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의 길 영성시리즈
누가복음 10:38-42
14. 마리아와 마르다의 영성
최근에 기독교계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있는데, 영성이라는 말입니다.
영성생활, 영성신학, 영성세미나, 영성시리즈, 영성집회, 영성캠프 등 많이 쓰고 있지요.
영성의 정의가 무엇일까요? 쉬운 것 같지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영성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 하라”고 하셨으므로 완전의 길로 가는
모든 과정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우리 심령에 오셔서 나타나는 모든 역사가 다 영성입니다.
모든 물질에는 다 물질의 성질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도 물질인데, 육성이라고도 하지만 물질이므로 물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성이란 비 물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성의 반대요, 물질성의 반대의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이 오셨으므로,
성령의 은사, 성령을 따라 나타나는 신비, 영적 생명, 진리, 성결의 모습 등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영성입니다.
영성은 크게 두 가지인데,
마르다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이 있습니다.
마르다의 영성은 활동적이고 동적인 영성이고 이웃에 대한 영성생활로 나타납니다.
마리아의 영성은 비활동적이고 정적인 영성이고, 자기 자신 개인의 영성생활로 나타납니다.
본문에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는 일에 분주하였는데 이웃을 대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일에 전념하였는데,
이는 자신만의 영혼을 위한 일이었는데, 예수님은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대부분은 이 두 가지의 영성이 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로운 세상에 할 일이 많아 날 가라”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목회자, 직분자, 선교사, 기도원사역자, 사모님, 장로님, 그리고 다 중보 기도자 들입니다.
혼자 영성생활하며 마리아처럼 완전의 길을 가며,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며
이웃과 상관없는 삶을 살만한 분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두 가지의 영성생활을 감당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어거스틴의 해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카토릭 교회나 개신교에서 다 같이 존경받는 교부 중 한분이십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생활 하는 분으로 완전을 추구하는 교부였고,
교구에 담당 교회에 목회자로 많은 영혼을 감당하여야 했고,
신학교를 세워 후배 양성하며 교리를 바로 세워야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3가지를 감당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저도 한 때 3가지의 사역을 감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해법에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두 가지의 영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쪽은 물이고, 한쪽은 불인데, 물과 불 사이를 걸아 가는 것 같다고....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에 데고 다른 쪽으로 치우치면 물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지혜롭게 치우치지 않고 잘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영성을 감당한 그의 해법을 봅니다.
첫째는 목자이며 동시에 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예배인도와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는 자인데,
우리가 다 목회자 아니어도 나름 맡겨진 양들이 있습니다.
나보다 어린 영혼들, 자녀, 구역원들 등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이 목자임과 동시에,
자신이 주님 앞에 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영혼들을 인도하는 목자라도 내 개인이 주님 앞에 양이 되지 못하면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목자임과 동시에 양이 되었을 때 두 가지의 영성을 겸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생이며 동시에 제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가르치는 교사, 선생이지만 주님 앞에는 항상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선생은 아니어도, 나름 나보다 어린영혼을 맡기셨다면 끊임없이 주님 앞에
겸손히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말씀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지식만 아니다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불우하게 자라서 어려운 동네에 살았는데,
동네 근처 유리 공장에 다니는 동네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유리 공장에서 기술자에게 매를 맞으며 뜨거운 불에 데어가며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 기술은 다름 아니라 펄펄 끊는 유리물을 대롱에 찍어 그것을 불어서 유리병과
유리제품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술을 익혀야 제대로 대접을 받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기술을 배우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안에서 예수님께 배운다는 것은 삶의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경질 나고 짜증날 때 신경질 안 내고 짜증 안내는 기술입니다.
교만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교만이 올라오지 않는 기술입니다.
원망 불평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기술입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이라고 합니까? 부자라고 합니까?
오직 주님께 배운 사람만 하는 것입니다.
인도에 어느 어머니는 아이가 설탕을 너무 좋아해 스승에게 아이를 권면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스승은 한 주, 두 주가 지나도 권면하지 않습니다.
세 주가 지날 때에 비로써 아이에게 설탕은 몸에 안 좋으니 끊으라고 권면합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왜 진작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질문할 때
스승은 그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도 설탕을 좋아하고 있었거든요...”
자기가 먼저 실천하고 가르치려고 했단 교훈입니다.
셋째는 제사장이며 제물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는 예배지요, 예배를 주관할 때나 앞장 설 때
자신이 한 알의 밀 되신 주님처럼 제물로 죽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의식의 예배가 아닌 몸의 산제사가 우리의 삶입니다.
펼쳐진 제단에 나의 삶이 모두가 제물인데, 우리가 제사장이 되며 동시에 제물이 될 때
두 가지의 영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두 가지의 영성 갖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보기도자로 부름 받았다면 반드시 감당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불과 물 사이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양쪽을 다 감당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시므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진리를 사랑하고
예수님의 지체인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의 방의 여러분 모두가 두 가지의 영성을 겸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성의 사람들이 되시고
여러분의 간구가 많은 기적을 나타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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