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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향연/메세지

낙심치 않는 선

by Andrew Y Lee 2023. 9. 4.

낙심치 않는 선

 

갈라디아서 6장 1~6절

 

우리가 모든 성경을 볼 때 이 성경이 어떻게 쓰여 졌는지

그 배경을 알면 올바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쓴 편지이다.

 

갈라디아 교회가 주후 33년경에 세워졌는데

그 뒤에 15년이 흘러서 주후 48년경에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한 것이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이다.

 

이 교회가 세워진 지 한 15년이 흘렀을 때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왔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

그런 율법주의자들이 등장을 하니까

이 사도바울이 세 가지의 핵심을 가지고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다.

 

첫 번째는

바른 복음이 무엇인가?

이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특별히 자기가 사도 된 배경

내가 왜 사도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기에게 준 그 복음

바른 복음이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 쓰셨고

 

두 번째는

바른 믿음이 무엇인가?

그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바른 신앙생활이 무언가?

결론은 성령을 따르는 삶이 바른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얻는 삶이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이렇게 쓰시면서

이 갈라디아서가 복음의 핵심이다.

로마서와 함께 복음의 핵심이다.

 

종교 개혁을 했던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책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이다.

 

종교 개혁을 했던 마틴 루터는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그런 말까지 했다.

 

그 당시에 카톨릭이라고 하는 두교가

‘행위를 통해서 구원 받는다‘ 이런 사상이 많았는데

사도 바울을 통해서 쓴 갈라디아서가

종교개혁의 대헌장이 되고

종교개혁의 원론적인 책이 되고

크리스천의 자유 선언문 그런 별칭을 가지게 됐는데

그래서 루터가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종교개혁의 대헌장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6은 사도 바울이 바른 신앙생활이 뭐냐?

올바른 복음을 가져야 되고 올바른 믿음을 가지면서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교훈하는

내용 중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짧지만 우리가 읽은 그 말씀을 통하여

그런 교훈 중에 한 가지를 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올바른 신앙생활은 심고 거두는

법칙에 따라 해야 된다 하는 것이다.

 

6 7 말씀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심고 거두는 게 농사의 법칙이 아니겠는가?

자연의 법칙이고 우주의 법칙이고

그런데 영적인 법칙도 여전히 심고 거두는 대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농부들이 왜 이른 봄에 씨앗을 뿌리고

왜 농사를 하는가?

가을에 추수하고 열매가 달리는 걸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금년에는 이제 더위가 심하고 홍수가 심하고

그래서 과일 값이 엄청 비싸다.

 

가을에 거두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에

농부가 농사를 하는 것이다.

 

창세기 8 22 말씀을 같이 한번 보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서

새 하늘 새 땅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심고 거두는 법칙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밤과 낮이

쉬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가 이 땅이라고 하는 개념

이것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디디고 서서 사는 이 땅도

심고 거두는 그대로 그 법칙을 따라간다.

 

그런데 땅이 그것만 땅이 아닌 것이다.

우리 마음 밭도 땅인 것이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비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씨를 어디에 뿌리겠는가?

우리 마음에다 뿌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그게 싹이 나면 그 열매가 맺어지면서

내 마음속에 농사를 짓고 있는 마음의 땅도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의 땅도 심고 거두는 이 법칙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2에 보면

예수님 공중강림 이전에 마귀가

미가엘 천사장을 통해서 땅으로 쫓겨 내려왔다.

그때 땅과 바다는 화 있을 진저

그런데 그 마귀는 영물이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마귀가 활동하는 그 영계라고 하는 그 땅

거기에도 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3분의 1씩

하늘의 빛도 3분의 1이 없어지고

땅의 소산물도 3분의 1이 없어지고

바다의 소산물 3분의 1이 없어지고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는 땅과 바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영계에서도 똑같이 3분의 1이 다 없어진다.

 

빛이 3분의 1이 없어지면

의의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들이

3분의 1이 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영계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의 땅도 땅이고

이 마귀가 또는 천사가 활동하는 영계에서도

여전히 심고 거두는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창세기 8에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땅은 계속해서 심고 거두는 범칙이 영원히 있다.

그럼 우리 마음의 땅도 영원히 심고 거두는 법칙을 따르고

내 마음에도 여름, 겨울, 가을이 오는 거고

내 마음 안에도 낮과 밤이 계속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단 축복 연단 축복이라고 하는

이런 은혜가 계속 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는 땅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의 땅

그리고 영계라고 하는 그 공간에서도

그대로 그 법칙이 영원히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심고 거두는 법칙을

바로 깨달아서 그런 생활을 해야만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본문 8 말씀을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육체를 따라 심는 자는 그 육체로 이제 썩어질 것만

거둘 수밖에 없고 성령을 따라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

 

우리가 무엇을 심을 것이냐?

거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본문 앞에 있는 5 16~21 말씀부터 한번 보겠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

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심는 것은 딱 두 가지이다.

육체를 위하여서 심을 것인가?

성령을 따라 심을 것인가?

 

그런데 그 육체라고 하는 것의 정체가

아담 이후로 타락하여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다.

죄와 정욕을 따라가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육체라고 하는 것이다.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육체를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죄만 짓다가 정욕만 따라가다가 멸망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

그럼 그때부터 그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성령이 원하는

땅을 살아가면서 성령이 원하는 대로 심어야

그것이 영생을 거두는 신령한 삶이고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떠나도 내 육체의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 둘이 평생 싸우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대로 계속해서 올라온다.

성령을 받아도 그 옛사람의 성품이 계속 올라온다.

그리고 나의 새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

이 둘이 평생 싸우는 것이다.

 

어느 시기가 지나가면 우리가 이것이 누가 승기를 잡아서

점점 성령이 강해지면 어떻게 되는가?

육체의 세력은 점점 없어진다.

 

점점점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면서

신령한 생활을 해야 올바른 신앙생활이 되는 건데

일평생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냥 육체대로 원하는 대로

따라가면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으로 심고 거둘 것이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본문 가운데 8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육체는 썩어질 것이다.

다 죽고 썩어버린다.

 

그런데 부활이라고 하는 영생은 썩지 아니할 것이다

그 말이다.

 

우리가 이 썩어진 걸 가지고 사는데 성령이 온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썩지 않을 것을 얻으려고 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썩을 것은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53~54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것이다.

사망 권세를 이겼다는 것은 예수님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육체는 썩어지지만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

그 부활이라고 하는 신령한 몸을 입게 되니까

사망이 다 물러가버린 것이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지금 취하는 것

성령이 그걸 위해서 우리에게 계속 그걸 따라오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감동을 주시고

성령이 그 일을 한 것이다.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게 해주려고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은 죽는 것이다.

썩는 것은 다 사망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썩지 않을 것은 사망을 뛰어넘어서

영생을 얻게 되는 거란 말이다.

 

고린도전서 9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린도교회에는 2년에 한 번씩 올림픽 같은

경기들이 있었다.

운동 선수들이 모여서 합숙 훈련을 하면서 그 면류관을

얻어 보려고 얼마나 절제를 하는가?

 

급수에 맞게 체중도 줄여야 되고 얼마나 절제하면서

운동회 나가는데 그 면류관을 아무리 얻어도

그건 썩어 없어질 면류관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해서

우리는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제가 필요한 것이고

우리는 향방 없이 뛰는 것이 아니고

분명한 향방을 가지고 목표를 가지고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하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고

썩지 아니할 것을 얻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빌립보서 3 20~21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이 썩지 않을 부활이라고 하는

영광의 몸을 입고 그 신령한 몸을 입은 것처럼

우리도 그런 영광의 몸을 주시려고 오시는 것이다.

 

주님이 오셔야 썩지 아니할 것을 얻게 되고

우리의 영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사도 바울은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9 말씀에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선이다 이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세상 기준의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9 16~17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 세상의 선의 기준은 하나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절대 선이시다.

 

이스라엘의 부자 청년을 비롯하여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 것처럼

다 그런 생각을 한다.

선하게 살아야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는 것처럼

그런데 절대 선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 것이다.

 

그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다.

영으로 계신 그분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다.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이 영이고 곧 생명인 것이다.

그 말씀들을 다 지켜 행하야 된다.

 

부자 청년은 그걸 다 지켰다고 그랬다.

율법적으로 지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계명들을 마음으로 지키도록

더 완성을 하셨다.

미워하면 이미 살인했다고.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0에 그랬을 때 예수님이 내 모든 소유를 다 팔고

나를 따라오면 내에게 보화가 있을 것이다

네가 원하는 영생이라고 하는 그 생명을 소유를 다 팔 때

그 소유가 천국 가지고 갈 수 없는 여러 가지들

애정과 욕망 같은 것들

이걸 다 팔아야 된다는 것이다.

물질의 소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절대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되는데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주의가 들어와서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만을 지켜야 된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단호하게 바른 복음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되고

마음으로도 지켜야 되고 그걸 지키지 못하면

또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게 해주고 말이다.

그걸 바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죄를 해결하고 그러면서 선을 행하고 말씀을 지켜나갈 때

세상은 악이니까 마귀가 공중 권세를 잡고

사탄이 다 쓴 세상이니까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기가 쉽다 그 말이다.

 

그런데 그 선을 행하면서 우리를 낙심하지 말아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왜?

언젠가는 반드시 선악에 대한 심판이 있고

반드시 그 선에 대해서 갚아줄 날이 오기 때문에

때가 이르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걸 갚아주시는 걸 알고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 것이 선을 지키는 것이고

낙심하지 아니한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말면서 기회가 되는 대로

착한 일을 하라.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

이렇게 사도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조선의 성자 방해인양이 있었는데

이 방해인양이 18살에 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에 있는 기전여학교의 교사가 돼서

몇 년 활동 못하고 23살에 소천한 그런 자매다.

그런데 그분이 성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아서

성령을 따라 살기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데

어느 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는 눈처럼 깨끗하게 살아라.’

그 음성을 들은 때부터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 일기를 쓰며 살았다.

자기 반에 맡은 아이들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말이다.

매일매일 한 가지에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규칙을 정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선을 행한다는 것이

무슨 큰 구제사업을 하고 뭐 이런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은 은사가 다 정해져 있고

받은 분깃이 있고 우리의 믿음의 불량이 있고

각자 다 삶이 있다.

 

그 속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매일매일 실천하면서

그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매일매일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서 작은 것 하나라도 말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을 향해서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고

위로해주고 말이다.

그런 것 자체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거창하게 무슨 사업을 하는 그런 선이 아니다.

지극히 작은 거.

 

그 방해인 자매는 매일매일 일기를 쓰면서

자기가 맡은 그 아이들을 위해서

그 영혼들을 위해서 매일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아빠가 멀리 미국으로 간 그 아이는

그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그 아이를 심방도 하고 말이다.

나중에는 고아들을 모아서

전주 곳곳에 그 모든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고아원을 지을 수 있는 작업을 모았다고 한다.

그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아이들이 때가 차면 함께 데리고 목욕탕에 가는데

사람들이 보니까 어린 양 대신 예수님이

마치 어린 양을 끌고 가는 그런 모습을 연상할 만큼

 

홍수를 만난 사람에게는 교사가 만년필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필요한 물건인가? 비싸기도 하고

그 만년필을 팔아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해서 들어가라고 말이다.

 

황해도에서 어머니가 매번 옷을 보내주는데

나중에 죽고 보니까 옷이 한 벌도 없다는 것이다.

다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 주었다.

 

하나님이 ‘눈과 같이 깨끗하게 살아라’

그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때부터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만 계속해서 심으니까

일평생 아버지가 예수 믿지 않아서 그렇게 어려웠는데

결국은 그 아버지도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때가 이르면 다 거두게 돼 있는 것이다.

왜? 그게 자연의 법칙이고 농사의 법칙이고

그게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을 따라 심어야 되는데

그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어떻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그 성령을 따라가겠는가?

 

그러니까 육체를 위해서만 심고

예수 믿어도 육체만을 위해서 심게 되는

그런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세상사는 동안에 이 전체가 선을 심는

그런 기회가 되는 곳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열매를 하나도

볼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면서 이 말씀을 지켜

행해야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심어도 이 열매를 당장

딸 수 없을 수도 있다.

악인이 계속 극세하는 것 같고 말이다.

선한 사람은 선하게 살아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심판이 오고

반드시 거두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매일매일

열매가 없어 보여도 낙심하지 말고 이렇게

또 그렇지만 하나님은 종종 세상에서도

종종 거두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심령을 아시기 때문에

위로가 필요할 때는 그렇게 역사도 하고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니까

또 하나님이 응답도 하시고 또 축복도 하신다.

이 세상에서도 그 열매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형편에 따라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를 하신다

그 말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큰 것으로만 심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매순간 나의 사는 삶의 전체가 심는 것이다.

 

매일매일 사랑으로 심는 거고

매일매일 기도를 심는 거고 말이다.

말 한마디로 심는 거고 말이다.

작은 사랑 실천하는 거

다 그 모든 것이 전부 심는 것이다.

 

은사도 다르다.

분량도 다르다.

분깃도 다르다.

내게 준 은사와 분깃과 내게 준 그 분량 안에서

최대한 성령을 따라 그렇게 살아가면

그게 올바른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심는 삶인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가 영생으로 나타난다 이 말이다.

 

심고 거두는 법칙에 따라서 남은 생애를

여러분이 살아가게 되시길 바란다.

 

이것은 뛰어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농사의 법칙이고 이게 자연의 법칙이고 우주의 법칙이고

영계의 법칙이고 내 마음이라고 하는 땅속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신령한 일도 전부 이 법칙을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여러분이 심고 거두는 이 원칙에 따라

이렇게 산다면 올바른 신앙생활이고 그 원칙을 따라

무엇을 심을 것인가?

성령을 따라 심어야

우리가 영생을 얻자는 것이다.

 

육체의 세력이 강성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육체가

좋아하는 대로 이렇게 심기를 원할 때도 많지만,

신령한 자는 신령한 자가 될수록

성령을 따라 심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을 따라 심고 선을 행할 때

낙심하기 쉽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시고,

또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이 모든 행함대로, 심은 대로 그대로 갚아주신

그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이렇게 심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심고 거두는 법칙을 따라,

특별히 성령을 따라 심어서 영생을 거둘뿐더러,

또 이 땅에 성령을 따라 심어서 많은 상으로

이렇게 받을 수 있는 귀한 자리로 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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