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적인 삶
누가복음 2장 23절~39절
오다가 보니까 개나리도 피었고 노란 진달래도 피었다. 아무리 겨울이 지루한 것 같아도 때를 따라 이렇게 봄이 오는 것 같다.
아무리 세상이 암울하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시간표는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모든 것이 온전해 질 줄 믿는다.
인류역사를 다른 말로 하면 '구속사'라고 말할 수가 있다. 하나님이 얼마간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 인류역사이다.
그런데 그 인류역사를 크게 두 가지로 보면 빛의 시대가 있고 어둠의 시대가 있다.
대부분의 시대가 다 어둠의 시대이다. 하나님이 다시 빛의 시대로 세우기 위해서 얼마간에 영성의 사람들을 일으켜 다시 회개하며 빛으로 회복을 시킨다.
그러다가 다시 시대가 어둠으로 가고 또 다시 빛으로 이렇게 반복하는 것이 인류역사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도 가나안 땅 정복 이후에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 말씀을 외면하니까 외세를 강하게 하셔서 다시 어둠의 시대에 빠질 때 하나님이 사사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선지자를 세워서 다시 회개하게 하여 빛으로 회복을 시키신다.
신약의 교회 시대에도 마찬가지 이다. 교회가 어둠에 빠질 때마다 개혁자들을 세워서 빛으로 회복을 하게 하신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때는 빛 가운데 부흥의 역사가 있지만 또 어둠에 빠진 시대도 있고 지금은 어둠의 시대이다. 이렇게 인류의 구속사 역사를 반복하는 것을 볼 때 이 어두운 시대에 새롭게 빛으로 나가야 하는데 이때 꼭 필요한 것이 선지자의 영성이고 선지자적인 삶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선지자적인 삶' 이런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한다.
선지자적인 삶이 무엇인가?
첫 번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이다.
때에 따라 예언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고 또 시대마다 하나님의 개입된 뜻을 전파하기도 하는 것이 선지자이다.
민수기 11장 29절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본심은 모든 사람에게 신을 주셔서 다 선지자 되길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이 말씀이 나타난 배경은 24절부터 말씀을 보면 ‘모세가 장막에 나갈 때 칠십인의 장로를 도와서 장막에 둘러 세웠는데’ 25절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의 신이 모세에게 임한 그신이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니까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그쳤다 이렇게 말씀한다.
26절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그래서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엘닷과 메닷이 진중해서 예언하더이다' 그럴 때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 진중에서 예언하는 것을 금해달라" 이렇게 건의할 때
29절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마음은 누구나 다 신을 받아서 선지자 되길 원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다.
사무엘상 19장 18절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까 다윗이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 나아갔고 그들이 나욧으로 갔다 이것이 라마 나욧이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사자를 보냈는데 20절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의 신이 서울의 사자들에게 이 말에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다윗을 죽이러 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예언을 한 것이다.
2절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고로 사울이 세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다 사람을 보내자마자 다 신이 임하니까 다 예언을 해 버렸다. 그래서 직접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나아간다.
23절~24절'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예언을 하면 선지자가 되는 그러니까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이런 속담이 나타났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도 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 선지자들의 삶인데 이 선지자적인 삶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런데 그중에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서 선지자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고 선지자로 직접 부름을 받지는 않았어도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도 있다.
구약에는 선지자가 많이 있다. 신약에 와서도 초대교회에 선지자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선지자의 부름을 받았던 선지자의 부름을 받지 못했던 선지자적인 삶과 선지자의 영성을 추구하며 사는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시대마다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신다.
그래서 여기 '예언한다' 이 말은 한 개인이 장차 되어 질 것만 예언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계시록 자체가 다 예언 아닌가? 장차 되어 진 일을 다 전하는 것 그것 자체가 다 예언인 것이다.
누가복은 2장 시므온과 바누엘의 딸 안나 이 두 사람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선지자적인 삶의 모델을 보게 된다.
시므온은 선지자로 호칭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안나는 분명히 선지자라고 누가복음 2장 36절에 나와 있다.
선지자로 호칭을 받지 못한 시므온과 선지자로 호칭을 받았던 안나 이 두 사람의 삶을 통하여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던 선지자의 명칭이 없었던 우리는 다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이 두 사람의 모델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28절에 보니까 선지자의 호칭을 받지 못했지만 시므온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누가복음 2장 29절~32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예수님이 만민 앞에 예비 되신 분이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고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이것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이 예수님 이 메시아가 누군가를 선포하는 이것 자체가 선지자의 삶인 것이다.
34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예수님이 비방을 받는 표적이라고 선포를 하고 있다.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비방을 받겠는가?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그 예수를 믿으면 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다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된다.
35절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님의 삶이 찌르는 칼이라고 제일 먼저는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는 칼이 된다고 한다.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게 되는 그 어머니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그런 칼의 삶이 예수님의 삶이라고를 선포한다.
그리고 그분이 그분의 말씀 칼로 영혼들의 심장을 찔러서 그 영혼들을 수술하고 새롭게 하는 그런 칼이기도 한 것이다.
전부 메시야 된 예수님을 선포하는 메시지들인 것이다.
그래서 시므온은 선지자로 호칭을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찬송하며 선포하며 메시아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그런 삶을 살아간 것을 볼 수가 있다.
반면에 안나는 분명히 선지자로 호칭을 받았다. 이 구약에 선지자가 더러 있지만 여자 선지자는 참 드물다. 성경에 보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선지자라 했다. 또 사사 드보라, 사사 홀다 그리고 좋은 선지자는 아니었지만 악하게 쓰임 받은 느예미야 시대에 노야다라고 하는 여자 선지자가 있었다.
여선지자 중에 하나인 안나는 38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아이가 메시야 이시고 이 아이가 바로 많은 사람을 구속하는 구속주 이시다' 라는 메시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되어 질 일들 예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이에 대해서 증거하는 자체가 선지자의 메시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선지자가 되었던 선지자가 되지 않았던 선지자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고 그 시대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선지자적인 삶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메시지 또 되어질 일들, 하나님의 계획들 이런 것들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두 번째, 선지자적인 삶을 살려면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이 오실 때 그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들이 그들의 선지자적인 삶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살아있는 동안에 메시야를 만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명은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고 그 예수님을 살아생전 만나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셨던 이스라엘 당시의 배경을 한번 좀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날 당시 유대는 굉장히 정치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아주 암울한 어둠의 시대였다. 헬라의 알렉산더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아 통치하고 있었다가 그 헬라에서 벗어나 잠시 독립을 했지만 다시 로마 제국에 의해서 식민지가 된 그런 때이다.
우리도 일제시대 때 식민지가 된 삶을 살았지만 외국의 식민지가 된 삶이 얼마나 어려운 시대인가?
굉장히 어둡고 혼란했는데 그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왕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이 로마의 힘을 등에 업고 유대인의 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마치 일본 사람들이 총독부를 세워 다스렸던 것처럼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왕이 되어서 다스렸다.
그래서 열심당원들이 나타나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애썼지만 로마 제국에 의해서 색출 당하고 로마의 공포 분위기로 인해 모든 대부분의 사람이 로마 제국에 굴복한 시대였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대였다.
반면에 종교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진정한 정신을 망각한 채 율법 조문에만 얽혀서 모든 것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모든 백성들에게 짐을 지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신랄하게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책망을 하셨다.
종교지도자들이 전부 정치권력과 결탁하고 야합하여 자신의 욕망만 채우기에 현안이 되어 있는 그런 시대였다.
종교적으로도 암울한 시대였다. 정치, 종교 모두 혼란, 절망, 무기력으로 가득한 암울한 시대였기 때문에 오늘 본문 가운데 보면 '이스라엘의 위로' 25절에 있는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는 한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그래서 이스라엘의 위로라고 하는 것은 메시야를 오셔야만 정치적으로 그 어두운 시대를 이겨나가고 또 종교적으로 어두운 그 시대를 이겨나갈 수 있고 오직 메시야가 오는 것만이 이스라엘의 위로였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가 바로 그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시므온이나 안나와 같은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죄에서 백성을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할 메시야를 예언한 그대로 기다리는 시대였던 것이다.
25절~26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반드시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성령에 감동에 따라 그 삶을 살면서 오직 삶의 목표가 그분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그 분을 기다리는 그런 삶을 산 것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의 선지자적인 삶에 목표였던 것이다.
반면에 안다라고 하는 이름은 '은총' 이라고 하는 뜻이다. 하나님이 특별한 은총을 베푸는 그런 은총이고 '바누엘의 딸이라' 여기서 바누엘은 구약에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거기를 부니엘이라고 했다. 바누엘이 바로 부니엘이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은총을 받은 자'라는 것이 안나의 배경인 것이다.
이 안나의 가족사와 그의 배경을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는 은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메시야를 만나는 것이 사명이었다. 이렇게 정치적, 종교적으로 암울한 시대에 시므온과 안나가 선지자적인 삶을 살면서 그들의 사명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그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이 시대는 예수님이 초림하여 오실 때와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다. 정치적으로도 암울한 시대이다. 온 세계가 다 암울한 시대이다. 종교적으로도 암울한 시대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런 시대에 나의 사명이 선지자적인 삶으로 연관이 되어져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한 그런 사명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던지 선지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던 우리의 삶은 선지자의 영성을 생각해야 되고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재림하여 오시는 예수님과 관계된 예언과 메시야의 메시지와 관계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획을 깨달아서 선포해야 될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적인 삶이고 선지자의 목표인 것이다.
세 번째, 선지자적인 삶이 실질적으로 어떤 삶이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다.
선지자적인 삶의 실질적인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다. 시므온은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이 순간순간 지시하는 그런 삶을 살았다.
27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그날이 무슨 날인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여 아기예수를 성전에 들어가서 바치는 날이다.
22절에 보면 '결례의 날이 차매' 여성들이 아이를 낳으면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결례에 남자 아이를 낳으면 40일 정도 지나서 결례식을 하게 되고 '율법에는 처음 난 자마다 거룩한 자라 해서 비둘기 한 쌍 혹 어린 반구들로 제사한다' 라고 24절에 나와 있다.
이것은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재물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더 좋은 재물을 드리지만 돈이 없는 어려운 가정이니까 이렇게 약소한 재물이지만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재물을 가지고 가서 성전에 들어가서 이 결례와 아이에게 첫 희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이런 종교식을 하려고 하는 바로 그날인 것이다.
그런데 그날 성령의 감동으로 시므온이 그 성전에 들어가서 그 아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니면 선지자적인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므온이 아이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29절 말씀인 메시지적인 내용도 성령 충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는 34절에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폐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다' 이 말씀과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 말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도 전부 성령 충만이 아니면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한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선지자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그 다음 안나의 삶을 보면 36절~37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과부 된 지 팔십사년이라' 이 말은 번역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혼하는 습관이 있었다. 보통 여자가 열다섯 살이 되면 결혼했다. 그래서 열다섯 살에 결혼을 했고 남편과 함께 칠년 동안 살았다면 스물두 살이 된다. 여기 팔십사 년이라고 한 것은 과부 돼서 지금 나이가 팔십사 년 그러니까 남편이 죽고 육십여 년을 혼자 살게 된 것이다. 만약에 과부 된지가 팔십사 년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7년을 더 붙여야 한다.
그렇지만 안나는 60여년을 과부로 혼자 살아간 사람이다. 그런데 84세 되는 이 여자선지자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라고 하고 있다. 이 성전에는 아무나 살 수가 없다. 어떻게 이 여자 할머니가 성전에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 여기서 한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창세기 49장 20절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임금이 먹는 상을 수라상이라고 한다. 이 아셀은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의 축복 속에서 아셀 지파에게 되어 질 일을 말씀했는데 이스라엘 땅에 가면 전부 산악지대고 광야이다. 그런데 아셀 지파는 곡창지대를 유업으로 받는다. 그래서 아셀 지파가 사는 곳은 평야였다. 그러니까 음식이 많이 있는 그런 땅을 차지한 것이다. 그래서 임금님의 수라상을 준비하는 직책을 가진 지파였던 것이다.
성경 곳곳에 보면 아셀 지파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셀 지파가 성전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셀 지파는 먹는 것이 풍부한 지파였다. 그런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가 임금의 수라상을 준비하는 지파의 후손 이였기에 성전에 들어가서 살 권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금식은 귀한 금식이 된 것이다. 즉 안나의 이러한 모습은 그녀가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나가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메시야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에 대해서 선포하고 아이에 대해서 말할 수가 있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마디로 선지자적인 삶은 성령 충만한 삶과 경건한 삶을 살아드려야만 선지자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이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이를 초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시므온은 예수님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다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분명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는 걸 우리가 알 수가 있다.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이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성령에 지시와 감동을 받고 살아왔으니까 나이가 많은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안나도 84세가 된 사람이다. 세상적으론 과부고 외롭고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는 사람인데 이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빛으로 예수님을 소개하며 선지자적인 삶을 준비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귀한 삶을 살게 된 이 사람들이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이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볼 때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선지자적인 삶을 살면서 은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신다면 늘 성령 충만함으로 경건함으로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이 시대의 예언이다. 또 장차 되어 질 일이고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66권중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이 결론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속사의 결론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예언인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을 읽는 다는 것은 증거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메세지이고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적인 삶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선지자적인 은사와 직분을 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선지자적인 사람들이 어두운 시대를 개혁하고 빛으로 다시 인도하는 귀한 사역을 맡은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선지자적인 영성과 선지자적인 삶을 통하여 그들을 통하여 시대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아시고 이런 선지자적인 삶으로 성령 충만과 경건한 삶을 사모하며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 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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