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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향연/메세지

해방의 은혜

by Andrew Y Lee 2022. 8. 23.
해방의 은혜

누가복음 4장 16~19절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내일은 8월 15일이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6월25일과 8월15일을
6.25와 8.15라고 읽는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이 6.25가 뭔지 8.15가 뭔지 모른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내일이 8.15 광복절인데 광복 77주년이다.
그래서 교회마다 광복 77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교회도 내일 광복절을 앞두고 광복 77주년 기념하면서
이 아침에 함께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일본에 대한 감정들이 남아 있어
개운치 않는 때를 살고 있다.

세계를 항해하는 어느 유람선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배가
고장이 나서 선장은 많은 사람을 다 태울 수 없으니
몇 사람이 뛰어내려서 배를 가볍게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영국 사람이 제일 먼저 신사답게
'영국이여 영원하라!' 하고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뒤이어 미국 사람이 대국 사람답게 뛰어내렸다.


세 번째 한국 사람이 '대한민국 만세!' 그러면서
옆에 있는 일본 사람을 확 밀었다고 하는
우스개 얘기가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일본에 대한 감정들이 남아 있고
어떻게든지 일본을 이기려고 한다.
스포츠나 다른 여러 방면에서 보면
그런 현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인류 역사 가운데 큰 해방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이다.


성경적으로도 큰 사건이고 영적인 의미가 있는
큰 사건이다.
기원전 약 1440년 전 일이다.
지금으로 부터 3460년이나 된 그런 일이다.


그리고 미국의 노예 해방운동도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결말로서 대한민국이
1945년 독립을 하게 된 것이 큰 사건이었다.
굉장히 큰 하나님의 은혜였다.


8월15일을 지나면서 어려울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교회가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나라와 민족이 평안해야 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죄에서 해방이 되고
마귀에게 포로된 것에서 해방 되어지는 것이
더 급한 일이다.


왜 그런가?
그 시대와 그 지역에 의인이 있는가?


소돔 고모라가 멸망 할 때도 보면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했다.


대한민국의 흥망성쇠가 사실은 여기에 얼마의 의인들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의롭게 살기를 애를 쓰고 의인을 향하여
신앙의 목표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나라와 민족은 지켜진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도 하고
관심도 가져야 하지만 먼저 우리 자신들이 죄에서
해방 되고 마귀의 포로에서 해방이 되는 이런
영적인 해방의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본문의 말씀하셨다.


이번 설교는 복음의 의미를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해방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첫 번째는,
18절 말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오셨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됐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이 말은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약하다는 것이다.
또 필요한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가난하게 지음 받지 않았다.


에덴동산에서 모든 걸 다스리며 풍성하게 살도록
만들어졌는데 하나님과의 약속을 떠나서 죄를 짓고 나니까
가난한 자가 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물질 기준으로 부자냐? 높으냐? 많으냐?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우리는 세상의 부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주님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은
물질 기준이 아니고 영적 의미의 가난을 말한다.


마태복음 5 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먼저 가난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천국을 받게 된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은 우리가 성장론의 모형적인
진리에서 이미 다 깨달은 것처럼
이 죄악 된 출애굽 하려면 바로의 탄압이 있어야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에게 탄압을 받으니까
모세가 올 때 함께 떠났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적인 성도의 모습에서
모세에 해당하는 예수님, 성령님이
우리를 죄악 세상에서 끌고 나가야 되는데
어려움을 당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안주하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성령님을 따라 예수님을 따라 죄악 된 세상을 남겨두고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어려운 환경 이 때 겪는 마음을
가난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세상이 무가치하고 허무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마음
이런 마음이 곧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배고픔을 많이 겪게 하고
빵을 먹게 하는 원리처럼 배고프게 만드신다.


그래야지 우리가 복음이라는 빵을 먹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게 된다.


병들고 여러 가지 고통당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불화가 일어나고 멸시천대 받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느끼는 곤고한 마음,
절망적인 마음, 무기력하고 낙심되는 마음
이것이 복음을 받게 되는 조건들이고
이것이 가난한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창녀, 세리, 병자
이런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늘 많이 있었다.


이것이 다 출애굽의 원리이고 우리는 계속 영적으로
성장하고 계속 우리가 이 광야를 진행해 나가려면
이 가난한 마음이 계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다.


늘 부족하고 늘 뭔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더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이 유지돼야
우리가 은혜를 받게 된다.


은혜 받는 비결이 계속 가난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이것을 갈망이라고 한다.
이것이 갈급한 심령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속 영적으로 배가 고파야 하나님이 먹을 걸 보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단 말이다.


계속 갈망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계속 갈급한 마음이
끊어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 은혜 받는 비결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의 해방도 중요하고 기도하지만
내가 영적으로 더 성장하여 이 지긋지긋한 죄에서
해방이 되고 마귀의 포로에서 놓임 받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가난한 마음, 계속해서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 우리 가운데 이어져야 한다.

두 번째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아담이 죄를 짓고 난 이후에 누구나 인생은
태어나서부터 죄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


이 죄는 마귀의 속성이다.


그러니까 마귀가 배후에 있어서 우리는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 있고 죄에게 포로 되어 있다.


어린아이를 보면 천사 같다는 말을 우리가 하지만
그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고 싸우게 되고 거짓말도 하고
욕도 하고 아주 능수능란하게 이렇게
죄 가운데 살게 된다.


이것이 다 아담이후에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에 이런 것을 모를 그때는
천사 같지만 점점 자라면서 아이들도 죄 가운데 있게 된다.


그래서 세 살 때 버릇이 여기까지 간다는 것이
죽을 때까지 죄 가운데 산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 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점점 죄에서 포로 되고 마귀에게 눌려 사는 것에서
우리가 힘을 받고 이겨 나가게 된다.


우리가 이 자유, 해방이라고 하는 말
해방이 한자로 풀면 "풀 해", "놓을 방" 이다.
무언가 묶여 있는 것에서 그걸 풀어놓는 것
이것이 곧 자유라는 말이다.


일제 36년 누가 정확하게 계산을 했는데
34년 11개월 16일이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일제시대
묶여 살다가 자유를 찾아서 해방이 된 것인데
이처럼 우리는 죄에 묶여 있고 지금 뭔가 상습적인 악에
묶여 있는 악습과 마귀에게 포로 되어있고
또 병이라고 하는 환경에 묶여 있고
또 결단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과 음주 가무
또 오락, 게임, 술 이 세상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환경들에 묶여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해방이 되고 자유를 얻어야 한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과 대화를 하고 있다.


요한복음 8 31~34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된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환경에 져서 억눌려 있으면
그것에 종이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병이 걸렸으면 병에 종이 되어 있는 것이고
마귀에게 잡혀 있으면 마귀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이고
악습에 잡혀 있으면 악습에 종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 오락과 정욕에 잡혀 있으면
그것에 종이 되어 있는 것이다.


구원받는다 이 말은 해방돼서 풀어주는 것, 자유를 얻는 것
그러니까 아무리 세상에 어떠한 환경이 와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되는 것, 해방이 되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환경의 구원도 있고 죄와 마귀로부터의 구원도 있다.

그래서 로마서 8 2에서는 사도 바울이
죄에서 해방이 됐다고 선언을 하고 있다.


로마서 8 2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곤고한 인생이나 여러 가지 환경만 오면 마음으로부터
올라오는 죄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에 놓여 있는데
로마서 8장에 보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와서
어떠한 환경이 와도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죄에서 해방이 됐다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해방촌이 두 곳이 있다.
해방촌이 두 곳이 있는데 6.25를 전후해서 북한에서
넘어온 탈북민들이나 북한 사람들이 해방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그들이 정착해서 머문 곳이
두 곳 있었다.


하나는 남산 아래 해방촌이라는 곳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가 사는 옥길동 바로 앞에 있다.
옥길동 길 하나를 두고 건너편이 시흥인데
공장지대 같은 이곳이 해방촌이다.


원래 탈북민들과 북한 사람들이 살다가 점점 떠나면서
이곳에 공장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여기 이름도 해방촌이다.
제가 여기로 이사 온지 5년이 좀 넘었다.
창문만 열면 해방촌이 보인다.
5년 동안 해방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번에 책을 쓰면서 책 뒷면에 인사하면서
교회 근처에 있는 산을 따라 "원미산 아래에서 작은 종이"
또 하나는 주로 집에서 책을 쓰다 보니
집 근처에 만수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래서 "만수산 아래에서 해방촌을 바라보며 작은 종이"
라고 적었다.


오랫동안 해방촌을 바라보면 왜 하나님이 나를
여기다 갖다 놓으셨는지 그걸 묵상하면서
매일매일 해방촌을 바라보면서 빨리빨리 이 모든 환경과
이 죄악에서 해방되기를 사모하며 지낼 때
그래서 여기에 앉혀놨구나 하며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지금까지 문만 열면 해방촌이 보이니까
해방을 생각하며 매일매일 살아온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은 해방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환경에서 해방이 되고
죄에서 해방이 되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 자체가 여기에 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기에
그 주님의 목적 따라 우리는 살아가야 된다.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잘 깨닫고 앞가림을 잘하여
척척 일을 잘 해 나가면 얼마나 그 자녀가
사랑스럽겠는가?


우리를 부르시고 십자가의 그 목적이 죄에서
해방시켜주려는 것이 목적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예수 믿기만 하면
다 된 줄 착각하면서 제 멋대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 은혜가 죄에서 해방시켜주려고
힘든 환경에서 해방시켜주려고 그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깊이 헤아린다면 효도 하는 자식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여러분! 죄에서 해방되어지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고
삶의 목적이고 남은 인생의 목적인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란다.
다른 건 다 부업이고 악세서리이다.


여기에만 목적이 있다.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지긋지긋한 죄에서
해방이 되어 질까?
자나 깨나 내가 이 마귀에서 어떻게 되면
이 포로된 것에서 내 약점에서 벗어날까?
이것만 생각하며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예수님은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그 은혜 역사이다.


다시 본다는 이 말은 시력이 회복되고 복구된다는 말이다.
원래 볼 수 있었는데 볼 수 없게 된 것을
회복시켜준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두 가지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있고
정상인이었다가 어떤 사고나 어떤 연고로
시각장애인이 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본래 보던 사람인데 보지 못하게 된 것처럼
이것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것이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한다는 말이다.


여러분 "광복"이라고 했는데
이 "광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빛 광" 자에 "회복할 복" 자이다.
빛을 회복하는 절이다.


그러니까 일제시대 이 시절은 어둠의 시간이었다.
신사 참배할 수밖에 없고 신앙의 자유가 없는
그 시간은 어둠이었는데 이제 이것에서 해방 되었다는
말은 빛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마음껏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해방이 된다, 광복이 된다는 말은
빛으로 회복 된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9 39~41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어려운 말씀이다.

요한복음 9 1~3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1절에 보면 예수님이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는데
제자들이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자기 죄로 인함인지
부모님으로 인함인지 묻고 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이 부모가 죄를 범해서
소경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였다.


이 사람에게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했을 때 이 사람이 씻고 밝은 눈으로 오게 됐다.


소경을 예수님이 고쳐주셨다.
지금 소경 됐던 사람을 보고 바리세인들이 와서
시비를 걸고 있다.


그런데 이 부모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면
쫒겨 나기를 두려워해 자꾸 핑계를 대고 소경되었던
아들에게 물어보라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다른 성경 구절에서는 내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신 것은 곧 심판을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심판 하나가 뭐냐면 보지 못한 자를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지금 보지 못하는 자들은 영적인 빛이 없고
영적인 것을 못 본다는 뜻이고 보는 자들은
영적인 것은 못 보고 세상 것만 본다는 것이다.


세상 것만 보는 그것을 소경이 되게 하면
죄를 다 해결한 것이 된다.
그런데 바리세인들은 여전히 우리는 소경이 아니다
여전히 보고 있다고 하니까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야 되고
영적인 빛에 대해서는 눈이 열어져야만 참된 것을
보게 된다는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눈이 완전히 열어져야 된다.

어느 해 신학교 개강 예배 때 가서 하나님이 계시를
보여 주셔서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 번째 줄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끌고 가는데
그 사람이 소경이었다.
웅덩이에 빠진다고 소경이 소경을 끌고 가고 있었다.


그 다음은 소경이 굴비 엮어서 묶고 가듯이
몇십명의 사람을 묶어서 끌고 가고 있었다.
이건 더 위험하다.
더 많은 사람이 웅덩이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는 소경이 버스를 운전해서
가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한꺼번에 낭떨어지로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줄에는 보니까 눈이 절반쯤 떠진 사람이
한 사람을 끌고가고 또 눈이 절반쯤 떠진 사람이
몇십명을 두루마리 엮듯이 끌고 가고 있었고


마지막은 눈이 절반쯤 떠진 사람이 버스를 몰고
가고 있었다.


세 번째 줄에는 눈이 완전히 열린 사람이 한 사람을
끌고 가고 있었고
또 눈 열린 사람이 두루마리 엮듯이 사람들을 끌고 가고
세 번째는 눈이 완전히 열린 사람이 버스를 운전해서 갔다.


아홉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제일 위험한 것이 무엇이냐? 주님이 물을 때
장님이 버스를 운전하는 것이 제일 위험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제일 좋고 안전한 것은 무엇이냐 할 때
눈이 열어진 사람이 버스를 운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기 신학교는 눈을 열어주는 신학교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이 이야기하고 똑같다.

우리는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눈에 빛이 들어오니까 세상을 보는데
이것은 육적인 것이고 혹시 못 봐도 육적인 눈이 떠진
이 사람이 주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 영적인 눈이 동시에
떠지게 되었다.


우리가 영적인 빛을 만나서 영적인 시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본래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는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인 시력이 회복되면서 다시 주님을
만나고 세상에 대해서는 안 보여도 상관없다.
세상에 대해서 소경이 돼도 영적으로 눈이 열어지고
이 빛을 만나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눈먼 자에게 눈을 뜨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였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났다면 점점 눈이 떠져야 한다.


반쯤 열려서 한 사람을 끌고 가기도 하고 반쯤 열려서
두루마리로 끌고 가서는 안된다.
눈이 완전히 열어져서 한 사람을 끌고 가고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가야 한다.


신앙생활은 점점 완전하게 눈이 열어지는 것이다.
눈이 열어지지 않으면 뭔가 볼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도 이런 영적인 눈이 열어져야
보여 지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도
눈이 열어져야 환경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눈이 열어져야만 한다.


주님은 소경된 우리의 열어주려고 오셨다.
이것이 해방인 것이다.
이것이 자유함을 얻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 가지로 주님이 말씀하셨다.
눈먼 자에게는 눈을 열어주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위해 복음을 주셨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다고 말씀하였다.

77주년 광복절 제가 이곳에서 5년이 됐는데 한 번도
해방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없었다.


7이 두개인 77주년은 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해방에 대해서 설교를 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해방이 얼마나 감사한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나라와 민족이 그 뒤로 새롭게 되고 영적으로 발돋음해서
그 이후로 대한민국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서
마지막 때에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얼마나 영적인 축복을 받았는가?


이제 우리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다시 한 번
뭔가 영적으로 빛과 어둠으로 갈라지는 전환기인
이 시점의 시대는 온 세계가 지금 어둠에서 빛으로
바뀌는 때이다.


영적인 빛으로 바꿔지는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는데 우리 사명은 사실 예수님이
눈을 열어주는 것처럼 우리가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시대의 눈을 열어주고 성경의 눈을 열어주고
정말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 있는지 이것을
열어주는 작업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이 시대에 어둠의 일들이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이것을 봐야 빛으로 나가는 이 일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런 어둠의 일을 우리가 다 보게 되고
빛으로 나가는 이 전환기에 나라와 민족의 기도도
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 눈이 열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열어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눈이 열어져야 하나님의 의도가 발견되고 성경이 이해가
되고 내 환경에서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이 열어져야 꿈도 해석이 되고
눈이 열어져야 전체를 보고 우리가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신령한 눈이 열어지고 신령한 은혜가
우리 각자 임해야 한다.

에베소서 1 15~19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이 자녀를 낳듯이 교회들을 개척해 나갈 때
교회마다 편지하면서 그 교회에 합당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


지금 에베소교회를 위해서는
17에 있는 말씀대로 지혜와 계시의 정신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있어야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그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마음의 눈이 밝혀져야 알게 된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왜 이렇게 기도 했을까?
에베소서 3 2~4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살았을 때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12사도도 아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서 이 복음과 모든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됐다.


그래서 이것을 대강 기록해 놨는데 이것을 읽으면
이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처럼 너희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이렇게 연결시켜서 기도하고 있다.


제가 책을 쓰면서 인사말을 이렇게 넣었다.
여러분도 이런 계시와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이걸 깨닫게 될 거라고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사도 바울과 같은 흉내 아닌 흉내를 내며 썼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의 눈이 밝아지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 경륜이 뭔지 그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우리의 소망이 뭔지, 그 능력이 얼마나 큰 건지,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누구인지 이것을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없으면 알 수 없다.


그 유명한 베드로가 신앙 고백하였다.
마태복음 16 16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고백하는 모든 신앙에 대해서
계시로 알게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신령한 세계의 것은 이렇게 열리는 것이다.


오늘 77주년 해방주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영적으로
해방되기를 힘쓰기 위해서 특별히 마음의 눈이
밝아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분명 주님이 그 눈을 보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우리의 눈이 좀 밝아지도록 또 우리가 포로 되고
마귀에 붙잡힌 것에서 해방이 되도록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늘 가난한 마음으로 갈급해 하며 늘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 결단을 가지고 나갈 때 주님이 주신 은혜들이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는다.

여러 가지 환경에서 건짐 받고 영적인 눈이 열리고
이 해방주일을 지나면서 새롭게 변화되어서
이 마지막 시대 전환기에 빛으로 새로워지는
이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서 은혜 받고
주님 앞에 마지막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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