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과거, 현재, 미래
시편 42편 1~8절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들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 나타난 그대로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그리고 우리의 실제적인 생활에도 성경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주시는 것이 또 하나의 말씀이다.
또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믿음을 더하게 되고
또 성경을 통해서 기도할 마음을 일으켜 주시기도 하고
또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기적을 보게 한다.
시편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사 위경해서 우리를 건지시는도다
그랬다.
여러 가지 위태로운 환경이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서
거기서 건져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이렇게 여러 가지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특별히 시편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신앙 고백을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맛본 간증들을 이렇게 우리에게
시편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 유익이 대단히 많은 그런 말씀이기도 하다.
시편은 신앙의 시를 모아서 편집한 것이다.
예배드리고 제사하고 찬양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이 시의 신앙심을 모아서 편집했는데
가장 먼저 편집을 한 것이 다윗 왕이었다.
그다음에 히스기아가 종교 개혁을 하면서
시편을 편집했고
그리고 성전을 재건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이걸 다시 편집을 했다.
오늘날 150편으로 다섯 권으로 나눴다.
그래서 150편의 시편이 정리된 것이
다윗 때부터 세 차례의 편집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 다윗이 쓴 시편이 73편으로 가장 많다.
그리고 아삽이 12편, 고라 자손이 쓴 시가 11편
기타 솔로몬의 기도도 있고 모세의 기도,
그리고 작자 미상이 49편이나 된다.
대부분 시편은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비탄으로 탄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하다가
나중에는 찬양으로 끝나는 그런 것이
대부분의 시편의 특징이다.
오늘 42편 고라 자손의 씨를 우리가 보면서
시인의 과거, 현재, 미래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첫 번째는
제목에 보니까
‘고라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이렇게 되어 있는데
고라 자손이 이 시편 42편을 쓰는 당시에
배경을 이해를 해야 된다.
왜 이런 시편을 쓰게 되었는가?
그래야 고라자손 시인의 과거, 현재가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을 왜 이렇게 하고 있느냐?
왜 이런 시편을 썼느냐?
그 고라자손의 배경을 이해할 때
우리가 이 시편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택하셔서
그 레위지파를 통해서 하나님은 제사장 지파로
삼기도 하고 성전 봉사를 레위지파에게 맡기셨다.
출애굽기 6장 16절 말씀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연치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수는 일백 삼십 칠세이었으며
레위에 가문의 족보가 나오는데
그 레위가 게르손, 고핫, 므라리 이 세 아들을 낳는데
17절에 보면 게르손의 아들이 쭉 나왔고
18절에는 고핫의 아들이 나오고
19절에는 므라리의 아들이 나왔다.
20절에 아므람이 그 아비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취하였고 그가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수는 일백 삼십 칠세이었으며
21 이스할의 아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요
레위가 게르손 그다음에 고핫, 므라리 세 아들을 낳는데
그중에서 고핫의 아들인 아브람을 통해서
모세와 아론을 낳는 것이다.
그리고 고핫의 아들 이스할을 통해서
거기에 고라자손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과 고라는 서로 사촌지간이다.
제가 이렇게 도표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보시면 이해가 될 것이다.
레위를 통하여 게르손, 고핫, 므라리
세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런데 게르손은 여기 고핫 자손 중 아들이 넷인데
아브람 가운데서 아론과 모세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아들 이스할 거기서 고라가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론과 모세와 고라는 서로가 사촌지간이다그 말이다.
하나님이 레위지파를 택하셔서 모세와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시는데
민수기 3장 3절 말씀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을 발리우고
거룩히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은 제사장들이라
아론을 통해서 제사장 지파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고 민수기 4장에 가서 보면
레위지파 가운데 남은 여러 가지 게르손, 고핫
이런 나머지 레위지파 가문의 사람들을
3장에도 그렇게 나왔고, 4장에도 나왔고
나머지 그 레위의 족속들 모든 사람들을
전부 성전에 봉사를 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정하셨다.
고라도 제사장 지파인 아론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성막에서 봉사하게 됐기 때문에
고라도 성막을 봉사하게 된 그런 지파였다.
그러다가 민수기 16장 1~3절
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이것이 고라의 폐역입니다.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아론을 제사장 지하로 세운 것이 하나님이고
모세를 세우신 것이 하나님인데 고라의 자손들도
성막 봉사를 했지만 왜 너희들이 총회,
왜 스스로 높아서 너희들만 제사상 집하냐
이렇게 반역을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30~33절 모세가 기도한다.
30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줄을 너희가 알리라
31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33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고라와 함께 250인의 그 반역한 사람들을
땅을 열어서 그대로 다 묻어버렸다.
이것이 고라의 폐역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고라는 비록 당을 져서 이렇게 멸망당하였지만,
고라의 자손들은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민수기 26장 9~11절 말씀
9 엘리압의 아들은 느무엘과 다단과 아비람이라 이 다단과
아비람은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자러니 고라의 무리에
들어가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여호와께 패역할 때에
10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 오십명을 삼켜 징계가 되게 하였으나
11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아버지는 반역자가 되고 역적모의한 사람이 되었지만
고라의 자손들은 아버지를 따라간 게 아니고
하나님의 신앙의 편에 서서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이다.
고라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따라 반역을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은 250인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반역자였고 아버지는 변절자였지만
오히려 다윗을 도와 고라 자손들이 나라를 건설한 것이다.
역대상 26장 19절
고라와 므라리 자손의 문지기의 반차가 이러하였더라
고라의 아들들은 성전에 문지기가 됐다 이 말이다.
성전 문지기도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가?
성전의 문지기가 됐다.
그리고 역대상 6장에 레위 아들들의
족보가 쭉 나오는데
그 아들들 가운데서 고핫, 바로 고핫의 후손들
그중에서 아론은 제사장되고 나머지는 전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데
그중에서 하만이 나온다.
그런데 그 하만이 바로 성전에서 찬양하는 사람이다.
38절 이하의 말씀이 나오지.
38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요 이스할은 그핫의 아들이요
그핫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며
39 헤만의 형제 아삽은 헤만의 우편에서 직무를 행하였으니
저는 베레갸의 아들이요 베레갸는 시므아의 아들이요
그러면서 그들이 성전에서 찬양하는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을 쭉 설명해주고 있다.
고라는 패역하여 멸망당하였지만 고라의 아들들은
그 사건에서 죽지 않고 다윗을 도와서
성전에 문지기도 되고 성전에서 찬양으로 봉사하는
그런 사람들의 지파가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라의 자손들이 시편 42편을 쓸
이 당시에는 유다가 앗수르에 의에서 멸망되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 드릴 때도 없고
성전 문지기 할 때도 없고 찬양할 때도 없고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 이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여기에 고라 자손의 과거를 보면
4절 말씀에 바로 말씀을 하고 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하나님께 제사하고 예배하는 날이면
고라의 자손들이 찬양을 하고
성전 문지기로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집으로 성도들을 인도하는
이런 일을 했는데 그 성전이 되고 없으니
이제 이걸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이게 고라 자손의 과거였다.
오늘 이 모습이 혹시 우리는 대한민국의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 한번 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옛날 예루살렘,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에서
그렇게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서
지금까지 한국 땅에 이렇게 신앙이 지켜 왔는데
그 평양에 장대현 교회,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이
바로 서 있는 것이다.
우상의 단지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고
대한민국도 마지막 때 팬데믹이니
이런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서 예배가 다 흐려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낙심이 되고 좌절되면서
신앙이 점점 없어져 가는 이것이 바로
그 옛날 성전을 그리워하며 탄식할 수밖에 없는
고라와 같은 그 현실이 우리 각자의
현재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모습이요
우리 각자의 참담한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의 과거이다.
그럼 두 번째 시인의 현재는 어떤가?
성전이 무너지고 예배와 제사와 찬양을 할 수 없게 된
그 상황에서 이 고라 자손들은 1절부터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 성전은 하나님이 그 이름을 거기 두신 곳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낙성하면서
하나님이 여기에만 계시지 않겠지만
우리가 여기 와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셔서
이곳에서 응답하시고 함께 역사해 주고
그렇게 기도한 것이 바로 성전인데
성전이 없어졌단 말이다.
그러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광야와 그 사막 가운데서
물이 귀한 거기에서 사슴은 목이 마르면
얼마나 시냇물을 찾겠는가?
옆에 사자가 와서 이렇게 공격을 해와도
그걸 볼 수가 없다고 오직 물만 찾는다
목이 마르니까 물만 보이는 것이
바로 목마른 사슴인데 그러한 심령으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내 영혼이 주를 찾게 갈급하다
이런 고라자손의 과거를 그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아! 왜 현재 성전이 없기 때문에 예배하고 찬양하고
이런 자리가 없는 그 속에서 내 영혼의 시냇물처럼
시냇물을 찾는 그 사슴처럼 주를 찾기에 갈급해 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다.
2절은 또 뭐라고 말씀하는가?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다.
죽어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에게 응답하셨고 나와 동행하셨고
나에게 말씀으로 함께하셨던 그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지금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면서
어느 때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갈 것인가?
이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예배할 처소를 잃어버리니까
10절에 이렇게 고백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성전이 파괴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겠냐
그러면서 그 원수들이 비방하는 그 말을 들어야만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인 것이다.
그게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그 내 심령 속에서
그렇게 괴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비방을 하는 것이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 하고
그래서 시편 기자는 5절에 그렇게 표현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11절에도 똑같이 고백을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생존하신 하나님을 배우지 못하고 예배하고 찬송하지 못하고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고 그걸 믿고 알고는 있지만
내가 현재 만나지 못하니까 비방을 받고
이러면서 그 하나님을 찾는 그 괴로움이
나를 낙망하게 하고 나를 불안하게 한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3절 말씀에는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이 원수들이 네 하느님이 어딨느냐
그럴 때 그 비방을 들으면서
그것이 눈물이 내 음식이 되어 질 만큼
이런 것이 이 시편 기자의 현재적인 삶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낙망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불안하게 되고 말이다.
우리가 이 시편 기자의 배경을 알게 되면
현재 왜 낙망할 수밖에 없고
현재 왜 불안할 수밖에 없고,
왜 비방 가운데서 슬퍼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이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고라 자손의 시편의 고백이 때에 따라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세 번째
그러면 이 시편의 기자인 고라 자손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11절 하반 절에 뭐라고 말씀하는가?
내 영혼이 불안하고 낙망 가운데 있지만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비방도 받고,
원수들의 압제에 있고,
세상의 파도와 물결이 지금 나를 힘들게 하고,
여러 가지 이런 환경이지만
하나님의 그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이 환경을 뛰어넘어서 오히려
오히려 이 말이 얼마나 위대한 말인지 모른다.
내 환경은 현재 이렇고 낙망하고 불안하고
비방을 받고 이러지만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오히려를 다른 번역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표현했다.
전에 하나님께 하던 것처럼 여전히
현실이 없지만 오히려 더 하나님께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고백한 것이 이 시편 기자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5절에도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여전히 그 환경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찬송하는
그런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8절에 또 이렇게 고백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들이 오고
낙망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낮에 나에게 인자함을 베푸셔서
그 인자함이 곧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은밀히 도와주시는
그 인자함을 베풀기 때문에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내가 살아계신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여전히 기도하는 삶인 것이다.
낙망하고 불안한 것에 멈추는 그런 현재가 아니고
이 시인의 미래는 계속해서 여전히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얼굴에 도심을 하여
찬송하고 기도하는 이런 삶을 계속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이고
저와 여러분의 미래는 이러한 삶인 것이다.
성도의 삶은 현재를 바라보고 낙망하여 불안한 것이 아니고
성도는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멀지 않아 주님이 오실 것이고
멀지 않아 우리의 개인적인 종말이 올 것이고
나의 미래, 그 먼 훗날, 이 미래를 바라보면서
여전히 오히려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생존하시는
그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이것이 성도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7절 말씀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이게 어려운 건데 주의 폭포 소리가 뭐겠는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영광 중에 계시고
절대 평강 가운데 계시고
기쁨과 평강과 영원한 즐거운 빛과 사랑 가운데 계신
그 하나님이 그 생명을 우리에게 나눠주려고
생명의 강을 통해서 그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는
그게 하나님의 폭포 소리인 것이다.
저 외국 나라의 그 거대한 폭포에서 그 물이 휩쓸어
내리는 것처럼 그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지금 공급되기 위해서 그 폭포 소리가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있는 깊은 바다와
하나님의 깊은 바다인 그 바다가 서로가 서로를
부르고 있다 그 말이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어떻게 돼 있는가?
그 빛이 오기 전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그 땅은 흑암이 가득한 땅이었다.
그게 우리의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 마음의 땅이 혼돈스럽고 무질서하고 빛이 없으니까
정리가 되지 못하고 그 땅이 공허한 것은
만족함이 없는 것이다.
빛이 들어오고 예수님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만족함이 없고 공허하고 어둠이 가득한 땅인데
그다음에 혼돈 공허와 함께 깊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음이 곧 우리의 영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걸 직역성경에는 깊은 바다, 무저갱 이렇게 번역했다.
끝을 알 수 없는 그 깊은 바다인데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서 그 깊은 바다에 하나님의 깊은 것이 들어와서
영원히 사는 인생이 돼야 되는데 그 깊은 바다인
나의 영이 갈망하여 하나님의 깊은 것을 찾고
그 깊은 생명에 폭포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려고
서로 바다가 바다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 영혼의 갈망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서 운행한다
그렇게 말한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어서 생명을 열어주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날개를 풀어서 영의 깊은 바다와 그 물,
그 영의 소유를 받는 마음이라고 하는 그 땅의 물,
그 수면 위에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덮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생명을 주시려고
그러니까 그 폭포 소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폭주의 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내 영에 깊은 바다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찾아서
그 영과 영이 만나려고 하는 이 몸부림이
이 고백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서로 부르는 그 모습이
깊은 바다와 바다가 부르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그 소리가 들리는가?
그런 영의 갈망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곳을 찾아야 되는 것이다.
시편 130편에
내가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나이다 하는 말씀인데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되는 거고
찬양도 깊은 곳으로 가야 되는 거고
말씀도 깊이 내려가야 되는 거고
기도도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서 영과 영이 만나도록
나의 깊음의 바다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서
끝없이 끝없이 생명을 알아가면서 영원히 사는
그것이 우리의 갈망이 되고
그 생존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가 누리는
그 소원에 마음이 우리에게 이렇게 넘치는 게
이 시편 기자의 고백이다.
베드로처럼 깊은 데 가서 그 물을 내려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된다.
얕은 물가에서 찰싹거리는 그런 기독교인이 아니고
사탄도 깊은 것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그 사탄도 깊은 대로 우리를 끌고 가고
멸망으로 끌고 갔는데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그 폭포 소리가 흘러내리면서 그 생명을 공급해주려고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가 깊은 데로 내려가지 않고
어떻게 그 생명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도 찬양도 깊이 있게 기도도 깊이 있게
사랑 실천도 깊이 있게 남을 위한 중보도
그 사람의 형편을 따라 깊이 있는 이런 기도로
모든 것을 깊은 데로 가서 해야 되는 것이다.
시시하게 예수 믿다가 시야에 죽는
그런 인생이 돼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제가 정확하게 34년 전에 저희 교단에 처음 들어와서
사경회를 참여하라고 말씀을 들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셨는데
앞에 높은 험난한 산이 하나 있는데
인류가 다 그 산을 넘어가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산 입구에 사람들이 쭉 있어서 가서 보니까
칼 장수들이 칼을 팔고 있었다.
그 당시에 사경회 강사들을 통해서
또 그 당시에 교수를 통해서 말씀을 파는 게
칼 장수로 보인 것이다.
칼 장수들이 좌판을 벌려놓고 뜨문뜨문 앉아서
칼을 팔면서 그 산 입구에서 칼 장수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보여주면서
그 당시에 깨닫게 하셨다.
그 34년의 세월, 저도 교단에서 지금까지 34년 하면서
그동안에 부족하지만 말씀의 칼을 지금까지 갈면서
저도 칼 장수가 됐다.
말씀의 칼을 그 동안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말씀의 칼을 괜히 갈게 하셨겠는가?
날이 잘 서서 이렇게 잘 갈은 그 칼을 하나님이
한 번쯤 쓰게 하시려고 그 칼을 갈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의 깊이를 찾아 말씀을 따라
계속해서 깊은 대로 지금까지 달려온 그런 생애가
저의 생애인데 우린 깊은 대로 내려가야 된다.
나의 영이 사탄의 영을 만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을 만나서 영과 영이 서로 부르면서
이렇게 그 생명을 나눠 받고
그 폭포 소리가 내 속에 들어와야
내 마음의 깊은 곳에 내 영의 깊은 곳에
요한복음 7장 38절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 폭포의 강이 생명수의 강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고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거기에 있는 것인데
여러 가지 환경 가운데서 낙담하는 부분이 있고
때에 따라 환경 가운데서 불안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때에 따라 주변 사람들의 비방이 우리에게 있을 수도 있다.
너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너 잘된 게 뭐냐?
예수 믿는다더니 맨 날 그 모양 그 꼴이고
왜 환경은 점점 어렵고 그러냐?
계속해서 비방 들을 수도 있고
주님이 보내시는 파도와 물결 속에서 세파 속에서
여러 가지 건강에 문제도 있을 수 있고
물질의 문제도 있을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공격도 있고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힘든 세상을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가?
그러나 이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히려 생존하신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이게 우리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서
나는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것도 더 깊이 있는 영과 영이 만날 수 있는
그런 깊이 있는 찬송으로 말이다.
그런 기도로 말이다.
그렇게 말씀의 깊이로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생존하신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서
그렇게 나가는 것이다.
낙망스럽고 불안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그래도 낮에는 그 인자하심이 여러분 앞에 베풀어주시고
그 하나님이 그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하나님 여러분 앞에 은밀하게 도우시는 역사가
계속될 것이다.
낙망하지 마시고 불안하지 마시고
우리의 현재는 이렇다 할지라도
이 시편 기자의 미래처럼
오히려 찬송하고 오히려 기도하고
오히려 더 깊은 데로 내려가서
6절 말씀에 그렇게 표현하였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헤르몬은 이스라엘 땅에 가장 높은 산이다.
우리나라 백두산보다 더 높은 산이다.
1년 내내 만년설이 쌓여 있는 산이다.
그 산에서 매일 이슬이 내려서
그 산에 물이 흘러내려서 요단강을 적시면서
그 물이 요단강을 흘려서 사해까지 흐르면서
이스라엘은 농사도 짓고 그 물을 먹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헤르몬과 같은 높은 그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생명의 역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미살산은 어느 작은 산이겠다.
이렇게 하나님이 낙망이 되는 그 환경 속에서도
요단땅, 헤르몬,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그 높은 산에서 물줄기를 주어서 요단강을 흐르게 하시고
이스라엘 광야에 그 먹고 살만한 물을 흘리시는
그 생명의 하나님의 그 역사
거기서 그 주님을 기억하면서 여전히 살아계시고
생존하신 하나님께 나가는
이것이 성도의 미래가 되고
저와 여러분의 삶이 돼야 하는 것이다.
오늘 고라 자손들이 과거에는 하나님 성막에서
봉사하면서 찬양하고 문지기로 이렇게 하다가
성전을 잃어버리고 고통 가운데서 지금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과거 현재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에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께 더 깊은 곳으로
이렇게 나갈 수 있는 우리 각자의 미래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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