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빌2:13
남, 북한이 함께 부르는 민족의 노래가 있다.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원래 작시 자는 안석주로 해방 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삼일절 기념 특집 어린이 노래극 대본을 부탁받아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라는 노랫말을 쓰고
이것을 당시 서울음대학생이던 아들 안병원이 작곡하였다.
남북이 갈라지면서 노랫말은 독립이란 말 대신
통일로 바뀌었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남북 칠천만이 함께 부르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나라와 민족뿐 아니라 인생은 모두 소원을 가지고 살아간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각 사람의 소원내용이
곧 그 사람의 인생의 기치관이며 수준이다.
한때는 대한민국 사람도 소고깃국에 하얀 쌀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6.25 후 한국은 잘살게 되어
이제는 북한사람들의 소원이 되었다.
그런데 그 소원이 곧 그들의 수준이고
가치관이 되는 것이다.
일곱 개의 장기를 동시에 이식한 칠세 소녀 은서가 있었다.
은서는 소화 흡수가 안 되는 선천성 희귀병을 가져
적은 양의 식사만 하면서
필요한 영양분의 80%를 영양제 주사에 의존해왔다.
장기 이식에 성공한 후 네 소원이 뭐냐고 묻자
은서가 두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하였다
첫 번째는 마음껏 먹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가수 이승기 오빠를 만나는 것이라는 거였다.
얼마나 마음대로 먹고 싶었을까?
이 두 가지의 소원이 이 아이의 수준이고, 가치관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소원은 무엇인가?
그 소원이 우리 인생의 가치관이요 수준이다.
그리고 그런 소원들이 쌓여 지면서 우리 인생이 만들어지고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소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영적인 소원과 육적인 소원이다.
잠언 30장을 쓴 아굴은 두 가지의 소원이 있음을 알게 된다.
7절을 보면, 그 소원은 보통 소원이 아니라 평생의 소원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내가 죽기 전에”라는 표현을 통해 아굴이 지금까지 기도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기도할 것이고, 평생에 기도할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소원은 거짓이 없게 해 달라 곧 정직한 삶을 소원하였다.
이는 영적인 소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고
생활에 필요한 만큼 적당한 물질을 달라는 것이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이것은 얼핏 보면 육적인 소원 같지만, 사실은 영적인 배경을 가진 소원이다.
다음 구절을 보면 이해하게 된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에 나타난다. 이를 다른 번역으로 보자.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공동번역)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새번역)
그러므로 소원을 일으켜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이 소원을 주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이 은혜를 받게 되면 우리에게는 갈망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영적인 갈망이 없는 사람은 사실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소원이 크게 심겨진 것을 우리는 대원(大願)이라고 한다.
소화 테레샤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 중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는 대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원에 예쁜 장미꽃을 하나 꺾어 머리에 꽃은 후
5분 후에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을 회개하였다 한다.
대원이 아니면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다.
한국의 성자 방애인은 눈과 같이 희게 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소원이 되어 그렇게 살았다.
전주 기전여학교의 교사로 짧은 일생을 살았지만,
눈과 같이 희게 살았다.
가지고 있는 옷을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주고
매일 매일 어린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였고
심지어는 전주 칠천여 호의 집을 다 일일이 방문하여
구제금을 받아 고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현필 선생은 53세의 나이에 폐병이 걸려 각혈하면서
내 몸의 피는 다 빠지고 예수의 피로 채워달라고 기도하였다.
모두가 대원을 받은 갈망의 결과다.
그런데 이 대원은 모두 비원(悲願)이다.
이 대원을 주시고 이것을 이루실 때 이것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자기 부인이 이루어져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에게 주신 대원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자신은 저주를 받아도’라고 하고 있다.
이는 곧 십자가와 버림을 받아도 라는 말이다. 곧 비원이다.
대원은 곧 비원이다.
이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이를 이루실 능력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을 바라보자
나에게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무슨 소원을 주시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은혜는 곧 갈망이다.
갈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2022년에는 더 많은 갈망을 사모하자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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