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망하는 자 이사야 40장 27~31절 2021년 한 해에도 절반을 지나갔다. 월요일부터 또 새 한 주 7월 달로 후반기를 우리가 지나가게 되는데 7월은 주보에 나와 있는 대로 "주님 앙망의 달"로 보내기로 하였다. 오늘 말씀 제목은 "앙망하는 자" 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보면 아주 좋은 말씀이 있다.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얼마나 좋은 말씀인가?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항상 기뻐하십니까?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가? 왜 항상 기뻐할 수가 없는지 왜 쉬지 않고 기도할 수가 없는지? 범사에 감사할 수 없는지? 이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직면한 어려움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마 대답을 할 것이다. "항상 기뻐하기를 원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에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되는데 어려운 현실 때문에 할 수 없고 범사에 감사해야 되는데 어려운 현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이렇게 대부분 대답 할 것이다. 인생은 해결할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매 순간의 현실에서 일어서느냐? 일어설 수 없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유도를 배우는 사람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무엇일까? 유도를 배울 때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낙법이라고 한다. 상대가 기술을 걸어서 넘어지면 일어나야 다시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과적으로 넘어져야 된다. 다치면 시합을 할 수 없고 싸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치지 않고 효과적으로 잘 넘어지고 다시 즉시 일어나서 싸울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낙법이 유도의 기본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유도를 배운 사람은 낙법을 먼저 배우게 된다. 축구 선수가 골을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태클을 어떻게 피하는가? 상대방이 태클을 걸어올 때 그 태클을 잘 피하지 못하면 부상을 당한다.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 스카우트 해 와서도 부상을 당해버리면 선수로서 값어치가 없게 된다. 꼴을 많이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태클을 잘 처리하는 선수 그 선수가 진짜 훌륭한 선수라고 말할 수 있다. 이사야 40장 본문을 통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샘플의 나라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또 깨어지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 이것이 성경 이야기이다. 샘플로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이야기,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이야기 그래서 본문 가운데 다시 일어서는 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이다. 여러분 이제 여러 가지 어려운 현실 때문에 나는 항상 기뻐할 수가 없다고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없다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한다고 이게 하나님 뜻인데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마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워서 오늘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시기 바란다. 쉬지 않고 기도하시기 바란다. 범사에 감사하시길 바란다. 첫 번째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을 한번 살펴보겠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30여 년 동안 포로 생활 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했던 기간이 이사야 때이다. 이 포로 생활을 하니까 얼마나 우울하겠나? 낙심하고 의기소침하게 된다. 포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정치 경제 종교 전부기 문제 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포로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이스라엘의 현실이 이사야 입장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사야 1장 4절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사야 1장 2절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민족을 택하시고 자식처럼 양육을 했는데 그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다는 것,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그 이스라엘은 주인 된 하나님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 못했다. 결국 이사야 1장 5~6절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님께 매를 맞아서 온 몸이 다 상처인데 그걸 싸매고 치료해주지도 않는다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사야 1장 11~13절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성막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마당만 밟고 가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예배한다고 하나님께 제물을 가지고 찾아오지만 그것이 전부 헛된 것이고 하나님에겐 오히려 이것이 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종교의 현실이었다. 종교가 타락하고 경치, 정치가 다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사야 40장 1~2절 "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그렇게 하나님앞에 제물을 제대로 드리지 못했고 정치 경제가 다 문제 투성이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포로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복역의 때가 끝나서 그 포로 생활이 끝날 때가 와서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말씀하셨다. 이것이 오늘 이사야 40장의 본문의 내용이다. 두 번째 인생들이 어려울 때 내 사정을 하나님이 모른다고 내 원통함을 수리함을 받지 못한다고 대부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본문 가운데 이사야 40장 27절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어려운 문제를 당하면 하나님은 내 사정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어디 가셨나? 살아 계신다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대부분 이런 원망 불평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는 분이다. 우리의 원통함을 전부 아시는 분이시다. 이어서 이사야 40장 28절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원하신분임을 믿으십니까?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계속된다는 우리의 개념이 아니고 현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저와 여러분도 영원한 존재이다. 오늘이라고 하는 이 현재가 계속 끝없이 시작되는 영원이다. 죽음은 우리의 영원을 막지 못한다. 우리의 상태만 변화가 된다. 죽음이라는 상태가 왔지만 이제 다시 부활의 상태가 오고 계속해서 우리의 상태가 변화되면서 이 현재가 계속되는 것을 영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분 다만 우리는 그 앞에서 상태만 변하게 된다. 어제의 상태하고 오늘의 상태가 다르다. 내일 상태도 또 다르다. 죽음이 와도 상태가 바뀌지만 또 계속해서 우리는 부활체를 입고 상태만 변하게 된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에 주방 일을 하면 얼마나 피곤한가? 직장 다녀오면 얼마나 피곤한가?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이것 때문에 피곤한 분이 아니시다. 영으로 계신 분이고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피곤한 분이 아니시다. 왜 우리 사정을 모르겠는가? 나는 너무 피곤해 그 사람 신경 쓸 수가 없어 이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알고 우리의 모든 형편을 다 알고 계신 분이시다. 요한계시록 2장 18절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나오신다. x레이 광선처럼 모든 것을 투사하여 볼 수 있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님이시다. 육신을 입고 온 예수님도 그 눈이 불꽃같아 모든 인생들의 형편 처지를 다 꿰뚫어보고 계시는데 육신이 없는 하나님은 얼마나 더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자녀를 키워봤다면 자녀가 병들고 힘들어 할 때 얼마나 부모의 마음이 아프겠는가? 밤새 그 자녀를 지키면서 신음소리를 들을 때 대신 아파주고 싶은 게 부모의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도 바로 우리의 신음까지 다 들으시고 아파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요한계시록에 4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입신하여 하늘에 가보니까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구약 시대의 이긴 자들 24장로들이 있는데 그 24장로는 시간을 지배하며 하나님의 비서관 노릇을 하는 분들이다. 1년 절기는 24절기이고 하루는 24시간 이다. 시간을 관장하는 분들이 24장로들이다. 또 네 생물이 있는데 눈이 가득해서 천상천하의 모든 생물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들을 꿰뚫어 본다. 이런 비서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무엇인들 모르겠는가? 무엇인들 할 수가 없겠는가? 시간을 지배하고 천상천하의 모든 생물체를 전부 이렇게 관리하고 다 하시는 분이시다. 세 번째 이사야 40장 29~30절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우리가 이렇게 인생 가운데 여러 가지 피곤하고 어렵지만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쳐 올라가고 다름 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 다시 일어서는 비결이 무엇일까? 이것이 31절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다.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날로 새 힘을 더 받고 독수리처럼 날개 쳐 올라가고 달려가도 걸어가도 피곤치 않으면서 그 하나님 능력이 임하게 된다. 항상 새롭게 일어날 수가 있다. 앙망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그래서 이 앙망이라고 하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를 좀 생각하면서 우리가 함께 은혜를 나눠보려고 한다. 앙망 한다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가 살펴보면 한자로 그대로 본다면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앙망한다. 바라보는데 소망을 가지고 기대를 가지고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과 똑같이 앙망이라고 하는 언어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제일 먼저는 창세기 15장 6절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을 따라 나선지 10년이 돼도 하나님의 자녀를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면서 "네 몸에서 날 후사가 이렇게 많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이 이것을 믿었다 이 "믿었다" 하는 말이 바로 "신뢰했다" 라는 말이다.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라는 뜻이다. 욥기 13장 15절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욥이 "나의 재산을 다 털어가고 자녀도 다 죽고 나의 몸도 치신 이런 가운데에서도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믿는다는 개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욥은 "나는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은 나를 죽여도 나는 그분을 신뢰하고 나는 그분을 따르겠다" 고 말한다. 욥은 주신 것도 빼앗은 것도 하나님이시기에 원망 불평을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 이것이 앙망의 원어적인 의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말리브에 있는 패더라인 대학교에서 졸업식이 되었는데 백 명이 학사 학위를 받으면서 졸업식을 하는데 졸업생의 평균 나이가 40세 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많이 와 공부를 해서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제일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 67세 할머니였다. 자녀가 10명 손자 손녀가 27명이었다. 이 67세 할머니가 대학을 졸업하게 되니까 많은 손자 손녀 자녀들 다 왔다. 졸업식이 끝나고 나서 자녀들이 와서 "엄마 드디어 해냈군요. 수고했어요." "할머니 성공했어요" 하면서 다 축하를 해주는데 그 67세의 할머니가 졸업식이 다 끝나자마자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만약에 믿음을 심어주지 않았다면 만약에 하나님이 내가 좌절할 때마다 새 힘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시작하자마자 포기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좌절하지 않도록 새 힘을 주고 믿음을 줬기 때문에 4년 동안 공부를 잘 마칠 수가 있었다" 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이제 바라본다는 것이 영어로는 "Wait 기다리다"라는 뜻과 같은 말이다. 한 개의 밧줄을 만들어야 하는데 밧줄이 굵을수록 튼튼하다. 배에서 쓰는 밧줄은 엄청 굵다. 산을 올라갈 때 구조용 밧줄도 튼튼하고 굵다. 이 모든 밧줄이 지극히 약하고 작은 실오라기 하나하나가 뭉쳐져서 되어 진 사실이라는 것이다. 작은 실 하나가 여러 겹으로 묶여져서 하나의 줄 되고 또 그것이 하나로 묶여져서 든든한 밧줄이 된다. 옛날에 줄이 없을 때 새끼를 여러 번 꼬아서 새끼줄을 만들어 이런 저런 줄로 사용하였다. 아무 힘이 없는 가느다란 줄은 하나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두 개가 모여지고 세 개가 모여지고 여러 개가 모여서 작은 줄이 되고 또 그것을 모아서 굵은 밧줄이 끊어지지 않는 그런 밧줄이 된다. 그 실오라기 하나하나가 매 순간에 나의 믿음이다. 그 실오라기 하나가 매 순간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칭의를 받고 실제 득의를 얻을 때 100세에 이삭을 얻을 때까지 16년의 세월을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좌절이 올 때 그 믿음이 쇠하지 아니하고 그 많은 세월을 기다리며 그분이 아들 주실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 앙망이라는 것이다. 밧줄을 엮듯이 실오라기 하나하나를 모아서 굵은 줄을 만드는 원리와 똑같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매 순간에 어떤 환경이든지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그 믿음이 쇠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앙망이다. 나의 구속의 줄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고 응답의 줄이 이렇게 만들어지게 된다.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응답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바라보면서 실오라기 하나하나가 묶어져서 줄이 만들어져 밧줄을 만들듯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 구원의 줄 이렇게 내려온다. 응답의 줄이 이렇게 내려온다. 2. 앙망이라고 하는 원어적인 의미는 시편 37편 3절 "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이 의뢰한다고 하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레스링 선수가 시합을 하면서 상대방을 들어서 던졌다." 이런 의미이다. 레스링 하면서 상대방을 던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공격을 받고 내가 죽고 내가 지게 된다. 승패가 갈리게 된다. 상대방을 어떻게 해서든지 들어서 밀치고 던져버려야 한다. 이것이 원어적인 의미인데 그 의미가 뭐냐 하면 나의 이 모든 문제와 무거운 짐을 다 예수님께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상대방 선수를 잡아서 던지는 것처럼 나의 모든 무거운 짐들과 나의 문제를 들어서 예수님 편에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럼 문제는 내 손에 없게 된다. 모두 예수님께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앙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맡기는 것이다. 던저버렸기에 내 손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 예수님께 던져버리고 하나님께 던져버리시길 바란다. 3. 시편 57편 1절 "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피하리이다" 이런 말이 있는데. 이것이 원어 적으로 뭐냐 하면 "토끼처럼 달아나다" 토끼는 아래서 위로 갈 때 잘 뛸까? 위에서 밑으로 내려올 때 잘 뛸까? 언덕으로 올라갈 때 토끼는 잘 뛴다. 토끼몰이 할 때 산으로 올라가는 토끼를 당하지 못한다. 토끼는 아래로 뛰는 걸 잘 못해서 아래로 뛰어 내려가다 넘어지고 만다. 토끼가 사람과 짐승들이 몰려오니까 잡히게 된다. 토끼는 자기가 힘이 없기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냥 무작정 도망간다. 피할 수밖에 없다. 잘 뛰는 언덕위로 도망가다가 또 언덕 밑에 도망가다가 사방으로 쫓기다가 이제는 기진맥진해서 잡을 먹히려는 그 순간에 은밀한 바위틈이 보여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 바위틈으로 피했다는 것이 앙망이라는 것이다. 아가서 2장 14절 "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비둘기도 힘이 없다. 낭떨어지 밑에 어떤 짐승에 올라오겠는가? "은밀하게 갈라진 바위 틈속에 숨어 있는 나의 비들기야" 이곳으로 피했기 때문에 절대 안전하다. 시편 18편 1~2절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이 나의 요새시다. 하나님 나의 성채이시다. 피난처이시다. 그분이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뿌리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수많은 원수가 나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환경이 올 때 내가 토끼처럼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는 그때에 은밀한 바위틈인 예수님 안으로 숨어 들어오는 것이 진짜 피하는 것이다. 그 바위틈에 들어가면 어떤 사나운 짐승이 잡을 수가 있겠나? 악령이 내 환경의 배후에서 역사하지만 예수님 안에 숨어버리고 예수님 안에 피했다면 아무도 건들 수가 없다. 이것이 앙망이다. 67세 된 그 할머니가 목사님을 손을 붙잡고 "나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않으셨다면 나의 하나님이 좌절할 때마다 나에게 새 힘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시작하자마자 포기했을 겁니다." 이 고백이 바로 앙망이다. 매순간 어려움이 올 때마다 실 한오라기로 밧줄을 엮는 것처럼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그 분께 피하고 그 분께 기도하고 토끼가 위기를 만날 때마다 바위틈에 들어가서 주님을 의지하고 레스링 선수가 상대방 선수를 들어 던지는 것처럼 그 할머니에게 모든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건강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이 이 모든 문제를 다 하나님께 던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바위틈으로 숨어버리고 매일매일 믿음을 가지고 그 길에서 좌절하지 않고 가는 이것이 앙망이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주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굵은 밧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절대 믿음을 가지고 절대 신뢰하면서 그것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의 피난처인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그분에게 피해야 한다. 문제를 레스링 선수처럼 주님께 던져버리면서 가는 것이 앙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앙망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새 힘을 얻으리라"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한 번 날개 짓 할 때 다시 새 힘을 얻지 않으면 어떻게 날개를 또 치겠나? 날개를 칠 때마다 새 힘을 얻어야 한다. 여러분의 영적 성숙이 바로 이런 원리이다. 어떠한 문제를 당할 때 그 문제를 믿음으로 잘 맡기고 주님께 피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면서 날개 짓을 한 번 했다면 새 힘을 줘서 다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높이 올라갈 수 있다. 날개 짓을 할 힘을 안 주면 어떻게 올라갈 수가 있겠나?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것이 오늘 하루에 만보를 걷겠다는 그런 걸음 거리가 아니다. 내가 영적으로 달려가더라고 내가 영적으로 걸어가더라도 어떤 때는 걸어가고 어떤 때는 우리가 달려간다. 천로역정에 보면 간난산에 올라가는 기독도가 바로 이렇다. 간난산에 올라가기가 험한데 처음에는 달려가고 그러다가 힘이 들면 걸어가다가 나중에는 기어서 올라간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이렇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아주 용감하게 막 달려간다. 철야하고 금식하고 열심히 달려간다. 그러다가 좀 힘들면 걸어가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기어 갈 때도 있게 된다. 우리가 영적으로 달려갈 때 곤비치 않게 해주고 걸어갈 때 피곤치 않게 해주겠다. 어떠한 영적인 상태로 가더라도 하나님이 새 힘을 줘서 갈 수 있게 도와주시겠다는 것이다. 다시 일어서서 가게 해주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서 또 가게 해주고 이사야 40장 29~31절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소년은 영적으로 아이를 말한다. 영적인 아이들도 신앙생활을 하면 피곤하고 곤비할 때도 있고 장정 이제 청년이 되고 좀 더 신앙이 성장해도 또 넘어질 때도 있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앙망하는 자에게는 계속해서 갈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이것이 앙망하는 자에게 주는 축복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샘플로 삼으셔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포로 생활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을 거역하는 순간에 우리는 영적으로 포로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세상에 포로가 되고 술에 포로가 되고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얼마나 포로 되는 게 많은가?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복역의 때가 끝나고 영적 싸움이 끝나는 내 사정을 하나님이 모른다고 내 형편 처지를 모른다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대로 우리를 축복하시고 이 약속의 모든 말씀대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로 이렇게 믿는다. 7월 이후에 마지막 하반기 여호와를 앙망하는 삶을 통해서 승리하시고 많은 기도의 응답과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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