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수고하는 자
요한3서 1장 8절
"8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세계 모든 나라가 운영되려면 운영해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회사가 운영되려면 운영주와 직원이 있어야만
운영이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직원이 있어야만
교회가 원활하게 운영이 된다.
여러 교파와 교단마다 직원의 의미가 달라지겠지만
장로교회는 목사, 장로, 권사, 전도사, 안수 집사
그리고 서리 집사 이런 분들이 교회 직원들이다.
목사, 장로, 권사, 안수 집사는 실제 안수를 받아서
기름부음을 받고 한 번 안수 받으면 은퇴할 때까지
항존직으로 계속해서 이어져 가는 직분이다.
전도사는 시무하는 기관만 임명받는 것이고
서리 집사는 임시 집사직으로 진행이 된다.
우리가 이 직원의 개념을 잘 이해하려면
교회 정치를 알아야 된다.
여러분이 교회 정치를 좀 이해할 수 있도록
오늘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기를 이 교회 정치가 마치 세상 정치를
본받아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역으로 교회 정치를 본받아서 세상 정치들이 나타난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 점을 이해해야 된다.
그래서 이 장로교의 정치가 어떤 원리로 되어 있고
장로교의 정치가 세상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면서
지금까지 왔는지 그 의미를 잘 깨달을 때
교회의 직원의 역할을 좀 더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교회는 두 가지의 권리가 있는데
교회를 치리하는 치리권이 있고
치리를 받는 교인권이 있다.
이것을 천칭저울처럼 시소와 같은 개념으로 본다면
먼저 치리권만 있고 교인권은 하나도 없는
치리권은 무겁고 교인권이 하나도 없는
그런 정치 제도가 있고
또 치리권은 하나도 없고 교인권만 있는
그런 정치 구조가 있다.
반면에 치리권과 교인권이 시소처럼 수평을 이룬
천칭의 수평처럼 수평을 이루는 그런 정치도 있다.
그래서 세 가지의 정치 형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한다.
먼저 치리권만 있고 교인권이 없는 이러한 정치는
우리가 교황 정치, 감독 정치 또는 군주 정치라고 말한다.
옛날에 군주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치리권만 있는 교회가 캐톨릭 교회이다.
그래서 캐톨릭은 교황이 정치를 하고 있다
교인들은 아무 권리가 없다.
온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도 교황청부터 나와서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게 되고 모든 나라의 교회마다
다 로마 교황청의 지배를 받게 돼 있다.
교황 군주 정치이다.
그리고 감리교의 감독 정치가 이러한 군주 정치와 같은 것이다.
그 다음에 교인권은 많은데 치리권이 하나도 없는
교회를 회중정치라고 한다.
회중교회는 많지는 않지만 전 세계에 산재돼 있다.
이곳에는 목회자를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 모여서 찬송하다가 갑자기 누군가에
성령이 임하면 설교도 하기도 하고 예언도 하기도 하며
이렇게 진행되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는 예배의 모습이 성령의 역사와
질서로 하나님을 따라 되어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모임으로 가버릴 수도 있는 우려가 있다.
그 다음은 치리권과 교인권이 팽팽하게 수평을 이루는
정치로 장로교회의 정치를 말한다.
지금까지 말한 정치형태를 다시 보면
치리만 있는 캐톨릭교회 정치가 있고
회중들의 교인권만 있는 회중교회 정치가 있고
치리권과 교인권을 아주 비슷하게 만들어놓은
장로교의 정치가 있다.
그럼 여기서 치리는 누가 하는가?
목회자가 한다.
그런데 조직된 교회 목회자를 누가 청빙을 하는가?
교인 전체인 공동위에서 찬성을 해서 뽑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형태이다.
하나의 치리권은 대통령이 권리를 가지고
행정부 수반이 되어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데
그 대통령을 누가 뽑는가하면 온 국민이 뽑는다.
똑같은 원리이다.
지리권과 교인권을 서로 견제할 수 있도록 팽팽하게 만든다.
그래서 목회자가 교인들을 치리하지만
그 치리하는 목회자를 뽑는 권한은 교인들에게 있다.
마치 대통령제와 똑같은 그런 개념인 것이다.
그 다음에 세상에서는 국회가 있다.
입법부라고 한다.
또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은 누가 뽑는가?
국민들이 자기 지역에서 뽑게 된다.
교회에서는 자기를 대표하여 장로를 선출하고
그 교회당회로 보내서 법을 제정하도록 장로를
대표로 뽑아서 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장로교 정치이다.
장로교회마다 좀 다르지만 우리 교단 헌법은
25인의 세례 교인 중에 1명을 뽑을 수가 있다.
정식 세례 받은 교인 중에 한 명의 장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 장로를 보내서 목회자와 함께 당회를 조직해서
그 당회에서 이 교회 법을 다스려 나가고
법을 제정하게 된다.
국회의 입법부 모습과 동일하다.
모든 국민이 국회의원을 뽑아 그 국회의원을
국회로 보내 대통령을 견제하게 된다.
그래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도 하게 된다.
또 대통령은 제정한 법에 동의를 해야 하는 권한이 있어
서로 이렇게 견제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 다음은 민주주의에는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가 있다.
이 장로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상회가 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노회라고 하는 상회로 가지고 와서
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노회에 재판국이 있다.
노회 문제는 더 상회로 올라가서 총회 재판국이 있다.
거기서 재판을 받게 된다.
장로교의 정치는 오늘날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이 세 가지의 민주주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정치 제도이다.
치리권과 교인권이 수평을 되도록 치리하는 자가
교회를 치리하지만 대표를 뽑는 것은
공동회의 교인들이 갖고 있다.
장로를 선출하여 국회에 보내는 것처럼 보내서
입법을 하도록 한다.
칼빈이 만든 이 장로교의 정치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 정치를 실현했다.
결국 칼빈이 온 세계의 민주주의 정치를 시작하게 된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민주주의를 보면서
교회 정치가 생긴 것이 아니고 장로교회 이 정치를 보면서
민주주의가 나타났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를 해야 된다.
칼빈의 이 정치가 오늘날 민주주의를 주창하게 되는데
영국의 청교도들이 그 영향을 받았고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프랑스의 위그노, 네델란드의 베리, 미국의 필그림등
종교 자유를 지향하는 국가에 이 장로교 정치가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근대 민주주의가 장로교 정치를 통해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교회는 세 가지의 회의가 있습니다.
공동의회는 등록교회 전체를 공동의회라고 한다.
그리고 제직회가 있다.
목회자와 전도사, 장로, 권사, 안수 집사, 집사 이분들이
제직회이다.
이것이 행정부역할을 한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직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제직회가 임명을 받고 선출이 되면 당회와 함께
교회 예산을 정하고 실질적으로 교회를 운영해가는
주체가 되어진다.
오늘 본문 가운데 말씀이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그랬다.
교회는 진리를 위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의 기둥이 진리로 세워지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참된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오직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 마지막 때 진리의 거점이 되고
마지막 때 진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안의 모든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리를 위해서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 사도가 이렇게 진리를 위해서 함께 수고하는 자들을
영접을 하라 이들은 귀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3서 1장 2~4절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이 요한3서는 사도 요한이 썼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다른 제자들은 다 선교지로 가서
순교를 당하고 마지막 한 분 남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기도 하면서 끝까지 남아서 이 진리를
요한1,2, 3서를 쓰게 되었다.
이 사도 요한의 심정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자.
이때는 이제 사도 요한이 나이가 많이 먹어서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권면의 한 마디
말에도 그 권면을 들은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이러한 영성의 사람들이
불같이 일어났던 시대였다.
사도 요한은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나봤고 목격했고
부활, 승천한 것 보았고 그래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
마지막 요한계시록과 요한 1,2,3서를 쓴 사도로서
영성이 얼마나 뛰어났겠는가?
사랑하는 자들을 만나서 너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그 한마디의 권면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쏟으면서 회개하게 한 것처럼
이러한 사도 요한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그 사도 요한의 마음이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그 사도 요한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그 진리를 증거하면서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사도 요한의 마음이고 곧 예수님의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타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의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오해 받고
세상과 어울릴 수 없어 길을 가며 진리를 사수하고
하나님 말씀을 사수하였다.
그렇기 때문이 참된 진리의 말씀이라면 어느 무엇으로도
타협을 할 수가 없다.
진리를 증거하는 것은 외로운 길을 가야 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를 증거하고 진리대로 행한다고
하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 4절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교회 교인들이 진리대로 향하고 있다고 하면 이런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이상의 즐거움이 없다고 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다.
적어도 우리 교회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기를 원하고 진리의 거점이 되기를 원하는 그런 교회다
라고 한다면 모든 직원들이 함께 진리를 위해서
수고하는 자가 돼야 마땅하다.
진리를 깨달아야 하기를 힘써야 하고 진리대로 살기로
애써야 되고 진리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가야 한다.
제가 우리교회를 개척하면서 주님께 받은 이름은 시타델이었다.
시타델이라는 말은 오래전에 한국의 상선 하나가 소말리아에서
해적들에게 붙잡혔었다.
배에 탄 사람들의 몸값을 요구했던 사건이 비슷하게
두 번 일어났었다.
그런데 배 하나에는 피난처가 있었고 다른 배 하나에는
피난처가 없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배의 은밀한 곳에 피난처를 만들어서
모든 선원들이 대피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선원들이 없으면 배를 운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피난처를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서
어떠한 해적이든 아무리 기관총을 싸도 그 벽을 뚫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또한 그 피난처 안에는 일주일 정도 먹을 양식과 한국에
연락할 수 있는 무전 장치와 이런 것들이 다 구비돼 있었다.
그런데 배 하나에는 이것이 준비돼 있었고
다른 하나는 준비가 안 되어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배는 어떻게 됐겠는가?
붙잡히게 되었다.
준비되어 있던 배는 빨리 본국에 연락해서 해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배의 은밀하게 준비되어 있는 그 피난처를 영어로
시타델이라고 한다.
제가 그 시타델이라는 의미를 그 배의 사건이 일어난
얼마 후에 복음신보에 칼럼을 썼던 적이 있다.
그래서 시타델의 의미를 알았다.
그 배 사건을 통해서 제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시타델이라는 개념을 알고 그 칼럼을 썼는데
얼마 뒤에 교회 이름을 시타델이라고 하라는
주님의 뜻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 분들이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이것을 한국말로 번역하다 보니까 성채교회로 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타델을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커다란 함대의 포를 말하기도 한다.
함대가 포가 없으면 적을 공격할 수가 없고
수비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함대의 큰 포를 시타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미국에는 사관학교가 4개가 있는데
그중에 한 사관학교 이름이 시타델이기도 하다.
결국 시타델은 가벼운 이름이 아니다.
이 마지막 때에 진리의 보루가 되고 진리의 거점이 되기를
원한다는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이 이 교회를 운영하셔서
그 진리를 전파하는 그런 마지막 보루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소망이고 저의 소망이고
이것이 성채교회를 세운 하나님 뜻이다.
교회의 직원들이 선출되어서 임명받는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진리에서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교회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온 세계에 우주적인 교회가 하나님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고 눈에 보이는 지 교회들이
수없이 많다.
교회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대로 음부의 권세가
틈타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너희와 함께하신다는
말씀대로 되어진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가 임명받고 이 땅에서 선출되고
이 땅에서 매어지는 하늘에서도 그대로 매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감동으로 받게 되기를 바란다.
단순히 교회에서 이렇게 직원들을 세우고
교회를 확장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받으시고 진리를 위해서
함께 수고하라고 하나님이 수고하는 자로 부르신 것임을
상기하며 이러한 각오와 결단을 가지시고
부름에 임해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