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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나의 달려갈 길

by Andrew Y Lee 2023. 9. 4.

나의 달려갈 길

 

디모데후서 4장 6~8절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오늘도 주의 평화와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오늘은 디모데 후서 4장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나의 달려갈 길" 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한다.

 

성경의 모든 장에는 쓰여진 배경이 있다.

디모데 후서가 어떻게 쓰여졌는지

그 배경을 먼저 이해하면 본문의 말씀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구약 시대는 끝이 나고

신약시대인 교회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교회 시대는 이방인인 우리를 충만하게 채우는

이방인 구원의 시대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이 복음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7에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핍박이 온 예루살렘에 있게 되니까

사도들과 성도들이 전부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안디옥 그리고 땅 끝까지 점점 전파되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나니까

신실한 자 바나바를 파송하고

이 바나바가 후에 바울 된 사울을 초청해서

둘이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저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그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두 사도가 많은 교회들을

세워나가면서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세운 교회 중 하나가 에베소교회인데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젊은 디모데를 후계자로 세웠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AD63년경에 로마 감옥에서 나와

디모데전서를 쓰게 된 것이다.

 

사도바울은 AD67년에 순교하였다고 기록이 돼 있는데

2차로 다시 로마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마 AD66년 아니면 67년 초이고

순교하기 직전에 로마 감옥에서 나와서

디모데 후서를 쓰게 되었다.

 

디모데후서 1 8을 보면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힐 때부터

이 편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2 9에 보면

"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본문 가운데 4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라고 하였다.

 

이 관제는 어떤 제사인가?

짐승의 피를 받아서 하나님께 부어지는 제사이다.

 

사도 바울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자기의 피를 다 재단에 붇는 것처럼

관제와 같이 내의 생명이 끝날 때가 됐다고

그 기약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이다.

 

마지막 편지 하면서 유언과 같이 디모데와

많은 성도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주고 있다.

 

순교하기 전 마지막 편지요 마지막 유언과 같은

이 말씀을 남기면서 본문 가운데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

 

이제 이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은혜를 나누도록 하자.

 

첫 번째,

바울이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하는 이 길이

어떤 일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길을 달려왔길래 그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이 달려갔던 길은 네 가지였다.

에덴동산에서 물이 4개의 강줄기로 흘러서

온 세계에 퍼지는 것처럼

거꾸로 말하면 에덴동산에 그 모든 물 근원이

전부 에덴으로 모이게 된다.

 

에덴은 땅에 있는 동산이 아니다.

에스겔 28에 보면 하나님의 성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도장 같은

영적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그 경험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영적인 도장이다.

 

이 네 갈래의 길이 4개의 강 근원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인데 사도 바울이

이 네 갈래의 길을 달려갔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개인적으로 익은 열매가 되는 길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는 길이

첫 번째 길이다.

 

로마서 8에 보니까 예수 그리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익은 열어야 되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된다고 했는데

에베소서에는 이것을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였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도 빛이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든 제자와

주님의 자녀들은 전부 그 빛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익은 열매가 되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의

성품과 모든 것을 닮아간다는 것이고

우리의 달려갈 길이고 사도바울이 달려갈 길이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익은 열매의 길을 가는 동시에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는데

그 사명을 이루는 것이 사도 바울의 달려갈 길이었다.

 

한 사람이 빛이 되어지면 빛을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게 하기위해 등경 위에 두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이 점점 익은 열매가 되고

점점 빛이 되어지면서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거기에 걸맞은 사명을 주셔서 작게는 가족부터

크게는 직장과 사회 그리고 온 세상에 나가서

이 빛을 전하면서 이 사명을 이루는 길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셨다.

저와 여러분은 사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몸의 지체에 붙어서

우리는 각자 어떤 사명이든지 그 사명의 그릇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 사명의 길을 걸어갔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다.

 

마태복음 22 37~40 말씀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한 율법사가 나와 예수님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계명과 선지자의 강령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사랑을 이루는 것이 개인적으로 우리가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됐든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야 된다.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길이

우리에게 있다.

 

신명기 8 2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동안 걷게 하신 이유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육신의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떡으로만 사는 곳인데

하나님의 그 모든 말씀을 온전히 지켜내면서

순종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달려갈 길은

4가지의 길이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는 익은 열매가 되어지는 길이고

두 번째는 맡겨진 사명을 이루는 길이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길이고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각각 이것은 네 갈래의 길이지만

각각의 길이면서 동시에 같은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님 사랑하는 일이 따로 있고 말씀 순종하는 것이

따로 있고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 따로 있고

복음 전파하는 사명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결국 같은 길인 것이다.

 

프랜시스 성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부르심을 받았으면 익은 열매가 돼야 할 거 아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을 닮아보려고

매일매일 이런 삶을 살면서 점점 익은 열매가 되고

그러면서 나중에 주님을 얼마나 닮고 싶었는지

예수님과 같은 그 오상을 나에게도 달라고 한 것이

마지막 프랜시스의 기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40일 금식하면서

교회 부흥을 위해 또 육신의 것을 위해 기도하는데

프랜시스는 40일 금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그 오상을

나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오상을

프랜시스에게 허락을 하셨다.

 

예수님의 그 상처를 그대로 받았다.

손과 발에 피를 흘리면서 평생 그 상처를 감추고 다녔지만

프랜시스는 인류역사 가운데 최고의 은사라고 하는

오상의 은사를 받은 분이 되었다.

 

주님을 닮아보고자 하는 그 몸부림과 동시에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프랜시스와 같은 수도자가

무슨 복음을 전파하느냐 라면서 사명에 대한 오해를 하였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어떻게 했는가?

탁발 수도회를 만들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거지 전도자이다.

얻어먹어가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십자가 전쟁을 통해서도 전하지 못했던 복음을

사라센 지역 복음을 이 탁발 수도회의 형제자매들이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렇게 프랜시스는 동시에 사명을 감당하는 길을

가게 되었다.

 

800년이 지난 지금도 프랜시스를 생각하면 은혜스럽고

그분을 닮아가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면서

그 빛을 드러내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자꾸 자아가 튀어나오고

자신을 사랑하는 육신의 정욕이 올라오니까

한밤중에 눈밭에 나가서 눈사람을 여러 개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에게 첫 번째 큰 눈사람은 마누라고

작은 눈사람은 아들과 딸들이다.

 

내 마누라와 자녀들을 살리려면

그들에게 입히고 먹여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자책 하면서 비록 나는 혼자가 됐지만

이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이것이 축복된 길이라는 걸 알고 자기를 치면서

그렇게 살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해보려고

형님 태양, 누님 달하면서 이렇게 음유시인으로서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그 사랑을 이루려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들을

부르면서 그렇게 살아갔다.

 

이 네 갈래의 길이 각각의 길이면서 동시에

같은 길임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나는 이 길을 택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길은 가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익은 열매로의 길을 가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서로가 유기적으로 한 몸과 같이 얽혀 있고

복합적이고 이것이 함께 묶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된 그 때에 이미 익은 열매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사도가 되어서 복음 전파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 가슴에 품으며

자기 몸을 쳐 복종하면서 그렇게 말씀에 순종했다.

 

그러니까 이것이 다른 길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달려갔던 그 길이 내가 달려갈 길이고

우리 모두가 각자 갈 길이지만 하나의 길인 이 길을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한다.

 

제가 그림을 하나 그렸다.

거대한 산의 정상을 올라가는데 네 갈래의 길이 있다.

 

첫 번째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그리고 좌우로 있는 길

마지막으로 맨 뒤쪽에서도 올라오는 네 갈래의 길이 있는데

이 길들은 서로 서로가 연결돼 있다.

 

이 산은 높아 직선으로 올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길들은 나선형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연결되어 있는데 결국 이 모든 길들은 복합적으로 하나고

융합적인 길, 다차원의 길, 여러 개의 길이 섞여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이 이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면서

나의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네 가지의 달려갈 길은 믿음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

 

이 네 가지의 길을 믿음 없이는 한 걸음도

갈 수가 없는 길이다.

 

믿음이 떨어지고 믿음이 바닥에 나면 앉은뱅이 신앙이 되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영적인 성장이 없어지면서

익은 열매가 되지 못한다.

 

믿음이 없이 어떻게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겠는가?

믿음이 있어야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사랑 못한다.

믿음이 없이는 네 번째 길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순종 할 수 있는가?

말씀이 믿어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가니까

그것이 믿음이 된다.

 

디모데후서 1 4~5 말씀을 보면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 나오면서 디모데후서라고 하는

그의 모든 서신 가운데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가장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지금 유언과 같이

말씀을 남기고 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 보는 것이 큰 기쁨인데

왜 보기를 원했냐하면 그것은 디모데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고 싶어 하는가?

왜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가?

나와 동질의 것이 있어야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사도 바울 마음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충만하니까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디모데를 만나기를

그렇게 기뻐하고 그 디모데가 오기를 원하였다.

 

거짓이 없는 그 믿음이 사도 바울에게 있는데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속에 그 믿음이 있어

그 믿음이 자손인 디모데까지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를 보기를 원하였다고 하였다.

 

디모데후서 1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확실히 믿는다는 것이다.

지금 확신한다고 하였다.

내가 그 분 앞에 모든 걸 의탁 하여서 그 날까지

나를 지켜줄 것을 나는 믿는다는 고백이다.

 

지금은 감옥 안에 있고 순교를 앞에 놓고 있고

고난을 당하는 이런 것들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그때까지 나를 지켜주실

그분을 확신한다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길을 달려갈 수가 있다고 하였다.

 

디모데후서 2 11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어

나의 옛 사람이 다 죽어버리면 그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연합하여 언젠가 주님이 오시면

우리가 영원히 사는 부활의 몸을 얻을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에 이 몸은 지금 죽어도 몸을 쳐

복종하면서 어떠한 고난을 받아도 견디며 인내할 수 있었다.

부활을 믿으니까 생명을 던져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믿음의 길이 아니면 이 모든 달려갈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그 말이다.

 

디모데후서 3 14~15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인데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다.

 

믿음 없이는 아무리 성경을 봐도 그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나에게 갖다 주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은 나에게 지혜가 되고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성경이 능력이 되어서

나의 삶을 도와주고 결국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떠나서는

이 네 갈래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

 

믿음이 없이는 익은 열매의 길도 가지 못하고

사명의 길도 가지 못하고 주님 사랑하는 사랑의 길을

따르지도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

 

저는 지난주 월요일부터 3박 4일 동안 남해 쪽에 가서

부흥회도 하고 왔다.

 

그 집회에 얼마나 기름부음이 강한 집회였다.

15명이 모였는데 입신 하신 분도 있었다.

이곳에 장로님과 여자 목사님이 찾아가는 교회를 하고

계시는데 이 기적의 방에 들어와서 1년 동안 같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들을 만나보길 원했는데

만나게 되었다.

 

한국 유일의 찾아가는 교회로 45인승 버스를 개조해서

어려운 분들을 목욕해 줄 수 있는 목욕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또 50만원 정도하는 칼갈이 기계가 있다.

그리고 여자 목사님은 미용봉사도 하신다.

 

이렇게 교회 없는 남부 지방 일대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하고 계신다.

 

이분들이 이번 3박 4일 집회동안 참여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하면서 연합해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정말 믿음이 없이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분들은 이러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버스를 끌고

사방팔방 다니면서 칼을 갈아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미용을 해주면서 복음을 전파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

그 장로님이 칼갈이에 미쳤다고 표현하셨다.

돈도 안 받는 일이고 봉사인데 미쳤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이것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니까 그것에 미쳤다는 말이다.

실제로 가서 보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가 되었다.

 

그래서 저도 한번 버스를 타고 한번 가 보았다.

같이 가보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여러분 믿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기를 바란다.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 전에 그 믿음이 떨어지면

이 모든 네 가지의 길이 다 막혀버리게 된다.

 

사명의 길도 막혀버리고 성장의 길도 막혀버리고

믿음이 떨어지면 주님 사랑하는 길도 막혀지고

믿음이 없으면 이웃 사랑도 막혀버리고

믿음이 없으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게 되는

이 모든 길이 다 막히는 된다는 것 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키면서 달려갈 길을

다 달려왔다고 하였다.

 

세 번째는,

이 믿음의 길을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이라고

본문 가운데 말씀하고 있다.

 

본문 7 말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10년 전에 저희 자녀들이 차를 사줬을 때 그 차 뒤에

영어로 글을 붙였는데 바로 이 성경 구절이다.

 

고린도전서 9 24에는 사도 바울이

이 선한 싸움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9 24~27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움이라고 하는

이 표현으로 썼을 때는 이 고린도 지역에

2년마다 한 번씩 올림픽과 같은 경기들이 열렸다.

 

그 경기를 보면서 각종 여러 선수들이 있는데

이 선수들이 상을 얻으려고 달려가는 것을 보고

연상하면서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것이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래서 우리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라고 표현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운동장에서 지금 달음질하는 자들이다.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자들이다.

 

그런데 상 얻는 자는 하나다.

모든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그 상을 얻고자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하나 받으려고 그 싸움을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을 얻어 보려고 사도 바울은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 허공을 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정확하게 상대방의 급소를 쳐서

KO 시켜야 이길 수 있다.

그래서 허공을 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달려갈 때는 목표물을 향해서 달려가야지

다른 길로 가면 실종 된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허공을 치지 아니하며 상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허공을 치는

그런 때가 되서는 안 된다.

시간 낭비이다.

향방 없는 것처럼 달려가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익은 열매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 사랑이 내 속에 부어지는 목표를 가지고

나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어찌하든지 말씀에 순종하여 이 말씀으로

나의 인생의 승부를 보겠다고 하는 그 목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

 

말씀은 모든 것을 역사한다.

말씀 한마디를 나에게 주시면 나의 인생은 뒤집어진다.

 

여러분 그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허공을 치지 않고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 이렇게 달려가야 된다.

 

그리고 전파한 후에 내가 버림을 받을까

내 몸을 쳐서 복종한다고 하였다.

 

프랜시스 성자가 마지막 죽으면서 이 표현을 하였다.

“당나귀야 수고를 많이 했다.”

 

당나귀는 교통수단이지만 자기 마음의 소원을 따라

나를 따라서 움직여준 자기 몸을 당나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가 원하는 대로 그 끌려가면 나의 마음이

육체에 뺏겨버리고 오히려 그 당나귀를 타야하는데

당나귀를 높이 들고 가는 그런 격이 된다.

 

내 몸을 쳐서 내 육신을 복종하게 하여 기도하기를 원하면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갈 수 있고

사랑 실천을 하게 되면 그 사랑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

 

이런 당나귀로 나를 길들이게 하려면 내 몸을 쳐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지 이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킬 수 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나뿐만 아니고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가 되었고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이

그날 이 세상에 오시면 주님은 요한계시록에

내가 상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하셨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수고하고 애쓴 만큼 그 모든 상을 주는

그 날이 반드시 온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 그날이 우리 눈앞에 닥쳐있다.

 

여러분 머지않아 주님이 오시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상과 벌을 주실 것이다.

 

이 복음은 희생을 해야 전파되는 희생의 복음이지만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계시의 복음을 받아 수고하고 애쓴 만큼

거기에 걸맞은 상을 주는 복음이다.

 

복음 전하는 이 일 때문에 우리가 상을 받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무더운 날씨 가운데서도

달려갈 길을 달려가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달려가야 할 네 가지 길이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닮아서 익은 열매가 되는 길이고

나에게 준 사명을 감당하는 길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길

그리고 말씀 앞에 순종하는 길

 

이것이 다른 길 같아도 하나의 길이고

복합적이고 융합적으로 하나의 길로 묶어져 있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길은 믿음이 있어야만 가는 길이고

이것은 영적인 선한 싸움이라 하였다.

 

이번에는 남해에 갔을 때 어떤 여자 권사님이 한 분이

서울에서 오셨는데 기적의 방에 처음으로

참석 하는 분이었다.

 

권사님은 알고 보니 찬양사역자라고 하셨다.

cts 권사회에서 찬양사역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책도 3권이나 쓰셨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쓰라고 해서 처음에는 수필처럼 두 권을 냈는데

마지막 세 번째 책을 얼마 전에 냈는데

"영적 싸움" 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이 평신도에게 계시를 열어서

이 마지막 때는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우리가 살아가는 마지막 때에 이 믿음의 길은

영적인 전쟁터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다.

내 환경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령들과의 싸움이다.

 

우리는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령을 인식하고 악령을 물리쳐야 된다.

그 악령들이 다 환경에서 병을 갖다 주고 불행을 갖다 주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다 주고 혈기를 갖다 준다.

 

그래서 이 악령들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니까

그 악령들과 싸워야 된다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의 방패로 방어하고 말씀의 검을 가져야만

이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각자의 부르심이 있다.

우린 그 부르심을 따라 이 자리까지 왔다.

지금까지 삶에 살아왔던 모든 그 순간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 길을 온 것이다.

 

우리가 프랜시스처럼 수도의 길을 달려갈 수도 있었겠지만

또 결혼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허락하시고

지금까지 우리가 그 길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은 어찌 되었든 간에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남은 달려갈 그 길을 믿음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다 달려가서 멀지 않아

주님이 오실 때 참 잘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도록

그 상을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현재를 바라보고 사는 게 아니고

미래를 바라보고 산다.

 

죽은 후에 먼 미래가 아니고 이 시대는

상을 가지고 오신 주님이 눈앞에 닥친 멀지 않아

상을 받게 될 그 미래를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헌신하고 수고하면서 그 길을 달려간다.

 

여러분 각자의 부르심에 충실하여 남은 생에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서 주님이 오신 그날

부끄러움 당하지 않고 주님이 예비하신 그 놀라운 상을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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