했는데

3년 안에 해지해버리면 다 물어 내야한다.

해지한 만큼 손해배상이 따르게 된다.

 

또 연예인이 이적 하거나 자기 회사를 바꿔버리면

그 모든 피해를 그대로 물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도 이와 똑같다.

 

본문 신명기 30 5에 말씀하셨다.

"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길을 주셨다.

 

생명의 길을 주셨고 사망의 길을 주셨다.

생명의 길은 복 받는 길이고

사망의 길은 화를 당하는 길이다.

 

그런데 그 화를 19 말씀에 뭐라고 표현하는가?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길은 복 받는 길이고

사망의 길은 화를 당하는 것인데

저주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갈래의 길인데

순종하면 생명이고 순종하지 못하면 멸망이고

사망인데 이것을 성경은 저주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신명기 30 1 이하의 모든 말씀은

두 갈래의 길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30 1~2

"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이 주신 길은 복과 저주의 길인데

그 복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2에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5 이하의 말씀은 불순종을 하면 그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두 가지의 길을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28 1~6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복을 받는 길이다.

 

그런데 말씀을 불순종하면

신명기 28 15 이하 말씀처럼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말씀은 순종할 것이냐

불순종할 것이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약속한 대로

생명과 복을 주실 것이고 저주에 이르게 되면 사망을

당하는 인생에 화를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신약에 와서 사도 바울도 이 말씀을

갈라디아서 3 10에 표현하고 있다.

갈라디아 3 10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에 정통한 사도 바울도 율법대로 행하지 않으면

저주아래 있는 인생이라고 하였다.

 

여호수아 8장에도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한 그대로 여호수아도 똑같이 이 말씀을

반복하는데 가나한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면 복과 생명을 얻을 것이고 불순종하여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사망 할 것이라고 하였다.

 

신명기 27에 말한 이 말씀을

그대로 여호수아가 다시 한 번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의 양면성을

우리는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도 법인 것이다.

세상법도 지키는 자에게는 혜택이 있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겐 벌칙이 있다.

이같이 법은 반드시 두 갈래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만 한다.

 

세 번째,

회복의 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담이래로 다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인생이고

그 저주 아래에서, 이 사망의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회복을 할 것인가?

 

우리가 회복의 길을 가려면

먼저 우리의 상태를 이해해야 된다.

 

저주 아래 있는 인생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나의 현재 저주의 모습이 무엇인지

이것을 이해해야 회복의 길을 갈 수가 있다.

 

출애굽기 20 5~6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리의 선조, 부모, 모든 조상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켰으면 그 후손들이 천 대까지 복을 받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고 미워하는

자들은 죄를 갚되 하나님이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조상들이 받고 있는 이 저주의 자리에서

과연 회복의 자리로 나와 있는가?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 광야 연단은 내 마음대로 만든 게 아니다.

이 저주를 우리들이 갚아내야 된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 깨닫기 바란다.

내 자녀를 사랑하는 길은 이 저주를 끊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켜서 천대까지

은혜를 배풀 그 은혜의 자리로 옮겨줘야만

진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저주는 재산을 상속해주고 가업을 세습해 주는

것처럼 대대로 전수가 된다.

부모가 하는 저주를 그대로 답습하고 그 저주를

껴안고 태어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마태복음 25 41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은 양과 염소를 나누는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인데 여기에는 믿음을 얘기한 적이 없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먹이고

이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고

옷을 입히고 병들 때 돌아보고

감옥에 갔을 때 돌아보고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다.

 

그런데 그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자들은

저주를 받아서 영영한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

왜 믿음 이야기가 없는지 여기에 믿음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혹자는 마지막 심판 받을 때

선행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마태복음 25 31~32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이것은 바로 백보좌 판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백보좌 심판대에 앉아서

누구도 빠지는 사람이 없다.

모든 민족을 다 모아서 그 앞에서 심판을 하는데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여기서 양은 영생을 얻는 사람이고

염소는 저주를 받아서 영영한 불인 지옥에 가는 인생이다.

 

그래서 여기에 모든 민족 즉, 구약시대로부터 모든 사람을

다 한꺼번에 모아 놨다.

 

그런데 그 심판의 기준이 35절 이하의 말씀에 나와 있다.

마태복음 25 35 이하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40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지극히 작은 자, 내 형제가 누군인지

깨달아야 한다.

 

마태복음 10 14~15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님은 2천년전에 이 땅에 잠시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은 다음에 속죄 은총을 준비하시고 부활 승천한 분이지만

제자들을 파송하여 하나님 말씀을 들고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는데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들이고

지극히 작은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들을 대접하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우리가 잘 깨달아야 된다.

마태복음 10 40~42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안 계시지만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이들은 바로 예수님이 보낸 자고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다.

 

예수님 믿는 형제가 바로 예수님의 형제, 자매, 모친이고

그 지극의 작은 자를 영접하고 그들을 돌보고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6 22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도 사랑하지만 주님이 파송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극히 작은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을 돌보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다.

요한복음 4 34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내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택정하신 자들을 구원을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 받을 백성들과

함께 순종하고 주님처럼 모으는 것이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하는 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영접하지도 대접 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이 원리를 우리가 잘 알아야 된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 백보좌 심판에는 마치 믿음이

아무 상관이 없이 양과 염소를 나눈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지극히 작은 작은 자가 예수님을 사랑한 자들이요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인데 그 구원에 하나님의 뜻을

이룬 형제, 자매들을 함께 모으고 대접하기 위해서

힘 쓰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조상 때로부터 3, 4대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과거에 얼마나 많은 우상을 섬겼는가?

 

우리는 조상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이런 인생들의 그 자손들인데 그러므로

3, 4대까지 하나님은 계산 하고 계시기에 3, 4대인 우리는

그 저주에서 벗어나 회복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목표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 그럼 내 자녀들을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가?

육신적으로 잘 되기만 하면 그것이 사랑인가?

 

다 지옥 갈 인생을 내버려 두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가?

우리의 자녀들도 이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제가 상주에 있을 때 한 장로님이 오셨는데

이 장로님은 40일 금식을 하셨다.

목회자도 하기 힘든 40일 금식을 장로님이

하셨는데 이 분은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날 물어보았다.

"장로님 왜 금식을 하십니까?"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까 다 저주 받은 인생인데

내 자녀들이 이 저를 받지 않도록 

내 대에서 끊어주려고 40일 금식을 했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3 13~14, 22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구약의 말씀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 받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려 저주

받았는데 예수님의 저주는 우리의 저주를 속량해 주려고

우리를 저주에서 꺼내주려고 대신 저주를 받으면서

고통 당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러니까 예수 믿지 않고는 아무도 율법이라고 하는 저주

그 두 갈래 길에서 벗어난 인생은 아무도 없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저주에서

속량을 받는다.

 

둘째는

신명기 30 2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과

정성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여야 한다.

 

셋째는

신명기 30 6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연단을 다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입구 할례산에서 할례를 받는 것이 할례의

의미인데 그때 애굽의 모든 죄악이 뽑히게 된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인 이 영적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고

생명을 얻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말씀 앞에 순종하고 이 광야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가 저주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것을 성경은 연단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보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각자가 조상들로부터 받은 것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나게 된다.

 

조상 때부터 받은 성품이 있고 유전적인 기질이 있기

때문에 다 다르다.

저주의 양이 틀리다.

 

예수 잘 믿는 삼사대 집 안에서는

비교적 쉽게 이 길을 간다.

그런데 예수 안 믿는 집 안에는 이 저주의 사슬이

크기 때문에 상급이 더 크겠지만 그 과정이 어렵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저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정신적인 것들, 만성 질환, 여러 가지 가정이 붕괴되는

것들, 작은 사고가 나는 것, 가정에 자살이 있는 것,

단명 하는 것, 이것이 다 저주로 나오는 인생들의 모습이다.

우연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부모와 자식 간에도 합하지 못하는 이런 저주들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도 나타난다.

 

지금도 우상숭배로 나타나는 저주들이 있는데

이 세대 어둠의 세력들은 구약에 있는 몰렉에게

아이들을 산채로 제사했던 그 신을 섬기고 있다.

이것이 바알이고 세상 정욕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저주받은 인생을 한꺼번에

심판하고 있는데 이것이 마지막 때인 지금의 모습이다. 

 

또한 저주받은 땅이 있고 저주받은 물건들이 있고

저주받은 그 환경들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특히 우리의 언어생활 조심을 해야 된다.

가뜩이나 다 저주받은 인생이고 어떻게든지

힘을 합해 함께 저주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저주의 말을 쏟아 부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 자신도 그 저주에서 저주를 더 하는 것이고

자녀들도 더 저주를 받게 된다.

 

"이 못된 놈 나가 죽어라!", "우리 호적에서 파가라"

이런 것들이 다 저주의 말들이다.

 

우리가 이 저주에서 벗어나도록 힘을 합하여

기도하고 이 회복의 길을 가야 되는데 인생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축복의 말을 해줘야 되고

생명의 말을 해줘야 되고 회복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줘야 한다.

 

또한 우리는 기복적인 신앙을 경계해야 한다.

잠깐 하나님이 연단을 통해서 전리품처럼 축복을

주는데 이것이 평생 축복인 줄 알고 이 저주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다.

기복 신앙이 얼마나 두려운지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 지옥에서

건져 천국으로 가는 것이고 죄를 씻는 것인데

이것이 연단이고 훈련이고 광야의 삶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심판대라고 한다.

 

다 같은 원리이다.

모두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기를 바란다.

 

내 삶에 정말 왜 이런 환경들이 계속해서 찾아올까?

이것이 조상 때로부터 받은 저주의 결과고 내 자신이

아직 이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해 신앙의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에게 이것을 그대로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지 여호와를 사랑하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회개하고 마음의 할례인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내 신앙의 목표로 삼고

죽기 살기로 이것을 행할 때 내 자녀들이 구원에

이르는 혜택을 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자신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전부 인생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있다.

 

쓸데없는 일에 세상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마실까, 어떻게 하면 더 입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곳을 갈까 여기에만 관심을 갖고 있지

저주에서 벗어나야하는 시급한 이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여러분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전체적인 원리를 알고

우리의 가족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어야 한다.

 

신앙의 동지가 다른 게 아니다.

내 자녀들과 함께 축복하면서 이 신앙의 저주에서

벗어나기를 힘쓸 때 내 신앙의 동지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저주의 말을 쏟아 부으면 신앙의 적이 되고

함께 저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생활도 축복하는 말

하나님 말씀 위주로 해야 하며 저주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종합해보면

저주에 벗어나는 길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몸소

저주를 받으며 매 맞고 채찍 맞고 그분이 나를 위해서

그 고통을 당해서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을 따르고

같이 힘을 모아서 그 일을 이루어 가는 자들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이다.

 

우리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대접하지 못한 것으로

저주를 받게 되고 영영이 불속에 들어가는 인생이

되고 만다.

 

둘째는 반드시 말씀 앞에 순종을 해야 된다.

말씀 앞에 순종을 할 때 우리는 이 말씀으로

혜택을 받게 된다.

 

세상법도 마찬가지이다.

법이 없으면 얼마나 세상이 악으로 가겠는가?

법은 잘 지키는 사람을 위해서 법이 세워지는 것이다.

 

악으로 고통당하지 않도록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로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는 이것도

지키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혜택이 있고 안 지키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저주받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말씀 앞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셋째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만 이 저주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는다.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며 저주받으며 사는 인생의 모습은

우리의 환경 속에서 정신적인 것들로 여러 가지

만성 질환으로 여러 가지 작은 사건들로 가정의 어려움들과

심지어는 말 한마디에 있는 그 뿌리박힌 죄악들로

여러 가지 저주의 모습으로 나오게 된다.

 

언어생활이라든가 우리의 생각하는 것들 전부 철저하게

해결하면서 나도 저주에서 벗어나고 자녀들도 벗어나고

이 환경을 점점 넓혀 더 많은 사람들이 저주에서 벗어나

회복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초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말씀을 믿고 말씀으로 이기고 말씀으로 벗어나길 바라고

또 말씀을 선포하면서 회복의 길에서 승리하는

여러분들 꼭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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