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의 교훈
욥기 5장 8~16절 연극이나 영화를 왜 볼까? 사람들이 재미있으니까 보는 것이다. 단순한 재미보다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연속극도 보고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영화와 연극에는 주연 배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만 있는 것이 아니고 조연도 있다. 어떤 때는 조연이 더 마음의 감동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 영화 속에 주연, 조연, 엑스트라, 이런 수많은 이들이 있는 것처럼 성경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성경은 각 장마다 거의 주연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조연이 있다. 수많은 인물이 성경 안에 등장하면서 그 책마다 주연이 있고 조연이 있고 엑스트라도 있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의 연출자이시다. 그 모든 성경에 나타나는 주연, 조연, 엑스트라,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다시 한 번 감동을 주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섭리하시는 것이다. 욥기의 주인공은 누굴까? 두 말할 것도 없이 욥이다. 그런데 그 욥기에는 욥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조연들이 나온다. 그 욥의 세 친구가 나오는데 4장 1절에는 대만 사람 엘리바스 그리고 8장 1절에는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11장에는 나아마 사람 소발 이렇게 세 친구가 등장을 한다. 그 세 친구가 세 번이나 여러 장에 걸쳐 말을 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욥이 대답을 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32장에 가서 엘리후가 나타나서 37장까지 마지막 정리를 해주는 것이다. 이 주제는 욥에 당한 어려움. 가족의 자녀가 다 죽고 재산도 다 날려버리고 종들도 다 죽고 몸에는 악창이 일어나고 동방의 의인인데 왜 고난을 당할 것인가? 이것을 주제로 하여 그 세 친구와 대화 속에서 인생을 향한 교훈과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말들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5장에 나타난 첫 번째 친구인 엘리바스의 이 말들을 교훈으로 받고 우리가 거기서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죄성을 타고난 인생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교훈을 먼저 우리가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은 아니지만 본문 앞에 있는 6절 7절이다. 6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말 중에 나오는데 단어가 좀 어렵다. 그래서 공동 번역으로 옮겨왔다. 6 땅에서 불행이 솟아나는 일 없고 흙에서 재앙이 돋아나는 일도 없으니 7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내는 것, 불이 불티를 높이 날리는 것과 같다네. 이렇게 번역을 했다. 어려움, 인생의 고난, 욥이 당한 고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땅에서 흙에서 올라오는 게 아니다. 어려움이 닥치는 이유가 자연이나 주변 환경을 탓하지 말고 그 환란이 어디에서 오는가? 외부의 원인이 아니고 인간 내면에서 그 원인이 있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재난은 공동 번역에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스스로 빚을 내는 것이다 그랬다. 그러니까 인생의 모든 재난과 고통과 어려움은 자기 스스로 빚어내는 것이다. 흙에서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그 불로 비유를 해서 불이 타니까 불티가 높이 날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불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원죄를 빗대서 말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원죄라고 하는 7종 죄악성 자체가 있으니까 그게 불과 같이 올라오니까 그것이 불티나는 것처럼 불티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런 표현인 것이다. 인생의 모든 고난과 인생의 모든 어려움이 인간 내면에 있는 원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다 엘리바스가 그렇게 주장을 하는 것이다. 죄성을 갖고 있는 그 인생을 불이 타는 걸 빗대어서 불이 있으니까 불이 타니까 불티가 나타나고 그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내면의 죄성으로 인해서 고난이 닥쳐오는 것이다. 이 엘리바스를 통해서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생은 고난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시편 90편 10절에 그렇게 고백을 한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인생이 7, 80인데 날나간다. 세월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옛날에 시를 쓴 분들은 백발이 오는 걸 막으려고 막대기를 갖고 하니까 막대기보다 먼저 알고 백발이 온다고 말이다. 서리를 좀 녹이려고 봄바람을 초청했는데 인생이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속히 날아가는 인생인데 7, 80인데 인생은 전체가 슬픔과 고난과 이 수고와 인생의 모든 것은 고난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러냐? 사는 동안에 죄의 지배를 받는 인생이니까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오로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평상시에는 괜찮다가 기회만 되면 그 환경 속에서 죄가 튀어나오니까 죄의 싹은 사망이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니까 고민스럽다. 사도 바울은 그것 때문에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모든 연단을 마치고 죄에서 해방이 됐다고 로마서 8장에 선언을 하고 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생은 고난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물론 하나님이 감당할 만큼 하시니까 어느 정도 했다가 또 축복도 하시고 쉬었다가 영원히 잘되고 범사가 잘 되는 이게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다. 한 번만 그렇게 한 번만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걸 반복하신단 말이다. 그러면서 욥기서 5장 2~5절 말씀을 보면 죄 가운데 허덕이는 인생을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3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 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4 그 자식들은 평안한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이것도 너무 말이 좀 어렵다. 그래서 이것도 제가 공동 번역으로 한번 이렇게 가지고 왔다. 2절을 이렇게 번역을 했다. 어리석은 자는 투덜거리다가 망하고 철없는 자는 화를 내다가 죽는다네 2절을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것을 지금 1차적으로 욥에게 하는 교훈이다. 그럼 욥이 투덜거리고 철없는 자처럼 화를 냈다는 그걸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3장에 있는 욥의 말을 빙자해서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럼 3장 전체에 욥이 어떻게 하고 있나? 갑자기 인생 가운데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악창이 일어나고 자녀가 죽고 우양이 다 죽고 이럴 때 3장 1절에 보니까 뭐라고 표현했는가?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이것이 미련하다는 것이다. 자기 생일을 저주했다. 3장 전체를 다 볼 수 없지만 11절에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차라리 이렇게 고난을 당할 바에는 태에서 나오지 말고 어머니 뱃속에 나오면서 바로 죽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다. 3장 마지막 25~26절에 또 이렇게 표현했다. 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이 3장 전체에 나오는 그 욥의 말에 대해서 네가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게 미련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는 투덜거리다가 망하고 철없는 자는 화를 내다가 죽는다네 3 나도 어리석은 자가 뿌리를 뻗어가는 것을 보기는 했네만 그의 집은 삽시간에 망하고 말았네. 4 그의 아들들이 도움받을 곳이 없어 성문에서 몰매를 맞아도 살려줄 사람조차 없었네. 5 그들이 거둔 것은 굶주린 자가 먹어 치우고 하느님께서 그들의 이빨에서 빼앗아 내시니 목마른 자들이 그의 재산을 삼켜버렸네. 이 모든 원인들이 지금 네가 어리석기 때문에 투덜거리는 것이다. 그러면 욥기서 1장 1절에 보면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렇게 동방의 의인이라고 했던 욥인데 그 욥조차도 표면적인 의인이었지 원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원제를 다루시려고 지금 욥에게 이런 어려움을 줄 때 그 욥이 그것에 대해서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어.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죽었으면 좋겠어. 왜 나를 이렇게 태어나서 고난을 갖게 해.’ 이런 투덜거림 때문에 망하는 거고 이런 분노가 망하는 지름길이다 그걸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인생은 누구인가? 그 수많은 고난 가운데서 그걸 원망 불평하면서 남의 누군가의 환경에 탓으로 돌리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는 그런 인생이 어리석은 인생인 것이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죄악의 원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그 해결책을 따라 사는 인생 그게 가장 지혜로운 인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교훈 속에서 그 두 가지를 보는 것이다. 인생은 죄 때문에 허덕이고 죽을 때까지라도 수고와 슬픔 가운데 있는 인생인데 어떻게 내가 이 사는 동안에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거기에 도전하고 거기를 주목하고 그 해결책을 따라서 말씀을 대하면서 그거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 어리석은 인생과 미련한 인생이다 그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투덜거리고 이렇게 미련한 인생에 자녀들까지 다 돌보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엘리바스는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신속히 가는 인생인데 여기다가 초점을 맞추고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예수 믿어뒀다가 죽은 다음에 그냥 막연하게 따놓은 당상처럼 천국 가는 그런 천국이 아닌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내 속에서 심령 안에서 지금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다. 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현재적으로 공급받아야 되는 것이고 그 사랑이 완성되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나라의 자녀의 자격을 현재적으로 갖춰가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의 목표가 돼야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엘리바스의 교훈은 고난 가운데서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5장 8절에 이렇게 고백을 했다.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이것도 제가 공동 번역으로 봤다. 내가 만일 자네라면 나는 하느님을 찾겠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겠네. 나의 당한 이 인생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내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이 문제를 맡겨서 회개하면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지 이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 9~11절까지 말씀해 놓고 있다. 9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 이런 하나님을 나 같으면 의뢰하겠다. 이런 하나님에게 나는 그것을 맡기겠다. 지금 엘리바스의 교훈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에 당한 모든 문제를 누구 탓이나 어떤 환경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인생 안에 나의 문제인 내 죄악성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이런 환경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내 문제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가지고 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귀한 일을 셀 수 없이 하는 하나님,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고 이게 지금 육신적인 비를 땅에 내리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비다. 우리 심령의 땅에 비를 내려야 인생이 산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속에 이제 신령한 비를 내려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물을 내 마음의 밭에 보내시는 하나님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 하나님께 의뢰하고 하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가야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서원하여 드디어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아들을 얻게 됐을 때 거기에 노래를 불렀는데 사무엘상 2장 6절부터 이렇게 표현하셨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우리 인생의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살리기도 하고 나를 죽이기도 하고 나를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시는 거 전부 그분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한나라고 하는 위대한 여인이 이런 신앙 고백을 한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고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셔서 귀족들과 함께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도 여전히 하나님이 하시는 거라고 말한다. 인생의 모든 나의 삶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장에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한란이 얼마나 어려운지 마음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그런 것처럼 어려웠는데 그때 하나님이 이런 가운데서 얼마나 고생고생이 심했는지 마음의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의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그 환경 속에서 깨닫고 보니까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려고 하시는 거구나 그래서 그 환경에서 하나님이 이제 다시 위로하시고 환경에서 건져주시니까 자기와 같은 고난당하는 많은 영혼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걸 경험하게 되어서 남은 생애도 평생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는 인생이 됐다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다. 저와 여러분은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먼저 나가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아뢰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그때부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그 사울에게 악신이 붙었는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다 욥에게 악신을 붙이고 욥에게 사탄을 붙여서 하는데 그 사탄도 하나님의 도구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환경을 갖다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울도 그 부리시는 악신이다 그랬다. 제2의 성경이라고 하는 천로역정에는 이 기독도가 미궁이라고 하는 성에 들어가서 큰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데 사자 두 마리를 거기다가 두었다. 너무 두려우니까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은조의 도움으로 똑바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딱 한 길로 갔다. 알고 보니까 그 사자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려고 무는 사자처럼 환경을 그렇게 해놓은 것이지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않고 한 길로만 가면 그것이 다 통과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종종 이 모든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위협해 주시지만 그게 전부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부자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엘리바스가 나 같으면 하나님을 의뢰하겠다고 나 같으면 이 순간에 하나님께 나가겠다. 인생에 당한 모든 문제에서 저와 여러분은 먼저 회개하면서 이 문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걸 의뢰하고 그분께 모든 걸 맡겨드리는 그런 삶으로 나가야 된다. 그게 진정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교훈은 이 엘리바스가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징계 교훈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5장 17~19절 17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여기서 엘리바스가 징계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이다.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후에 히브리서에 똑같은 말씀을 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12장 6~8절 말씀에 보면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니까 참 아들은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징계한다는 것이다. 전에 신학교에 있을 때 학생 하나가 상담을 왔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사생아 같아요.”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을 읽고 자기가 징계가 없다고 지금 자기는 사생활 같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랑한 자가 아닌 것 같다고 고민을 하면서 상담하러 왔다. 상담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분이 고아인데 평생 고아로 살아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그런 평생의 고아의 삶을 살았는데 사실은 어마어마한 징계와 연단과 훈련을 많이 받았는데 고아의 삶 속에서 그게 하나도 징계로 느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은 엄청난 연단을 받았고 징계를 받았는데 징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분은 예수 믿고 너무너무 좋아서 ‘하나님 저 학교도 못 다녀서 성경도 읽지 못하는 사람인데 저 성경 좀 열어주세요. 눈 좀 열어주세요.’ 성경 읽게 해달라면서 한글을 깨우쳐서 성경을 한 달에 일독씩 수십 독을 한 사람이다. 그런 특별한 분이 상담을 오셨다. 엄청난 연단과 훈련 속에서 많은 징계를 받았음에도 그 징계가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런 고백을 한 것이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죄를 짓고 잘못한 자를 경책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따끔한 사랑의 손길이다. 그러니까 이 경책을 가볍게 여기고 마시고 사랑한 자에게 주는 경책이다 이렇게 깨닫고 그래서 징계를 받을 때 그것이 유익하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도 싸매시고 상하게 하시다가도 손으로 고치면서 6가지 환란에서 구원하시고 7가지 환란에도 미치지 않게 하시겠다. 왜 하필 여섯, 일곱을 말했을까? 돌 항아리 여섯 개의 물을 채워야 되는 것처럼 일곱 번째는 안식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경은 전부 그런 원리로 돼 있다. 완전의 길에서 다 6가지 창조의 한 주간의 여섯 날처럼 6번 이렇게 훈련을 받고 시험이 들어갔는데 마지막 일곱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거기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가 여러 가지 징계도 받고 훈련도 받지만 일곱 번째는 안식에 들어간다는 그런 교훈을 엘리바스가 우리에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런 원리로 돼 있다는 것이다. 결론의 말씀드린다. 엘리바스는 인생이 왜 고난을 당하느냐? 권력을 탓하는 것이 아니고 원망하는 것이고 우리 각자의 죄악성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이걸 우리에게 지적해주는 것이다. 여러분 인생을 통하여 남은 생애에 누구 탓하고 원망하지 말라. 모든 환경은 내 문제이다. 내 원죄를 해결해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환경인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걸 해결해보려고 애를 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걸 모르고 그 환경에 대해서만 이렇게 원망, 불평하는 사람은 미련한 인생이고 그게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고 그다음에 고난 가운데서 회개하면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라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 가서 일러라. 누구 사람한테 따지지 말고 하나님께 그 문제는 가지고 가라. 남편이 힘들게 하면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고 아내가 힘들게 하면 그 문제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라. 인생의 삶을 하나님이 주관하는 거지 이 주변의 환경이 그건 아닌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라. 징계가 이렇게 유익하고 사랑하는 자에게 준다고 하는 그 징계인 것을 알자. 그래서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야보고 사도가 그렇게 표현을 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통해서 죄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고난이 끝이지 않는 인생임을 깨닫게 하시고 왜 심판대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완전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심판대 가서라도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져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거룩해진 만큼 이상에서 완전해진 만큼 그건 상급이 될 수도 있겠지만 죽은 후에는 아무 상급이 없이 하나님은 그걸 이루시고야 천국에 들여보내지는 그런 하나님이신 것이다. 여러분의 크고 작은 여러 가지 환경에 어려움이 온다면 하나님의 징책인 줄 깨달으시고 하나님을 의뢰하시고 회개하면서 이렇게 주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는 가운데서 새롭게 평안을 맛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이 아침에 간절히 축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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