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호수아 별세 이후부터 예루살렘성이 완성되기까지
(1) 모형적진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은 후에,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명을 다 마쳤기 때문에 약 10년 동안 조용히 살다가 별세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13명의 사사 즉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엘리 등에 의하여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사통치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범죄 할 때마다 이방민족의 군대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식민지가 되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사를 세워서 괴롭히던 이방세력들을 물리치고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사사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숭배하던 신이나 우상도 다양하고, 이방민족들에게 짓밟혀서 고통 받는 기간도 각각 다르며, 사사들이 활동하던 지역도 다르고, 그들의 권세와 능력도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통치시대’가 끝날 무렵 즉 엘리 제사장이 성막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블레셋 군대에게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었고, 그 뒤를 이어 사무엘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사울왕은 한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몇 번 거역한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17살이었던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장차 이스라엘을 강력한 하나님의 왕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지도자로서 훈련을 받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13년이 지난 후에 사울왕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다가 죽었고, 그 뒤를 이어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7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사울왕과 다윗왕이 통치하였던 시대에 점진적으로 강력한 하나님의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 시대와 다윗왕 시대를 비교해 보면, 두 왕이 각각 40년 동안 통치를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고 이방민족들을 향한 권세와 능력은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왕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 가운데 부족한 점들이 많이 있었고, 종종 이방민족들의 침략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항상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다윗왕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았으며, 가나안 땅의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들을 대부분 정복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였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사사통치시대보다 사울왕 통치시대에, 그리고 사울왕 통치시대보다 다윗왕 통치시대에, 모든 면에서 더 강해지고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왕은 즉위한지 4년이 되었을 때부터 20년 동안,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성곽을 준공시킴으로써 가장 강력한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던 날부터 가나안 땅에 예루살렘 성을 완성함으로써 강력한 이스라엘 왕국이 완성될 때까지 500년이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모형적진리에 대한 해설
여호수아가 별세한 후부터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성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성도들이 생명수가 폭주하는 체험을 할 때부터 완덕(完德)에 도달하기까지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영적 할례 즉 성결은총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되는 체험을 할 때부터 생명수가 계속적으로 유입되는 체험을 하면서 완덕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사사통치시대’와 ‘왕권통치시대’로 나누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한 사사들과 왕들의 권세와 능력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과정이 확실하게 둘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통치시대의 사사들도 세밀하게 살펴보면 각각 서로 다른 면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울왕과 다윗왕이 백성들을 통치할 때에도 많은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통치자들의 능력이 강한 모습과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성도들의 영 안에 내주하신 성령 즉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내시는 능력이 강할 때와 약할 때가 있다는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도하는 통치자의 권세와 능력이 사사 시대보다 사울왕 시대가 더 강하고 사울왕 시대보다 다윗왕 시대가 더 강하다는 것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더 높이 성장할수록 영 안에 내주하신 생명이 능력을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내주신다는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영 안에 내주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능력을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내심에 따라 성도들은 육신과 마귀와 세상을 더욱 온전하게 승리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통치자들의 권세와 능력이 강할수록 이방민족의 우상과 군대의 세력을 더 강력하게 물리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성도들의 심령에 나타내시는 생명의 능력이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더 강하게 되어 이방의 세력 즉 정욕과 죄성과 마귀의 세력을 더욱 더 쉽게 이기며 영성의 열매를 더 풍성하게 맺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영속에 내주하신 생명의 능력이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차이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여호수아가 통치할 때와 다윗왕이 통치할 때의 권세와 능력이 사사들이나 사울왕이 통치할 때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여호수아와 다윗왕이 통치하는 과정을 통과할 때는 생명의 능력이 심령 가운데 아주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별세한 후에 사사들이 통치하였는데, 그 권세와 능력을 비교해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을 다스릴 때보다 훨씬 약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사들도 서로 비교해보면 강하고 약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심령 가운데 내주하신 하나님의 생명도 여호수아가 통치하는 과정을 통과할 때는 능력을 매우 강하게 나타내시고, 사사들이 통치하는 과정을 통과할 때는 비교적 약하게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들이 통치하는 과정을 통과할 때보다 사울왕이 통치할 때, 사울왕이 통치할 때보다 다윗왕이 통치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더 큰 능력을 나타내시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 즉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의 전기나 체험담을 기록한 책들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거나 이방민족들에게 침략을 받아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모형적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 즉 심령천국이 이루어진 성도들의 심령상태와 영성생활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이러한 성도들은 영속에 있는 죄성과 정욕이 제거되고 생명의 성령이 내주합일 되어 심령천국이 이루어진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은 로마서 8장 2절에 기록한 것과 같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법에서 해방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 가운데는 여전히 죄성과 정욕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 10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서 8장 체험에 들어간 성도들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의 영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의롭고 거룩한 상태가 되었지만, 몸에는 타다 남은 부지깽이처럼 죄의 뿌리가 남아있는데 이것은 장차 부활체를 입게 될 때에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도 정욕의 지배를 받을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방민족들에게 침략을 받아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우상을 숭배한 죄 즉 정욕의 지배를 받았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귀가 주는 극심한 환난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결은총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이 폭포수와 같이 유입되는 체험을 계속하고 있는 성도들도, 광야를 통과하는 성도들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지만, 때로는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된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통하여 고난풍파를 겪게 하시면서 철저하게 참회하는 생활을 하도록 하십니다. 이때 성도들은 순간적으로 정과 욕의 지배를 받았던 부끄러움을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주님의 형상을 점점 더 온전하게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이 우상 즉 정욕의 지배를 받는 삶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99세가 되었을 때 새 이름과 할례를 받았으며, 100세가 되었을 때 이삭을 후사로 받게 되었는데 이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후사였기 때문에 이삭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그들을 집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이삭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을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순수한 영적 사랑을 가지고 이삭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이름을 받을 때 영적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되는 축복을 받았는데, 그 후에도 12아들 가운데 요셉을 지나치게 편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입혀줄 정도로 편애하였는데, 이러한 야곱의 육적 애정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형제들의 미움을 받게 하였고, 결국 상인들을 통하여 애굽 땅으로 팔려가는 사건이 생기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요셉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는 가운데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였던 잘못을 철저히 회개하면서 영성생활이 한층 더 진보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요셉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당할 때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 즉 익은 열매가 된지 상당한 세월이 지나간 후였습니다. 이러한 유혹을 물리쳤기 때문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미움을 받아 결국 감옥에 들어가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요셉이 그 유혹하는 여인으로부터 완전무결하게 승리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마음을 세밀하게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유혹을 받는 순간순간 남녀간의 애정에 지배를 당하는 부끄러운 점들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성생활이 부족하였던 요셉을 더 높은 경지의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약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시련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 외적으로는 큰 승리를 하게 된 것 같지만, 마음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상태 즉 정욕의 지배를 받은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민족들의 침략을 당하게 하셨던 것처럼 감옥에서 고난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엘리야 선지자를 알아보겠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제단에 불을 내리게 하고 바알과 아스다롯의 선지자 850명을 죽이는 가운데 명예욕과 권세욕의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리고 왕비 이세벨에게 미움을 받아 수십일 동안 광야에서 쫓기는 가운데 굶주리고 지쳐서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엘리야는 명예욕이나 식욕 등 정욕의 지배를 받는 부끄러움을 나타냄으로써 많은 고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 과정을 통과할 때 여러 가지 거칠고 사나운 환경이나 유혹하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가운데서 정욕의 지배 즉 우상을 숭배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면 징계하시는 뜻에 따라 마귀들의 침략을 받게 하시면서 영성생활이 더 진보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더 영적으로 높은 단계로 들어가면 더 큰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익은 열매가 된 성도들의 발자취를 자세히 살펴보면 신약시대의 성도들보다 애정과 욕망을 절제하는 삶이 훨씬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성도들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서로 차이점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모세의 율법이 선포되기 전, 즉 족장시대에 살던 성도들과 율법이 선포된 이후에 살던 성도들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선포된 이후에 살던 성도들의 삶을 분석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이 살았던 족장시대와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등이 살았던 율법시대와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세례 요한 등이 살았던 선지자시대를 서로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큰 차이점이 생긴 이유는 하나님께서 빛에 대한 말씀, 즉 교훈적인 말씀을 구속사의 흐름에 따라 점점 더 자세하고 풍성하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 역사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좀 더 보완이 되고 발전하였기 때문에, 성도들은 지극히 작은 죄와 정욕까지도 온전하게 분별하면서 더 철저한 영성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신 산상수훈이나 바울 사도를 통해서 가르쳐주신 고린도전서 13장과 로마서 12장의 말씀은 이 세상에 나온 교훈적인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진리가 점점 발전하게 된 사실에 대하여 실례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로부터 역대상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족장시대나 율법시대에는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 즉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 등은 땅에서 성결은총을 받고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인데,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시대 즉 엘리야가 활동하던 때부터 세례 요한이 나타날 때까지, 이 땅에서 성결은총을 받았던 분들을 살펴보면 독신생활을 하였거나 한 명의 부인만을 두고 어느 정도 엄격한 절제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라고 정죄하셨으며, 신약성경에 나온 대부분의 말씀이 남녀간의 애정과 성욕을 엄격하게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사도를 비롯하여 교회시대에 등장한 성인들의 사상이나 삶에 대하여 기록한 전기를 살펴보면, 지극히 작은 죄라고 할지라도 철저하게 참회하면서 정과 욕심을 엄격하게 절제하는 영성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대표적인 영성지도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로, 중세교회에서 현대교회로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정과 욕심을 절제하는 생활이 더욱더 엄격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교역자들은 이러한 진리를 잘 알지 못하고 정과 욕심을 철저하게 절제하는 삶에 대하여 무가치하게 평가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영성생활에 대하여 잘못 평가하는 분들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나온 바와 같이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생활’ 즉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매우 귀하게 여기면서 행한 대로 상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는 천국의 원리에 대하여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분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신약시대의 성도들 가운데 땅 위에 사는 동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신앙을 가지고, 정과 욕심을 절제하면서 철저한 영성생활을 하였던 몇 분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었던 사도 바울은 13권의 성경을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정과 욕심을 절제하는 삶에 대하여 많이 강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2-14절을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7장 7-31절을 보면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다 지나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프랜시스 성자의 거룩한 행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프랜시스는 철저한 회개와 절제생활을 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점점 시력이 악화되어 그 생애의 말년에는 소경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프랜시스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자신이 머물고 있던 기도처를 떠나 베르나르도를 찾아갔습니다. 프랜시스는 베르나르도가 머물고 있는 기도처로 가서 “여기로 와서 이 소경에게 이야기를 해주시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또 한 번 불러보고, 다음에 한 번 더 불러보았으나 여전히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프랜시스는 세 번이나 불렀는데도 베르나르도 형제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글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고 근처 외딴 곳으로 간 프랜시스는 왜 베르나르도 형제가 응답이 없는지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이 불쌍하고 작은 사람아, 어찌하여 고민하느냐? 사람이 피조물 때문에 하나님을 저버려야 하겠느냐? 네가 부르던 베르나르도 형제는 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너에게 갈 수 없었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대답하지 못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그는 나에게 깊이 몰입하여 있었기 때문에 네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러한 응답을 받고 프랜시스는 즉시 자기 마음속에 품었던 나쁜 생각을 겸손히 고백하기 위해서 베르나르도 형제에게 나아갔습니다. 베르나르도 형제는 자기에게 오고 있는 스승을 보자 달려가서 그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프랜시스는 베르나르도를 일어나라고 한 후에 잠깐 동안 자신이 가졌던 생각들과 번민하였던 것들을 겸손하게 말하고, 또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중에 자기를 꾸짖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습니다.
“거룩한 순명으로 형제에게 명하노니 내가 지시하는 대로 실행하여 주시오. 내가 지금 땅바닥에 똑바로 누울 것이니 주책없고 뻔뻔스러운 내 마음을 징벌하기 위해 한 쪽 발로는 내 목을, 다른 쪽 발로는 내 입을 딛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세 번 넘으면서 창피를 주고 욕을 하십시오. 또한 ‘여기에 누워있는 야비한 놈 삐에뜨로 디 벨라도네의 자식아, 피조물 중에서 가장 못된 놈이 어쩌면 그렇게 교만하냐?’라고 나에게 말하시오.” 베르나르도 형제는 그것은 너무 심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거룩한 순명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프랜시스가 명령하는 대로 하였습니다.
프랜시스는 수도회가 창립된 후에 언제나 공동기도 시간에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생애의 말년에는 몸이 매우 허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공동기도 시간에 빠지지 않았으며, 몸을 벽에 기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행 중에 정해진 기도 시간이 되면 필요한 시간만큼 발걸음을 멈추었고, 말을 타고 갈 때는 말에서 내려왔습니다.
1223년 12월 프랜시스는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쏟아지는 비를 맞고 옷이 흠뻑 젖은 채로 정해진 그날의 성무일도를 끝까지 바쳤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프랜시스의 건강을 염려하여 항의를 하자 “육신도 그렇듯이 영혼도 조용하게 먹을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소.”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프랜시스는 한가한 시간에 작은 컵을 깎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완성했을 때는 공동기도를 바칠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기도를 드리는 중에 프랜시스는 자꾸만 마음이 완성된 작품에 쏠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는데 잘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프랜시스는 분심이 들어왔음을 깨닫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빼앗아간 그 컵을 불 속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 가운데 한분이신 병상의 증거자 K선생님을 통해서 우상 즉 정과 욕심의 지배를 받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1971년 1월 4일 새벽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생명수가 폭포와 같이 흘러 들어오는 가운데 풍성한 기쁨과 평강과 능력을 맛보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신앙적으로 사랑과 위로를 나누며 깊이 교제하던 친구들이나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 가운데 1971년 10월부터 대화와 교제를 시작하였던 J라는 여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 당시에 제가 살고 있던 동네로 이사를 하신 분으로서,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진리를 깨닫고 출애굽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선생님은 저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되자 큰 기쁨과 감격이 넘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만나는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특히 영적 성장론을 깨닫고 성결은총과 완덕의 경지를 사모하면서 영성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J선생님은 제가 지내던 방에 자주 출입하면서 영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시험을 당하거나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서 서울에 올라가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순복음교회의 신앙계나 조 목사님의 설교가 담긴 전단지를 구해서 따뜻한 위로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적인 사랑으로 자주 왕래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점점 가깝게 되었고,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생겼던 것입니다. 가끔 만나고 싶은 생각이 스쳐가거나 기다려지는 마음이 나타났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러한 생각을 즉시 물리쳤습니다.
이와 같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은 하나님의 생명수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체험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잠깐 동안이라도 어떤 피조물에게 관심이나 정을 두게 되면 주님께 엄한 책망을 받고 철저히 회개하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성도들은 선한 양심과 빛에 대한 지혜와 풍성한 생명의 감각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에 속한 것 즉 육적인 애정이나 욕망, 그리고 관심을 갖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을 잘 분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즉 육적인 것들로 말미암아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럽히지 않고 언제나 정결한 마음과 행실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성도들의 영혼은 이미 영성결혼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이나 사물에게 애정과 욕망을 갖게 되면, 신랑이신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며 즉시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애정이나 욕망을 비롯한 어두움에 속한 것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늘 깨어서 참회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 J선생님은 신앙과 인격과 지혜가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만나게 된 때로부터 얼마동안은 순수한 영적 사랑으로 교제를 하였는데, 나중에는 저의 마음 가운데 육적인 애정이 약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손님이 없을 때나 가끔 조용한 시간이 생길 때, 순간적으로 그 여선생님이 보내주시는 신앙서적과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이 스쳐가는 경우가 있었고, 또 어느 때는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오늘 만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쳐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때마다 저는 예수님이 아닌 피조물에 대한 생각을 한순간이라도 하게 된 것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가장 심각하게 회개하였던 일은 ‘만일 하나님께서 건강한 몸을 주신다면 J선생님에게 청혼을 할 수도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과, 이러한 생각을 그분과 만나 대화하는 중에 하마터면 얘기할 뻔 하였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얼마 후에 그 여선생님이 다른 신학생과 교제하며 결혼까지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저는 하나님 앞에서 큰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우상 즉 정욕을 숭배했던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두 분이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앞에서 증거한 경험적 사실들을 모형적진리에 비추어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그들의 생활과 문화와 종교를 자주 보고 들으면서 점점 우상을 숭배하는 수렁에 빠졌던 것과 같이, 저도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아름다운 여성과 자주 만나고 대화하는 가운데 남녀간의 애정이 약간 포함된 것을 깨닫고 회개한 것입니다.
저의 마음 가운데 이성에 대한 애정이 가끔 나타난 사실에 대하여 지나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보충설명을 하겠습니다. 저는 J선생님을 향하여 마음에 음욕을 품은 적도 없고 육적인 애정이나 음란에 속한 말을 한 적도 없으며, 손을 잡아보거나 음란에 속한 행동을 나타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은 영혼 가운데 뿌리박힌 죄성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된 분들이며, 항상 생명수가 풍성하게 흘러 들어오는 체험을 하면서 늘 깨어있는 생활을 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예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제 영혼도 이미 예수님과 영성결혼을 한 후이기 때문에 J선생님에 대한 마음이 스쳐가게 될 때마다 부끄러워하면서 즉시즉시 물리쳤던 것입니다.
또한 그때에 저는 천로역정의 허화시 과정을 통과하는 중이었으므로 많은 고난을 받고 있었는데, 이러한 어려움들이 가끔 우상 즉 이성에 대한 애정의 지배를 받았던 잘못에 대하여 징계하신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J선생님이 다른 신학생과 결혼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조금이나마 정을 느꼈던 것에 대하여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철저하게 회개를 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저는 가끔 우상의 영향을 받았던 생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또한 제가 우상을 섬긴 잘못 때문에 밤늦게까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던 일에 대하여 간증해 보겠습니다.
1972년에는 초여름부터 극심한 무더위가 밀려왔습니다. 그때 저는 바람이 전혀 통하지 않는 북향 방에서 긴팔 스웨터를 입고 두꺼운 솜요 위에 누워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숨 막히는 더위를 참고 견디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몸과 옷과 요는 매일같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으므로 마치 더러운 진흙탕 속에 누워있는 것과 같은 괴로움을 겪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저는 매일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인내와 절제의 열매를 맺으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해 6월 어느 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여동생이 저를 위하여 선풍기 하나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저는 표정이나 언행으로 그 선풍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극심한 더위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던 제 육체는 은근히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시장에서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선풍기가 생긴 것을 보시고 반가워하기 보다는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원망과 불평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저희 가정은 경제적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에 그 선풍기를 사용하게 되면 전기요금을 많이 내야할 것으로 생각을 하면서 큰 걱정에 빠지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께서 염려와 원망과 불평을 많이 하시는 동안 저는 잘 참으면서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한마디 부끄러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실수했던 말은 “어머니, 제가 만일 저와 같이 더위에 시달리면서 병상에 누워있는 자식이 있다면 돈을 빌려서라도 선풍기를 하나 구입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겠어요. 이 선풍기를 통해서 극심한 더위 때문에 겪고 있는 저의 어려움이 가벼워지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좋아하셔야지 계속 불평이나 원망이나 염려만 하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라고 말씀드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우리 가정이 얼마나 어려운 형편인데 선풍기를 사용하느냐, 이것을 쓰면 전기요금을 많이 내야할 텐데 … .”라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말씀으로 공박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원망과 불평을 듣는 가운데 저는 ‘어머니께 너무 이기적인 말을 했구나!’라고 반성하면서 참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빛을 밝게 비춰주셨으므로 제가 잘못한 말 즉 이기적인 말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점점 깊이 참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했구나. 끝까지 잘 참았어야 했는데 … . 하나님이시여, 이 부덕한 죄인을 용서하소서!” 얼마 후에 어머니와 동생들은 모두 다른 방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저는 계속해서 더 깊이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온 밤을 새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기적으로 말한 것을 모형적진리에 비춰보면, 혈육의 정이라는 우상 때문에 더 쉽게 부끄러운 말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그렇게 원망과 불평을 했다면 더 잘 참을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에 대한 애정 즉 혈육의 정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쉽게 이기적인 말이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 즉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의 공통점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죄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작은 잘못을 가지고도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습관적으로 철저하게 참회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도들은 예수님의 밝은 빛을 따라 좁은 길을 열심히 달리면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되고, 많은 사람들과 교회를 위하여 빛과 소금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됩니다.』
◎ 천로역정
지금까지 우리는 모형적진리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이 사사통치시대와 왕권통치시대를 통과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더 온전히 성장하게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천로역정에서 사사통치시대는 기독도가 전도를 세 번째 만날 때부터 허화시와 들길과 의혹성을 다 통과할 때까지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왕권통치시대는 기독도가 환락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물에 걸려 큰 고생을 하는 과정을 통과하고, 무신이나 무지와 동행하다가 미지에 들어가 고난을 겪고 쀼-ㄹ라에 도착할 때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천로역정은 사사통치시대와 왕권통치시대를 통과하는 성도들을 기독도나 진충, 유망, 기독도 여사와 그 일행 등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사람의 이름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같은 성장과정을 통과하면서도 부분적으로 경험한 내용들이 어느 정도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기독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독도는 간난산 꼭대기에 있는 미궁에서 전신갑주를 입은 후에 세 번째 전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부터 세 차례의 큰 시련과정 즉 허화시와 의혹성과 미지를 통과하게 됩니다. 기독도는 이러한 시련과정을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 더 큰 능력과 신령한 은총을 체험하게 되고, 결국 최고의 경지이며 완덕(完德)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 쀼-ㄹ라에 도달하게 됩니다. 먼저 천로역정이 가르쳐주고 있는 영적 성장에 대한 진리를 요약한 후에 좀 더 자세한 해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생명의 전신갑주를 입고 간난산을 빠른 발걸음으로 내려온 기독도는 겸손의 골짜기에서 아볼루온을 물리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직후에 진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독도는 진충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영적 성장에 대한 진리를 정돈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허화시에서 멀지 않은 들판을 통과하는 중에 전도씨를 만나 위로를 받고 정욕을 조심하라는 것과 험준한 길을 용감하게 나아가라는 것과 순교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기독도와 진충은 허화시(虛華市)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허화시는 허화라는 성읍에 있는 시장으로서 그곳에 있는 물건들이 다 경박한 것들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기독도와 진충은 허화시를 통과하면서 그 시장에 있는 상품들을 경히 여기고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가 물건을 사라고 하면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눈을 하늘로 향하고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지나갔기 때문에 이러한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경멸하고 조롱하고 비방하면서 큰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허화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기독도와 진충을 쇠사슬로 결박하고 때리면서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다가 차꼬에 채워 감금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심문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허화시의 관리들은 기독도와 진충에게 가장 잔혹한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때 진충은 많은 고문을 받은 후에 죽임을 당하였고, 기독도는 사형을 집행하는 날짜가 연기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하나님께서 기적의 손길로 도와주셨기 때문에 그곳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허화시를 떠난 기독도는 유망(有望)이라는 성도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 유망은 허화시에서 기독도와 진충이 나타낸 경건하고 영웅적인 행실을 보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따라온 것입니다. 기독도와 유망은 함께 길을 가다가 자리(自利), 세재(世財), 애전(愛錢), 인색(吝嗇)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자리와 세재와 애전과 인색보다 먼저 안락(安樂)이라는 들길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 들길의 건너편에는 큰 은광이 있는 이욕산(利慾山)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데마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그 은광으로 이끌어 들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독도와 유망은 데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곳을 잘 통과하였는데, 자리와 세재와 애전과 인색은 데마에게 이끌려 이욕산으로 갔습니다.
그 후에 기독도와 유망은 상쾌한 강변에 이르러 과실을 먹고 강물을 마시면서 쉬게 되었습니다. 피로를 풀고 난 기독도는 또다시 길을 가다가 갈림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로(正路)가 아닌 다른 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은 의혹성(疑惑城)의 절망(絶望)이라는 통치자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절망은 두 사람을 잡아다가 의혹성에 있는 깊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다음날 절망은 두 사람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사정없이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 감옥에서 두 사람은 등불도 없고, 한 조각의 떡이나 물 한 방울도 없는 가운데 며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절망은 두 사람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큰 고난 가운데서 낙담한 기독도는 자결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기독도는 유망의 권면을 받고 자결을 포기하였는데, 마침 그때 언약이라는 열쇠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열쇠로 잠겨있는 모든 문들을 열고 의혹성에서 탈출하였습니다.
의혹성을 떠난 기독도와 유망은 환락산(歡樂山)에 도착하여 샘물을 마시고 몸을 씻은 후에 포도를 먹었습니다. 그때 두 사람의 심령은 큰 기쁨과 감사와 평안이 넘쳤습니다. 또한 환락산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던 지식과 경험과 경성과 신실이라는 선한 목자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교훈과 위로와 권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환락산을 떠나 천성을 향해 진행하다가 무지라는 사람을 만나 잠깐 동안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서 무지와 어느 정도 멀어지게 된 기독도와 유망은 대화를 나누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다가 또 갈림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검은 몸에 흰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유혹을 받고 잘못된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기독도와 유망은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물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물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며 부르짖고 있을 때 광명한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광명한 사람은 그물에 얽매어 탄식하며 부르짖고 있는 두 사람을 구출해주면서 환락산의 선한 목자들이 가르쳐준 말을 잘 따르지 않고 주의하지 않았던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물에서 건짐 받은 후에 기독도와 유망은 천성을 향해 길을 가다가 무신(無神)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신은 두 사람에게 신(神)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헛수고를 하지 말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기독도는 무신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여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무신은 기독도를 비웃으면서 떠나갔습니다.
계속 길을 가고 있던 기독도와 유망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땅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좋지 않은 공기로 인하여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졸음에게 사로잡히도록 합니다. 그 땅의 이름은 미지(迷地)라고 하는데, 졸음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졸음에게 사로잡혀 잠을 자게 되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기독도와 유망은 졸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화를 계속하는 가운데 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기독도는 또다시 무지라는 사람을 만나 동행하면서 담론을 하는 가운데 많은 진리가 정돈되었습니다.
기독도와 유망은 무지와 헤어진 후에 졸음이 심하게 몰려오는 미지를 어렵게 통과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여행의 목표가 되는 쀼-ㄹ라에 도달하였습니다. 이 ‘쀼-ㄹ라’라고 하는 지역은 천성의 접경이며 천성에 살고 있는 빛나는 성도들이 왕래하기도 하는 곳인데, 과수원과 포도원과 화원이 있으므로 기독도는 거기에서 원기를 회복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기독도와 유망은 육체의 죽음을 상징하는 사하(死河)강을 건너, 빛나는 세마포와 면류관을 받고 천성문을 통과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궁에서 전신갑주를 입은 기독도가 세 차례의 큰 시련과정 즉 허화시와 의혹성과 미지를 통과한 후 쀼-ㄹ라에 도달하는 과정을 요약해보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이 과정에 대한 해석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로 하는 기초적인 견해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의 심령 가운데는 항상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되어 있으며, 생명수가 언제나 풍성하게 흘러들어 오는 체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해석해야 됩니다.
그런데 천로역정에는 기독도가 미궁을 통과할 때나 아볼루온과 싸울 때나 무지와 동행할 때에만 생명의 전신갑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왜곡된 해석을 하기 쉽습니다. 이와 같이 기록한 것은 그 과정을 통과할 때에 전신갑주 즉 생명의 능력의 법칙을 더욱 뚜렷하고 강하게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한 대부분의 천로역정 해설가들은 전신갑주 입는 체험을 일시적인 체험으로 착각하면서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언제든지 신비로운 생명의 전신갑주와 천국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수를 감각적인 체험으로 언제나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천로역정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대하여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국의 발달과정을 중심으로 알게 된 ‘영적 성장론’에 비추어 가면서 해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로역정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쀼-ㄹ라 즉 완덕에 도달할 때까지 성도들의 신비로운 체험이나 다양하게 경험하는 환경이나 도덕적인 생활모습 혹은 깨닫게 되는 사상들에 대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단계별로 나타나는 특징을 비교적 간략하게 상징적으로 가르쳐주는 진리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나타난 모형적진리와 비교하면서 해석해야만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간난산 정상에 있는 미궁에서 전신갑주를 입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후에 쀼-ㄹ라를 향하여 달려가는 과정,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진리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모형적진리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로 이 과정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의 신령한 체험이나 생활환경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이나 도덕적인 생활인격에 대하여 잘 알아야만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 대한 진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만이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체험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은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영적 성장에 대한 진리를 종합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천로역정』을 저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요한 성자도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경험과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감성의 밤’이나 ‘영성의 밤’에 대한 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영적으로 많이 성장한 성도들이 아주 극소수이고, 이분들 가운데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체험한 내용들을 기록하거나 증거한 분들은 더욱 적기 때문에 영적 성장에 대한 진리가 종합적이며 체계적으로 정돈되어 있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렇게 지고한 신앙의 경지를 잘 모르고 있는 천로역정 해설가들은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생명의 전신갑주를 입는 신비로운 체험이나 환락산을 통과하는 체험, 허화시나 의혹성이나 미지를 통과하는 체험을 하지 못하고 천로역정을 해설하기 때문에 영적 성장에 대한 진리가 더 혼란스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과정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의 경험과 삶과 사상을 바탕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넷째로 천로역정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증거하였기 때문에 순서를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천로역정에 나온 내용을 영적 성장과정과 아무 관계없이 적용을 하면 아주 엉뚱한 내용이 되기 쉽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연구하는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천로역정을 해석한 내용을 보면, 대부분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례를 들어보자면 천로역정에서 등짐을 지고 가던 기독도가 시내산 아랫길을 다 통과한 직후에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문을 마태복음 7장 13절에 나오는 ‘좁은문’과 같은 문이라고 해석하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미궁에서 전신갑주를 입는 체험에 대해서도 초보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이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천로역정 해설가들은 천로역정에 나온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맞추어 해석하기보다 그 책에 나온 사건들을 인용하여 교훈을 주는 내용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에 대한 진리가 잘 정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왕국의 발달과정도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대해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진리이기 때문에 사건 하나하나를 순서에 맞추어서 잘 해석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전신갑주를 입은 기독도가 세 번째 전도를 만날 때부터 쀼-ㄹ라에 도달할 때까지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서 해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과정을 크게 네 단계 즉 ‘허화시 입구에서 이욕산까지’, ‘의혹성 입구에서 환락산까지’, ‘환락산에서 그물을 통과하기까지’, ‘무신을 만날 때부터 쀼-ㄹ라까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왕국의 발달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모형적진리를 해설할 때는 이 과정을 사사통치시대와 왕권통치시대로 구분하였습니다. 사사통치시대는 허화시부터 의혹성을 다 통과할 때까지이며, 왕권통치시대는 환락산에서부터 쀼-ㄹ라에 도달할 때까지입니다.
◉ 허화시 입구에서 이욕산까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 통과하고 기독도는 진충과 함께 길을 가다가 허화시 입구에서 세 번째 전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기독도가 세 번째 전도를 만난다는 것은 광야연단과정을 다 통과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되고 생명수가 폭포수와 같이 유입되는 놀라운 체험을 계속적으로 하게 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큰 감동을 받고 전도에 대한 사명감이 뜨겁게 불타는 가운데 주님과 교회와 복음증거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역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실례를 들어보면 안디옥 교회에 목회자가 필요할 때에 바나바가 다소에서 살고 있던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가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 바나바는 바울에게 세 번째 전도역할을 한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광야의 연단과정을 다 통과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과 진리를 소유한 좋은 일꾼이 되었으므로, 주님께서는 바나바에게 ‘세 번째 전도’의 역할을 하도록 하셔서 안디옥 교회에서 진리증거와 목회사역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 번째 전도를 만난 후에 열심히 진리증거를 하면서 살고 있는 성도들은 광야연단과정을 다 통과하고 정결케 되었기 때문에 밝은 양심과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충성스럽게 봉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경건한 인격과 덕행으로 충성하는 것을 보고, 시기와 미움이 가득해진 마귀는 성도들의 생활환경 배후에서 강하게 역사하여 많은 시험 풍파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성도들은 큰 고난을 겪으면서 허화시를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과정을 통과할 때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핍박 자들에게 돌멩이를 맞아서 돌무덤 속에 들어가기까지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허화시는 하나님께서 성결은총을 받고 충성스럽게 사역하는 성도들에게 수많은 유혹과 고난 풍파가 일어나는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 상당한 기간 동안 시련을 받게 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빛과 소금 역할을 잘 하면서 영성생활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성도들은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더욱 더 온전하게 성화되는 것입니다.
먼저 허화시에 대하여 잘 이해하기 위해서 천로역정에 나온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허화시(虛華市)는 헛되고 호화로운 도시를 가리켜 말하는데, 그 도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또한 미신과 우상이 많았으며, 완전히 세속화되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는 한 시장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사람들의 정욕을 만족시켜주는 물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기독도와 진충은 그 시장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옷을 입고 있었으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물건들이 많은 그 시장을 지나가면서도 이것저것을 보기 위해 얼굴을 돌리지 않고 앞만 똑바로 보면서 열심히 지나갔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시장 사람들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비방과 조롱을 많이 하였고, 채찍으로 때린 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 시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두 사람을 재판정으로 데리고 가서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때 진충은 순교를 당하고, 기독도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곳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이제부터 허화시 과정에 대해서 해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도와 진충이 허화시를 통과하게 된다는 것은 이 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이 세상적인 쾌락이나 정욕적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나 조건들이 많이 나타나는 가운데, 시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련을 통해 성도들을 더 온전케 하십니다.
기독도와 진충이 그 시장 사람들과 다른 옷을 입었다는 것은 세속적이며 육신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행실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그 시장의 사람들은 정욕적이고 마귀적이고 세상적인 행실을 가지고 있는데, 기독도와 진충은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행실 즉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행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도와 진충이 그 시장에 있는 물건들에게 얼굴을 돌리지 않고 천성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성도들이 세상적이고 마귀적이고 정욕적인 모든 것들을 배설물같이 여기면서 영성생활을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시장에 사는 사람들이 기독도와 진충을 미워하고 박해를 하였다는 것은 이 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이 영성생활을 좋아하고 철저하게 실천하기 때문에 세상적이며 정욕적인 것들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서 허화시를 통과하는 성도들이 여러 가지 세상적인 쾌락이나 정욕적인 만족을 조금씩이라도 누리면서 살아야 되는데 “그런 생활은 육적인 생활이다.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아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하겠다.”라고 하면서 모든 유혹하는 조건들을 대부분 물리치게 되니까 마귀들이 떼를 지어 큰 고난풍파를 일으켜 영성생활을 방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귀들은 허화시를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의 생활환경 가운데 맹렬하게 활동하여 큰 고난 풍파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은 성도들을 세속화시키고 육적인 생활에 빠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기독도와 같이 영적인 목표를 바라보면서 철저하게 정과 욕을 절제하기 때문에 밝은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되는 것입니다. 허화시에 있는 재판정에서, 그 시장 사람들이 기독도와 진충을 고발하는 내용을 보면 세상적이며 마귀적이며 정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분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시험풍파가 다가오는 이유는 이 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 즉 성결은총을 받고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밝은 빛을 따라 영성생활을 철저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밝은 빛을 따라 철저한 영성생활을 하면서 빛의 열매를 많이 맺고 있는 훌륭한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흠이 없이 완전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통과하지만, 마귀들이 거칠고 사나운 환경을 많이 만들어 놓기 때문에 가끔 실패를 하기도 합니다. 실패를 하게 되면 철저히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면서 더욱 더 새로워져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 가운데 원수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계속 괴롭힌다던가, 애매하게 핍박과 욕을 당하게 된다던가, 또는 육체의 고통이 너무 극심하게 되면, 영속에는 죄성이 제거 되었지만 육체에는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부족함을 조금 나타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모세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도하기 시작할 때 모세는 이미 허화시 과정에 들어간 후였습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많이 성장한 모세는 원망과 불평과 불신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조금 부족함을 나타낸 적이 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체험했으면서도 물이 없는 것 때문에 원망불평이 심해지고 심지어는 돌멩이로 때리려고 하니까 바위를 두 번 치면서 조금 부족함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비딤므리바 생수’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부족함에 대해 종교개혁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영혼은 성결은총을 받았을지라도 육체 가운데는 타다 남은 부지깽이처럼 여전히 죄의 흔적은 남아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부족함까지도 더 온전하게 하시려고 허화시 과정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통치시대를 통과할 때 자꾸 이방민족의 침략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과정을 통과할 때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약해져서 우상을 숭배하게 되거나 율법을 거역하게 될 때 이방민족의 침략을 받아 큰 고통을 받게 하였던 것과 같이 철저한 영적 생활을 하다가도 정욕을 따라가는 작은 잘못이 있을 경우 마귀들의 공격을 받게 하여 큰 고난을 겪으면서 회개생활을 철저히 하고 영적으로 더 성장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큰 시험풍파가 이 과정을 통과하는 성도에게 몰려오지만, 영속에 죄성과 정욕이 뿌리 뽑힌 성도들이기 때문에 크게 실패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털어서 나오는 먼지, 즉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서 본다면 온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족함을 발견하고 철저히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하게 회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과하면서 티끌만한 죄도 짓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어느 순간에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철저히 회개하면서 점점 더 지혜와 인격과 생활이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허화시를 통과할 때 진충은 많은 고문을 받은 후에 죽임을 당하였고, 기독도는 사형을 집행하는 날짜가 연기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하나님께서 기적의 손길로 도와주셨기 때문에 그곳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진충이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은 허화시를 통과하면서 순교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기독도는 허화시를 잘 벗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허화시 과정을 잘 통과하고 더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로 나아가는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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