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박자 효도
에베소서 6장 1~3절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오늘은 어버이주일인데 "삼박자 효도" 라는 제목을
하나님이 주셔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삼박자라고 하는 말은 음악적인 용어다.
한 마디에 박자 수가 셋으로 보통 강약약 이렇게 삼박자다.
이 삼박자는 많이 쓰인다.
또 영화가 성공하려면 각본, 연기, 연출의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
요새 입당하는 분들이 많은데
당뇨병이 되면 입당이라는 말을 쓰는데 혈당 조절을 하려면
삼박자가 맞아야 된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식습관, 운동, 약물 요법 이 삼박자가
맞아야 혈당 조절이 된다고 한다.
또한 야구를 잘하려면 투수, 공격, 수비의
삼박자가 맞아야 된다.
또 먼 나라로 여행을 가려면 삼박자가 맞아야 되는데
시간과 건강과 경비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소천 하셨지만 한국의 삼박자 축복을
말씀하셨던 어느 목사님께서
요한3서 1장 2절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이 성경 말씀인데
이런 삼박자 축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이
지금 기복적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 것은
영혼이 잘 돼서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세기에 6일 동안 창조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영혼이 완전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밤과 낮이 반복하게 된다.
창세기에 밤이 오고 낮이 오는 것처럼 이 밤과 같은
연단과 어려움 속에서 영혼이 잘 되면 강건하고
범사가 잘 되는 축복이 오는데 이것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섯 번이나 반복을 해야 한다.
전도서 7장 14절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일생을 형통과 권고를 병행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계속 형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형통하고 권고하고 또 형통하고 권고하고
두 가지를 병행하신다.
그래서 인생의 앞날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가서에서 이것을 북풍과 남풍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한 겨울에 차가운 북풍이 불어오면 춥고 힘이 든다.
또한 따뜻한 남풍이 불어 올 때도 있다.
이렇게 삼박자 축복은 여섯 번이나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면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서 우리는 효도하며 살아가야 한다.
삼박자로 효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교회 주류는 30~40대분들이다.
지난주에는 자녀들을 어린이주일로 섬겼고
또 오늘 어버이주일에는 부모님을 섬겨야 하는
샌드위치 세대이다.
아예 나이가 먹으면 자녀들한테 효도를 받고
어리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는데 현재 끼어 있는
상황이다 보니 부모도 섬겨야 되고 자녀들도 섬겨야 되지만
우리는 이것을 믿음 안에서 잘 감당해야 될 줄로 믿는다.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유산을 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믿음이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경은 어렵지만 삼박자 효도가 가장마다
있게 되기를 바란다.
첫 번째,
먼저 삼박자라고 말씀드린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인생의 구조는 영.혼.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이 성전은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영과 혼과 우리의 육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효도하되 영혼육 세 가지로 효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지면 올바르게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삼박자 효도의 근거는 인생이 영혼육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러면 삼박자 효도의 실제는 어떻게 되는가?
1) 바로 몸이다.
육체가 편안하도록 효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잘못할 때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데 그 회초리를 맞은 아들이 어느 날 우는데
울었던 이유는?
전에는 아버지가 그 회초리로 때릴 때 팔에 힘이 있었는데
점점점 그 팔에 힘이 없어져서 이제 회초리를 맞아보니까
아버지가 연약해지고 노쇠해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아서 우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팔에 힘이 없어지는 것 때문에 그 아들이
울었다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조선시대 문인 박인로가 지은 "반중조홍감"이라는 시조가 있는데
어느 날 손님으로 갔더니 쟁반에다가 연시감을 대접받았는데
그걸 보니까 먼저 부모님 생각이 났다고 그 맛있는 걸 보니까
부모님 생각이 먼저 나더라고 하며 반중조홍감이라는 시조를 썼다.
어느 분이 효도하는 방법을 네 가지로 말하면서
그 네 가지 중에 하나가 건강을 체크해 드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인생 대부분 평균으로 5년 동안 병치레를 하고 죽는다고 한다.
아무리 건강해도 약 5년 정도는 병치레를 하고 죽는 것이
원래 인생의 평균이다.
그래서 효도하는 방법 중에 한 가지가 건강을 체크해
드리는 것이 효도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부모들은 자식이 걱정할까 봐 숨기는 경우도 많이 있다.
아픈 곳이 많지만 자식에게 피해를 주고 자식이 걱정할까 봐
병을 숨기고 이렇게 지나가는 경우도 많이 있다.
제가 오래 전에 춘천에서 목회할 때 그곳에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이 아파트 세를 얻어서
커다란 짐가방 하나를 놓고 가버렸는데 그 속에서
할머니가 나왔던 사건이었다.
현대판 고려장으로 유명했는데 그 큰 가방에 어머니를 넣고
집을 얻어 거기다 놓고 도망가 버렸는데
아들의 연락처도 알고 주소도 다 아는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끝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의 연락처를 안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삼박자 효도는 제일 먼저 영.혼.육으로 만들어진 인생 가운데
육체라고 하는 그 몸이 병이 없도록 편안하도록 하는 것이
효도다 하는 것이다.
2) 혼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효도하는 것이다.
물질을 많이 갖다 드려도 환경을 좋게 드려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다.
잠언서에 보니까 "네 늙은 어미를 즐겁게 하고"
그 어머니를 기쁘게 하라고 물질로 기쁜 것이 아니다.
마음이 기쁘고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그래서 부모님을 어떻게 마음으로 기쁘게 할까?
어떻게 즐겁게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마음으로도 효도를 잘 해야 된다.
3) 그 영이 반드시 구원을 받고 상급도 많이 받을 수 있는
영혼이 되도록 심령적인 구원을 이루도록
심령의 효도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예수님 믿지 않고 있으면 부모님이 어떻게든지
구원을 받도록 기도하며 애를 써야 한다.
우리의 일생이 다 끝나고 나면 반드시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계속 우리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못 받을 것인가
구원을 받아도 구원의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거듭나면 어린아이가 태어나
점점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처럼 영적으로 성숙한 만큼의
천국에 간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그것을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라고 그랬다.
해의 영광은 예수님과 한 몸 되는 머리 구원을 받는 것이고
달은 목, 별은 저 발꿈치 아주 희미한 별,
별도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
희미한 별도 있고 빛나는 별도 있고 별과 별에 차이가
천차만별인데 희미한 별처럼 겨우 구원은 받았지만
상급은 없는 하나님의 보좌부터 멀리 떨어져서 태양 되신
주님이 희미한 별처럼 보이는 그런 구원도 있다.
이것이 다 우리의 상급의 차이이다.
이 세상은 잠시 살아가는 것이지만 영원한 천국은 영원하다.
족히 비교할 수 없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몸으로도 우리가 효도해야 되고
마음으로도 편하게 효도해야 되지만
영의 문제는 영원의 문제인 것이다.
이 세상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드리고
기도해드리고 예수 믿지 않으면 열심히 전도해서
영적인 효도도 우리가 해야 한다.
그래서 삼박자 효도 이런 감동을 저에게 주셔서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린다.
세 번째,
삼박자 효도를 잘하는 비결이 있다.
삼박자 효도를 어떻게 잘할 것인가?
고린도후서 5장 18~21절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대한예수교 장로의 헌법에 목사의 정의가 무엇일까? 할 때
고린도후서 5장 20절 말씀을 얘기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이 사신은
전권대사를 말한다.
한 나라의 왕이 모든 권리를 받아서 파송 받은 대사이다.
그래서 그 왕의 뜻을 다른 나라에게 전하는 사람이 대사인데
예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을 목회자라고 하는데 목회자가 아니라도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대사이다.
그리고 그 직책이 뭐냐 하면은 18절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하는 직책이 바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되고 또 이웃과 화목하면서
서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
그리고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은 19절에 있는 말씀대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전도도 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예수 믿는 우리가 받은 직책이다.
그래서 이 직책을 우리가 열심히 잘 해나가면
저절로 삼박자 효도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서로 잘 감당해 가야 한다.
어느 날 프랜시스 성자가 어느 제자가 시냇물을 떠서
물지게를 지고 오는데 그 안에다가 커다란 나무토막을
물통 안에 집어넣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왜 거기다가 나무토막을 집어넣고 물을
집어넣었느냐" 물어보았다.
제자가 대답하기를 "이 물은 지고올 때 요동하고 출렁거려서
무거운 나무토막을 이 안에다 집어넣으면 그 무게 때문에
물이 요동치 않고 흘러넘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지혜로운 제자이다.
그 순간에 프랜시스에게 하나님이 성령으로 감동을 하셨다.
프랜시스는 형님은 태양, 누님은 달 이렇게 모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그 나무토막이 바로 예수님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마라라라는 지역을 지나갈 때
그 지역의 물은 써서 마라라고 하였는데 마라라는 말 자체가
쓴 물, 혹독하다, 쑥처럼 쓰다 그래서 물이 써 먹을 수가
없을 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지시한 한 나무를
그 물에 던졌다.
그래서 물이 달아졌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제 이후로 너희에게 이 세상 애굽의
질병을 하나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약속을 하시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나무를
의미하는 한다.
여러 가지 환경 가운데 혹독한 환경, 어려운 환경,
마라와 같이 쓴물을 만날 때 나무를 그곳에 던져야 되는
것처럼 사랑하는 제자가 그 요동치는 물을 잘 지고
가기 위해서 나무토막을 집어넣은 것을 볼 때
프랜시스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 그렇구나! 인생에 요동치는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님의 그 나무토막이
그 안에 있으면 요동치는 그 환경이 잠잠해져서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지어 갈 수 있는 것이구나! 라고
제자의 그 지혜로운 모습을 보면서 프랜시스는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분에게 요동치는 환경이 얼마나 많은가?
여러분의 삶에는 구석구석에서 요동치는 환경이 있고
마라의 쓴 물처럼 혹독하게 어려운 환경들이 다가오는데
그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그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면 그 모든 것이 요동치지 않고 화평하게 되고
잠잠해 진다는 것을 프랜시스는 알게 되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원수 된 인생이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셔서 이 말씀으로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가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부모 자식 간에 화목하게 되고
남편과 아내가 화목하게 되는 인생의 모든 얽히고설킨
요동치는 환경을 요동치지 않게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이라는
나무토막을 그 가운데 놓을 때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요동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지체를 위해 서로서로 잘해 가려고 애를 쓰면 우리는
삼박자 효도를 저절로 잘 할 수 있게 된다.
예수라고 하는 나무토막이 없고 예수라고 하는 중심이
그 속에 없기 때문에 물속의 물이 쏟아 넘치는 것처럼
인생을 낭비하고 흘려 내보내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라고 하는 나무토막을 우리 가정에 모시고
내 심령에 모시고 서로가 화목하게 하는 이 직책을 잘
감당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효도를 하게 될 줄로 믿는다.
히브리서 12장 14절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내 사랑하는 부모하고도 화평하지 못하고 내 사랑하는
자녀하고도 화평하지 못한데 어떻게 모든 사람과 화평함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제가 하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으로" 그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과 직결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으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주님 보기를 원하는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를 원하는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지 않고는
주님을 볼 수가 없다.
이렇게 화평하지도 못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님 얼굴 볼 수 있다는
이러한 착각 이러한 미신은 금물이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은 거룩함에 이르지 못하면 심판대 가서
이것을 다 이루어야만 주님을 볼 수가 있다.
마태복음 5장 9절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팔복은 단순한 팔복이 아니다.
8개의 계단을 말하는 것이다.
8개의 천국 가는 계단으로 팔단진복인데
5장 8절에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한 마음이 되어져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영적성장에서 여섯 번째로 할례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경지인데 그 이후에도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믿는 순간에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모든 과정들을 지나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요한계시록 21장 7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새 하늘 새 땅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 이기는 자이어야 한다.
왜?
사망은 맨 마지막 천년왕국이 끝나는 그때까지
사망권세가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겨야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겨야 된다.
새 하늘 새 땅이 나타나는 그때까지 이겨야 된다.
그래서 이기는 자가 새 하늘 새 땅에 특별히 새 예루살렘성에
이것을 유업으로 얻는데 그 이기는 자가 내 아들이 되리라
말씀하고 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젠가 다 죄악 세상을 다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세력들을 다 이겨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사람이 되어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직책이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가지고
나가서 내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 말씀대로 서로 부모지간에 서로 자식지간에
화목하게 하는 이 직책을 잘 감당해 나가면
이것이 정말로 진정한 효도가 되는 것이고
삼박자 효도가 되는 것이다.
어버이주일인 이번 주만 삼박자 효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1년 내내 우리가
부모님의 건강을 돌보고 그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해드리고
또 영도 잘 되어서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기도해드리고 또 안 믿는 부모에게 전도도 하고
그래서 삼박자 효도를 잘 감당하는 여러분 되시고
특별히 화목해 하는 직책도 잘 감당하셔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