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분별력과 결단력

by Andrew Y Lee 2021. 7. 19.
분별력과 결단력
 
누가복은 17장 26~37절
 
 
어린 시절에 학교에 다닐때 60년 전에는
지능 지수가 좋아야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바로 지능 검사를 하였다.
 
공식적으로는 125가 나왔고
비공식적으로는  140이 나왔다.
그런데 나중에 목회자가 되고 나서 보니까
유대인의 랍비는 머리 좋은 사람은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머리가 좋으면 인간의 생각이 앞서가기 때문에
랍비들은 머리 좋은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머리 좋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지수가 무엇인가?
살아가는 힘, 능력의 수치이다.
머리가 좋아야 살아가는 힘 능력이 우세할 수 있기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지나서 우리가 자녀들을 키울 때는
EQ  감성 지수가 얼마냐?
이제 감성이 더 우수해야 살아갈 힘이 많게 된다.
 
그러더니 좀 변해서 시대가 바뀌니까 이번에
영성 지수가 얼마냐?
도덕 지수가 얼마냐?
사회성 지수가 얼마냐?
이런 다양한 말들이 나왔다.
 
회사에서도 사람을 채용할 때
직무 지수를 보지 않는다.
영성 지수가 얼마인지?
사회성 지수가 얼마인지?
도덕 지수가 얼마인지?
 
그런데 최근에 또 새로운 말이 등장을 했는데
역경지수가 얼마냐?
역경지수는 역경이 왔을 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얼마인지 그 측량하는 지수가
필요한 시대가 있다는 것이다.
 
풍요한 시대에 웬 역경지수냐?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경지수는 역경을 이기는 힘,
역경 가운데 승리하는 그런 힘인데
이 역경지수는 풍요 지수와 같은 말이다.
 
무슨 말이냐면 최근에 아이들은 역경을
잘 모르고 자라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대에 군대의 양상을 보면 옛날 군대 같지 않다.
 
젊은이들이 어려운 일을 하지 못하니까
풍요한 시대에 살아가는 아이들은
역경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감사하지도 않는다.
겸손하지도 않고 더 나가서는
남의 역경을 이해할 수도 없다.
 
몇 번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풍요한 것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풍요한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고
부패하고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경을 만나게 되면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되고 감사한 마음이 있고 
그래서 풍요를 만날 때 그 역경지수만큼
풍요를 누릴 수가 있게 된다.
 
결국 역경지수는 곧 풍경 지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 11~2 고백을 한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바울은 엘리트였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선교를 위해서 배고픔도 당하고 비천한 일도 당하고
궁핍도 여러 가지 형편을 당했는데 그 모든 것에
자족할 줄 알게 되었다.
 
어떤 환경 어떤 곳에서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고
다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러한 역경을 겪지 못했으면
그 모든 풍요 속에 어떻게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었는가?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자족하는 마음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될 줄로 믿는다.
 
누구에게나 역경은 다가오지만 역경을 어떻게 대하느냐
거기에 따라서 역경이 풍요와 축복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역경이 불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역경에 대처하는 힘 역경 지수가 높아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됐다.
 
본문을 통해서 받고자 하는 교훈은
 
첫 번째,
인자의 때라고 하는 역경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하는 것이다.
본문 가운데 여러 번 말씀이 나오고 있다.
 
누가복음 17 26,30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 인자의 때 이런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 시대마다 지수가 바뀌는 것은 그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역경지수란 말이 나왔다 하는 그 의미는 역경의
시대가 다가온다는 것이다.
좀비들이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런 좀비들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그런 때가 임박했다는 것이고
아이들의 장난감에도 여러 가지 괴물과 이상한 것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런 것도 영적인 것들이 반영 되어져
나타나는 것들이다.
 
결국 그 시대의 흐름 속에 있는 이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래서 역경지수가 등장했다는 말은
역경이 가까이 왔다는 그런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자의 때"라 그랬다.
누가복음 17 22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여기는 인자의 날이라고 하셨는데 인자의 날이라고
하는 그때가 이르는데 제자들은 볼 수 없다 그랬다.
 
누가복음17 24~25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말하고 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인자의 날, 인자의 때에
그때가 분명히 오는데 먼저는 많은 고난을 받고
이 세대에서 버림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때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는 인자의 날,
자기 날, 인자의 때가 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인자의 때가 바로 노아의 때와 같다.
롯의 때와 같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럼 이 노아의 롯의 때는 무엇인가?
그때는 바로 심판의 때요 구원의 때인 것이다.
 
죄의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노아의 때로 죄가 관영하여 심판했고
소돔 고모라도 동성애로 말미암아 그 죄가
관영해서 하나님이 심판하는 때였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노아와 롯은 구원을 받은 때이다.
이 심판과 구원은 같은 때에 이루어진다.
심판과 구원 그때가 인자일 때이다.
 
누가복음 17 37
"37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이 부분은 많은 주석을 보면 이 구절을 난제 구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지상 재림하는 모습을 보면 뜻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19 17~18
"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예수님이 지상재림하면서 아마겟돈에 불러 모아놓고
많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을 전부 죽이는데 
그래서 이때에 많은 새들을 초청해서 사람 고기를 먹게 하는
그 장면이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리라"
이 말씀이다.
 
결국 누가복음 17장에 있는 노아와 롯의 때
심판의 때가 7년 대환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1 35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환란이라고 나와 있다.
 
이 역경의 시대에 인자의 때가 다가온다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살아가야 한다.
 
밴 사무엘이라고 하는 유대의 랍비가 탈무드와
성경을 가지고 예언한 것을 토대로 제가 2012년에
설교한 내용이 있었다.
 
이 밴사무엘이라고 하는 랍비는 독일에서 살았던
유대인이었는데 이분은 1217년에 죽었다.
성경을 가지고 예언을 했는데 8번의 희년이 지나면
예루살렘이 이방 나라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그런 예언을 했다.
 
그런데 이분이 죽고 나서 정확하게 300년 뒤에
1517년부터 1917년까지 8번의 희년이면 400년이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은 오트만트루크에 의해 400년
동안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또 예언하기를 9번째 희년 1917년부터
1967년까지인데 그때는 그 지역이 누구의 땅도
아닌 땅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로 1917년 오트만트루크가
망하면서 영국이 예루살렘을 위임 통치 하면서
어느 누구에 땅도 되지 않았다.
 
마지막 10번째 희년이 되면 1967년에서 2017년이다.
그때 예루살렘이 유대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선포를 했다.
그런데 실제 2017년이 다 가기 전에 2017년 12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선언해 버렸다.
 
그러면서 그 밴사무엘은 이렇게 10번의 희년을
지나가면 이때부터 종말의 시나리오가 다가올 것이다.
이런 선언을 했는데 그 앞에 모든 희년에 대한 예언이
다 맞았다면 이 시대가 정말 종말의 시간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자의 때라고 하는 종말의 시나리오가
다가오고 역경지수가 필요한 이런 시대를 우리가
만나고 있다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한 교훈이다.
 
두 번째,
그럼 인자의 때 이렇게 역경의 때가 오는데
이 심판과 구원의 시대에 그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왜 하나님이 역경을 주시고 왜 심판과 구원을
하시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2 5~9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인자의 때와 노아의 때와 같고 소돔 고모라가 망한
롯의 때와 같다고 했는데 이것이 경건한 자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심판하시고 부활하시는 교훈이라고 하는
샘플이라는 것이다.
 
노아의 때는 물로 심판하였고 소돔 고모라 때는
불과 유황으로 그 성을 재가 되게 불로 태웠는데
이것이 후세의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게 교훈을
삼으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니 경건한 자와 경건치 않은 자를 갈라내기
위해서 인자의 때가 필요하다.
 
7년 대환란이 필요한 것은 경건한 자와 경건치
않는 자를 갈라놓는 것이다.
 
결국 경건치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고 경건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때고 회복의 때이다.
 
베드로후서 2 7~8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그러니까 경건하고 경건치 않은 기준이 무엇이냐면
이 죄악 세상에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듣고 마음이
상해가는 것이다.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다.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이 경건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들여 헌신하여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 경건인
것이다.
 
그래서 예배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경건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심판의 때에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노아의 때에 죄가 세상에 관영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데 창세기 6장에 보니까 노아에게는
은혜를 주셨더라 하였다.
 
그럼 이 은혜가 무슨 은혜인가?
물로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이 믿어지는 은혜
마음에 믿어지는 것 그래서 배를 만들게 되는 순종의 은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또 롯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에 아픔을 가지고 무법한 행실 때문에 고통당할 때
하나님이 그 의로운 롯을 죄악세상에서 건져내시는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그 시대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
 
이 역경의 시대에 심판과 구원의 시대가 올 때
우리는 경건한 자의 반열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야 한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는 역경의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이 분별력과 결단력이라는 것이다.
 
분별력은 뭔가?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이다.
시대를 아는 것이고 시대를 분별하는 것이다.
시대를 알았기 때문에 나아갈 길도 알게 된다.
방향감각이 생기는 것이다.
먼저 알아야 되는 것은 이 분별과 비판은 다르다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7 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하는 것은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면에 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선과 악을
구분하여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비판은 정죄하는 것이지만 분별은 고치기 위해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정죄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고치기 위해서
선과 악을 드러내서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분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잘 깨달아야한다.
우리에게 분별이 필요하다.
 
선으로 가야 되고 악으로 가지 말아야 되기 때문에
이 분별이 필요한데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어떻게 우리에게 생기는지 말씀을 보겠다.
 
히브리서 5 13~14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신앙생활은 젖을 먹는 어린아이가 있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자가 있다.
 
신앙이 성숙하고 어른과 같이 장성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 장성한 사람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이 분별력이 연단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연단 곧 역경이다.
거칠고 사나운 역경이라고 하는 어려운 환경을 많이
지나야 연단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는 자세 분별력이
이때 나타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그랬다.
이 지각이 곧 지성이다.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먼저 지성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지성 이성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그것을 분별하는
훈련했다는 것이다.
 
연단의 과정 속에 어려움을 겪는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하여 따라가니까 연단이 되어 지고
그때 선악이 분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 장성한 자가 된다.
 
이 분별력은 우리의 지성 속에 세워지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기준을 통해서 훈련받고
지켜나가면서 우리는 점점점 장성하게 되고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모형적인 진리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까지 가서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을
짓는 이것을 계속 제가 강조를 하고 있다.
 
모형적인 진리 이것이 하나님이 정한 인류 역사의
스케줄이다.
개인 역사의 개인 성장 과정의 스케줄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어느 개인과 인류에게 이것을
초월하지 않으신다.
 
야곱이 사닥다리 그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꿈을 꾸었을 때 그 사닥다리가 야곱이 올라가야 될
완전에까지의 길이고
그것이 한 칸 한 칸 차례대로 올라가야지
두 칸을 뛰어넘을 수 없고 초월 할 수 없다.
한 칸 한 칸 차례대로 완전에까지 올라가야 한다.
 
골로새서 1 28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혹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이 완전에 이르도록 사도바울이 전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몸의 어느 지체로 구원을 받든 발바닥이 되든
머리가 되던 어느 지체든 몸의 지체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가 구원받을 때
어느 지체든지 다 완전히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 되어가는 모든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이 되어지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다 모형적인
진리에 기준해서 만들어 받고 계신다.
 
우리가 지성이 발달하고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모형적인 진리에 기준하여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우리에게 분별력이 생기게 된다.
 
그래야 누구를 상담해도 거기에 기준해서 상담할 수가 있고
인류 역사 되어지는 과정도 그걸 기준해서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분별력을 가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모형적인
진리를 잘 무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성을 중심으로 해서 분별력이 생기도록
선악을 분별하도록 우리를 연단하신다.
또 양심도 그 선악을 분별하지만 똑같은 기능인데
이것도 연단을 통해서 자꾸 받아야 한다.
 
"아! 내가 이렇게 악을 행하니까 하나님께 혼났구나!"
"하나님이 이걸 싫어하는구나" 이렇게 경험적인 것을
통해서 점점점 선을 행하게 되면서 양심도 밝아지는 것이다.
 
그 다음에 결단력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의지의 작용인 것이다.
내가 양심으로 깨달아서 "아 이게 선이구나"
내가 지성으로 알게 돼서 "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구나" 이 지성과 양심이 연단을
통해서 밝아지면 어떻게 행동하는 걸 알게 된다.
 
사람이 그때 실천하는 기능이 의지라고 한다.
그 마지막 싸움은 결단력의 싸움이다.
 
본문 가운데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
이런 말씀이 32에 나와 있다.
 
창세기 19 14
"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롯의 처는 지성으로 얼마나 알았는지
양심으로 얼마나 알았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으니까 우리가 알 수가 없다.
또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얼마만큼 깨닫고 얼마만큼 분별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왔기 때문에 소금 기둥이 돼버렸다.
 
소금이 좋은 것이지만 그 맛을 잃어버리면 밟혀 버리우는
것처럼 롯과 그 가정은 그 시대의 샘플이고
경건한 자를 구원 하나님의 샘플인데
뒤를 돌아보면서 모든 걸 다 잃어버리고 만
그런 샘플이 되고 말았다.
 
오늘 본문 가운데
누가복음 17 34~35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둘 중 한 명이 올라가고 버림당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데려가는 사람도 있고
버려둠을 당할 사람도 있다 이런 얘기다.
 
그럼 여기서 데려가는 사람은 누구겠는가?
분별력과 결단력이 아주 잘 완성이 되어서
모든 때를 분별하여 거기에 맞는 결단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로 환란의 때를 면제받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갖추게 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분별력과 결단들이 말세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자
인류 역사에 나타나는 천년왕국이라고 하는
이 메시아 왕국!
 
죄도 없고 고통도 없고 모든 것을 다 만족하는
그런 나라 이 메시야 나라가 온 세상에
나타나는데 왜 7년 대환란을 지나게 하겠는가?
 
역경을 지나고 나야 그 풍요 속에서 만족할
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연단 받은 자유 의지가 아니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는
처음부터 세상을 천년왕국과 같이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서
질병도 없고 고통도 없고 이런 세상으로 만들어 갔으면
하나님께 감사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역경을 지나갔기 때문에 환란을 지나갔기 때문에
풍요에 대해서 사도바울처럼 일체의 비결을 가지고
자족하고 거기서 풍요의 지수가 나오는 것이지
처음부터 세상을 죄가 없이 만들고 처음부터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렇게 만들어놓는 세상이라면 거기서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누가 거기에 대해서
만족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구원의 섭리는 이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고난과 왜 불행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의 의도 자체를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죄악 세상의 역경과 환란을 통해서 양심과 지성도
깨끗해지고 하나님 말씀으로 채워지고 연단을 받아서
그 의지도 하나님만 순종하는 의지를 갖추어서
천년왕국에 들여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구원의 섭리이고
하나님의 의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역경지수가 필요하다.
 
1992년 휴거소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내가 메시야다 하면서 이단들이 이렇게 성행하면서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거부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 시대가 당하는 징조를 우리는 볼 줄 알아야 한다.
 
밴 사무엘 그 랍비가 말한 것처럼 2017년 마지막
10번째 희년이 지나간 그때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땅이 되어 지는것을 트럼프가 선언했다.
 
대사관도 다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레위기 25장 보면
나팔을 불면서 그러니까 트럼프가 나타나
나팔을 불면서 희년이 선포된 것이다.
 
2017년 그때부터 종말의 시나리오가 시작 되었다.
지금 백신 문제 온 세상의 문제가 그 종말의
시나리오 안에서 지금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럼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분별 하겠는가?
모형적인 진리를 가지고 시대를 잘 분별할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분별력을 더하시고
더 나가서 결단력을 더하셔서 점점점 우리의
역경지수가 높아져가고 어떠한 환란이 와도
거기에 자족할 수 있고 사도바울처럼 일체의
비결을 가지고 우리를 어느 환경을 만나도
그 순간에 사랑만 나타나고 어느 환경을 만나도
하나님 말씀대로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할 수 있는
이러한 영성의 사람, 영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에게 환란이 있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지만 영적인 역동의 시대에
꼭 필요한 분별력과 결단력을 갖춘 여러분 되시고
인자의 때라고 하는 역경의 시대가 우리 발밑에
다가와 있다 하는 사실을 깨닫고 역경지수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
하는 걸 깨달으셔서 여러분이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우리의 역경에 승리하시고 역경 지수가 높아져서
또 그로 말미암아 풍요지수도 풍족해져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풍요를 누리고 만족할 수 있는
귀한 여러분 되시기를
이 아침에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말씀의 향연 > 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원하는 자  (0) 2021.08.18
하나님의 도움  (0) 2021.08.18
주님 생각하며 바라보자  (0) 2021.07.19
호밥의 눈이 주는 교훈  (1) 2021.07.10
앙망하는 자  (0) 2021.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