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곳, 높은 곳
시편 130편 1절~8절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저희 집사람에게 별명이 있는데 처녀 때와 학교 다닐 때는 눈썹 없는 간호원이라는 별명을 받았다고 했다. 눈썹이 진하지 않으니까 아마 어린 학생 시절에 그런 별명을 들은 것 같다. 이제 사모 역할을 감당하면서 별명이 하나 또 생겼는데 시편 사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문제 당한 사람이 있으면 시편을 읽으라고 권면을 하니까 시편 사모님이라고 별명이 붙었다. 왜 그런가? 이 시편에 많은 신앙고백이 있다. 그 신앙 고백에 한마디 말씀이라도 내 심령 속에 들어와서 역사를 하면 그 말씀대로 되어지기 때문에 시편은 무한한 능력을 가진 그런 말씀이다. 이 시편의 저자가 여러 명이다. 모세를 비롯하여 다윗의 시편이 73편 그러니까 시편 150편중에 절반 정도가 다윗이 쓴 것이고 12편은 아삽의 시, 10편은 고라의 후손들이 쓰는 시가 있고 또 한두 편은 솔로몬 또 에스라의 시도 한두 편 있고 그렇게 여러 저자가 있다. 내용적으로 분류를 하면 개인의 삶 속에서 비탄의 노래 여러 가지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탄식하는 노래가 있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의 탄식의 노래가 있다. 개인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노래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적으로 찬양하는 노래이다. 하나님이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에 대한 찬양 그리고 애굽을 탈출케 하신 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노래 그리고 참회 참회의 노래 또 메시아를 찬양하는 노래 그런 여러 가지 분류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전부 순례자의 노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1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을 참배한다. 그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하나님께 성전에 올라가면서 노래하는 그런 시이다. 그래서 이것을 순례자의 노래다 이렇게 부른다. 오늘 130편 본문에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렇게 제목이 붙어 있다. 그래서 130편 시편 순례자의 노래를 생각하면서 깊은 곳, 높은 곳이라는 특이한 말씀의 제목으로 함께 교훈을 받으려고 한다. 첫 번째 인생은 깊은 곳에 처해 있다 하는 사실인 것이다. 1절 말씀에 보니까 이 시편 기자가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인생은 깊은 곳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깊은 데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요나를 연상케 하는 말이다.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 삼킴을 당했을 때 요나서 2장 2절~5절 말씀에 보니까 물고기들 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요나가 당첨돼서 사공들이 바다 속에 던졌는데 그 요나가 깊음 속 바다라고 했다. 그냥 단순한 바다의 깊음만이 아니고 내 영혼까지도 깊음이 나를 둘렀다고 했다. 육적으로 바다에 빠져 있지만 영혼도 깊음이 나를 에워쌌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그래서 육신의 깊은 바다지만 영혼도 깊음에 빠졌는데 그것을 2절에 스올의 뱃속이다 라고 표현했다. 큰 물고기 흔히 고래라고 번역하는 그 물고기 뱃속에 들어 있는 그것을 깊음이다. 그런데 그것을 깊은 바다 내 영혼이 깊은 바다에 빠져 있는데 그것도 그 속에서 물고기 배속 그것을 스올의 뱃속이다. 음부라고 하는 것이다. ‘영적인 음부의 자리다’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곳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음부와 같은 그런 곳이고 영혼의 깊은 바다 같은 것이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빛이 오기 전에 땅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때 땅은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깊음은 우리의 영을 말하는 것이다. 그 깊음, 나의 영이 흑암이 가득했다 그랬다. 그 말은 바로 죄 성인 마귀의 속성인 죄악이 내 영혼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땅은 마음인데 그 속에 양심과 지성, 의지가 있는데 영의 깊은 바닷물이 내 양심과 지성과 의지까지 흘러 들어와서 영혼이 전부 내 영과 마음이 깊은 바닷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느라 커다란 암탉이 병아리들을 품듯이 하나님이 이렇게 영, 육간에 흑암이 가득한 영혼 속에 흑암과 죄악이 가득한 스홀과 같은 물고기 뱃속과 같은 이런 깊은 데 빠져 있는 인생을 건지려고 그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였더라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창세기 1장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죄악에서 건질 것인가 예수 믿어도 여전히 마음으로 범죄하기 때문이다. 죄의 싹은 사망이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탄식했던 사도 바울의 그 깊은 곳에서의 고민 이것이 오늘 인생의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여기서부터 구원이 있고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호세야 2장 15절 말씀 함께 보자.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아골 골짜기는 아간이 취하지 말라고 하는 전리품을 취해서 아간과 그 일가친척이 전부 돌려 맞아 죽은 그런 무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명령을 거역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자리가 아골 골짜기이다.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먹어서 그때부터 타락하고 죄가 영문의 뿌리 박혀있는 이런 인생을 아골 골짜기인데 그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애굽 땅에서 올라오는 거와 같은 똑같은 현상이라는 것이다. 애곱 세상이 바로 아울 골짜기고 그것이 깊음 속에 빠진 나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죄가 깊이 뿌리박혀 있는 나의 영혼이 바로 깊은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간식하고 고민하고 죄로 말미암아 불행하고 이러기 때문에 이 깊은 곳이 바로 죄에 대한 깊은 인생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죄의 깊은 것 때문에 탄식하고 이것을 경험하고 이러한 죄의 인생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주님이 필요한 것이고 그 병든 것 때문에 의인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 때문에 구원의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이 죄에 대한 기쁨에 이것을 극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건질 수도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어느 음악 교사가 자기에게 배우는 많은 학생들을 위해서 특별히 어느 학부 학생 평을 했다. ○○○의 제자는 음악 실력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도 상처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교사는 인생이 여러 가지 죄 때문에 고통도 당해보고 사람들에게 상처도 당해고 그러한 그때 비로소 그것이 음악을 통해서 나올 때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력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학생인데 상처를 받아본 그런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저가 상처를 가지고 죄 때문에 고민도 하고 이렇게 인생의 깊은 심연을 깨닫기만 하면 유럽에서 제일 많은 음악가가 될 것이다. 그런 평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모든 예술에도 다 이런 인생의 깊은 곳을 체험하는 그런 사람들만이 승화돼서 사람들에게 감화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인생들은 이렇게 깊은 곳에서 죄 문제로 고통당하고 불행하고 죄 때문에 어렵고 그 가운데서 성숙함에 승리하는 이런 것을 우리가 고진감래라고 한다. 모진 고통과 어려운 가운데서 승리하면 그때 비로소 우리가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14절에는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하는 시련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욕을 받고 이런 것들이 다 고진감래로 영광의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성인군자들도 인생에 이러한 모든 원리를 터득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많이 하고 있다. 제가 맹자의 말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맹자도 그렇게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게 큰 인물을 내리려 하면 우선 그들의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들의 근육을 수고롭게 하고 몸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고 몸에 지닌 것을 없게 하고 또 그들이 하는 일을 어긋나게 한다 이는 하늘이 그들에게 시연을 주고 마음을 흔들고 인내성을 키워서 전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더욱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맹자도 이런 원리를 안다. 인생을 누군가가 들었으려면 그렇게 인내를 배워야 되고 그 어려움 가운데서 영, 육간에 고달프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뜻대로 되지 않게 어긋나게 그런 시련을 주고 인내성을 키워야 그때 비로소 처음에 하지 못하던 일을 할 수 있는 인생이 된다는 것이다. 성인군자들도 다 인생의 원리를 이렇게 알았다는 사실인 것이다. 두 번째 인생은 기다림으로 사는 것이다 하는 것이다. 깊은 죄악의 문제 때문에 불행이 오고 인생은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인생의 대부분은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부귀영화를 기다리고 승진을 기다리고 돈벼락을 기다린다. 이렇게 인생은 죄 때문에 깊은 곳에서 탄식하며 이것이 회복되고 새로워지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인생인데 오늘 성도의 기다림은 그런 세상 것을 기다리는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도의 기다림은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5절 말씀에 표현하고 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바라는도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내 영혼에게 말씀해 주시고 그 말씀이 오면 우리가 기다리는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되는데 그것이 여호와께 있기 때문에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이다. 인생이 이렇게 깊은 곳에 빠져 죄 때문에 허덕이고 고통 가운데 기다리는데 3절 말씀을 뭐라고 말하는가? 시편기자는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죄악을 정하고 죄악을 감찰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죄를 정하고 감찰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용서하시고 살려 주시는 것도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고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7절~8절 말씀에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8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인생에 여러 가지 죄 문제 또 거기서 구속하고 또 이제 환경 가운데서도 구원하는 거 여러 가지 환경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그 구속도 여전히 여호와께 있는 것이다. 그분의 인자하심과 그분의 풍성한 구속의 은혜 이것이 여호와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여호와를 기다리고 여호와를 봐 라고 그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깊은 가운데 있는 인생에 특별히 성도들의 기다림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요나서 2장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 나의 깊은 속 바다에 가운데 빠져 있고 내가 성전에서 쫓겨났지만 다시 그 깊음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도했다. 그러니까 요나 3장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사명을 주셨을 때 니느웨의 사람이 바로 누구인가?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의 수도 서울인 것이다. 그들이 멸망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이 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니까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깊음 속에 바닷 속에 스홀의 뱃속 이렇게 집어넣고 나니까 요나가 부르짖어 기도하고 여호와를 다시 바라니까 말씀이 두 번째 임한 것이다. 여호와를 바라고 여호와를 기다리는 인생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어느 시편 기자는 130편 6절에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파숫군의 그 심정을 한 번 이해해보시길 바란다. 군대 갔다 온 분들은 군대에서 밤에 보초를 쓰면 그 날이 밝아야 자기 임무가 끝난다. 어두운 밤에 혹시 적군들이 쳐들어오고 무슨 사건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밤새도록 잠을 안 자고 원수를 살피고 적을 살피고 그러다 아침이 오면 얼마나 홀가분하겠는가? 자기의 할 일이 다 맞춰졌기 때문에 그래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 여호와를 기다리는 그것이 파수꾼이 아침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린다고 하였다. 파수꾼의 기다림보다 우리는 더 간절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고 말씀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에스겔 33장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여서 2절~3절 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숫군을 삼은 3 그 사람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원수들이 쳐들어오고 다른 나라에서 쳐들어오는 전쟁이 나타나면 누군가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아서 그 원수들이 쳐들어오는 그 전쟁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서 백성을 경고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7절 말씀에 말씀하고 있다.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파수꾼을 세우는데 그 파수꾼은 개인적으로 잠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살펴야 된다. 그래야 자기도 원수들에게 당하지 않고 또 원수가 오는 것을 목격하면 경고에 나팔을 풀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온 밤 동안 눈을 부릅뜨고 자기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다 함께 살기 위해서 잠을 안 자면서 원수를 살펴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파수꾼의 사명이다. 그런데 그 파수꾼이 아침이 오게 되면 사명이 끝나는 것이다. 낮에는 다 적들이 오는 것이 보이고 준비할 수 있지만 한밤중에는 습격해 오는 것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다. 동료들은 잠들고 있고 그러니까 이 파수꾼은 한밤에 눈을 부릅뜨고 온밤을 세우면서 그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더 나에게 오시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인생은 높은 곳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반드시 망대로 올라가야 되는 것이다. 망대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적을 살필 수가 없다. 망대로 가야 적이 다 보이는 것이고 또 적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때문에 경고의 나팔을 불수가 있는 것이다. 이 파수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되는데 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 영적인 문제는 사실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내 죄악이 깊은 곳에 있는 인생이 발견한 그 사람은 기도도 더 깊은 곳에 와서 참회도 더 깊은 곳으로 가서 사랑도 더 깊은 곳으로 가서 말씀도 더 깊은 곳에 가서 이렇게 해야 영적으로 높은 데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깊은 곳에 있는 이 인생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되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할 때 많은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가야 된다. 기도도 더 깊은 곳에 가야 되는 것이다. 기도가 두 가지가 있는데 네오마이 그런 뜻의 기도는 네오마이 이것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청원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뭐가 필요합니다. 뭐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네오마이다. 또 하나의 기도는 프로슈토마이 그런 뜻인데 이것은 내 필요를 청원하는 기도가 아니고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뜻에 맞추어서 드리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 필요한 것이다. 때에 따라 우리의 피로를 청원하는 네오비아 네오마이 이런 기도도 필요하지만 프로슈토마이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춰 드리는 기도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때의 기도는 언어로 볼 때 이것이 프로슈토마이라는 것이다. 쉬지 말고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춰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만 청하는 것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그 모든 것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드리는 기도 이것을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렇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면서 이제부터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다 이루리라 요한복음 16장에 약속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찬양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려라 이 찬양은 가사가 있는 신앙 고백이다. 가사가 신앙 고백이고 곡조는 기도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특권이다. 우리가 세상 노래방에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게 하나님 백성의 특권이고 또 하나님께 하나님의 자녀가 됐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 성도의 특권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도 성도의 특권이다. 여러분 대통령도 특권이 있다. 내란죄나 외란 이런 특별한 죄가 아니면 대통령을 체포할 수 없다. 국회의원도 특권을 갖고 있다. 외교 사절단도 다 특권이 있다. 대사도 다 특권이 있다. 하다못해 비행기의 조종사와 비행기 안에는 스튜디어스 이들도 다 특권이 있다. 웬만하면 세관에 걸리지 않는다. 세관 검사를 안한다. 이런 세상에도 고위 관직들, 대통령, 국회의원 등 다 특권을 가지고 사는데 성도의 특권은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찬양을 올려드리면 기뻐하시고 예수 그리스의 이름을 선포하여 죄사함과 구원을 받는 이런 수많은 특권들이 있는데 이런 특권들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가? 그 특권들은 우리가 높은 곳으로 나가야 되는데 그 영적인 높은 곳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편 기자가 단식하는 것처럼 죄의 깊은 곳에 가서 정말 자기가 죄인 걸 깨닫고 하나님 앞에 참회도 깊은 곳에 가서 말씀도 깊은 곳에 가서 사랑의 실천도 깊은 곳에 가서 모든 것을 깊은 대로 내려갈 때에 우리는 영적으로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를 ‘역설적인 진리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죽고자 하면 산다. 여러분 살고자 하면 죽는 것이다.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지는 것이고 높아지게 하면 낮아지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이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창조주 자체이신데 그분이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을 잊고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죽는 가장 낮은 그 자리에 내려온 것이 예수님의 낮아지심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시 그를 높이셨다.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영적인 원리는 반드시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우리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깊은 곳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높은 곳에 세워서 이 시대에 파수군의 사명을 감당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게 하신단 말이다. 높은 곳에 영적으로 가 있지 않으면 적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온 세상에 벌어지는 이런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심판하고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이것을 영적으로 높은 곳에 가는 파수꾼의 자리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깊은 곳으로 내려갈 때 영적으로 높은 곳에 가서 이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금년 한해 세상에 싸워질 것만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정말 바라는 그런 인생들이 되길 바란다.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을 바라는 도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는 그런 은혜를 사모하고 여호와가 내게 도전하기를 다시 사모하는 그런 은혜를 우리가 사모하고 그러기 위해서 내 자신들이 깊은 곳에 가서 말씀도 깊이 있게 기도도 좀 깊이 있게 사랑 실천하는 것도 깊이 있게 사랑도 겉으로 하는 이런 사랑이 아니다. 정말 행함과 진실로 깊이 있는 그런 사랑하고 뭐든지 좀 깊이가 있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은 곳에 올리셔서 에스겔을 내가 너에게 파수꾼을 삼은 것처럼 이렇게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어라 그랬다. 이 마지막 때에 이런 경고의 나팔이 필요한 때이다. 인생은 깊은 죄악에 자리해 나가는 깊은 곳에 있는 인생이지만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인생이고 그러나 인생은 높은 곳으로 나가야 한다. 교훈들을 명심하면서 금년에 성채교회 모든 지체 하나하나가 다 이렇게 깊은 곳에 내려가서 주님을 체험하고 만나서 높은 곳에 나가서 성채교회 자체가 이 시대에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여 많은 영혼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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