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주님 생각하며 바라보자

by Andrew Y Lee 2021. 7. 19.

주님 생각하며 바라보자

 

히브리서 12장 1~4절

 

히브리서 12 2 말씀을 보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3 말씀에는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주님을 생각하며 바라보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하려 한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는 것을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2000년 전에 돌아가신 주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나타난 그분을 믿음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또 생각하면서

그분을 따라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왜 예수님을 생각하며 바라보자 하는 것일까?

왜 생각하며 바라봐야만 되는 것일까?

 

첫 번째

 

1절 말씀에 있는 것처럼 모든 무거운 것

이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며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 자체를 살아가는 것이 무거운 짐 이다.

한 가정의 부모로서 또 자녀로 살아가는 것도 무거운 지이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아내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

인생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다.

 

거기에 또 우리는 성도로 살아가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

이것 자체가 무거운 짐을 집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생각하며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종종 사명자를 훈련하시는데 언제인가는 우리가

머리 된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서 그 지체에 붙는

그 구원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라면 우리는 어느 지체가 될 것인데

만약에 우리가 어깨에 붙는 지체가 된다면 하나님이

어깨로 짐을 지는 훈련을 많이 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훈련 방법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지체에 눈이 되어 진다면

눈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형안이라고 한다.

독수리에 눈, 매의 눈, 영적으로 눈이 날카로워서

독수리처럼 매처럼 이렇게 형안을 가졌다면

그것은 눈에 지체가 될 확률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무거운 짐을 많이 제공한다면

어깨의 붙는 지체가 될 확률이 많고

어깨로 무거운 짐을 많이 지고 가는

그런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인 것이다.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때 본문 가운데는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 이것을 공동 번역에서는

믿음의 근원이라고 번역을 했다.

 

믿음의 근원이시고 또 온전케 하시는 이것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의미가 아니고 그분 자체가 완성자이신

그런 말인 것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 자체가 그분의 무거운 짐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 무거운 짐이고

그것보다 더 큰 무거운 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분은 그 믿음의 근원이 되셨고

그 일에 완성자가 된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 분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와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온전케 하시는 이

이 말은 완성자 이런 말로 공동 번역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분이 이 믿음의 근원자가 되시고 완성자가 되셨다는 것은

이 땅에 그 무거운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고 오셨는데

그 앞에 있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그 십자가를

이기셨다는 것이다.

그 완성자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각자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그 믿음의 완성자가 되셔서 무거운 짐을 잘 담당하신

그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것을 이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1 28~30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 인생 자체가 살아가는 것이 수고하고 무건운 짐이다.

 

이 세상 자체를 살아가는 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데

우리는 성도로서 살아가는 게 죄 중에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무겁고 수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모든 짐을 다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신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지고 가면 짐이 가벼워지고

오히려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주님은 초청하고 있다.

 

멍에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멍에는 두 마리 소가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함께 가는 것이다.

 

어느 한쪽의 균형이 깨어진다면 그 멍에는

올바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묶여져 있어

그분과 함께 보조 마치면서 함께 균형을 맞춰가면서

그분과 함께 이 짐을 지고 가면 그 짐이 오히려 가벼워지고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의 주요 완성케 하신

그 완성자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바라보며 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지 다 주님께 맡겨드리고

완성자이신 주님을 생각하며 바라보고 따라 가심으로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는 놀라운 일이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두 번째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며 바라보며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은

12 1 두 번째 나온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이것도 이제 공동 번역에는 그렇게 번역했다.

억매이기 쉬운 죄 얽매여 얽어매는 죄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죄

그것 때문에 영적 성장이 방해를 받고 헌신의 방해를 받고

얽매이는 그 죄 때문에 정욕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순간에 우리는 예수를 생각하며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려놓으신 그 피,

그 보혈을 통해서 우리가 용서받고 다시 힘을 얻어서

이 길을 걸어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분을 생각하며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얽매이는 죄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순간순간

잊지 않고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한 10여 년 전에 간증을 들었는데 북한에서 탈출한

이옥 선교사라고 하는 분의 간증을 들었었다.

 

이분이 북한에서 여군으로 7년간을 근무했다.

여군으로 근무하며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면서 북한의

군인들의 마음을 막 선동시키는 그런 역할을 했던 분이다.

 

후에 이분이 남한에 와서 신학교에 들어가서 보니까

자기가 했던 것이 마치 전도사 사역 같았다고

그렇게 고백을 했다.

 

아코디언으로 곡을 연주하면서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책동 선전원 같은 그런 일을 했던 분인데

이분이 김일성이 죽고 북한에서 부모님과 모든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을 보면서 ‘아 이거 뭐가 잘 못 되었구나!’

그래서 친척들이 있는 중국으로 탈출을 했다.

 

친척이 있는 중국에 가서 잘 정착을 해서 살아가는데

어느 날 예고 없이 공안들이 들이 닥친 것이다.

모든 게 잘 풀리는 걸 보고 누군가 조선족이

신고를 한 것이다.

 

그래서 이분이 공안에 잡혔다.

잡혔는데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이 중국에 친척들이 많으니까

중국이나 북한이나 부정부패가 심하니까 분명히 친척들이 와서

돈을 공안에게 주고 나를 건져줄 것이다

이렇게 철떡 같이 믿어진 것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시간이 가는데도 친척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내일 낮 2시 면은 북한에 끌려가고 끌려가면 바로 사형이다.

 

끌려갈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 오고

오늘까지도 친척들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마음속에 점점 불안해지면서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고

그러면서 이제 자기애를 제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난동을 피우니까 사람들이 나무 의자에다 묶어서

독방에다 집어넣었다.

그 당시해도 혈기가 방정하고 젊으니까

거기서 이 철문을 머리로 막 들이 받은 것이다.

 

세 번째 머리로 들이받으면서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분이 쓰러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까 여전히 철문은 닫혀 있고

자기는 여전히 붙게 있었다.

그다음 날 마지막 날 아침이 되었는데

2시면 이제 끌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분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주님이 나타난 것이다.

중국에 갔을 때 어느 선교사가 찬양에 들어있는 녹음테이프를

줬었는데 그때 들었던 노래가 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못 박힌 손과 발...’

그 노래가 북한에 선동하는 그 아코디언의 곡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 곡을 지고고 선동하는 곡으로 사용했는데

그 곡을 아는데 그 선교사가 찬양테이프를 준 거기에서

그 곡이 흘러나오는데 가사는 처음 듣는 가사였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못 박힌 손과 발’

갑자기 그 가사가 막 떠오른 것이다.

그러면서 고난 받는 주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주님이 나타나서 역사를 하시게 된 것이다.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제 2시가 되어 그 공항 관계자가 왔는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공안 당사자가 이 이옥 선교사를 보자마자

눈물을 막 흘리면서

“너는 어떻게 내 죽은 땅하고 똑같이 생겼냐”

그러면서 자기 딸처럼 생각하며 놓아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 그 공안 담당자가 감동을 받은 것이다.

“너는 꼭 죽은 내 딸과 똑같이 생겼다” 그러면서 풀어주었다.

 

그래서 다행히 풀려난 다음에 나중에 남한으로 탈출을 해

한국에 와서 그 당시 10여 년 전에 총신대학교에 가서

종교 음악을 공부하면서 북한 선교하는 그런 사역자로

자기가 나왔구나 하는 그런 간증을 했었다.

 

그렇게 얼마나 그분이 아프셨는지 그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 그 피가 오늘 우리를 얽매이는 그 모든 죄에서

우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한 번 피 뿌린 그분의 그 십자가의 은총이

우리의 모든 자범죄에서 매일매일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거친 광야 생활을 다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한 땅이 입구인 할례산에서 7번 피 뿌림에

영적 할례 은총을 받으면 우리의 모든 원죄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십자가에서는 이미 다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이 실제 나의 삶 속에 적용이 되어 그 피로 우리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용서받으며 가기 때문에

그분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얽매이기 쉬운 죄가 있다면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그분의 그 피가 그 보혈이 우리를 용서해 주면서

우리의 거친 광야를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준을 경주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이 경주하는 것이다.

 

100미터를 뛰어가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고 42.19미터를

뛰어가는 장거리 마라톤 같은 경주를 우리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 하면서

그 말씀을 하셨다.

 

고린도전서 9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우리의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처럼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실제로 고린도 지역에서는 2년에 한 번씩 오늘날 우리의

올림픽 같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그런 경기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이제 비유로 집어넣어서 이 말씀을 한 것이다.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늘 그 상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장거리 경주와 같은 그것인데

그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라고 하는 것이다.

 

인내심이 없으면 우리가 장거리 경주를 달려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체력도 문제지만 장거리 경주는 자기와의 싸움이고

인내를 해야 되는데 그 인내하며 경주하는 그때에

주님이 어떠신 분인가?

3절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인내를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거역한 자,

빌라도도 가룟 유다도 수많은 유대인들도 제사장들도

전부 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면서 모두가 예수님을

거역한 자들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를 거역한 모든 자를

주님은 다 참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을 생각해 보며 그분을 바라보라고

그래서 그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인내로서 잘 감당한 그분을 생각하며

우리가 그분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1에 보니까 그렇게 말씀하셨다.

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믿음의 근원이시고 완성자인데

그분은 인내 자체도 완성하신 분인 것이다.

자기를 거역한 자를 다 참으셔서 인내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 성경의 온전이라는 말이

완전하라는 말이다.

완전, 성숙, 장성 다 같은 말이다.

 

우리도 다 예수님처럼 우리 개인적으로 인내를 완성해야

되는 것이다.

 

인대를 완성해야 되는데 그 인내가 어떻게 만들어진다는 것인가?

믿음의 시련이 올 때.

믿음의 시련이 오면 그 인내를 만들어내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 이것을 우리가 흔히 연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같은 시험, 연단, 환경 가운데 원수가 나타나는 이것이

믿음의 시련이고 이것이 불시험 인 것이다.

 

이제 용광로 속에 원광에서 가지고 나온 많은 물질을 집어넣어

거기서 순수 금을 빼내고 불순물 다 제거야 되는데

그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이 용광로고

그것이 불시험이고 믿음의 시련인 것이다.

 

뜨겁다고 용광로의 불을 끊어버리면 그것이 금이 되겠는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금이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 용광로에 있어야 되는

그것이 인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 야고보 사도는

그것을 온전히 이루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인내를 완성하게 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서 인내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믿음의 시련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주님은

고린도전서 10 13에 말씀하셨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이것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허락하셔서 나에게 믿음의 시련을 주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시련이 올 때 기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시련 그것이 인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이 없으면 어떻게 인내를 연습해 볼 수가 있겠는가?

원수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연습해 볼 수가 있겠는가?

원수가 나타나봐야 그 순간에 자기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자기 안에 있는 미움과 자기 안에 있는 이 모든 악한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때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그 인내에

훈련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사랑하라는 것이고 용서하라는 것이고

이것을 지키는 것이 인내라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인내이다.

 

무조건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니고

그 말씀을 인내하며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인내 자체가 완성이 되어야

온전해지고 구비하여 조금 더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로마서 5 1~5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사랑 자체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지

않으면 누가 사랑이 될 수 있겠는가?

인간적으로는 우리는 아무도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부어지니까 사랑하게 되는 거지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겉으로는 사랑하는 것 같지만 마음에는 원망하고 불평하고

이 겉으로는 사랑하는 것 같지만 여러 가지 세상적인 법도 있고

도덕도 있고 이권도 있고 여러 가지 조건들 때문에

사랑하는 척 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우리의 인생 삶는데

내 마음으로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방법이 오직

환란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믿음의 시련인 것이다.

 

그것이 베드로가 말하는 바로 용광로와 같은 연단인 것이다

 

이렇게 환란이 올 때 사도바울도 그것을 즐거워한다.

그 환난이 오니까 그 환란이 곧 원수를 만난 것인데

그 원수를 만나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인내 말씀을 지키는 훈련이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이것을 작은 능력이라고 했다.

아직 사랑이 부어지지 않았는데 온수를 사랑하는 이것은

적은 능력인 것이다.

 

할 수 없는데도 그것을 열심히 실천하며 나갈 때

그것이 인내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사랑이 이미 왔는데 사랑하면 쉬운 일이다.

아무리 사방의 원수가 많다 하더라도 이미 사랑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지 다 사랑할 수가 있다.

 

그 하나님의 속성상, 예수님의 속성상

마지막 가룟 유다까지 라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가 사랑하겠는가?

그러니까 그것이 부어지지 않는 가운데 사랑하는 건

우리의 작은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이렇게 환란이 찾아오면

나를 하나님의 인내를 통하여 연단을 만들고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이 놀라운 축복을 주기위해서 주신

환란이기 때문에 그걸 믿는 마음으로 그 환란을 기뻐하는 것이고

그것을 야고보 사도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 되는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환경이 오고 원수가 나타날 때 마음에 불편하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고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부어주시려 하는 섭리 속에서

나에게 믿음의 시련을 주고 환란을 주셨다는 그것을

믿는 마음으로 그것을 아멘으로 받아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것이 인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란의 인내를 만들어내고 인내는 연달을 만들어내서

그 모든 불순물이 그때 빠지는 것이다.

 

아무리 환란을 주어도 인내하지 않으면

그건 연단이 안 되는 것이다.

불순물이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환경은 어려워도 그 환경 속에서 인내하지 않으니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연달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환란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나가면

그게 연단이 되고 그때 비로써 소망을 이루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다.

그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 신앙생활이 오랜 장거리 경주와 같은 경주인데

그 경주 속에서 수많은 여러 가지 환란이 오고

시련이 오고 이럴 때 그 많은 고통을 참으시고 인내하여

인내를 완성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바라보자.

 

육신이 가지고 이 땅에 와서 이렇게 사는 동안에 이 모든

것을 인내로 감당하여 완성하신 그분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 가운데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감당할 시험을 주셨고 그것을 우리는 이루게 한다는

그 샘플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분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이 모든 환경 속에서 승리하게 될 줄로 믿는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가 그분을

따라갈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참 제자가 되어주고 그리고 그 놀라운 영광에도 함께

동참을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누가복음 14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으면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각자 몫의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를 내어 던지고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빌립보서 1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은혜를 주신 것은 그 은혜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고

또한 믿는다면 그를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으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고 수많은 기적을 보고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왔지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참 제자는 열두 제자밖에 없었다.

 

성경에 나타난 것은 열두 제자밖에 없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되어서 나를 따르는 너희들을 천국에

기초 석이 되게 하시고 12 진주문에 그들의 이름이

다 기록되게 해주신다고 했는데

 

요한 계시록 21장에 보면 말씀대로

다 그들의 이름 열두 사도 이름이 거기 나타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개국 공신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한 나라를 만들면 개국하는데

공신들을 다 좌의정, 영의정등 한 자리씩 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무슨 몫을 감당했느냐 거기에 맞는 영광과

거기에 맞는 보상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천국은 행한 대로만 받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데 멀지 않아 주님이 오시고

환란이 지나가면 이 땅에서 나타나는 메시아 왕국,

천년 왕국이 다가올 것이다.

 

그 천년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천년 왕국 메시아 왕국을 개설하는 데 어떤 역할을 감당하느냐

거기에 맞는 영광과 보상을 주실 것이다.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은 열 므나, 곧 이제 많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어서 분봉 왕이 되는 것이고 다섯 므나는 다섯 므나대로

두 므나는 두 므나대로 남긴 대로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자기의 몫에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여기에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따라갈 때 참 제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 네 가지를 말하였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그 모든 십자가를 비롯하여 무거운 짐,

이 땅에 육신을 갖고 온다는 것 자체가

그분에게 얼마나 놀랍고 무거운 침이었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애완견을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가 애완견 자체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분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고

얼마나 놀라운 무거운 짐이었겠는가?

 

로마의 왕국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은 바로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태어나셔서 그곳에서 그렇게 많은

모진 고통과 십자가를 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그분에게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겠는가?

 

아무 죄가 없는 그분이 죄인들에게 둘러싸여 산다고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무거운 짐이겠는가?

요만큼 예수님을 알고, 요만큼 승화되고,

요만큼 영성을 가진 우리도 이 죄악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가?

 

빛과 어둠이 합칠 수가 없는데 그분이 온갖 악에 둘려 쌓여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분의 모든 인생에

무거운 짐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새벽 미명마다 나가서 하나님을 뵐 수밖에 없고

매일매일 주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그 은혜를 받지 않으면

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가 없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그 모든 무거운 짐을 감당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다.

 

여러 가지 우리를 얽매이는 죄, 그것은 그분의

십자가 보혈의 은총으로만 해결되기 때문에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랜 믿음의 경주와 같이

오랜 시간 일생의 경주이다.

 

일생이 우리를 달려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상을 바라보며 절제도 해야 되고

상을 바라보면서 허공을 치지 아니하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쳐야 하는 것이고

하늘의 버림을 당할까봐 자신을 또 치고

그러면서 가는 믿음의 경주이다.

그때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거역한 자들을 다 참으신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 믿음의 경주를 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길을 이렇게 따라 갈 때

참 제자가 되는 것이고 자기 몫에 십자가를 잘 지고

이럴 때 메시아 왕국이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이 될 때

열 두 제자에게 영광과 그 놀라운 일에 동참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거기에 걸맞은 놀라운 영광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이다.

 

본문 가운데 4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피 흘리기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피 흘리기까지 싸운 적이 있었나?

 

예수님이 피를 흘려주심으로써 이 모든 것을 감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몫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내가 피 흘리기까지 주와 대화 했는가?

피 흘리기까지 내가 이 싸움을 싸워 왔는가?

생명을 걸고 우리는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피 흘리기까지 인내 말씀을 지켜가며

피 흘리기까지 기도하며

피 흘리기까지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만나 놀라운 일에 동참하여

우리의 모든 믿음의 경주를 잘 달려가고

참 제자의 하늘에 넉넉히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말씀의 향연 > 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도움  (0) 2021.08.18
분별력과 결단력  (0) 2021.07.19
호밥의 눈이 주는 교훈  (1) 2021.07.10
앙망하는 자  (0) 2021.07.10
시온의 대로  (0) 2021.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