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캐, 부캐
마태복음 18장 1~5절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우리 어린이들을 더욱 사랑하고 어린이들을 말씀 안에서
잘 양육하는 좋은 부모가 되어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어린아이 같은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제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 하는 것이었다.
12명의 제자와 70인의 전도대, 예수님 주변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따라다녔는데 과연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이것이 제자들의 관심사였다.
마가복음 9장 33절~34절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길 가면서도 제자들은 누가 과연 큰 자인지 대해
쟁론하고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메시아로 이 세상 왕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우리 중에 누가 더 클 것인가?
누가 좌의정, 영의정하면서 누가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크게 될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길에서 서로 토론하면서 왔다는 걸
볼 수가 있다.
누가복음 9장 46절~47절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마태복음 18장 본문과 비슷한 장면이다.
누가 클 것인가에 대해 서로 변론하고 있다.
마태복음 18장 본문에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과연 누가 천국에서 클 것인가? 물을 때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천국에서 누가 클 것인가를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본문 그대로 말씀드리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결단코", "돌이켜", "진실로"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셨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서 누가 높고 이 세상에서 누가 높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천국 자체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누가 클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 같은 심령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어린아이로 다시 될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어린이 주일을 맞아서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에게 좋은 부모도 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천국에 가려고 예수 믿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단코 라고 하셨다.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어린아이 같은 심령이 무엇이겠는가?
먼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을 한번
살펴본다면 상대적으로 어린 아이 같은 심령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8,27절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2장 15절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다.
상대적으로 어린아이 같지 못한 자들이다.
몇 가지로 분류해 보면 두려워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심령이 아니다.
믿지 않는 마음, 우상숭배, 가증한 일, 행음 전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그것을 따라하는 행위이다.
속된 것은 세상적인 것이다.
행악자와 살인자는 악을 행하는 자이다.
거짓말은 정욕 때문에 우리가 애정과 욕망을 만족하기
위해서 환경이 되어 지면 거짓말할 수밖에 없다.
거짓말을 지어내고 거짓말을 좋아하는 자들 전부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 외에 우상을 섬기고 세상적인 속된 것,
가증한 것들, 믿지 않는 마음,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전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일서 4장 18~21절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을 때
오는 것이 두려움이다.
그러니까 내 속에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천국에 갈 자격이 아직 안 된다는 것이다.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국은 온전한 사랑만 있는 곳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아직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이것은 어린아이가 부모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입어서
그 부모를 절대 신뢰하고 그 부모만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두려움이 없는 자는 부모, 아버지 외에 다른 우상과
다른 사랑하는 것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 충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만
절대 신뢰하고 그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도 없고
온전한 사랑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것 자체가 거짓말이다.
우리가 손해 안보기 위해 정욕을 따라 살다보면
거짓말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 안에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심령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에게 충만한 사랑을 받고 부모에게 사랑을 받은
그 어린아이가 다른 것은 일체 사랑하지 않고
부모만 사랑하고 부모만 절대 의지하고 그 부모에게
오직 모든 것을 다 드릴 줄 아는 이것이
어린아이의 심령이다.
요즘 어린아이들이 다 어린 아이겠는가?
돌 쯤 아주 어렸을 때나 천진난만한 마음이 있지
이 아이들이 점점점 커가면서 세상 교육을 받고
부모에게 영향을 받고 그러면서 순진 무고한 마음들이
다 없어져 간다.
이젠 그 부모만 의지하는 그런 어린아이의 심령이 아니다.
부모만 절대 신뢰하는 그런 어린아이의 심령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린아이의 심령을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어렵지만
이렇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아서 완전히
부모님을 신뢰하고 부모님을 사랑하여 온갖 두려움도 없고
오직 부모 외에는 없는 이러한 심령이 어린아이 심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본캐, 부캐인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본캐"는 본래의 캐릭터를 말하는 것이고
"부캐"는 부수적인 캐릭터를 말하는 줄임말이다.
요즘 연예인들을 보면
본래는 예능인으로 이것이 이들의 본캐이다.
예능인인데 음악을 해서 가수로 활동하는 것이 부캐이다.
운동하는 것이 본캐인데 또 이런저런 예능프로를 하는 것을
부캐라고 한다.
하나의 재능을 가지고 잘 수가 없는 세상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다 본캐, 부캐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도 캐릭터가 7가지나 있다.
하나님의 7영,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영은
하나님의 7가지 캐릭터를 말한다.
이사야서에 7개의 캐릭터가 전부 나와 있다.
저도 목회자가 본캐인지 아버지가 본캐인지
최근에는 유튜브를 개설하고 책도 출판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지막 제 사명으로 본캐인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데
제가 이 제목을 이렇게 가지고 나온 것은
우리 권사님이 할머니가 돼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본캐인지
권사님으로 살아가는 것이 본캐인지 부캐인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캐릭터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한 가정의 아버지고 사회인이고 직장인이고 다 나름대로
본캐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건데 제가 볼 때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본캐가 사실 다 부캐이다.
우리 모두의 본캐는 전부 어린아이가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분의 본캐이다.
우리의 캐릭터는 전부 어린아이 같은 심령이 되어 지려고
사는 것이다.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란다!
나머지는 다 부캐이다.
아이를 키워내고 직장 다니고 어머니로서 권사님으로서
이런 수많은 우리의 직분과 우리의 사역,
한 가정의 중요한 직책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전부 부캐이다.
저와 여러분의 본캐는 전부 어린아이 같은 심령이
되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택정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에 갖다 앉히시려고
우리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훈련하고 연단하시고
또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정을 이루며 적당히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캐릭터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전부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이 되어 지는 것이
우리의 캐릭터이다.
할머니가 나의 캐릭터가 아니다.
권사님이 나의 캐릭터가 아니다.
목회자가 나의 캐릭터가 아니다.
집사가 나의 캐릭터가 아니다.
전도사가 나의 캐릭터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기 위해 은사와
재능을 주셨지만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 같은 심령이
되어 지는 것이 우리 모두의 본캐이다.
이것이 우리의 캐릭터이다.
왜?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결단코, 진실로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 들어갈 자격조차도
없다고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세종 선생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다.
지리산 서리내, 남원, 함평, 전라도일대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세종 선생은 40년 동안 머슴 생활을 하다가 돈을 좀 모아서
나이 어린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자녀가 없으니까 자녀를 낳고
싶어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성경만 보았다.
머슴살이 한 분이 무슨 학문이 있겠는가?
성경만 보면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심을 따라 살아갈 때
그때부터 이상한 행동들을 하게 되었다.
머슴살이해서 모은 돈으로 사람들에게 이자 받고
돈 빌려준 문서를 다 없애버렸다.
또 농사지으려고 밭을 매다가 잡초를 뽑아내야 하는데
그 잡초가 불쌍해서 다른데다가 심어주는 행동을 하였다.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동네 아이들까지 다 이세종이 미쳤다고 하였다.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이 이세종을 나무에 새끼줄로 묶었다.
"우리가 시장 갔다 올 때까지 여기에 그대로 있어야 돼!"
동네 아이들이 말할 때 어른인데 이세종은 그대로 그 말을
따라서 그 아이들이 시장 갔다 올 때까지 거기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이세종 선생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그 이유는 이세종 선생은 성경을 보면서 변화를 받아
어린아이들과 같은 심령으로 변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돈, 집문서, 자녀, 농사가 필요치 않았다.
매일 성경을 보면서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니까
저절로 어린아이 같은 심령이 되면서 이상한 행동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 영향을 받은 이현필 선생이 그 제자인데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누가 "당신 이름이 뭐요?"
그러면 "나는 헌신짝이요"
나 같은 인생은 쓰다버린 헌신짝과 같은 그런 인생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스승의 영향 받았기 때문이다.
부인하고 결혼생활도 제대로 안하고 감화 받고 따라오는
어린 소녀들과 함께 매일 다니니까 부인이 칼을 가지고
죽이려고 쫓아다니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
그때 전라도 일 때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어린 나이로
그 두 분을 따라다녔는데 지금 이 분들이 80, 90이 다 됐어도
남원의 동광원, 벽제의 개명산에 여러 곳에서 지금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런 삶을 그 스승들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부가 성경 말씀을 보고 어린아이 같은 심령이 되어 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이상한 행동, 세상이 볼 때는 이상한데
성령 안에서 볼 때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이현필 선생에게 어떻게 하면
예수 잘 믿냐고 비결 좀 말해달고 하였다.
저희 어렸을 때는 문둥병 환자들이 많아서 그 문둥병 환자들이
망태를 지고 다니면서 고물들을 주으며 다녔다.
예수의 삶이 되려면 그 망태를 짊어지고 다니며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렇게 거지처럼 헌 것을 주으며 살아가는 것이 낮아지고
비천해 져서 어린아이의 심령이 되고 예수를 잘 믿게 된다고
이현필 선생은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이상한 행동 같지만 이것들이 전부
어린아이가 되어지는 과정이었다.
본문에 분명히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지 않았던 모든 삶을 전부
돌이켜 회개하여 어린아이가 가질 수 없는 욕심들,
어린아이가 가질 수 없는 혈기들,
어린아이가 가질 수 없는 원망들,
어린아이가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을 전부 돌이켜 회개하고
이렇게 어린아이같이 되어 지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한다.
어린아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만 절대 의지하는 것 곧 낮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에서 큰 자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이다.
예수님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시고 그래서 5절 말씀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말씀하였다.
예수님의 온유, 겸손한 그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런 사람들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을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돌이켜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우리의 본캐이다.
살아서 이 세상에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끝내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과정을 겪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된다.
언제라도 어린아이 같은 심령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돌이켜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미국에서 한 동안 어려움을 당할 때 어느 목사님이 오셔서
"목사님 제가 한마디만 건낼께요 무조건 환경이 어려울 때는
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과 같이 납작하게
엎드리고 물과 같이 되세요."
이 말은 평생 교훈으로 남아있다.
물은 성향이 점점점 낮은 데로만 흘러간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가 천국에서 큰 자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성품이 바로 겸손이다.
육체가 아직 어려서 초등학교 다닌다고 어린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예수님과 같은 겸손, 온유로 낮아지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 절대적으로 아버지만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 부분의 사랑으로만 가득 차 있는 심령,
그러니까 두려움도 없고 다른 우상 섬길 일도 없고
행음 할 일도 없고 거짓말 할 일도 없고 속된 것에
속할 일도 없고 이러한 심령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이 되고 점점점 낮아지는 사람들이
더 천국에서는 높은 자라고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셨다.
어린이 주일을 맞아서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좋은 부모로 말씀으로 양육하고 그러면서 여러분 각자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나의 본래의 캐릭터라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하나님이 이 일 때문에 나를 부르셨고 우리가 지나가는
환경이 낮아지고 겸손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주신
것임을 알고 그 환경들을 통해 돌이켜 보면서
본래의 캐릭터를 따라 어린아이가 되기를 힘써서
한 명도 낙오되는 자 없이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하나님 나라의 자격들을 다 갖춰 가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