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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영혼의 감독자

by Andrew Y Lee 2021. 8. 21.
영혼의 감독자


베드로전서 2장24~25절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명칭이 많이 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다" 이렇게 표현을 하셨고
또 포도나무, 구세주, 메시아야, 임마누엘, 반석,
모퉁이 돌, 공중에 뜨인 돌, 흰 돌 돌 시리즈로 나가는
예수님의 명칭도 있다.


첫 열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마지막 아담 또는 둘째 사람 전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칭들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칭을 본문 가운데 나온 것처럼
"영혼의 목자, 감독되신 이" 라고 하였다.


이 "감독되신 이"를 여러 가지로 표현을 했는데
"영혼의 감독자" 라는 명칭으로 표현을 했다.


첫째 교훈은
베드로가 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목자, 우리의 감독자" 이시다는 것이다.


이 목자라고 하는 말은 양에 대해서 쓰는 말이다.
25에 보니까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우리는 다 양이다.


그래서 시편 2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 10 2~3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양 무리가 있는데 예수님이 목자만 문으로
돌아온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문지기가 그를 위하여 문을 열면
양은 그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서 인도한다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 10 7~12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예수님은 양의 문도 되시고 또 양의 목자,
특히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감독이란? 
사도행전 20 28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0장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유언적인 설교 내용인데
17절의 말씀을 보면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이 장로들이 다 오니까 18에 말씀하신다.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이 에베소에 장로들을 모아놓았고 그들에게 하는 말씀인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이 말은 그 장로들이 바로 교회
양떼를 위해서 "그들의 감독자다" 이런 말씀이다.


감리교나 루터교는 현재 교회 안에 가장 높은 교직자가
감독이다.


감리교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양떼를 감독하는 감독자
그래서 감독이라고 하는 직분을 써왔다.


카톨릭에서도 최고의 성직 계급이 주교인데
전에는 감독이라고 했다.


그래서 루터교 또는 감리교 천주교에서 이 말씀을 근거로
장로들을 감독자다 이런 말로 표현을 했다.


현재 교회 제도를 보면 이 감독인 장로가 두 종류이다.
치리만 하는 분을 이제 "치리 장로" 라고 하며
설교권을 가지고 있는 장로를 사실 목사라고 한다.
그래서 이 목회자가 감독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감독이라고 하는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어떤 일을 잘못이 없도록 보살피고 단속하는 사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


그래서 영화감독 그러면 제작자로부터 의뢰받은
시나리오를 토대로 등장인물을 캐스팅하고 촬영,
대본 작성, 제작, 스태프 구성, 로케이션 헌팅 등
모든 준비를 거쳐서 촬영, 녹음, 편집을 통하여
그 영화를 완성하는 사람을 영화감독이다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일을 잘못이 없도록 잘 보살피고 단속해서
그 일을 성취해 나가는 사람을 감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감독이라고 하는 말은 건축이나 교량, 다리, 길
이런 토목 분야에서도 쓰고 있다.
그래서 건축 현장의 감독이다 이런 말을 쓴다.


그럼 우리의 영혼의 목자가 되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양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인데
우리의 영혼의 감독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예수님이 길이신 것이다.


우리를 시온의 대로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이르도록
전에는 길을 잃은 양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길로 돌아와서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천성에 이르는
그 일의 그 길을 만들어주는 감독자다 그런 뜻이다.


가끔 길을 가다 보면 낭 떨어지기도 있고 강이 있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리를 놓아야 하고 교량을 놔야 되고 여러 가지
난공사 가운데서 그 길이 완성되어져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가 천성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완성시키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우리 영혼의 감독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3 2~6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모세는 구약에 이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충성했는데
집 맡은 그 집의 하인처럼 충성 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집 맡은 아들로 오셔서 충성을 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아들이다.
그 집을 짓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성을 했고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했고 그래서 우리 각자 속에
하나님이 집을 지으시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이것을 우리는 성전이라고도 표현한다.


세상에서 집을 짓고 빌딩을 지으면서 그것이 공사가
잘 완성되도록 현장의 감독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늘 내 영혼의 집과 내 영혼의 성전을 잘 건축하도록
그것을 잘 맡아서 하는 분이 우리 영혼의 감독자인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 예수님이 바로 우리 영혼의 집을 지어주신 감독자인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성전을 지으시는
그 성전의 감독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두 번째,
왜 그분이 우리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가 되셨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가운데 24 말씀에 보니까
"친이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리고 하반절에는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 그랬다.


우리의 죄를 담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마음에
하나님이 지은 성전을 건축할 수가 있게 됐고
하나님에 이르는 길을 갈 수가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담당했다 하는 말은 우리의 죄를 대속했다
그 말인 것이다.


이 시대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대속의 의미를 잘 모른다.
이 대속이라고 하는 것은 빚이 있으면 그 빚을 그대로
갚아줬다는 것이다.


천만원 빚이 있으면 천만원 빛을 갚아줬다는 것이다.
빚이 있기 때문에 노예 생활을 할 수밖에 없고
팔려갈 수밖에 없는데 그 빚을 대신 갚아줬다는 말이다.


이 죄의 삯은 무엇인가?
이건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고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인생인데
죄의 삯인 사망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지옥의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갈 그 지옥을
대신 감당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지옥을 면제받고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대속이라고 하는 말은 싸구려 같은 말이 아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지만 그 은혜는 공짜인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십자가에 대속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의 감독자가 되시고
우리의 영혼의 목자가 되실 수 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는데
죄와 병과 고통 사망 가운데 나음을 입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건데 우리를 다시 살게 하셨다.


이사야 53 4~6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저주다.


죄인들을 죽이는 그런 십자가였다.
그건 나무에 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서 죽는 것이
예수님이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하시는데
사실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신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이라고 하는 이 허물은
우리의 자범죄를 말한다.
 우리의 죄악은 7종 죄악성 원죄를 말한다.
나의 자범죄 때문에 나의 허물 때문에 그분이 찔렸고
우리의 원죄 7종 죄악성 때문에 그분이 상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 분에게 담당시키셨다.
이것이 대속이다.


우리는 거기에 손 하나 까딱 한 것도 없이
뭐 하나 도와준 것이 없지만 그 모든 죄를
그분이 담당하셨다.


우리의 허물이라는 자범죄와 우리의 원죄조차도
그 죄악을 전부 그분이 찔리고 그가 상하여서
그 모든 것을 그분이 담당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사야 53 7~8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 예수님이 곤욕과 신문을 당하고 끌려갔는데
아무도 그것이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인 줄로
깨닫지 못했다.
그 생각을 못했다.


내 백성의 허물 때문에 그가 곤욕을 당하고 신문을 당하고
끌려가는 건데 그 세대는 아무도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지고 죽는 것은
이제 마땅히 형벌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사야 53 12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서 사망에 이르게 하여
우리가 당 할 그 사망을 대신 받은 것이고
우리가 당할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인데
그 모든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면서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시고


저 사람은 죄 때문에 징벌 당하고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저 사람은 자기 잘못 때문에 저렇게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셨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도 거기에 있고
저와 여러분의 허물도 거기에 있는 것이고
우리의 죄악성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안에 우리의 모든 죄와 우리의 허물들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만 기도하셨겠는가?


지금도 우리 각자의 영혼을 위해서 그분은 기도하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지금도 기도하면서
우리 영혼의 목자가 되시고 영혼의 감독자가 되셔서
그 일을 감당하신다.


핏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에 그분은 넉넉히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감독자가 되셔서 우리 안에 모든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 나가시고
우리 안에 신령한 집을 지으시고 우리 안에 그 길을 완성해
가시는 목자와 감독자가 되신다.


세 번째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분이 우리의 영혼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의 감독자가
되셨는데 그럼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되겠는가?


세 번째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본문 말씀 24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저와 여분이 한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속하여
그 십자가에서 모든 은총을 준비해 놓으셨지만
이것은 객관적인 은총이다.


그럼 그 은총을 우리가 공급받아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시니라"
이건 미래다.


예수님 안에 연합돼 있고 객관적인 은총이 준비되어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 적용되어서 실제로 사는 역사는 궁극적으로
우리 미래의 구원의 완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서 현재적인 구원이 있지만
여전히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그 의에 대해여 사는 이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가야 할 길이다.


천로역정에 보면 장망성에 살던 기독도라고 하는 사람이
가만히 보니 이 죄악 세상은 망하는 세상이니까
누군가가 준 성경 한 권을 들고 이 성경을 따라서
영생을 얻으려고 집을 떠나 천성을 향해서 가게 된다.


그 천성이 완성이 될 때까지 그분이 영혼의 목자가 되고
감독자가 되셔서 우리 안에 그 일을 계속해서 도와주시고
역사하신다.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버리니까 그 아내와 자녀들도
기독도를 따라서 가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분이 그의 핏 값으로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우리는 지옥을 면제받았으니까
이제 천성을 해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려 하시니라"
그게 그분이 십자가 달리신 목적이고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는 길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그 집을 완성해야 되기 때문에 영혼의 감독자가 되신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이 문제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길 잃은 양처럼 전에는 죄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을 받지 못한, 출애굽하지 못한,
성령이 들어오지 않은 그 본래 원죄,
아담 이래로 자연적인 사람, 가만히 놔두면 죄와 정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자연인, 이 사람 자체를 성경에선
옛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겉사람이라고 한다.


성경은 육신이라고 하고 자기라고 하며
육성 또 우리의 자아라고도 한다. 
아담 이래로 유전적으로 성령 받지 못한 자연인을 말하고 있다.


로마서 8 2~11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9 말씀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많은 분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예수를 믿으면
그 믿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바로 들어오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


 로마서 8은 죄에서 해방이 되는 경지를 간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 하나님의 영이 먼저 마음속에 들어와서
죄 안에 살지 않고 의를 따라 사는 길을 부지런히 가서
죄에서 해방이 될 때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의 영 속에
들어온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이전에는 계속해서 바로 바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평안이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 앞에 굴복치 아니하고 할 수도 없고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하였다.


우리가 영적 할례 받고 득의가 돼서 의롭다고 인정되고
흰옷을 입고 인을 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이기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전부 같은 말이다.


로마서 8장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을
이렇게 여러 가지 경지로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초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죄로 인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의로 인하여 사는
그 단계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할 일이고
영혼의 목자가 되고 영혼의 감독자인 그분과
이 일을 이루어야 그의 핏 값이 헛되지 않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 사도 바울 조차도 이런 고백을 한다.
로마서 7 24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신약 성경의 절반을 썼던 사도 바울도 곤고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 고백을 하면서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죄의 삯은 사망인데 사도 바울 조차도 예수 믿고도
사망의 몸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죄를 짓기 때문에 그런데 사도 바울이 짓는 죄에는
육신의 표면적인 죄가 아니고 마음으로 짓는 죄를 말하고 있다.


마음으로 짓는 죄
로마서 7 8, 11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8절에서 말하는 죄,
11절에서 말하는 죄 이것은 7종 죄악성인 원죄를 말하고 있다.


내 속에 원죄 자체가 있는데 기회가 오면 죄를 짓게 되는데
그것은 나를 살려야 할 계명 때문에 내가 이 법에 저촉이 되어서
죄를 짓게 되니까 내 영혼이 죽게 된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깨닫게 된 것이 바로 17절에 있는 말씀이다.
로마서 7 17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나는 죄 짓기를 원치 않고 나는 죄 가운데 있기를 원치 않는데
기회만 되어지면 자동으로 그 원죄라고 하는 7종죄악성이
활동을 하면서 죄를 짓게 하는 그 죄 자체 죄악성
자체 때문에 탄식하는 것이다.


로마서 7 18~19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믿고 나서
악을 행하기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사랑하기를 원하는데
기회만 되어지면 법칙처럼 내 속에서 죄가 튀어나온다.
원죄가 아직도 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옛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탄식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로마서 7 20~23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내 마음에 두 가지의 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 법은 원칙인데 만유인력의 법칙이 뭔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지구의 중력이 그걸 끌어당기니까 저절로 떨어지는 것인데
이것이 법칙이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 마음의 법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데 나쁜 환경이 와서
기회가 오면 내 마음의 법대로 하지 못하고
내 속에 죄의 법칙이 있어서 죄가 나를 끌고 가게 된다.


이것이 육신의 싸움이다.
자꾸 나를 끌고 간다.
저절로 튀어나온다.
이것이 죄의 법칙이다.


그런데 죄를 짓게 되면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죄와 사망의 법이라 했다.
그런데 그 죄와 사망의 법이 로마서 8장에 와서는
해방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육신대로 생각하고 육신대로 끌려가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우리의 옛사람이
죄에 대해 죽어야 할 성질인데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기회만 오면 자꾸 나와서 나는 죄가 사망의 법칙으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데
고민하는 사람이 없다.
이 내면의 죄를 다루고 내면의 죄를 지적하면서
예수님이 "내가 이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왔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살인하는 것처럼 고민하고 회개하면서
그 죄에 대해서는 죽고 어떤 환경이 와도
의롭게만 살 수 있는 그 의에 살게 하려고
그분이 내 목자가 되시고 감독자가 돼서
나를 내 집을 내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주시고
그 길을 계속 만들어 주신다.


그분은 열심히 감독을 하시는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손바닥을 맞추면서 회개 철저히 하고
철저하게 이 죄에서 해방이 되어 보려고 하는
몸부림이 없으면 그 목자 되신 주님이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움직여주지 않는데 어떻게 감독을 하고
어떻게 길을 만들겠는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주인이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법 앞에
이 말씀의 법을 비춰보니까
우리는 한량없는 죄인인 것을 우리는 다 깨닫는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택정하셔서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 성령을 따라서
우리는 성령이 감화 감동하는 걸 알아 회개하면서
이제는 죄에 대해서 살지 않고 의에 대해서 사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앙의 본문이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는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인데 이것을 망각하고 신앙 생활하면
평생을 예수님 믿고 허송세월하는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겠다.
예수님은 우리의 메시아가 되시고 우리의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의 모퉁잇돌이 되시고 많은 명칭으로 우리에게 오시는데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목자이시고
감독 대신 감독자라고 우리에게 고백을 한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대신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목자가 되고 감독자가 되셔서 이제는 내 안에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몸소 만들어 가시는
감독이시고 내 영혼의 집을 짓고 내 안에 성전을
건축하도록 감독하시는 영혼의 감독자인 것이다.


이러한 감독자 밑에서 이러한 목자 밑에서
우리가 전에는 죄에 대해서 이렇게 살았던 인생이지만
이제는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고 의에 대해서 사는 자가 되도록
어떤 한경이 와도 하나님의 의만 드러날 수 있는
로마서 8장 경지에 이렇게 신앙의 목표를 가지고 달려 갈 때
궁극적인 미래의 부름이 우리 안에 이루어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영혼을 살리고
그 예수님과 연합했기 때문에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죽을 몸 자체도 함께 살아나서 그 부활을 이루어서
영육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목자 되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감독자이신 그분에게
감사드리면서 주님의 목자, 감독자인 그분 앞에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이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의 영혼의 성장이 아름답게 이루어져서
구원의 이르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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