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12절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금년이 꼭 두 주밖에 안 남았다.
12월은 결산의 달로 우리가 지나고 있는데
코로나 사태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많지만
더욱 분발하셔서 마치 한 학기가 끝나고
성적표를 받기 직전의 학생처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셔서 잘 결산하기를 바란다.
원래대로 하면은 이번 주 토요일이 성탄절이다.
이번 주가 성탄주일이고 다음 주는
송년주일 31일은 송구영신예배가 있을 예정이다.
지난주에 설교 드렸던 것처럼
매일매일이 우리에겐 성탄절이다.
내 마음의 빛으로 다시한번 찾아와 주시고
내 안에 생명으로 와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말씀과 진리로 새롭게 나에게 다가오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시길 바란다.
오늘은 "산상수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함께 은혜 나누려고 한다.
전에는 산상수훈만 가지고 부흥회를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최근에는 설교 듣기가 어렵다.
산상수훈 말씀이 부분적으로는 전해지긴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가려워져 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 1절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온지라" 산 위에서 하신 말씀이다.
때에 따라 이것을 산상설교 또는 산상보훈 보배처럼
귀한 교훈이라는 그런 뜻이다.
그래서 산상수훈 또는 산상보훈, 산상설교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많은 분들이 이 산상수훈을 "성경의 황금률"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매일 산상수훈을 읽어가면서 이 말씀을 지키며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내용은 산에서 가르친
산상수훈의 내용이다.
산상수훈이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예수님을 따라갈 때 무리와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제자가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있지만 또 그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3장에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다.
3장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또 4장 1절부터 보면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광야에서 받으셨다.
마태복음 4장 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리고 예수님이 이때부터 복음을 전파하셨다.
여기 "이때"라고 하는 말씀은
마태복음 4장 12절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잡혀서 죽게 되는
그때가 되니까 비로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면서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부터 복음을 전파하며 본격적인 신약시대 교회시대를
여시게 됐다.
이때부터 비로소 천국을 전파하면서
마태복음 4장 18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면서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이렇게 제자들을 부르셨다.
마태복음 4장 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온 갈릴리를 돌아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 또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귀신도 쫓아내셨다.
마태복음 4장 25절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시고 수많은 병을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시니까 온 갈릴리 지방을 비롯한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다.
마태복음 5장 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이 5장 1절의 말씀이 공동 번역으로 보면 좀 다르게
번역이 되어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이 산에서 허다한 무리와 가까이 있는 제자들이
다가왔을 때 이 말씀을 전하였다.
무리와 제자가 다 같이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다 들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마태복음 7장 28~29절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허다한 무리들이 다 듣고 놀랬다고
하였고 또 제자들도 예수님 가까이에서 이 말씀을 다 들었다.
그럼 무리와 제자들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무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 따라가는
자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이적을
나타내시고 이렇게 무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 추구하며
따라가는 자들이었다.
마태복음 8장 1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님이 산에 올라갈 때도 따라갔고 내려와도 따라가면서
계속해서 많은 병을 고치고 기적과 이적을 나타내시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관은 전혀 달랐다.
당시 로마서 속국에서 옛날 다윗 시대와 같은 전성기를
맞아서 다른 나라로부터 조공도 받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세상적인 좋은 나라를 만들어주는 메시아!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메시아관 이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병 고쳐주고 또 예수님을 통해서 귀신을
쫓아내주고 예수님을 통해서 빵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이것은 주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길 가다가 기진할까 봐
빵을 만드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병도 고쳐주셨는데
이것은 주님의 사랑과 인애와 자비의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방편이다 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목적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그들을 부르시는데
그 다가오는 자들에게 방편으로 병도 고쳐주시고
빵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각자의 심령에 임하도록
훈련하시고 회개시키시고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과정 중에
병 고치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고 과정이고
하나의 방법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 목적 자체가 중요한데 그 목적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무리에 속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때
무엇보다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메시야로 받아들였다.
우리역시 이런 메시야를 받아들여야 한다.
메시야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의 기름 부은 자"라고 하는데
기름은 선지자에게 붓는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또 제사장이 되어서 죄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해 주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의 왕이 아닌
하늘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실 그런 메시야관을
바로 가져야 한다.
이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세상 왕으로
등장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혀 달라 하였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 먼저 심령에
임하도록 이렇게 훈련을 받고 믿음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점점 깨달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마태복음 8장 23~24절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쫓아갈 때 말씀이 임한 다음에 그 말씀을
실천하도록 제자들을 "바다"라고 하는 환경 속에서
훈련시키시는 모습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가 있다.
같은 말씀이 마가복음 4장 35~41절에도 나와 있다.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면서 풍파를 만날 때
주님이 "왜 믿음이 없느냐" 책망을 하시면서
믿음을 키우시는 바로 그날 저녁이라고 하는 그날은
마태복음 13장의 말씀을 증거 한 그날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훈이 우리에게 임하고
하나님 말씀이 임하고 비밀이 임하면
그 말씀에 걸맞은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 훈련이
이어서 따라오게 된다.
이것이 제자들의 삶이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교훈이 올 때마다
그 말씀에 걸맞은 삶으로 변화시키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몸부림 속에
주님을 따라가게 되고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지도록
그렇게 그 목적을 가지고 따라가지만
무리는 그와 상관없이 나타나는 현상만 보면서 따라가는
것이 무리다 하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요한복음 6장 24~31절
"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여기 요한복음 6장에도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까지 왔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말씀하셨다.
영생 자체가 목적이지 썩는 양식을 예수님께 얻고
그것 때문에 일하는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이다.
저희가 그때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였다.
신학교를 가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목회를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 길로 나가기 때문에
예수님이 생명 떡 설교를 하셨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이 생명 떡 설교를 하고 나니까
요한복음 6장 60~71절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몇 종류가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씀이 어렵다" 하였다.
그래서 제자 중에도 66절에 보니 "많이 물러가고"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랬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였다.
그러니까 신앙의 목적이 영생에 있고 어렵고 힘든 일이며
어려운 말씀이지만 그 영생을 취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끝까지 붙어 가는 열두 제자 이들이 정말 제자였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룟 유다는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허다한 무리가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반적인 제자 즉 이름을 가졌지만
물러갈 수밖에 없는 그런 제자들이 있고
진실한 열두 제자가 있고 가룟유다 같이 타락하는 이단 교주
같은 이런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
마태복음 8장 18~22절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여기 많은 무리가 에워쌌는데 그중에 한 서기관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하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다.
또 제자 중에 하나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말하니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하셨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오는 제자들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물러갈 수밖에 없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여기서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따라가는 무리가 아니고
어려운 환경이 오면 물러갈 수밖에 없는 제자도 아니고
영생의 말씀이 있는 그 자리를 끝까지 따라가서
결국 예수님의 형상을 입어서 우리가 하늘나라까지
도착할 수 있는 그런 제자의 길을 가는 그런 사람들이
돼야 한다는 것이 산상수훈의 핵심 내용이다.
두 번째
산상수훈은 도덕과 윤리와 법의 말씀이 아니다.
요한복음 5장 38~42절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이것은 율법이다.
오늘날 세계의 나라마다 다 법이 있는데 그 모든 법은
전부 성경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여 만든 법이다.
율법을 중심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주는 것이
세상법의 기준이다.
그런데 세상의 도덕도 있고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가는 윤리도 있고 세상의 법도 있지만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이 기독교의 종교적인 차원에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 법대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 가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주고 오리를 가게 하는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이것은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서
예수님처럼 이 땅에 와 육신을 다 내어주고 이 땅에 와서
원수들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예수님의 형상을
입어가는 종교적인 차원의 그 기준을 말씀하는 것이지
세상 도덕과 윤리와 법을 지켜 사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용서받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참 제자의 길을 걸어갈 때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마태복음 5장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것은 성경의 율법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3~47절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런 도덕과 윤리와 세상법의 기준을 갖고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아 온전해 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산상수훈의 교훈은 세상, 윤리, 도덕을 초월한
예수님과 같은 형상을 본 받아야만 한다.
결국 하나님이 온전한 것 같이 온전하다는 기준이
산상수훈이다.
본문 가운데 마태복음 5장 1절~12절에 있는 팔복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 단순한 여덟 개의 복이 아니고
온전에 이르기 위한 과정, 성장론적인 말씀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까지 가는
그 길을 마태복음 5장을 통해 예수님이 전파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세 번째는
이 산상수훈의 첫 번째로 나오는 팔단진복
이 모든 8가지의 말씀을 우리 삶의 현장에 적용하여야 한다.
여러분 깨달으시기 바란다.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줄이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아서
천국을 얻었는데 마지막 연단 후에 또 천국을 얻는다.
그러니까 1차 연단은 성령이 우리의 심령에
임시적으로 와서 계약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단까지 가야 그 집에 입주하면서 실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그래서 영적성장은 여덟 개의 과정인데 이것이 무 잘리듯이
1차 연단단계에서는 애통하고 다른 단계에서 애통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다른 곳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때그때 단계마다 온전해지는 성장 과정의 특징들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영적성장과정에서 여덟 가지 환경이 골고루 다 오게 된다.
우리가 의를 위해서 핍박받는 것이 마지막 단계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 과정에서든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모든 여덟 가지의 환경들이 성장하면서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내 삶의 여러 가지 환경들이 골고루 다 오기
때문에 이 여덟 가지가 전부 삶에 적용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도표화하고 1,2 차원에서 우리가 아무리 수평적으로
얘기해도 3차원 이상의 하나님의 영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동시적으로 다변적으로 한꺼번에 온다.
그러니까 애통하는 것도 우리가 완전에 이를 때까지 계속
애통하는 심령을 가져야 되고 핍박을 받는 것도 계속해서
온전에 이를 때까지 자져야 한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3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한춘근 박사라고 하는 조직 신학 교수가 있었는데
그분이 간증하셨는데 황해도 신천에 김익두 목사라고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다.
신천지방 시장바닥의 깡패였다.
이분이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다가 황해도 신천에 앉은뱅이가 하나 시장에 있었는데
이분이 성경을 읽다 보니까 사도행전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읽고 그래서 가서 앉은뱅이에게
기도를 했는데 안 일어났다.
그래서 일주일간 금식하고 다시 가서 안수를 했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그때부터 부흥사가 돼서 많은 병자를 고쳤는데 이분이 6.25 때
인민군의 개머리판에 맞아 죽고 순교하셨다.
당시 교수님은 김익두 목사님이 시무하던 그 교회에
중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마을로 인민군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주일날 교회를 가야 되는데 인민군들이 소집을 해서
교회를 못 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분은 열 몇 살에 어린 중학생이었지만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그날 인민군들에게 가지 않고
교회를 갔다.
그런데 그다음 날 가니까 자아비판을 해야 된다고 그 모임에
오지 않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어린 중학생을 거꾸로 매달고 매를 때리면서
자아비판 하라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분의 간증에 의하면 그때 생각났던 말씀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천국이 저의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
생각나면서 내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주일 성수했던 것 때문에 공산당에게 매를 맞고
내가 주님 때문에 매를 맞는다고 하면서 그 핍박을 받는
은혜 속에서 한없는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분이 그때 받은 은혜로 신학교를 다니고 후에
조직신학 교수가 되어서 일생을 주님 앞에 헌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학생이지만 높은 경지에 있을 의를 위해서 핍박받는
이 일이 어린 학생의 신앙 초기 때에 핍박받는 일이 있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어느 시골 마을에 교회를 하나 세웠는데
이 교회 초등학교 6학년짜리 여자아이가 전도사님이 전도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는 농부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딸이 교회 가는 것이 못마땅해서 주일날
못 가게 하려고 토요일 날 서리가 내리는 때에 끝없이 넓은
밭에 고춧대를 다 뽑아놓지 않으면 혼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주일날 아침에 보니까 이 아이가
교회에 가버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교회에 쫓아가서 끌어내 밭에서 타작하는
걸로 딸을 때리며 "너 고춧대 뽑아놓으라고 했는데
왜 교회 갔냐?"고 야단을 치는데 이 아이가
"아빠 저는 고춧대를 다 뽑았어요" 라고 말하였다.
아이는 교회가 너무 가고 싶어서 아빠가 그렇게 핍박하는데도
밤새도록 고춧대를 다 뽑아서 그 어린 아이의 손에는
전부 피가 묻어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의 말씀을 다 지키고 교회를 갔다고
하였다. 이런 것을 우리는 세상의 핍박이라고 한다.
결국 그 아버지는 그 어린 딸의 모습을 보고서 회개하고
예수 믿어서 그 가정이 다 구원을 받았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이 말씀이 단순한 여덟 가지의 복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너희가 온전히 이르러서 내가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에 너희가 이를 것인가?
그 과정을 설명해 줄 성장론인 것인데 이것이 단계적인
특징이지만 그 모든 여덟 가지가 어린 신앙의 때부터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핍박받을 수도 있고 때에 따라 긍휼을 베풀어야 될 자리도
있는 것이고 애통하게 될 자리도 있는 것이고 온유한
심령이 될 때도 있고 마음이 청결한 그때도 필요하고
여덟 가지가 계속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다 필요하다는
사실이 산성수훈의 교훈이다.
오죽하면 인도의 성자 간디가 다른 성경은 다 몰라도
예수님의 산상수훈만큼은 우리가 정말로 지켜서 해내야 된다
하면서 그 이방인이 그 말씀을 매일 보면서
그렇게 산상수훈을 지켜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저와 여러분은 내 자신이 무리에 불과한 것인가?
어려우면 물러갈 수밖에 없는 제자의 반열인가?
아니면 영생의 말씀이 있고 그 영생 때문에 예수님이
땅에 와서 나를 해서 죽으신 그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하여 그 신앙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알고 끝까지 따라가는 그런 제자의 반열에
있을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나는 허다한 무리에 불과한 것인가?
현상만 쫓아가는 사람인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따라가는 것인가?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영생을 주기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신 그 영생 때문인지
이것이 믿음 아니겠는가?
이 세상은 잠깐이고 나그네 길이고 언젠가 죽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이 분명한 현실에서
그 믿음을 성장시켜 주시려고 핍박도 주시고
여러 가지 환경을 주시지만 그 모든 곳에서 믿음을 지켜서
끝까지 영생의 말씀 때문에 주님을 떠나지 않는
참 제자의 반열에 앉아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산상수훈의 교훈이라는 사실이다.
후안까루라고 하는 성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나와 함께 사막으로 가자" 그러면서 사막에 가서
일생 남은 생애를 수도 생활하면서 지내는데
그분에게 준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무리인가? 나는 제자인가?
그래서 이걸로 책을 냈다.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보니까 그동안 자기는 무리에 속한
인생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에 사막에 가서
그 음성을 들어가면서 남은 생을 제자의 길을 가게 됐다.
연말연시 두 주밖에 안 남은 이 결산의 달에
여러분 다시 한 번 신앙을 점검하시고
정말 제자의 반열에 어떤 환경이 와도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그 영생을 주제로 한 목표와
영생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이런 제자의 반열에 서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영적으로 성숙해 가고
금년 안에 잘 결산하여 주님 앞의 칭찬 듣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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