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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나의 전부여!
요한복음 21장 15절~17절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가장 교회가 어려웠던 시대가 중세 교회였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전에 종교개혁 전야 같은 그런 어두운 시대였다.
카톨릭 교황권의 극치를 이뤘던 그런 시대인데 교황이 종교 세력과 함께 세상 권력을 동시에 갖고 있던 시대였다. 교황이 곧 황제요 왕 이였다.
큰 건축물들을 세우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았던 시대였다. 그리고 성경은 사제들만 보는 그런 시기였다. 매우 신앙이 어둡던 시기였다.
성도들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질병에 시달렸던 그런 시대였다. 하나님이 이 어려운 시대를 살리려고 사용하신 것이 성 프랜시스였다.
하나님은 그 시대 시대마다 시대를 살리기 위하여 그에 걸맞은 명성의 사람들을 항상 일으키신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타락상도 중세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교권이 너무나 커졌고 대형교회들과 많은 건축물들 이런 것들 때문에 중세 어두운 때와 너무나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마치 프랜시스를 일으켜 세우셔서 그 시대를 살리신 것처럼 프랜시스의 음성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때가 바로 이 시대이다.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다 이와 비슷한 추세이다.
프랜시스의 영성을 우리가 필요로 하고 그 영성의 사람들이 일어나야 하는데 프랜시스의 영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기 비움, 자기 포기의 영성이다.
세상 것이 허무함을 깨닫고 영성의 가치를 귀중하게 생각하면서 영원한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그걸 잡으려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비우고 포기하는 그런 영성이다.
프랜시스는 어린 시절 영웅이 되려고 전쟁에 나갔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그만 중병이 들었다. 오랜 병에 시달리다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가던 어느 날 오랜만에 지팡이를 잡고 비틀거리면서 수바시오산 기슭을 올라갔는데 걸음을 옮기면서 뒤돌아서 홀로 걸어왔던 길을 바라보니까 너무 그 환경들과 풍경들이 아름다웠음을 느꼈다.
'자연은 저토록 조화 있고 아름다운데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저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내면의 음성을 듣는데 그때 하나님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랜시스야!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그 음성을 들을 때 그는 비로소 내 갈 길이 분명히 정해졌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것 모조리 포기하고
‘하나님 저를 용서 하소서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결단을 하게 된다. 이때 하늘로 부터 황홀한 합창이 들려 왔다. “은총 받은 프랜시스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네 영혼으로 하여금 영원에 이르게 하는 문이니“ 그런 합창단과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면서 프랜시스는 이런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회심하고 자기 비움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오 주여 나의 전부여’ 이것이 오늘 바로 프랜시스의 고백이다.
마치 일생을 통한 구호와 같은 것이다.
첫 번째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의 삶이 물질관으로 나타난 것이 청빈과 무소유의 삶이라는 것이다.
프랜시스는 아버지가 부유한 포목상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포기의 길을 가기 시작하고 회심을 한 이후에는 그 많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동정심이 끝없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포목상의 물건들로 구제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연민을 실천하며 그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보니까 아버지께 매를 맞게 되고 감금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프랜시스는 결단을 하게 된다. ‘하나님만 나의 아버지고 육신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다’ 라고 선언했다. 아버지께 받은 속옷까지라도 다 벗어 줘버리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출발하는 것이 프랜시스의 청빈관이고 무소유의 개념인 것이다.
청빈은 거룩한 가난이다. 프랜시스는 스스로 ‘나는 청빈과 결혼했다’ 라고 선언을 했다.
당시에 모든 부를 소유하고 큰 건물을 짓는 이런 때였는데 하나님이 이런 어두운 시대에 프랜시스와 같은 성자를 일으켜서 그 시대에 가난이라고 하는 무소유라고 하는 그래서 탁발수도회를 창설하게 되는 것이다.
건물이 아닌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생활을 하면서 그 길거리에서 전도를 하고 설교를 해서 수많은 시민들에게 영향을 주는 이런 탁발 전도회가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 이러한 철저한 물질관 청지기적인 그런 삶으로 준비할 때가 되었다.
야곱의 7년 풍년이 온 후에 7년 기근이 오는 것처럼 머지않아 7년 풍년과 같은 놀라운 풍요를 세계 사람들이 맛보는 그런 시간이 올 것이다.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중산층이 부럽지 않는 그런 삶으로 온 세계가 변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지만 사람의 욕심이라는 건 끝이 없다.
사실 같지 않는 뉴스 소설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뉴스에 나오는데 로마 바티칸의 교황청에서 이스라엘에 이르는 150마일 한국으로 하면 240km정도 거기에 지하터널이 파져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수천 년 동안 쌓아온 금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황권이 욕심이고 이생의 욕심이다. 이 금만 갖다 팔아도 이 세상 사람들이 중산층이 될 만한 삶으로 다 분배 받을 수 있다
그런 시대를 앞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가 됐다고 한다면 인생의 욕심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저는 이런 예상을 해 본다. 우리가 첫 번째 연단을 마치고 신광야로 들어갈 때 그 축복이 연단이후의 축복이지만 그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청지기적으로 사는 이런 사람은 두 번째 연단에는 더 성장하지만 그 축복에 머물러 버리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영적인 앉은뱅이 되는 그런 원리가 그때 적용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나서 온 세계가 평안하고 안전하다 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것 때문에 오늘 정말 더 영적으로 성장할 것이냐? 성장하기 못할 것이냐? 인류전체가 그런 시험대에 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온 세계 정부가 하나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표를 받는 시대로 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시대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열개를 가지고 있어도 이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백 개를 가지고 있어도 다 하나님의 것이다 라는 청지기와 같은 삶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소유가 아니다 백 개를 가져도 청지기적으로 살면 소유가 없는 것이다. 무소유고 청빈의 삶이다.
그런데 열 개, 다섯 개를 가지고 있어도 이건 다 내 것이다 이렇게 하면 청지기의 삶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때가 되던지 주신 것에 감사하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빈부 어떤 것에도 감사
어떤 것에서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던 사도 바울과 같은 그런 자세를 배우면서 프랜시스와 같은 청빈과 무소유의 이런 정신으로 남은 때를 살아가는 그런 영성이 필요한 때이다.
두 번째 이 프랜시스가 자기 비움과 자기포기의 그 정신이 그의 삶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님과 같은 비하 낮아짐과 겸손의 삶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그의 제자가 프랜시스 성자에게 물었다. “사부여 사부는 성자가 됐고 그 영광의 자리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프랜시스는 그렇게 대답했다. “제자여 하나님이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한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이 세계 속에서 가장 추한 사람이 누굴까? 가장 고민이 많은 사람이 누구일까? 가장 병든 사람이 누구일까? 그럴 때 바로 내가 눈에 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한 사람을 택해서 한 사람의 생애가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 그것을 보여 주시려고 나 같은 사람을 택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가장 추한 사람이었고 가장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고 가장 병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로 택해 주셔서 그렇게 된 거 뿐이다 자기 성덕에 대해서 그렇게 대답을 했다.
어느 날도 농부가 프랜시스의 성덕에 대해서 칭찬을 하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나에게 주신 은혜를 당신에게 주었다면 당신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답을 했다.
예수님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가장 병들고 추악하고 가장 고민이 많았던 나 같은 인생을 택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렇게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어느 사순절에는 사십일 금식을 하려고 절제 생활을 하는데 제자들이 가서 사십일 금식이 끝나는 날 가서 보니까 빵 한 덩어리를 가져다놓고 한 입을 뜯은 자국을 남겼다는 것이다.
“사십일 금식을 하면서 어떻게 빵을 먹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이 물으니 “예수님이 사십일 금식을 하셨는데 나 같은 것이 어떻게 똑같이 사십일 금식을 하겠습니까?” 삼십구일 금식하고 마지막 날 그 빵을 한입 먹음으로서 나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자기를 낮추어서 금식을 마쳤다는 일화도 있다.
이렇게 프랜시스는 자기 비움과 자기포기의 삶이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이다. 겸손과 비하로 그렇게 낮추는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세 번째 자기 비움과 자기포기의 삶이 주님을 향한 주님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오 주여 나의 전부여’ 라는 바로 이 고백이었다는 것이다.
그 자기 비움과 자기포기의 삶이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고백이다.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랜시스야 너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주님이 직접 그렇게 고백할 만큼 모든 인생 가운데 너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그렇게 주님이 칭찬할 만큼 사랑했다는 것이다.
주님을 향하여 ‘오 주여 나의 전부여’ 이 고백하면서 그 많은 사랑을 드렸던 그 사랑이 있었기에 가장 무서워하고 싫어했던 문등병자를 끌어안고 고름을 짜 주면서 치료도 할 수 있었고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이 있었기에 마을에 내려와서 사람을 죽였던 살인늑대를 찾아가서 그 살인늑대에게 회개하며 축복할 때 살인늑대가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해와 달과 별들까지 다 사랑한 사랑으로 오늘 본문 요한복음21장 주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질문 하실 때 밑에 간주에 보니까 '이 사람들' 그것을 '이것들 보다' 그런 말고 표현하고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주변의 있는 만물보다 오직 주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오 주여! 주님만이 나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 받은 사랑을 가지고 그것이 그의 삶에 여러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너무 외로워서 나도 결혼을 할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본적도 있고 나도 가족을 거느리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그 한밤중 추울 때 마당에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내 아내다. 이것이 내 자녀들이다. 자! 이제 이 자녀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
그러나 조금만 날이 따뜻해지면 그 눈이 다 녹아서 없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이 세상 것들은 허무하게 없어지는 것이다.
다시 마음을 잡고 ‘오 나의 주여 나의 전부여’ 주님만이 나의 전부라고 고백을 하며 그렇게 남은 생애를 달려간 것이다.
혹시 ‘송과체’ 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송과체라고 하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면 우리 뇌 깊숙이 자리 잡은 솔방울 형태의 콩알 크기의 호르몬 분비 기관이다.
이것이 뇌 속에 박혀 있는데 이것을 송과체라고 하는데 사람의 미간 눈 사이 이마에 깊숙이 이 송과체가 있다.
여기에 시신경이 있어서 눈처럼 빛이 들어오는 빛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기관이다. 그래서 이것을 '원시적인 눈', '제 3의 눈이다' 라고도 한다. 시신경이 이곳에 다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멜라토닌을 분비한다. 그래서 수면할 수 있는 리듬을 이 호르몬이 만들어 내고 사춘기 발현 시기를 이 호르몬이 정하고 활성 산소를 제거하는 호르몬이고 항산화호르몬인 노화를 억제하는 호르몬이 이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 DNP라는 것이 나오는데 죽음이 임박할 때에 영적으로 깨어나는 것에 관계되는 호르몬이 이곳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신비로운 체험과 계시와 투시력과 직감이 이루어지는 관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인도사람들은 요가하고 탄트라 이런 걸 하면서 동전을 그 이마에 붙이고서 수련을 했다. 그리고 햇빛을 받으면서 수련을 했다.
이것이 중요한 자리이므로 인도사람들은 이 곳에 점을 찍는다. 666이 표를 받는 자리도 바로 이 자리이다. 십사만사천명이 인을 받는 자리고 이 자리이다.
이마의 미간에 그 송과체라는 그곳에 바로 영원한 하늘 생명이 그 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곳에 열 체크를 하고 그곳이 열리지 못하도록...
이것이 어떻게 하면 열릴 것인가? 고대 인도사람들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요가를 하면서 그곳에 동전을 붙이고 음식을 통해서 햇빛의 에너지를 받으면서 명상하고 단전하고 그런데 과학자들에 의해서 최근 발견된 것은 이런 방법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고 내 가슴에 에너지와 그것이 연결되어 있는데 가슴의 에너지에 사랑이 충만하면 열리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144000명은 어떤 자들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니까 그 부어진 사랑 때문에 가슴이 열리면서 그 에너지가 송과체를 열리게 하면서 영원한 생명이 그곳에 유입된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것이다.
프랜시스 성자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로 부터 생명이 유입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오 주여 나의 전부여’ 그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받은 사랑 때문에 살인 늑대를 회개시키기도 하고 해와 달과 별까지도 다 사랑하고 문등병자를 끌어안고 고름을 짜주면서 그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자기 비움과 자기포기가 드러나는 것이다.
네 번째 마지막 사순절에 40일 금식기도를 또 하면서 프랜시스는 죽기 전에 두 가지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 하였다.
그 두 가지의 소원 중 한 가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원수와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던 십자가의 사랑을 맛보게 해 달라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기에 원수와 죄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죽을 수 있는지 그 십자가의 사랑을 친히 맛보게 해달라고...
또 한 가지 소원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맛보게 해 달라고 그것이 두 가지 소원이었다.
40일 금식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십자가의 주님이 받으셨던 오상과 똑같은 오상을 온몸으로 체험 하였다.
죽을 때까지 프랜시스는 그 오상에서 피를 흘리면서 그것을 사람들한테 감추고 나타내지 않고 은밀하게 감추면서 그렇게 자랑하지 않고 평생 살았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때 교회가 많이 어두워졌고 온 세계가 매우 어두워졌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교세가 1/4이 악화되고 성경은 더 많이 축소되고 발행하지 못하고 매우 영적으로 어두운 세대를 살아가는데 이런 세대일수록 하나님이 가장 어두웠던 중세에 프랜시스를 일으켜서 그 시대를 살리고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냈던 것처럼 정말 이 때에 프랜시스와 같은 성인들이 그립고 그 영성이 그리운 시절이다.
프랜시스는 800년 전 사람이었지만 지금도 프랜시스의 이야기를 한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을 받는다.
‘오 주여 나의 전부여’ 그 고백 속에 자신의 모든 사랑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단어를 말 할 때 마다 마치 달은 사탕을 먹는 것처럼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그 예수님의 단어가 너무 좋고 그 분이 나의 삶이 전부기 때문에 마치 사탕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고백을 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철학인가? 우리가 다 그런 성자들을 똑같이 따라갈 수 없겠지만 이 마지막 때 이런 영성이 필요한 때이고 그런 성자들이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중병으로 인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얼마나 잠시 다녀갈 세상인가를 크게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 비움과 자기포기의 삶이 물질관으로는 청빈과 무소유의 정신으로 나타나서 탁발수도회를 창설하여 길거리를 다니며 전도를 하면서 얻어먹는 탁발의 생활을 했던 그런 수도회를 창설한다.
자기 비움과 포기의 정신이 삶으로 더 비하하고 겸손하여 나 같은 추한 사람, 나 같은 고민이 많은 사람, 나 같이 병든 사람 그래서 절대적으로 은혜가 필요하고 예수님만 필요한 그런 사람을 택해서 한 사람의 생애가 이렇게 은혜로 변화됨을 보여주려고 나를 택한 것이다.
그런 겸손함으로 그렇게 살았고 자기 비움과 포기의 정신이 오직 주님만 사랑하겠다는 그래서 ‘오 주여 나의 전부여’ 라는 고백을 하였고 마지막 사순절 마지막 죽기 전에 십자가의 그 사랑과 고통을 맛보게 해 달라고 그것이 응답이 되어서 오상을 받고 살아간 것이 그분의 간략한 생애이고 그 정신이다.
우리가 다 따라 할 수 없겠지만 마지막 때 7년 풍년이 오는 것처럼 온 세상이 평안하고 안전한 세상이 와 풍요를 맛보는 세상이 찾아올 듯하다.
거짓과 이야기들이 소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우리 시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간다.
풍요 이후에 7년 대 환란이 오는 것처럼 그런 환란을 대비하는 그런 영성이 우리에게 필요한때 과연 풍요가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다시 한 번 영성을 깊이 생각하면서 프랜시스의 정신에 만의 하나라도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는 그래서 정말 익을 열매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그런 우리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