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린도전서 13:1-13, 제목 : 사랑의 별명
별명이라는 것은
사람의 사물의 실제 이름 대신 쓰이는 이름으로 그것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별명은
사람이나 사물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것에도 붙을 수 있습니다.
사랑에도 별명이 있습니다.
한 인도의 시인은 사랑의 별명을 ‘이해’라고 하였습니다.
이해의 반대말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오해를 두고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므로 오해 하였도다’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무지한 것은 오해를 낳습니다.
이런 무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우리 자신의 경험과 감각,
자신의 상식에 의지하여 판단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오해들을 풀고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것들을 깨닫게 되면
이해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곧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서로에 대하여 잘 몰라서 오해하기도 합니다.
고양이와 개의 관계가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개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가 올라가는 반면
고양이는 기분이 안 좋을 때 꼬리가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를 보았을 때
상대방의 기분을 오해하게 되어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해의 사전적인 의미는 ‘부분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단편적인 사실들만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해에 이를 수 없고
내 상식과는 맞지 않는다는 억측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각 차이에 의한 오해는 싸움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 간의 편을 갈라놓습니다.
성도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담을 허무는 이해, 곧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언젠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과 같이
주님을 온전히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하였고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폐할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날이 이르지 못했으나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영적으로 어린아이였을 때는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배려’입니다.
이 배려는 사랑의 또 다른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진정 실제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선 자신의 이해를 토대로 배려를 해야 합니다.
세월호 사건이 많은 아픔을 낳은 가운데,
사고 현장에서 배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사람들의 삶이 조명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끝까지 구명조끼를 입지 않고 승객들의 대피에 온힘을 다한 승무원,
끝가지 다른 친구들의 탈출을 도우며 결국 자신은 탈출하지 못한 한 학생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줍니다.
사랑의 별명은 이해와 배려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의 이런 면면들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점검하고
사랑이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