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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즐거움의 근원

by Andrew Y Lee 2021. 9. 9.

즐거움의 근원
 
로마서 5장 1~11절
 
 
 
할렐루야! 주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즐거움의 근원이라고 하는 말씀의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
 
첫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기쁘고 즐겁게 살기를 원하는데
그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이 어디냐?
그걸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무슨 말이냐면 ‘고생 끝 행복 시작’ 얼마나 좋은 말인가?
이제 고생은 끝났고 행복이 시작됐다는 말이다.
 
각자 기준의 성공에 이르면 그 말을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고생이 끝났고 행복만 남았어’
행복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고
그 말대로 고생 끝이고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그 성공으로 만족할 수 있고
잠깐 동안 행복할 수 있겠지만
정말 이 말이 적용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때이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영접하고
출애굽이 되면 사실은 그때가 고생 끝이고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선언하며 완전한 고생 끝과
완전한 행복이 오는 그 과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완전한 고생을 끝내고 완전한 행복이 시작되는
그 과정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 믿는 우리는 즐거움과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시편 100의 시편 기자는 그렇게 노래했다.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광야를 지나가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 성전에 가는 그 때 부르는 감사의 노래인 것이다.
 
이제 장차 예루살렘이 내려오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면 얼마나 그때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노래하겠는가?
 
그 목적지를 향해서 가면서도 여전히 즐겁게 기쁘게 노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시편 35 9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편 4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구약 시대에 1년 농사를 잘 지어서 곡식을 잔뜩 쌓아놓고
새 포도주를 풍성하게 만들어놓은 그때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제는 겨울이 와도 곡식을 넉넉히 준비해놓고
포도주를 넉넉히 살았기 때문에 오늘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주신 기쁨은
곡식을 저장해놓고 포도주를 쌓아놓은 그 풍성함보다
내 마음에 주신 기쁨이 더 크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이 세상에서는 포도주를 쌓아놓고 곡식을 쌓아놔도
도적맞을 수도 있고 무슨 일이 닥칠 지 알 수 없어
그렇게 쌓아놓고도 편하게 잘 수가 없는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곡식을 많이 쌓아놓고 포도들을 풍성히 준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를 평안히 눕게 하기도 하고
평안히 자게도 하게 하시고 나를 안전하게 구하신 일은
오직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
그것 때문에 기쁘고 즐겁다고
시편 기자는 그렇게 고백하고 있다.
 
빌립보서 3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4 4에도 말씀하고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고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오늘 우리의 기쁨의 근원과 즐거움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라고
우리가 이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에 입문하는 출애굽하는 그 시작부터
이 기쁨이 점점점점 커지면서 그 기쁨이 결국
예수님과 합의되면서 극지에 이르고 천국에 가면서 통일되고
폭주하여 넘치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쁨의 과정인 것이다.
 
요한복음 17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우리가 아는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언적으로 기도하신 내용인 것이다.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목적과 이유와
그 십자가를 지는 그 가는 길에 모든 이유가 다
여기 17장에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기도하는데
그 목적 중에 하나가
예수님 안에 있는 기쁨을 저희에게도 주려고 한다.’
그것이 정말 십자가의 목적인 것이다.
 
예수님 안에 두신 그 목적, 예수님 안에 있는 기쁨,
그것이 무슨 기쁨이기 때문에 오늘 그것을 우리에게
주려고 하고 있는지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 11에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시고 아버지는 농부신데
이제는 우리를 가지라고 말하면서 이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붙어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서
너희가 그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려고
예수님은 이 교훈을 다 그 기쁨을 전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끝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은
그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을 전해주려고
그 기쁨을 나누려고 그래서 오늘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시편 1편 16편에 다윗을 빙자하여 예수님이 가르친
모든 기쁨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시편 16 8~9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다윗을 빙자하여 예수님의 심정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내 우편에 계시고 하나님이 항상 내 앞에
모셔 있기 때문에 마음이 기쁘고 영광도 즐거워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지신 기쁨은 하나님과 삼일체로
하나 되신 그 기쁨이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인 것처럼
우리도 그 안에 함께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 속에
기쁨 속에 하나님의 샤론 평화 속에 하나님의 영생 속에
그것이 하나가 되는 그 기쁨인 것이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있는
그 속에 우리도 하나가 되게 하려고
그래서 그 영생도 함께 분배를 받는 것이고
그 평화도 함께 분배 받는 것이고 그 사랑도 함께
나누어지는 것이고 기쁨도 함께 나눠지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서 함께 하나가 되겠다는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쁨을 반복하는 것이다.
거기에 영생이 있고 거기에 사랑이 있고 평화가 있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그 속에 있는 것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기쁨 예수님의 기쁨이 다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쁨에 그런 즐거움의 근원을 우리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 안에 둬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종교 개혁을 하면서 그의 주석가운데 유명한 말을 했다.
‘하나님이 기쁨의 원인이 되고 기쁨의 창조자가 되며
기쁨의 보증이 되셨다‘
 
하나님이 이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기쁨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기쁨의 창조자,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 기쁨을 보증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이고
천국의 기쁨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주시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내시고 부활 승천하여 가신 것이다.
 
우리는 이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한 자들이고
교회는 이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 것이다.
 
그럼 두 번째,
어떻게 이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면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이 기쁨이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이 점점점점 완성해 가고 완전에 가깝고
그 성장하는 비례에 따라서 기쁨이 점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점점 그 기쁨을 알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쁨은 구속의 기쁨이다.
구원을 통해서 얻는 기쁨,
하나님 안에 동참하면서 얻은 기쁨이다.
 
누가복음 15 7 말씀에 보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이 이제 많은 양 백 마리의 양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어버리면 99마리를 놔두고
잃은 것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그 한 마리 양을 찾아서 어깨 메고 집에 오면
그 잃은 양을 찾았는데 잃은 양 하나가 죄인인데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나두었던 회개할 것 없는 그 99보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온 것이 더욱 기쁘다.
 
죄인하나가 돌아오면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기쁨이
그 심령 안에도 나타나지만 같이 있는 모두에게 함께
그 기쁨이 나눠지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8절 말씀에 보면 드라크마 비유로
또 말씀을 하셨다.
 
은화 동전인데 열 드라크마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짐을 쓰며 부지런히 찾지 않겠느냐’
그래서 잃어버린 그 하나를 찾으면
‘모든 벗과 이웃을 불러서 함께 즐기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왜 하나님의 사자 천군천사가 함께 기뻐하겠는가?
그 죄인 하나가 돌아오도록 천군천사가 다 동원돼서
열심히 일을 하고 그 결과로 죄인 하나가 돌아오기 때문에
한 드라크마를 찾게 되면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있는 겁이다.
 
24절 말씀에 보면 또 잃어버린 탕자가 돌아왔을 때
이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밤새 불을 켜놓고 기다리던 그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서 함께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얻었는데 이것은
죽었다가 살아나고 다시 찾았기 때문에
함께 기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맏아들이
내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준 적이 없는데
허랑방탕한 창기와 함께 이 모든 삶을
다 잃어버린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니까
32에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렇게 죄인 하나가 돌아오면
그 하늘의 기쁨에 동참하는 길이 열렸기 때문에
그 기쁨이 시작이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
로마의 깊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을
신뢰함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어떤 사람은 투기와 분쟁으로
또 복음을 전파하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도바울 주위에 투기와 또는 전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선한 뜻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도
있는데 어떤 이유로든지 복음이 전파되어서 죄인 하나가
돌아오는 것을 바울은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자기가 돌아왔을 때 그 하늘의 기쁨을 맛보았고
하늘에 있는 기쁨을 알기 때문에 죄인 하나가 돌아오면
그들에게 또 나눠질 그 기쁨을 바라보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 2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우리를 구원의 과정에서
모든 것들, 이것을 이루어가는 것이 전부
기쁘신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소원을 지켜주면서
그 소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 하나가 돌아오면서
이 기쁨들이 시작이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할 때,
그때 이 기쁨들이 더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가는 것이고
말씀대로만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이것이 광야를 지나가면서 우리가 받는 훈련은
전부 말씀 지키는 훈련이 되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요한3 3 4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요한2 4에도 이렇게 표현한다.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이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도 기쁜 것이고
그것을 증거하는 것도 기쁜 것이고
또 그 진리를 깨닫고 증거하는 것을 받고
진리 안에 행해하는 것 이것이 또 한 기쁨인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기쁨인 것이다.
 
부모에게 순종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면
부모도 기쁘고 자녀도 기쁘지 않은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 부모를 기쁘게 하면서
우리 자신도 진리를 실천할 때 거기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다음에 기도를 우리가 깊이 침잠이라고 하는 말을 쓰고 싶은데
깊이 그 속에 침잠하면 잠수함이 물속에 깊이 내려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기도에 깊이 침잠하면 그때 하나님과 가까워지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서 그때부터 이 기쁨의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환희로 밀려오는 이런 기쁨을
우리가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기도에 침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속으로 깊이 내려가는 잠수함처럼
깊이 기도에 침잠하면 놀라운 하늘의 기쁨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 기쁨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본문 가운데 세 번이나 즐거워하라고
우리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
 
로마서 5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 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그런 표현을 한다.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 뻔했냐고’
그런 인생도 있을 수 있다.
가롯 유다 같은 경우에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다.
 
이후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영광의 자리에 동참해서
그 영광을 맛본다면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
 
나중에 하늘에 가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거기에 동참하는데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
 
그 놀라운 영광을 맛보지 못하고
그 놀라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도 고생하고 힘들고
신세타령을 하고 이러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
 
더 나가서 사도바울은 3에 뭐라고 말하는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왜 그런가?
환란이 오니까 인내의 말씀을 지키면서 원수 사랑을
실천하면서 연단이 되어져서 모든 불순물,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하는 불순물이 다 버려져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소망이 이루어지니까
환란 중에 즐거워한다.
 
그런 사람 별로 없다.
환란이 오면 ‘하나님 왜 또 접니까?’
‘왜 또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다 정말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11 말씀에 또 뭐라고 말씀하는가?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사람 바울의 즐거움 인 것이다.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환란이 오면
인내의 말씀을 지키면서 연단을 받게 되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소망이 생기니까
즐거워하고 그래서 오직 주 안에서는 즐거워 하느니라.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다.
 
야고보서 1 2~4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믿음의 시련, 연단이 인내를 만들었는데 그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만 우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한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프랜시스가 레오 형제와 함께 했던 온전한 기쁨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왔는데 수년 동안 한 번도 이 자료를 사용한 적이
없는데 오늘 프랜시스의 온전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그 내용을 증거 하려 한다.
 
이 성 프랜시스는 800년이 넘던 1200년대 성자이다.
개신교에서도 존경하는 그런 성자이다.
 
성 프랜시스가 어느 추운 겨울날 레오 형제와 함께
빼루지아에서 아씨시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가다가
조금 앞서 가던 레오 형제를 불렀다.
 
“레오 형제여, 가령 작은 형제들이 가는 곳마다 성덕과
감화의 훌륭한 모법을 보여 준다 해도 그런 것이
완전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잘 기록해 놓으시오.”
조금 더 가다가
 
“레오 형제여, 작은 형제가 소경을 눈뜨게 하고 꼽추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쫒아내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고, 죽은 지
나흘 된 사람까지도 부활시킨다 할지라도, 그런 것이
완전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고 잘 기록해 놓으시오.”
조금 더 가다가
 
“레오 형제여, 만일 작은 형제가 모든 나라 말과 온갖 지식과
만 가지 책에 능통하고 미래 일뿐 아니라 인간 양심의
비밀까지 꿰뚫어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완전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잘 기록해 놓으시오.”
그리고 좀 더 가다가 성 프랜시스가,
 
“하나님의 어린 양인 레오 형제여, 만일 작은 형제가
천사들의 말을 하고, 별의 궤도와 약초의 효력을 알고
또 땅의 보물을 다 찾아내게 되고, 새와 물고기와
온갖 짐승, 사람, 돌, 초목의 뿌리와 물의 효능을 알고
있다 해도 그런 것이 완전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잘 기록해 놓으시오.”
좀 더 걸어가다가 다시,
 
“레오 형제여, 가령 작은 형제가 선교에 아주 능하여 이교도,
불신자들을 모두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이끌어 들인다 하더라도
잘 기록해 두시오. 그런 것이 완전한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거의 십리를 걸어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자
레오 형제는 몹시 놀라 “사부님, 그렇다면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성 프랜시스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비에 젖고, 추위에 얼고, 진창에 빠져 형편없이 되고,
배고파 기진맥진하여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에 도착해 수도원
문을 두드릴 때
문지기가 화를 내며 “당신들은 누구요?” 하고 묻고
그때 “당신들의 형제 두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면
문지기가 말하기를 “거짓말 말라. 너희들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속이고 가난한 사람이 구걸한 것을 빼앗아 먹는
두 명의 악당이지? 썩 물러가거라.” 하면서
문도 열어 주지 않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서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깥에서 쏟아지는 빗속에 우리를 밤중까지 내버려둘 때
 
그런 욕설, 인정 없는 무자비한 대우, 매정한 거절도 우리가
인내로써 달게 받고 그 사람과 맞서서 싸우거나 불평하지 않고
겸손히 애덕으로 ‘문지지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도록 하나님께서 시킨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레오 형제여, 그것이 바로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해 놓으시오.
그리고 우리가 끝내 문을 두드리면
 
문지기가 더 화를 내며 튀어나와 우리가 나쁜 불량배나 되듯이
욕설을 퍼붓고 뺨을 때려 내쫒으며
“여기서 썩 물러가지 못해? 이 더러운 도둑놈들아!
근처에 있는 나환자 치료소에나 찾아가!
여기서는 먹여주지도 재워주지도 않는다.” 하고 말하게 될 때
 
우리가 만약 애덕의 숭고한 정신에서 인내와 기쁨으로
이 모든 것을 달게 참아 받아낸다면,
레오 형제여, 그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해 놓으시오.
 
그리고 우리가 굶주림과 추위와 어둠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다시 문을 두드리고 울부짖으며 “제발 문 좀 열어 달라”고
애원할 때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 파렴치족들, 혼 좀 나봐라.”하고 고함치며
옹이가 가득 배인 몽둥이를 들고 나와 수도복의 모자를
잡아 쥐고는 우리를 땅에 내동댕이쳐 눈 속에 굴리며
몽둥이의 옹이로 사정없이 매질 한다고 할 때,
 
그래도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달게 참아 받고 복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즐거워한다면
레오 형제여, 그런 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해 놓으시오.
 
자 이제 결론을 들어보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친구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온갖 은총과
선물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것은 바로 자기를 눌러 이기고
고통, 모욕, 수치, 불쾌한 것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달게 참아 받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른 선물은 자랑거리로 삼을 것이 못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께서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고린도전서 4장 7절) 하셨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프랜시스는 완전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병을 고치고 천사의 말을 하고 많은 전도를 하고
많은 일을 해도 그것은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고
정말 그 비바람과 온갖 고통 속에서 매를 맞고 욕설을 듣는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편을 생각하며
그것을 사랑으로 참아내는 그것이 바로 완전한 기쁨이라고
그렇게 기록하라고 프랜시스는 교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고.
환란 중에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가야 할 신앙의 경지는
바로 그 자리까지 인 것이다.
 
온전한 기쁨을 야고보 사도는 요구하고 있다.
믿음의 시험이 아무리 와도 인내를 하면서 여러 가지
시험 속에서 온전히 기뻐하면 그때 너희가 온전해지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해주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설계도이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기뻐하며 사시기를 바란다.
 
시편 37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우리가 기뻐하며 살면 소원을 이루는 지름길이 거기에 있다.
 
잠언 17 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심령으로 근심을 하게 되면 뼈가 마르고
그래서 이것이 건강을 해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하늘의 기쁨을 소유했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마음의 즐거움을 가지고 나간다면
이것이 양약이 되지만 심령의 근심은 뼈로 상하게 하고
우리의 건강과 영육간의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지름길이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안에 기쁨의 끈을 두고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또 특별히 말씀과 기도로 충만하면서
또 주변의 영혼 하나가 죄 가운데 구원받으면서
이 천국의 구원을 함께 누리면서
이 놀라운 기쁨이 우리의 성장과 우리의 충만 속에서
점점 배가 되는 은혜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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