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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by Andrew Y Lee 2021. 4. 3.

부활의 증인

 

고린도전서 15장 12절~19절

 

오늘은 유대력으로 초실절이다.

 

유대인들은 저녁 해질 때부터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26일 저녁부터 유월절이다.

 

27일이 무교절이 되는 것이고 

28일 저녁이면 이제 초실절이 되게 된다.

 

무교절이 지나면서 첫 안식일 다음 날이 바로 초실절이다.

올해는 무교절 바로 다음 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오늘이 초실절이다.

 

사도행전 20장 6절~7절

'6절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절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초대교회는 절기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

서로 마을과 함께하는 많은 분들이 무교절 후에

닷새 만에 안식 후 첫날이었다.

 

바로 7절에 나온 이 날이 초실절이었다.

그래서 이 초대교회 사도들은 특별히 초실절을 지키고

절기를 지켰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골로새서 2장 16~17절

'16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절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여기서 보면 절기, 안식일은 장래일의 그림자라 그랬다.

 

우리가 절기를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그 절기를 따라

그대로 모든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된 것이 무교절이고

초실절은 바로 부활절인 것이다.

 

춘분이 지나고 나서 첫 번째 만월을 지키는 것을

1500년 이상 부활절로 지켜왔는데 카톨릭이 당시 많은

종교를 통합하면서 이스터 여신을 기념하는 날을 바로

춘분 후에 첫 만월로 지금까지 지켜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실제 절기를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역사

그 의미를 알고 지켜나가는 것이 유익하다.

 

레위기 23장에 7가지의 절기가 다 나와 있는데

초실절은 3,4월경에 이스라엘 3,4월이면 우리와 비슷하다.

보리를 추수한 후인데 처음 익은 보리 한 단을 제사장이

가지고 가서 제사장이 안식 후 첫날 그 단을 흔들어

하나님께 드린다.

이 절기를 초실절이라고 한다.

 

바로 초실절이 예수님의 부활이 되는 날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래서 예수님이 첫 부활을 이루시고 오순절이 오면

오순절은 5~6월 달인데 밀을 수확하는 기간이다.

이것이 인류역사에서 오순절날 사도들을 통하여서

많은 익은 열매들이 나타나게 된다.

 

9~10월 가면 초막절인데 이 때는 모든 곡식과 야채를

다 추수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이다.

이것이 7년 대환란을 지나서 천년왕국에서 모든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모형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절기를 따라 인류 역사를 진행하셨고

예수님은 그 절기를 따라 이렇게 역사하셨기 때문에

이 초실절이 부활을 기념하는 날과 일치하는 날이 된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묵상하면서

'부활의 증인'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갖겠다.

 

첫 번째

증인이 무엇인가?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초대교회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시면서 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주를 따르는 많은 무리를 향해서

"너희는 내 증인이 되라" 이렇게 부탁하셔서

그 증인들의 증거의 역사로 지금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지금 저와 여러분도 그 증인의 삶 안에 함께 있는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보니까 증인은 '보증하는 사람'

또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

법률적이 용어로 '소송 당사자는 아니지만

법원이나 법관에게 자기의 듣고 본 사실을 진술하는 사람'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진술을 하는 것이 증인이다.

 

그래서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것을 거짓증거하면

그걸 위증죄로 걸리게 된다.

 

사도행전을 썼던 사람이 바로 누가 사도인데

누가복음 1장 2절 보면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마태, 마가, 요한 많은 복음들이 있는데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됐다고 나와 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목격자 된 사람들이 복음을 썼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증인이 됐기 때문에 썼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장 3절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이 말씀의 목격자 된 사람들이 쓴 것처럼 이 모든 일의 근원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시고 공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한 그 근원까지 자세히 살핀 누가도

이것을 그대로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이 '데오빌로 각하에게 쓰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누가복음 24장 45절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은 마지막 승천하시면서도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

 

 46~48절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의 모든 행적들에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말씀하신다.

 

요한1서 1장 1절~3절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절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요한도 생명의 말씀이 나타난 것도 눈으로 보고

주목하였고 심지어 손으로 만져 보았다.

이 모든 것을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이것이 바로 증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본 적 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우리는 목격한 적이 없다.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한 것을 결코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증인이 되겠는가?

 

우리는 보고 듣고 증거 한 모든 사도들과 복음 저자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이

그 말씀을 믿게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믿는 것이다.

그것이 믿어지고 성경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이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는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그분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분이 승천하신 것을 믿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2000년 전에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서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성령이 임했고 그 성령의 권능의 역사로

이것이 믿어지고 확신되어 지고 확정되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증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대하여 증인

더 나아가서 그분이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부활은 무엇인가?

 

우리가 부활의 의미를 알려면

죽음의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한다.

 

창세기에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지만 죽지 않았다.

그래서 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적인 죽음이 있고 육체적인 죽음이 있다.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순간에 영적인 죽음은 왔지만

육체적인 죽음은 오지 않았다.

그러기에 우리는 두 가지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로마서 5장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에 있는 이 사망이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망은 영적인 죽음 이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짓고 나니까 영적인 죽음, 사망이 왔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단절됐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없고 단절된 이것이 성경에서는 말하는

'사망' 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죽음인 것이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의 구원의 결과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22절에 나와 있다.

 

이 영생은 바로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인 것이다.

 

이것에 반대되는 말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생명 밖에 있는 이것이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가 죽으면 영원히 영 육간에 함께 죽는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죽음 사망에는 영적인 사망이 있고 육체적인 사망이 있다는 것

아담이 죄를 짓고 사망이 왔는데 이것은 영적인 죽음의 의미이고

육체적으로는 얼마간 더 살다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죽음이 있고 육체적인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8장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제자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하옵소서'

이스라엘이나 한국 사람이나 부친의 임종을 보고

그 부친을 장사하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부친이 죽었기 때문에

장사하고 따라가겠다고 그걸 허락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이 말씀에서 뒤에 있는 죽은 자는 뭔가?

부친의 육체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또 제자의 부친을 장사하는 앞에 있는 죽은 자들은 뭔가?

살아있는 사람이 장사를 하는데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하고 있다.

 

22절에는 영적으로 죽은 자와 육적으로 죽은 자

두 가지가 다 나온다.

 

계시록 3장 1절

사데 교회의 목회자를 향해서 '그 이름이 죽은 자다'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는데 실상은 죽은 자다.

영적인 행실이 죽었다는 것이다.

어둠에 싸여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육체적으로는 목회자였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다.

이것이 사데 교회 목회자 이름 이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이 됐다는 것은 영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영원히 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올 수 있는

그 기회를 잡은 것이 생령이다.

그런데 그 아담이 생령이 되어서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짓고 나니까 성경 이사야에서는 그것을 '음령'이다

죽은 자다 죽은 영이 됐다고 말씀한다.

 

생령으로 하나님의 생명과를 먹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인생이었지만 이제는 죄가 들어오니까 사망이 왔다.

 

죽은 자가 됐다 이 말은 음령이 되었다 그런 뜻이다.

생령이 아니고 음령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

 

즉, 우리는 생령 산령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범죄하고 나니까 죽은 영, 음령이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한 예수님이 그 영을 다시 살려줬기 때문에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먼저 영적으로 죄 가운데서

해방이 되어져 익은 열매가 되어야 영적인 의미의 부활을

맞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재창조라고 한다.

 

나의 영이 먼저 새롭게 살아나는 그 재창조를 입고 나서

그 재창조를 입은 순서대로 예수님이 오실 때 부활을

차례대로 하는 것이 참된 부활의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두 가지가 다 새롭게 재창조되고

새롭게 살아나야 온전한 부활을 이루어서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는 시간되길 기원한다.

 

마지막 세 번째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부활 신앙을 가져야한다.

 

부활이야말로 성도의 최대의 소망이 되고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최대 관심사가 되어져야 한다.

여러분의 삶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어느 앙케이트 조사에서 설문조사를 하니까 인생들이 평생의

돈벼락을 한 번 맞아봤으면 좋겠다가 70%가 나왔다고 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 16%였다.

 

예수를 믿는 우리라 할지라도 여기의 관심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인생의 관심사가 돈벼락을 맞아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최대의 관심사인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부활에 최대 관심을 가지고

부활에 소망을 가져야 한다.

 

기존 방송국에서 가짜 뉴스를 많이 하고 진짜 뉴스를

보내지 않으니까 많은 유튜버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유튜버를 통해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런데 그 유튜버들이 자기가 관심 가지고

자기가 잘하는 것으로 방송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부활에 소망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지

예수님이 오셔야만 이 영광의 몸을 입게 되는데 거기에

관심이 없으면서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부활의 신앙이 있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바울은 언변이 없었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변사가 아니고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말과 지혜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그것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 자랑했다고 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결국 부활을 말한다.

십자가가 없는 것은  부활도 없는 것이다.

그것만 알기로 작정을 했고 그것만을 전했다.

 

세상에 아름다운 말로 유창한 언어로 세상의 지혜로

세상의 언변을 전하는 것이 아닌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전하는 것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십자가의 도' 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만 알기로 작정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오직 부활에만 증인이 되고 증거하고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15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사도바울은 어찌 하든지 부활과 그 고난에 참여하려고

어찌 하든지 부활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 목표였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 복음을 전하려고 매를 맞고 고난을 받고

배고프고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부활을 잡으려고 이걸 푯대삼아 쫒아 간 것이다.

오직 부활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푯대'라고 했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라고 하였다.

 

왜 부활이 부름의 상인가?

히브리서 9장에서 보니까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서

부활에도 차이가 있다.

 

예수님 공중강림 하실 때 부활을 얻는 사람도 있고

지상 재림 할 때 순교자도 있고 나머지는 1천 년 뒤에

부활을 얻게 된다.

 

부활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더 빨리 부활을 얻으려고

빨리 좋은 상을 받으려고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 말은 이미 영적으로는 재창조를 받았다.

영적으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부활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 12절에 부활만큼은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영적인 것은 온전히 이루었지만 부활이라고 하는

육적인 것은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어 부활을 이루려고 그래서 사도바울이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만 관심을 가졌고

이것이 삶의 목표였고 이것을 위해 달려갔다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부활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의 살아있는

산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의 썩어질 소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먹고 살다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도 언젠가 죽는

것인데 부활만이 우리의 산 소망이라는 것이다.

 

눈물도 고통도 없고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영원한 부활이

성도들의 산 소망이 돼야 부활신앙이 되고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을 사모하고 관심을 갖고 원하니까

증인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본문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

다 헛것이라는 것이다. 거짓 증인이 되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증거하는 것도 다 헛것이고

믿음도 헛것이고 다시 사신 것이 없다면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있고

그분이 부활해야 속죄가 이루어져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건데 부활이 없다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는 것이고

우리도 망하는 것이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가 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제일 불쌍하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지금까지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희행하고 고난 받고 하고 연단 받고 병들고

고통 당해가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것이고 용서받는 것도 헛것이 된다.

 

세계 최대의 사기를 당하는 것이다.

제일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은 반드시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 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부활의 신앙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 죽어도 부활에 동참 하고 언제 죽어도 부활에 동참하는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더욱 견고하다.

더욱 주 안에서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다.

왜? 그것이 다 헛되지 않는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더러운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는 귀한 상을 받았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 여인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곱 귀신이 들려 7종 죄악상에 시달렸던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그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많음으로

무덤으로 먼저 달려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된 것이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이다.

 

사랑하면 그 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관계가 되면 그분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이고

그분의 증거가 내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분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는 것이고

사랑하면 그분의 부활도 내 부활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속성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종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분을 사랑하면 그분께 접붙임 되는 것이고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분의 사역이 내 사역이 되는 것이고

그분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는 것이다.

그분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 이끌어 간다.

 

2021년 초실절을 맞이해서 부활의 확실한 깨달음이 있기를

소망하며 최대의 관심을 갖고 부활의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귀한 영광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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