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 주시면 말 잘 들을 게요
누가복음 21장 7~11절
말씀의 제목이 좀 특이하다.
‘꺼내주시면 말 잘 들을 게요’
지난 2월 6일 오전 1시 17분에 튀르키예 지방 곧
터키 시리아 일대에 지진이 발생했는데
그 잔해 속에서 건짐받은
네다섯 살 된 아이가 구조대원이 왔을 때 한 말이다.
‘저를 꺼내주시면 말 잘 들을 게요’
그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이다.
1939년에도 그 지역의 지진이 있었고
1999년도 그 지역에 또 지진이 있었다.
튀르키예 그 지역의 지진이
이렇게 1939년도도 있었고 99년도도 있었는데
이번 지진은 여진까지 해서 다친 사람,
죽는 사람 포함해서 한 10만 명 정도 예상하는
그런 큰 대지진이 일어났다.
인류 전 세계의 큰 아픔이고
그곳도 날씨가 추울 터인데 얼마나 힘들까
우리가 예상이 된다.
삼주 된 신상아가
부모님은 죽었는데 혼자 구조되기도 하였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 일인가?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훈들을 받아야 된다.
이 튀르키예는 크리스천에게는 아주 특별한 지역이다.
예수님이 3년 공생 후에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고
이 기독교를 정착하게 한 게 사도 바울인데
사도 바울의 고향이 다소이다.
다소가 그 지역이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는데 다메섹이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후에 여러 교회들을 세웠다.
에베소에도 세우고 갈라디아 교회,
골로새 성경에 나와 있는 그 교회들이 다 그 지역이다.
이방 선교의 전초교인인 안디옥 교회도 바로 그 지역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가 발생한 그 지역이
바로 그 지진을 맞은 그곳이다.
그런데 거기가 다 회교권이 돼 있단 말이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이 시대에 기독교 발상지와 같은
그곳에 엄청난 지진을 계속해서 1939년, 99년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큰 지진으로 이렇게 하고 계신가?
우리가 좀 뭔가 경각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훈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이런 지진들을 보면서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간다
하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지진은 항상 있어왔었지만
20세기 들어서 아주 자주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목격할 수 있다.
여러분이 인류 역사의 지진 통계를 보면
전부 19세기 20세기에 와서 굉장히 많은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의 7절 말씀에 보니까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을 주님이 말씀하면서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 다른 종말 장에서는
예수님께 마지막 때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기에 대해서 대답하는 장면인데
여기에서도 예수님이 마지막에 대한 징조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나서 미혹을 할 것이고
난리의 소문이 나타나고 그리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일어나겠고
그리고 11절에 말씀하셨다.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 같은 종말장인데
거기는 그냥 지진이라고 표현했는데
누가복음에만 큰 지진이다
이런 말을 쓴 것이다.
누가복음만 큰 지진이 나타날 거다
그게 이제 인자가 문 앞에 이를 때고
마지막에 큰 지진이 일어난다 이렇게 표현하셨다.
거기에 기근 온 세계에 이제 물이 없어 고통당하는
데도 많고 먹을 것이 없는 그런 지역도 많고
온역 오늘날 코로나 같은 것도 온역의 하나고
전염병 중에 하나 아닌가?
무서운 일 여러 가지 홍수 기후 변동의 여러 가지
하늘로서 큰 징조들
25절~27절을 연장해서 한번 이어서 보자.
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구름을 타고 오시는 건 분명히 공중강림이다.
그런데 공중강림하기 전에 이런 일월성신의 징조가 있고
바다와 파도에 우는 소리가 울리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이런 무서운 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진을 비롯하여 이런 일이
많이 세계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실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 때 주님 오실 때가 임박한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
이 마지막 때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의식이 있고 생각이 있을 때
그 생각에 따라 우리는 행동으로 무언가가
나오게 돼 있는 것이다.
내 속에 생각이 없으면 행동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 속에
‘정말 이 시대는 마지막 때가 분명하구나’
이런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하는 것이 이번 지진을 보면서 또 한 번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번 지진에도 보니까 새들이 지진 오기 전에
막 방황하며 어디로 갈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그런 동영상들이 수없이 많이 찍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행접시 같은 이상한 구름이 1시간 동안 공중에 떠 있고
또 이상한 섬광이 나타나고 이 지진의 징조들이
너무 많이 나타났는데 그런 지진들이 오면
동물들은 다 감각이 있어서 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가 영적 감각이 중요하고
이 영적 감각이 곧 방향 감각인 것이다.
내가 어디로 튀어야지 사는가?
이 짐승들이 방향 감각이 있지 않은가?
지진인데 어디로 가야지 그냥 사는가?
그것처럼 우리가 영적인 감각은 내 영의 삶의 감각,
방향의 감각이다.
그런 감각을 우리는 찾아야 한다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7~24절 말씀 함께 보자.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옛 사람이고 예수 믿고
나서는 우리가 살 사람인데 이 새 사람은
이방인이 허망한 것으로 행한 것 같이 행하지 마라
허망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 물거품이 되고 포말이고 없어지는 것이다.
허무하다 이 말이다.
이방인이 행하는 건 영적인 생명이 없으니까
다 허망한 것이다.
다 망해버릴 거고 허무한 것이고 없는 거,
물거품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허망한 것은 바로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 이방인은 성령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총명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다.
마음이 굳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그랬다.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 있으니까 뭔가?
영적으로 감각 없는 자가 된다고 그러셨다.
전혀 감각이 없는 것이다.
신령한 것이 뭔지, 영적인 것이 뭔지,
이 시대에 되어 진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금
무슨 일을 섭리하고 계획하는지
도무지 영적 감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허망한 것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무지한 것이다.
마음이 굳어져 있고 총명이 어두어지고
그래서 감각이 없으니까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더러운 욕심으로 행하다
감각이 없다.
이게 지금 멸망으로 가는 길인지,
이게 지금 영적인 건지, 육적인 건지,
감각이 없으니까 그냥 방탕에 자신을 그냥 맡겨버려서
그냥 물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면서
더러운 욕심으로 행해서 이렇게 일생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데
그러니까 우리는 진리를 받은 사람들이다.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슬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이게 이방인들의 사는 삶이다.
성령 받지 못한 옛 사람은 그대로
마음이 굳어지고 감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고
뭐든 허망한 것을 행하는 그런 옛 사람은 벗어던져버리고
이제는 새 사람을 입어야 된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새 사람을 입는 것이냐?
어떻게 하는 것이 영적인 감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냐?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냐?
이 방향 감각을 알고 거기에 맞춰서 해야 되는데
그런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서운 일인 것이다.
잠시 다녀가는 나그네의 삶인데
우리가 영원히 사는 거 아니다.
예루살렘에 뭔가 건물이 무너지고 막 흔들리고
이럴 때 거기에 망대가 무너져서 멸망되는 그 사람들만
잘못한 게 아니고 회개치 않으면
누구든지 이와 같이 망한다고 그랬다.
망대가 무너져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때 그런 사람들만 그게 아니고
누가 그런 일을 닥칠지 모르고
이것은 회개치 않으면 다 그렇게 망할 것이다.
기독교 발상지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튀르키예의
지역이 회교권이 되어서 이렇게 하나님이
그 죽어가는 영혼이 얼마나 불쌍하겠나?
감각이 없이 살다 죽는 인생이고 다 이런데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행한 대로 심판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때 우리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방향 감각을 찾아야 된다.
주님 오실 때가 다 됐구나
큰 지진이 일어난 거 보니까 말씀대로
인자가 문 앞에 이르렀구나
내가 어떤 방향으로 튀어야 되느냐
내가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되느냐
영적인 감각을 어떻게 회복할 것이냐
여기에 초점을 맞춰 살아야 된다 그 말이다.
이게 마지막 성도들의 지혜다.
세 번째는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꺼내주시면 말 잘 들을 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지진 가운데 네다섯 살 된
어린 아이가 잔해가 다 덮인 그 속에서 구조대원에 의해서
구조를 받으면서 ‘나를 꺼내주시면 말 잘 들을 게요’
그랬는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각자의 영혼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왜?
우리도 지금 죽게 된 인생이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나를 이 죽음의 자리에서 꺼내주시면
앞으로 하나님 말씀 잘 들을 게요’
‘순종하며 살아갈 게요’
이게 우리의 고백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왜 우리가 죽게 되었는가?
요한계시록 3장 1~2절 말씀 보자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는 죽은 것이다.
온전한 행위가 아니면 다 죽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재물을 온전하지 않으면 받지 않으셨다.
그 행위가 온전치 못하면 다 죽은 것이다.
우리가 온전한 행위로 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사데 교회에게 너 죽게 됐다.
너 거반 죽게 된 것을 좀 일깨워라.
온전한 걸 찾지 못했다.
이런 영적인 상태가
곧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일곱 개의 편지하는 내용을
우리는 입체적으로 생각을 해야 된다.
먼저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내용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 때까지 되어지는
시대적인 교회의 상황들을 먼저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사도들 이후에
초대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초대교회가 어떻게 되었는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초대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이다.
그래서 그곳에 자칭 유대인도 나타나고
그곳에 니골라당이 나타나고
초창기부터 영지주의가 나타나면서
초창기부터 이원론이 나타나면서
처음에 주님이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한다고
그랬다.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 이후에
인류 역사에 되어 질 교회의 모습인데
이 사데 교회가 종교 개혁을 한 그 당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 개혁을 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고 개혁은 했어도 영적으로 죽게 된 것이 많이 있다.
이런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일곱 교회가 시대적인 교회의 모습일뿐더러
동시에 온 인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교회가
사데의 교회일 수도 있는 교회의 모형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칭찬하시고 권면하시고
여기에 약속한 내용이 개인적으로도 받을 수도 있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입체적인 해석으로 해야 된다는 말이다.
시대의 흐름을 나타나기도 하고 온 인류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에 대해서도 첫사랑을 잃어버리면
에베소 교회가 되는 것이고
영적으로 거반 죽게 되면 사데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것이 개인에게도
다 이 칭찬과 권면이 그대로도 적용도 되고 말이다.
다양성을 가지고 입체적으로 우리가 해석을 해야 되는데
이 사데 교회에 책망하신
내가 온전한 것이 찾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죽게 되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실제 육체적으로 죽은 게 아니다.
영적으로는 살았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게 됐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지진 잔해 속에서
네다섯 살 먹은 아이가
‘꺼내주시면 말 잘 들을 게요’ 이 말이
내 자신들이 내가 지금 죽게 돼 있는 그 잔해 속에
묻혀 있는 이런 영적인 인생인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나를 여기서 꺼내주시면 남은 생애
말 잘 듣고 살아갈게요.
저를 여기서 건져주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볼게요.
이렇게 고백하는 우리의 고백으로
그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18~22절까지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도중에 어떤 서기관도
“예수님 제가 쫓아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잠자리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심령 속에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문을 열면 내가 너로 들어가 먹고 마시고
주님이 함께하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마음에 성전의 문을 열지 않고
그 속에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는 것을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런 영적인 표현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 중에 또 하나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하옵소서
나도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인자가 머리 둘 것도 없고
거쳐도 없는 그런 주님이고 주님 따라가는 것이
그런다 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어떤 제자가 이제 고백을 하며 따르는데
한 가지는 무엇인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하옵소서
아마 그 제자는 부친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그런 위독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 유대인의 관습상 부모를 장사하는 거
그건 당연히 자식이 할 도리이다.
일륜 도리를 다하고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마저도 거절을 하는 것이다.
왜?
그것은 죽은 자의 일이다 그 말이다
그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부친이 죽고 누군가가 죽으면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고
그것을 장사하는 그들도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하는데
그건 죽는 일이고
네가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고 살려면 그런 세상적인
도덕, 윤리와 세상적인 자식에게 부모에게 할 그 윤리,
도덕 그 범위보다 이것이 네 생명이 사는 게
더 급선무다 이것이다.
그거 내버려두고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하게 내버려두고
너는 나를 따라오라
무엇이 인생의 급선무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럼 거기에 죽은 자들만 죽은 자인가?
사데 교회 목회자처럼 영적으로 온전하지 못하면
나도 아직 죽은 자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일시적으로 받았지만 예수님을 마리아가
열달 동안 후에 해산하여 낳아야 되는 것처럼
우리가 생명을 일시적으로 받았지만
완전한 생명으로 낳아야 온전함이 오는 것인데
그 생명을 낳지 못했다면 우리도 아직 온전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럴 때 우리 각자 이걸 시급한 문제로 알고
그 아이의 고백처럼 ‘저를 꺼내 주시는 말 잘 들을 게요’
그래서 성경 안에 보면 많은 주님 앞에 서원도 하게 되고
주님 앞에 약속을 한다.
정치인이 마치 저를 이제 뽑아주시고
저에게 한 표를 주시면 제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습니다.
다 헛된 공약이지만
하나님 앞에 공약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를 꺼내주시면
나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면
저를 온전케 해주시면
저를 새롭게 해 주시면
이제는 말 잘 듣고 살아가는 그런 일생을 살아가겠습니다.
그것이 그 아이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 음성으로
우린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유대인의 관습 속에서 여인이 자녀를 낳지 못하고
아이의 후계자가 없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
남편이 갑절의 분깃을 갖다 줬다 할지라도
그 여인이 마음에 한이 돼서
‘아들을 주시면 삭도를 대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소원 기도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위대한 사무엘을 주셨단 말이다.
그것처럼 우리가 종종 죽게 된 이런 여러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언약을 하고 공약을 하고 서원을 하고
약속을 하면서라도 그걸 받아낼 필요가 있다.
또 우리가 육체적으로도 병이 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병이 오면 서서히 죽어가는 거 아닌가.
육체의 병도 죽어가는 것이고
마음의 병, 더 무서운 마음의 병도 있다.
우리가 그럼 영 육간에 마음의 병이 들고
육체의 병이 들면 점점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 아이처럼
저를 꺼내주시면 말 잘 들을 게요
그 아이를 구조대원이 꺼내줬었단 말이다.
그럼 인생의 삶에서 내가 죽을병에 걸리고
마음의 병에 걸리고
내가 운전하지 못하여 죽은 자가 되고
영적으로 이런 자가 되어 있는 나의 현실 속에서
나를 꺼내줄 사람이 누구인가?
오직 예수님밖에 안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건져만 주신다면
제가 말을 잘 듣는 생애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이제는 남은 생에 어찌하든지 말씀을 지키면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약속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환경 가운데 주님이 그걸 받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치료를 해주시고
우리를 거기서 건져주신다 이 말이다.
여러분 각자의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줄로 믿는다.
지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만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도 죽어가는 것이고
거기서 나를 건져만 주신다면 말을 잘 들을 게요
이번 사태가 더 많은 나라의 지진이 확대될 것이다.
이미 확대되고 있다.
많은 지진이 확대된다.
이렇게 처처에 큰 지진들이 나타나고
온역과 처처에 하늘의 진노도 있고
이런 무서운 일이 닥쳐 나갈 때
우리는 분명히 말씀에 근거하여
‘마지막 때가 다 되었구나’
그런 마지막 때의 의식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그냥 말로만 마지막이다 이것이 아니다.
늑대 소년처럼 정말 늑대가 언젠가는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에 의식을 분명히 가져야
거기에 걸맞은 삶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의지가 분명히 결단이 있고
그 중심이 있어야 우리가 거기에 걸맞은 삶으로
준비하는 삶이 나오는 거지 의식이 없으면
그 삶이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감각과
우리의 삶의 방향 그것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왜 나를 지금까지 살려두시느냐?
비행기 부품 중에서 부품 하나만 꺼내도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
내 몸에 부품 하나만 망가져도
나는 살 수가 없는 인생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지금까지 살려주고
생명을 연장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다.
왜 그러겠는가?
하나님이 어찌하든지 구원해보려고
어찌하든지 영적으로 성숙시켜보려고
어찌하든지 상금을 좀 더 줘보려고
인생의 기회를 주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방향이 마지막 때가
되어진다는 건 무엇인가?
내 삶이 한계가 오고 이제는 추수 때가 되고
심판의 때가 왔고 결론을 얻을 때가 왔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나를 구원하는 그 구원이 뭐냐?
그 총명과 무지에서 이렇게 있는 것이고
우리는 영적 할례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그 분명한 신앙의 목표를
새롭게 하면서 그 방향으로 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삶의 방향인 것이다.
그게 영적인 감각인 것이다.
그 감각을 다시 한 번 회복을 하자
그리고 여러 가지 모든 환경이 있다.
병든 환경이 있고 마음의 병이 있고
우리 영적으로 온전하지 못하여 죽어가고
수많은 여러 가지 사정들이 각자마다 다 있을 텐데
그게 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죽음의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저를 건져만 주신다면 말을 잘 들을 게요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게 내 영혼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고 이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음성으로 듣기를 소원해서 이런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를 환경에서 건져주실 분은 오직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그주님만이 우리를 환경에서 건지고
그 주님만이 우리를 죽을 자리에서 건지시고
그 주님만이 내 마음의 병을 건지시고
그 주님만이 내 환경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주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그 피의 대가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다면
우리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인데
하나님이 예수의 핏 값으로 불리는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겠는가?
다만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고
내가 주님을 향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고
그 뭔가를 받으시고
그 일을 하나 하나 이루어 가시는데
그런 주님을 의지하면서
여러분 한 나라처럼 서원이라도 하고 약속이라도 하고
어떻게든지 좀 그 자리에서 벗어 나보도록 최선을 다해서
이렇게 이 길로 좀 나가보는
그래서 ‘저를 건져주시면 제가 말을 잘 듣겠습니다.’
이 음성이 여러분의 음성이 되고 저의 음성이 되어서
여러 가지 환경에서 다시 한 번 생명의 길로 나가고
다시 한 번 완전의 길로 나가고
다시 한 번 감각이 있는 귀한 자리로 나갈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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