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의미
마태복음 2장 1~12절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배경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일생과 죽음과 승천 이 모든 예수님에 대한 것은
예언하신 말씀 그대로 전부 이루어졌다.
마태복음 2장 6절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 하는 것은
미가서 5장 2절에 예언되신 말씀이다.
그래서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마태복음 2장 15절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애굽으로 피난 가실 것을 마태복음 2장15절에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호세아서 11장 1절에 예언하신 말씀이다.
마태복음 2장 18절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아이들이 학살되는 장면이 18절 말씀에 나와 있다.
이것도 전부 예레미야의 예언된 내용 그대로이다.
마태복음 1장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겠다고 예언돼 있는데
그대로 다윗의 가문에 오셨고 마태복음 2장 23절에는
애굽에서 피난 생활이 끝나고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살게 되는 것도 예언되어있는 그대로이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이 예언하신 말씀 그대로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오늘 "성탄의 의미"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 한다.
첫 번째
성탄일은 언제인가?
출생부터 죽음까지 다 예언이 되어 있는데 정작 날짜는
성경 안에 아무리 뒤져도 기록된 부분이 없다.
예수님은 "내 살과 피는 기념하라" 말씀하셨던데
"성탄을 기념하라" 그런 말씀은 없다.
반면에 여러 절기는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다.
작년에도 성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바가 있다.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당시 종교를 통합했다.
기독교를 국교화 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모든 이방종교들을
결속시켜서 하나의 종교로 만들었다는 것이 올바른 말이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종교인 미드라교의 그 우상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동짓날 축제를 하고 동지가 지나서
그다음 날부터 태양이 떠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동지를 중심으로 한 미드라교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임의로 정하였다.
성경에는 날짜가 없는데 12월 25일로 카톨릭에서 당시에 정했다.
그리고 춘분을 중심으로 해서 부활절을 또 정해서
"이스터데이" 우상 섬기는 날이다.
이것을 전부 축제화하였다.
축제가 필요했고 기독교 안에도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그런 방법으로 두 가지의 축제를 이렇게 정해서 시작하였다.
종교 개혁이 일어났지만 종교 개혁 대에 이 부분을 건들지
않고 17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성탄절과 부활절이
지금까지 지나온 것이다.
이것을 현실적으로 고치기는 어렵다.
성탄이 오면 상록수 나무를 장식하는 거, 선물 교환하는 거,
또 철야하며 파티하는 거 이것이 전부 그 당시 우상숭배의
관습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깨달은 이상 따라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날짜가 나온 적도 없고 기념하라는 말씀도 없고
그것을 우상숭배하는 다른 종교의 기념일을 갖다 붙여놨다면
그것을 구지 따라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오신 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성탄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거기에 합당한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는 것이다.
오늘날 달력이 지금까지의 달력으로 이렇게 정리되기에는
수천 년 동안 여러 번 바뀌었다.
그레고리력이라고 하는 것도 있고 율리우수 달력도 있고
수없이 많은 달력들이 바뀌면서 오늘날 달력이 세워졌는데
AD, BC라고 하는 예수님 중심의 기원도
4년에서 7년 차이가 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이 헤롯 때인데 헤롯은
예수님이 오신 그 이전에 4년 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적어도 AD, BC도 4년에서 7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날짜와 연도는 정확한 것이 없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성탄절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들을 하며 지금 발표했는데
중요한 단서 하나는 누가 복음에 보면
빈들의 목자들이 있을 때에 천사가 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고 빈들의 목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런데 실제 이스라엘에 가면 10월 말 이후에는
날씨가 춥기 때문에 빈들의 목자들이
밤을 샐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0월 말 이전인 것이지 그 이후로는
빈들에서 목자들이 밤을 셀 수가 없다는 단서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동방의 박사들은 밝은 별을 보고 찾아왔는데
이 밝은 별은 새로 태어나는 별, 초신성 별이나
아니면 별이 겹쳐서 보일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너무나 희귀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천문학자들이 연구를 했는데
이 베들레헴의 이런 별이 보이게 된 것은
BC 7년 5월 10월 12월 이 세 번 목성이나 토성이
서로 겹쳐 보이는 그때 밝은 빛을 발한다 라는
사실을 계산해 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와서는 이 컴퓨터가 대단히 발달해서
여호수아의 그 해가 멈춘 잃어버린 시간도
컴퓨터로 계산해서 찾아가는 시대이다.
많은 학자들이 별의 이동 사항을 컴퓨터로 계산해서
이 목성과 토성이 겹치면서 예수님 당시에 베들레헴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 BC 7년 5월 29일, 9월 29일,
12월 4일 이렇게 3번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확인이 되었다.
그 빈들의 목자들이 12월에 나올 수 없다는 걸 감안한다면
9월 29일 확률이 제일 많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날짜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또 이것을 기념하라 말씀하신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날짜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오셨고 분명히 오신 그 주님이 오셔서
이 성탄을 왜 주님이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의미를 알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나에게 다시 이루어지고
아직도 주님 만나지 못한 영혼들에게 그 주님의 역사가
오늘 이루어지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날짜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제가 페이스북을 한 지가 상당히 오래됐는데
이 페이스북의 친구가 수백 명이 된다.
그런데 해마다 제 생일이 음력 10월 23일인데
양력 10월 23일이 되면 많은 사람이
‘목사님 생신 축하합니다’ 하고 페이스북에 인사를 한다.
작년에도 음력이라고 알려줬는데 그전해도 음력이라고
알려줬는데 해마다 알려줘도 해마다 까먹고
그날 저에게 인사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다.
내 생일도 아닌데 개인 축하 받는 것도 이상하고
‘이 사람들 알려줬는데 또 잊어버렸나
젊은 사람이 치매야 왜 이래‘
마찬가지인 것이다.
예수님이 알려준 적도 없고 내 생일도 아닌데
그날은 더군다나 우상 섬기는 그날을
생일이라고 많은 사람을 축하하게 한다면
정작 본인이 기분이 좋겠는가?
우린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내생일도 아닌데 축하한다고 그 무슨 기분 좋은 일이겠는가?
성탄절을 알려준 적도 없고 그것을 기념하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것을 구지 날짜를 정해서 그것도 우상을 섬기는 날을 정해서
그것을 축하하고 기뻐한다면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겠는가?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성탄의 의미
우리가 여러 가지로 생각하면서 성탄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서
정말 이 시절에 주님이 언제 오셨는지 우리 간섭을 따라
이렇게 때 되면 성단을 기념하게 되는데 그것이 나에게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성탄의 의미
1) 이 어두운 죄악 세상에 빛이 왔다는 것이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세상 다 어둠이었다.
이미 창세기 1장 2장에서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 인생들에게 깨닫게 하셨다.
1장 2절에 보면 빛이 오기 전에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어둠의 세상이었다.
그럼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는 것이 다 어둠 속에 쌓여 있다.
그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 빛으로 찾아오셔서
그 안에서 모든 만물이 남자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의
그 인생에 지나가는 창조의 과정을
창세기 1장에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빛이 오기 전에는 컴컴하고 어두움 가득한 것이
빛을 만나기 전에 우리의 심령 상태와 똑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빛을 만나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두운 세상을 사는 것이다.
빛이 오고 나니까 이 안에서 빛이 온 다음에 창세기 1장에
하늘이 생긴다.
그것이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이다.
빛이 내 마음에 오니까 내 심령 안에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빛이 오니까 그 위에 하늘이 생긴 다음에
땅이 생기니까 거기에 많은 식물도 나타나고
동물도 나타나고 그 땅을 중심으로
남자 여자가 나타난다.
이것이 우리의 심령과 똑같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처소가 생기니까
남자 된 예수 그리스가 내 마음에 자리 잡고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고
나는 여자처럼 주님의 신부로서 드러나는 과정을
창세기를 통해서 다 말씀하신 것이다.
2천년 전에 주님이 빛으로 왔어도 현실 삶 속에서
내 마음에 빛으로 찾아와 있지 못한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우리는 빛으로 오신 주님이 다시 내 마음속에
이 계절에 다시 한 번 찾아와 주시고
또 이미 예전에 빛으로 주님을 만났지만 내 심령이
어두워져 있다면 다시 한 번 또 찾아와 주셔서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는 그러한 절기로 사모하며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날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심령의 현재의 빛으로 그분이 내 심령 안에
나의 심령을 비추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5절~7절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본래는 하나님이 빛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영원히 영혼에 계셔서
볼 수가 없는 분이다.
빛 되신 하나님을 누가 만나본 사람이 없고
아무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신데
그 빛 된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은 몸으로
사람으로 나타나신 그 예수님이 빛이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는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너희가 세상에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다.
빚 대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바로 이 세상
이 세상은 전부 어두운 세상이다.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도 없는 그 세상에
빛으로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빛을 받은 제자들이
세상에 빛이고 오늘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 온 그런 사람들이 우리가 빛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을 비춰야만 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2장 35절~36절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있는 동안 그 빛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신 동안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에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빛을 믿고 빛의 아들이 되지 못하면
어둠에 다니기 때문에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장님이 된다면 얼마큼 갈 수가 있겠는가?
10m를 걸어갈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어둠에 잡혀 있는 사람은 가는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빚 대신 주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지 못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면 빛이 아들이 되지 못하면
어둠 속에 다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빛이 있는 동안에
그럼 그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빛이 있는 동안에 그것은 내가 사는 동안에 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빛이 있는 동안에
그러나 주님은 이제 없고 주님은 말씀으로 진리로 오셔서
우리 안에 빛으로 오시는데 그 빛이 있는 동안에 그 말은
내가 사는 동안에 그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빛의 아들이 되고 어둠에 다니지 않게 되는 것이다.
2) 성탄의 의미는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는 것은
오늘 말씀이 오셨다고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이 말씀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이 오늘 왔다.
그 말씀이 빛으로 오신 것이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싹이 나는 것이다.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여 나를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말씀이 내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죄악 세상이 주님 오시면 다 심판받아서 불 타 없어질 것인데
우리가 그 안에 불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말씀은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까지
빛 된 주님을 맞이하지 못한 것이다.
내 마음속에 말씀이 오고 말씀을 통하여 은혜와 진리가
내 속에 충만한 이러한 인생은 하루라도 말씀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너희가 육신의 떡을 먹고 사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이 떡이고 그것이 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라고
그래서 살과 피를 먹지 하려는 영생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3) 예수님이 오신 성탄의 의미는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에 주님이 말씀하셨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이 각 사람 마음속에
진리의 영으로 오시는데 그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성령의 영이 있어야만
우리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세상은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성령을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이다.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빛의 자녀인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알고 맞이하고
그 성령과 더불어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요한일서 5장 7절~8절
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우리 안에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라 그랬다.
그럼 성령은 진리 곧 말씀인 것이다.
말씀을 받고 빛을 받은 사람은 곧 성령을 받은 것이다.
그 성령이 우리를 예수님이 준비해 놓으신 그 속죄의 열정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그 성령이 우리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언제 오셨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현재적으로 내 삶속에 성령이 들어오셔서
그 성령의 지혜를 통하여 나를 구원으로 인도해 가고
그러므로 내가 매일매일 변화되는 삶을 살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느냐
그 성령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요한일서 4장 2절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단 교주들이 적그리스도가 됐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영으로 온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많은 이단들은 성탄을 기성교회 같이 지나지 않는다.
문선명은 문선명이 태어난 날 정월 3일 1월 3일을 지냈고
하나님의 교회 안성 교회는 안성이 태어난 날을 성탄으로
지키고 이단 교수는 다 자기들이 메시아이고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분명하게
예수님이 육체를 따라 오셨고 이것을 시인하는 영이고
그래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4) 성탄의 의미는 생명이 우리 안에 왔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의 영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빛과 말씀이 없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생명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1절~2절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한 사도가 가장 위대한 것은 요한복음, 요한1,2,3서
또 요한 계시록을 통하여 하나님은 생명이라고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그 예수님이 빛이라고
그 예수님이 사랑이라고 그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것이 전부 요한 사도가 증거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니까 위대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가까이서 그를 의지하여 살고
예수님의 그 놀라운 비밀들을 깨달은 그 요한이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왔지만
그 생명인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았고
안드레와 요한이 첫 번째 제자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만져 봤고
그래서 그 생명이 나왔다는데
그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었다.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2천 년대에 오신 그 주님이
이제는 영으로 오셔서 또 말씀과 진리로 오셔서
또 우리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그 빛과 진리와 생명 되신
그 주님을 만나면 우리 안에 영생이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성탄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여서
하나님의 생명을 이 땅에 분배해주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예수님이 오신 것이
무슨 목적이 있고 우리 안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영생을 얻는 일에 초점을 맞춰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22절~23절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이 영생을 얻어야 되는데 이 영생은
먼저 죄에서 해방이 되는 경험을 먼저 해야 된다.
이 죄에서 해방이 되는 것이
로마서 8장 1절~2절에 있는 경험이다.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2천년 전 십자가 속에서 우리의 원죄도 해결했고
우리의 자범죄도 다 해결하는 은총을 주셨지만
그 은총이 나에게 주관적으로 실질적으로 역사해서
내 마음에 있는 원죄가 뿌리째 뽑혀나가야
죄에서 해방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로마서 6장에는 의의 종이다 라고 하였다.
1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먼저는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하느냐에 따라서
죄의 종이 되기도 하고 의에 종이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데 17절에 뭐라고 했는가?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복음을 알지 못하고 말씀이 없을 때는 다 죄의 종이었는데
복음이 왔고 말씀이 와서 그 교훈을 순종을 하니까
죄에서 해방되는 경지가 왔다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가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의에 종이 돼서 죄에서는 해방이 되었지만
그러나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고도 계속해서
마지막 영생이라고 하는 그 단계까지 나가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부활이다.
영적으로는 죄에서 해방돼서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내 몸인 육신도 예수님 오실 때 부활을 맞이해야
그 마지막인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속에 왔다고 하고 내가 빛을 받았고
내가 성령을 받았고 말씀을 받았는데
그것은 먼저는 영적인 구원인 죄에서 해방되는
이 은혜를 입어야 되고 더 나아가서는 육신도 구원받는
부활까지 일어나야 마지막 영생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까지 부활을 입어서 산 자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아무도 설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요한일서 5장 11절~12절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성령이 내 속에 오시고 말씀과 진리로
내 속에 온 그 사람에겐 아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
그리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론은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몇 월 며칠날 오셨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고
캐톨릭교에서는 그것을 축제로 당시에 우상 종교를 따라서
그렇게 정해버렸지만 종교 개혁을 통해서도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이 마지막 때는 이 성경의 모든 비밀들이 다 드러날 때이다.
아마 대환란 때는 이것이 개혁이 될 것이다.
1700년 동안 지켜왔던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개혁이 될 것이다.
대환란을 앞에 둔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잘못된 것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고 우리는 다만 그 의미를 알고
2천년 전에 오신 빛대신 주님
2천년 전에 오신 생명의 주님
2천년 전에 오신 말씀
2천년 전에 오신 성령
그것이 내 속에 현재 얼마나 충만하게 진행되고 있는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성탄의 의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분이 다시 한 번 재림하여
이 땅에 오셔서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빛과 말씀과 성령과 생명의 역사로 익은 열매를 구원하고
부활로 영생에 가는 길을 여실 그 재림의 주님이 오시기를
사모하는 그런 절기가 되어야 된다.
세 번째
성탄 이런 절개가 왔지만 날짜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날짜는 실제 알지도 못하고 그것을 우상숭배하는
이러한 잘못으로 이렇게 된 그런 날짜를 생각하지 말고
의미를 바로 알고 그런 의미로 이번 성탄 절기에
다시 나에게 빛으로 찾아와주기를
나에게 생명으로 역사해 주시기를
나에게 성령 충만으로 오시기를
나에게 말씀으로 다시 충만하게 오시기를
이렇게 사모하면서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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