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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첫사랑을 회복하라

by Andrew Y Lee 2021. 2. 27.

첫사랑을 회복하라

 

요한계시록 2장 1절~5절

 

 

영정 성장은 모든 성도들의 목표이다.

 

하나님이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이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부르셨기 때문에

영적 성장은 모든 성도의 목표인데

성장의 필수 조건은 말씀과 기도이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있는 것처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영적 성장의 필수적인

조건인데 성경과 더불어서 영적 독서가 필요하다.

 

우리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영적 독서가 필요하고

또 영적 독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적용하여

유익을 줄 수 있는 그런 책들도 필요할 수 있죠.

 

그래서 성경과 함께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필수 도서

그다음에 영적으로 적용하여 유익할 수 있는

이런 책들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많은 수도자와 목회자들이 선정을 했다.

영적 독서의 필수적인 도서와 유익을 줄 수 있는

그런 책들을 설문 조사를 통해서 선정을 했는데

한 2~3백 권 정도 되었다고 한다.

 

영적 독서 필요하다.

이 책은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 독서가 아니라 할지라도 유익을 주는

그런 책 한 2~3백 권 정도를 이렇게 선정을 하였다.

 

오늘 영적 독서는 아닌데 우리가 영적으로 적용하여

유익을 주시는 그런 책을 내가 몇 년 전에

하나 본 적이 있었는데 책이름이 뭐냐 하면

‘첫인상 5초의 법칙’ 이다.

 

‘첫인상 5초의 법칙’ 사람이 살아갈 때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추진을 한다거나 결혼을 전제로 교제한다거나

인간관계 여러 가지 모임, 단체

또 교회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첫인상이 왜 좋아야 할까? 왜 필요할까?

좋은 인상을 서로 남겨서 그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첫 인상이 중요한 것이다.

 

‘첫인상 5초의 법칙’ 그 책에서는 우리의 첫인상이

5초 만에 결정이 된다는 그런 주장이다.

 

시간을 잘 지키는가? 밝은 표정인가? 옷 모양은 어떠한지

언어와 자세 이런 것들이 5초 만에 첫 인상에서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자신감이 있는 사람인지,

친근감이 있는지 이런 걸 가지고 5초 만에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첫인상이 인생에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첫인상이 나쁘게 되면 그것을 바꾸려면 40번을 만나야

한다고 40번을 다시 만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바뀌어 지는데 한 번 굳어진 이미지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그 5초 만에 결정된 첫 인상이 바뀌어 지려면

40번을 만나서 고쳐야 한다.

거의 바꾸기 힘들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이 영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느냐?

무슨 유익이 있느냐?

나는 그 책을 보면서 우리 주인과의 관계에다가

연결시켜서 생각을 했던 것이다.

 

우리 주님과도 처음 만났을 때 주님하고의

첫 인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과의 첫사랑

주님과의 처음 만남의 첫 인상, 첫 사랑

이것이 일생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첫 인상이 서로 인간관계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처럼

첫 사랑, 첫 인상 이것이 우리의 일상의 시간과 생활,

일생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첫 사랑은 두 종류인데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첫사랑, 주님에 대한 첫인상

그것이 있고 주님이 우리를 보는 첫사랑이 있다.

 

서로 우리도 주님에 대해 예수님 믿고 주님 만나서

그 첫사랑 주님에 대한 첫인상이 있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대한 첫사랑이 또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대한 그 첫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화가 없으신

그런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를 오래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그 첫사랑이 변함없이 이렇게 하는 게 주님의 사랑이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 대한 첫사랑은

우리에게 이제 그런 속담들 있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을 보면 안다.’

싹수를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될 성 싶은 나무는 처음부터 싹을 보면 아는 것처럼

주님이 보시는 우리에 대한 그 첫사랑을 가지고

주님은 여러 가지를 결정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편에서는 잘 모르지만 주님이 우리를 보면서

그 첫사랑을 가지고 사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어디까지 성장시킬 수 있겠구나!’

하나님이 거는 기대가 그때 결정이 된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원의다. 예정된 뜻이다.

사실은 하나님이 예정된 섭리대로 영적 성장,

우리가 어디까지 성장해서 천국에 와서 어느 위치에 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예정된 것이다.

 

우리는 그 예정 섭리를 모른다. 사람의 원의가 있다.

 

그런데 우리 편에서 볼 때는 그 첫사랑을 보고

그것을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이 정도 성장, 이 정도 첫사랑이면

중학교까지 해도 되겠다, 고등학교까지 성장할 수 있겠다,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 하겠다.

 

그러니까 그 처음의 사랑을 보고 주님 편에서는

기대가 있고 또 주님은 어떠한 성장의 예정이 있고

또 주님은 사명까지도 그 첫 사랑을 보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 대한 첫사랑은 변화가 없는데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첫사랑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첫인상, 주님에 대한 첫사랑이

다 있을 터인데 이 첫사랑이 변해서 이 첫사랑이 회복되지

못하면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영적 성장도 멈춰버리게 되고 앉은뱅이 신앙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주님이 우리에 대한 첫사랑을 보시고 하는

기대도 기대치에 이르지 못하니까 기대도 저버리게 된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 말씀에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칭찬도 많이 받고

좋은 점도 많은 목회자였다.

 

요한계시록 2장 2절~3절 말씀을 보면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여러 가지 모험을

해서 수고하는 여러 가지 행위,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그런 목회자였다.

또 인내를 알고 오래 참음으로 잘했다는 것이다.

 

3절에도 또 말씀 하셨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다. 좋은 점이다.

부지런하게 게으르지 않는 신앙생활도 했고 여러 가지

수고했고 인내, 참고 견딘 것 이것도 아주 좋은 점으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 이건 아주 훌륭한 점이다.

 

그런데 오늘 책망할 것이 있는데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처음 사람을 저 버렸다.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았지만 처음 사랑을 저버린 것에

대해서는 무섭게 책망을 하신다.

그래서 이것이 회복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회복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 5절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첫 번째 처음 사람이 회복되려면

그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회개하여 그다음에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래서 돌이키는 방법이 어디서부터 떨어졌는가?

그걸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랬다.

 

이 에베소 교회는 어디에서 그 첫사랑이 떨어졌는가를

생각하는데 그것이 6절에 있는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할 때 니골라당의 행위

이것에 있다고... 그렇기에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

 

니골라당이 뭐겠는가?

 

사도행전 6장 5절 말씀에 보면 초대교회에 일곱 집사님을

택하게 된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초대교회에 3천명 5천명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많은 사람이 모이니까

이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하는 것과 전도하기 위해서

일곱 집사님을 택하는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이 일곱명의 집사가 다 헬라파 사람들이다.

이 이름들이 다 헬라식 이름이다.

오늘날 말하면 안수 집사이다.

 

6절에 보니까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초대교회에 안수집사님 7명을 세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니골라가 변질이 됐다는 것이다.

그가 쓴 것이 니골라당이라고 하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 그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처음 사람을 잃어버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계시록의 2장과 3장을 해석하면서

우리가 이 계시록 2장 3장의 아시아 7개 교회를

특별히 주님이 정하셔서 편지하게 하셨는데

이것을 두 가지로 해석을 한다.

 

에베소를 비롯하여 일곱 교회가 초대교회부터

마지막 주님이 오실 때까지의 그 시대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 해석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일곱 교회가 모든 교회시대의

교회들의 모형이다.

 

두 가지를 다 취하는 것이 좋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인데 그 초대 교회가

니골라 당의 행위 때문에 처음사랑을 잊어버린 것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고 또 교회 시대 동안에 어떠한 교회든지

에베소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그런 교회가 많고

그런 목회자와 성도가 많은데 그것이 전부 니골라당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니골라당의 교훈이 무엇인가?

니골라가 변질돼서 이제 나타난 것이 바로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초대 영지주의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 영지주의가 뭐냐 하면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버리는 것이다. 이분법이라고 한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분법

우리가 영원만 구원받는 것이지

육체는 이 구원에 아무 영향이 없다.

그래서 그 육체가 죄를 짓고 우상 숭배하고 율법을 어기고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이 없다 하는 것이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교회가 문제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영지주의로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여 이렇게 다시 사시는

그 육체를 부인하니까 예수님의 부활도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이 여전히 죄가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그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구원관이 바로 설 수가

없는 그 잘못된 사상이다.

 

이것이 초대교회부터 나타나서 오늘날 교회시대의 모든

이단들의 온상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 구원파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구원받게 되면 육체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렇게 영혼과 육체를 분리한다는 말이다.

 

오늘 개신교도 마찬가지이다.

믿음만능주의를 주장하면서 아예 그냥 회개하면 된다.

온전한 회개를 평생 하면서 우리가 사는 것인데

그냥 회개함은 그 육체의 범죄가 쉽게 없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착각을 한다.

그런 것이 전부 여기에 영지주의 그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라고 하는 이 두 가지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영혼과 육체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몸의 구속을 받아야 한다.

그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로마서 8장에 말했다.

 

로마서 8장에 영혼은 구원을 받아서 죄에서 해방이 됐지만

몸의 구속을 내가 기다린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에는 지금 내가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온 건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데

그 푯대가 무엇인가? 몸의 구속이다.

 

부활을 기다리는 거니까 이 영혼과 이 몸이 다 구속을

받아야 하는 것이 본래 기독교의 정신인데

그것을 갈라놓으려는 것이다.

그것이 영지주이고 니골라당이 주장했던 것인데

예수님이 니골당의 행위를 미워한다.

그렇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다.

 

초대교회의 큰 이단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영혼은 구원 받지만 육체가 그 행위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고

육체가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오늘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야보고서 2장 17절~18절 말씀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자연으로 따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영혼의 문제고 행함은 내 육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이 같이 따라가야 한다.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아 허탈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행함이 따라오지 못하면 그 믿음은 헛것이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22절에 말씀하신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과 행함이 함께 일하고 손바닥에 양면과 같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손바닥의 앞뒤처럼 행함과 믿음이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21절에 아브라함을 예를 들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것에 행함으로 나갔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24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데 그렇게 된다면 행함으로

그것이 따라와야 된다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이렇게 분명히 말씀을 한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건 아니지만 행함 자체로

그 믿음이 완전케 돼서 그것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영혼이 없으면 몸이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과 몸이 같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는 일원론이다.

 

이 우주의 역사와 모든 되지는 섭리가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일원론인 것이다.

 

그런데 이원론을 보면 하나님 외에 다른 많은 신들이 있어서

그 신들로 말미암아 우주의 모든 일이 일어나고

진리는 그렇게 여러 개로 나눠져야 한다는 것이 이원론이다.

 

그것이 오늘 헬라의 사상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초대 교회부터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그 집사님들도 전부 헬라파 집사님들로

세워 복음이 온 세계 전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원론을

허락하셨는데 그런데 본질상으로 그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것이 오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첫사랑을 받게 되고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이뤄가게 된다면

그다음에 나타난 것이 삶의 문제인 것이다.

 

삶의 문제

내 행위가 쫓아가지 않으면 영적 성장도 안 되고

행위가 쫒아가지 않으면 우리 사명을 이룰 수도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씩 거는 그 첫사랑에 대한 기대가

무너져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첫사랑을 회복하지 못하면 촛대를 옮기리라

이렇게 책망을 하셨는데 그 촛대를 옮긴다고 하는 것은

촛대가 교회이다.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은

이제는 그 교회에 은혜를 내리지 않겠다.

버림받는 기회가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럽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이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이 유럽이 한 때는 복음이 전파돼서 얼마나 뜨겁게 되었었나.

영국은 온 세계에 성경을 찍어서 다 파송을 하고

얼마나 많은 열정을 가지고 얼마나 뜨거웠었는가?

 

그런데 오늘날 어떻게 되었나?

목회자는 하나의 종교 공무원이다.

월급 받는 정부의 공무원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의 서비스기관, 종교서비스 기관으로

이렇게 변질되어 유럽 교회는 다 무너져 있다.

 

주일 날 노인들만 교회에 나오게 되고 말이다.

껍데기만 남아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다.

 

유럽 교회들이 전부 첫사랑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 사태를 보면서 한국 교회도

그런 유럽교회의 전처를 밟으면서 그렇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런 진단을 한다.

 

코로나 사태를 보면서 과연 각 사람에게 믿음이 있었나?

그 행위가 코로나 같은 이런 현실에 부딪치니까

다 들어난다. 과연 그것이 진짜 믿음이었는가?

 

그래서 어디에서 떨어졌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데

그것은 니골라당과 무관치 않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되고

전부 삶으로 그 믿음을 따라가지 못한 거기에서부터

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그 믿음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세우기 위해서

어디서 떨어졌는가? 스스로 생각하면서 회개하라 그러셨다.

 

회개하라! 회개는 삶의 문제이다.

이 행위도 회개 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동기.

그 행위를 일으키게 되는 동기! 마음도 회개해야 된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우리는 내면으로 짓는 죄를

다 회개 하는 이런 경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미워하면 이미 살인했다고 한다.

성장할수록 마음으로 나타나는 죄를 회개하고

더 성장할수록 생각으로 나타나는 그것까지도 회개해야 한다.

 

순간적으로 그런 나쁜 생각과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다음에는 그 마음의 문제가 아니고

생각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생각 자체도 오늘 회개하면서 성장할수록 점점 그러니까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행위로 드러난

것만 회개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조금 더 성장하게 되면 마음으로 드러난 것도

정말로 살인한 것처럼 간음한 것처럼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처럼 마음이 이미 죄를 범하는 동기니까

그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더 성장하면 그런 생각 들어오는 것 자체를 회개해야

된다는 것이다.

 

가롯 유다가 그랬다.

예수님이 떡을 집어주는 그 순간에 이미 악한마귀가

생각을 집어넣었다.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다.

생각으로 공격받는다.

그래서 생각 자체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는 처음 행위를 다시 찾으라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주님에 대한 첫인상 죄악 세상을 살다가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셨던 그 주님에 대한 첫 인상,

주님에 대한 그 첫사랑, 주님만을 열렬히 사랑했던 그 사랑

그래서 그 사랑이 놀라워서 그 사랑을 받고 나가

이웃을 사랑했던 그 사랑으로 처음의 사랑을 다시 갖아라.

 

아까 내가 말한 ‘첫인상 5초의 법칙’에서 처음에 인상을

바꾸려면 40번을 만나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것처럼 우리가 주님이 나에 대한 첫사랑이 있어서

그 첫사랑을 통해서 사명을 정해주시고

그 첫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있고

그 첫사랑 때문에 영적 성장의 원리가 있어서 어디까지

성장 시키겠다 그런 하나의 뜻이 있는데

오늘 그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사랑도 주저앉아버리고 성장도 주저앉아버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거는 그 기대도 주저앉아버리는데

오늘 그 첫 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40번을 만나라는

그 책의 저자처럼 자주 만나서 나의 이미지를 개선시키고

새롭게 돼서 그것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0번을 만나도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첫사랑에 대한 그것이 회복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회복하면서

어디에서부터 떨어졌는가? 원인을 찾아서

그다음에는 회개할건 회개 하면서 그 처음사랑을 다시 가져라

이렇게 해서 회복이 되어 진다는 것이다.

 

주님을 자주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꾸 주님을 찾고 주님이 나에 대한 첫 인상

그것을 회복하고 자꾸 이미지를 바꾸어야 한다.

 

감사한 것은 그분이 항상 참아주신다.

우리를 일생 동안 참아주신다. 기다려 주신다.

 

우리가 그것을 방종으로 하면 안 되고

그 참아주지만 세상 말로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말하는데

반복되는 죄를 또 짓고 또 짓고 또 습관적으로 짓지만

주님은 속아 주신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이렇게 늘 속아 주시고

그런 것처럼 똑같은 것이다.

그냥 뭔가 좀 자식이 다시 한 번 해보겠다고 하는

그런 의지를 조금만 보이면 뻔히 알지 않는가?

'아유 저거 또 며칠이나 가겠는가?' 그러면서

여전히 속아주고 기다려 준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주님이 우리를 기다려 주신다.

 

조금만 회개하는 모습만 보여도 그냥 반가워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밤마다 문 열어놓으니

기다리면서 그렇게 우리가 돌아주기를 그렇게 기다리신다.

 

부활절이 4월초 첫 째 주인데 그 무렵이

유월절과 초실절과 거의 비슷하게 간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늘 유월절, 초실절 이라고 하는

1년의 절기를 따라 거기에 걸맞은 은혜를 주시는

기간이었는데 사순절로 40일을 작정하지는 않아도

우리가 이제 멀지 않아 유월절이 다가 오는 구나

 

그 절기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러면서 그 유월절이 지나면

무교절이 오고 초실절인데 그것이 부활이란 말이다.

 

예수님이 처음 열매이니까 그 절기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거기에 걸맞은 은혜를 주는 기간이 또 온 것이다.

 

지금쯤 우리가 사순절과 비슷한 개념으로 부활절 유월절 초실절

이런 절기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은혜 받는 기간으로

다시 한 번 처음 사랑을 생각하면서

 

이것을 회복하는 기회로 다시 한 번 각자 마음에

작정을 해야 될 줄 믿는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한 번 유월절의 어린 양 대신

예수님의 은혜 받고 구원이 됐는데

오늘 나의 첫사랑이 어디서부터 떨어졌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나는 금년이 예수님 믿은 지 40년 되는 해이다.

40년 되는 달이 7월 달이다.

 

7월에 변화가 됐고 7월에 성령을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레위기 16장에 7월 달이 속죄 절기에

이스라엘의 달력이 우리와는 다르기는 하지만

7월 달을 내가 거듭난 그런 때이고 금년 7월 달을 기다리고

40년이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것을 예상하면서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우리 각자가 유월절 초실절 절기를

중심으로 해서 또다시 은혜 받는 기회가 왔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마음의 작정을 하고 나의 첫사랑

주님에 대한 첫인상은 어디에서부터 떨어졌는가?

나에게 니골라당의 행위 같은 그런 것이 없는가?

한번 돌이켜서 살펴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육체로 행위로 드리지 못하는 이런 것들을

다시 한 번 이 기간을 통해 회개 하면서

다시 한 번 마음에 작정을 해서 처음 행위를 다시 갖게 돼서

그것이 열매로 드러나야 그렇게 회복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회복이 되어 준다면 이런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날 줄을 믿는다.

 

첫사랑을 다시 한 번 회복하고 그것이 회복되는

도전의 기회로 작정하셔서 새롭게 되어 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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