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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by Andrew Y Lee 2022. 8. 13.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골로새서 3장 1~4절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 가운데 543장 찬송이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양인데

이 찬송가의 원작이 "보다 더 높은 곳"이란 제목이 있다.

 

"보다 더 높은 곳"

찬송시는 미국의 존슨 오토만이 썼는데

이 분은 목사님이다.

 

미국 뉴 저지주 메드포드에서 성악가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하게 됐고

나중에는 감리교 목사님이 되어서

이십 대 중반부터 찬송시를 쓰기 시작해서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위에 계신 나의 친구"를

이 분이 작시하였고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등등 자그마치

5천여 편의 찬송시를 썼다고 한다.

종교적인 천재였다.

 

그리고 찬송가의 작곡은 가브리엘이라고 하는 분이

작곡했는데 이 분은 어릴 때 너무 가난해서

농장에서 자라면서 독학으로 오르간을 공부했다고 한다.

16살 때부터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작곡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분 또한 종교적인 천재였다.

 

16살에 이미 작곡을 하고 34살에 감리교회의

음악 감독이 되어서 46살 때부터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해 70여 권의 노래 책,

23편의 칸타타를 만든 작곡가였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9개 노래가 실려 있다.

"샤론의 꽃 예수", "그 어린 주 예수",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 "주여 지난밤 내 꿈에",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이렇게 주옥같은 찬송이 9곡이나 우리나라 찬송가에

실려 있을 만큼 익숙한 작곡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35년 장로교 찬송가인

"신편 찬송가"에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처음으로 실렸는데 이은상이라고 하는 시인이

번역했는데 "보다 더 높은 곳"이라고 하는

원문에는 4절까지밖에 없다.

 

그런데 5절을 만들고 약간 가사를 개작한 것으로

이렇게 추정이 된다.

 

이 찬송가는 바로 골로새서 3장 1~4절의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한 곡이라고 한다.

 

오늘 이것을 본문으로 하여 말씀드리면서

찬송가의 배경을 설명을 드린 것이다.

 

첫 번째,

"위"는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 가운데 보면 1

"위엣 것을 찾으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엣 것을 찾아라", "위엣 것을 생각하라"

두 번이나 말씀을 하셨는데

이 위의 것에 반하여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그러니까 위의 것과 땅의 것은

서로 반대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

 

이 위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하늘이 아닌 것이다.

 

이 땅의 것이라고 하는 이 반대 개념도

단순한 땅이 아니다.

 

이 땅이라고 하는 이 개념은

모든 피조세계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1 16 말씀을 한번 같이 보겠다.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하늘도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땅도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눈에 보이는 하늘만 하늘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땅만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12 12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

여기서 지금 땅과 바다가 나왔다.

그리고 하늘도 나온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하면 7부터 말씀을 보면

요한계시록 12 7~9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단이 공중권세를 잡았다.

그 공중이라고 하는 하늘에 예수님이 공중 강림하기

위하여 그 공중 하늘에 있는 사탄과 용

그리고 그의 사자들을 땅으로 내어 쫓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있던 곳에 강림하시고 성도들이 휴거하게 된다.

 

그래서 큰 용과 마귀,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9 말씀에 보니까 땅으로 내어 쫓기게 되었다.

그리고 12절에 이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공중 강림하셨기 때문에

"하늘과 그 안에 거하는 자들" 이분들은 휴거 돼서

그 공중으로 올라간 분들이다.

 

그런데 휴거 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자들은

전부 땅에 있다.

 

그래서 마귀와 그의 사자들이 땅으로 내어 쫓겼기 때문에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자.

용이라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존재인가?

용이 전설적인 동물로 사람들이 모양을 만들었지만

이 용은 마귀, 사탄, 옛 뱀을 상징하는 것인데

영계에서 활동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용과 그의 사자들이 땅으로 내어 쫓겼다는 이 땅이

눈에 보이는 땅만이 아니고 이 피조 된 영계를

포함하는 그런 땅의 의미이다.

 

우리의 육체는 눈에 보이지만

사람의 마음과 그 영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도 눈에 보이는 육체도

지으셨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영도 함께 지으셨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땅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의 땅도 있다.

그래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땅,

눈에 보이는 땅 모든 것이 함께

다 화가 있다는 말씀이다.

 

마귀, 사탄, 용이 땅으로 내어 쫓겼기 때문에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히니까 사람의 육체도

괴로움을 당할 것이고 사람의 마음도 괴로움을

당할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땅이라고 하는

영계에 있는 모든 영적인 존재들도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이 땅이라고 하는 개념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땅은 모든 피조세계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 땅에 비해서 위의 것을 찾으라 하는

그 위는 무엇이겠는가?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위의 것이라고 한다.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이 계신 곳

그래서 본문 가운데 보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 속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본래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이 또 말씀으로 예수님이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 예수님이 오셨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거기는 눈에 보이는

피조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위의 것이라고 한다.

 

요한복음 17 24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와 있다.

요한복음 17 24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피조물

이전의 세계 이것이 창세전이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상에서 기도하면서 아버지가 내게

주신 모든 자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여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와 예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기 전, 창세전부터 계신 그 자리에

그 영광을 보기를 원한다고 하실 때

이 창세전의 세계 이것이 바로 위의 것이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하는 개념이 저 하늘눈에 보이는 그 어느 끝에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피조물

이 안에 창세전의 세계를 말하는 이것이

바로 위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내게 주신 모든 자가 그 창세전의

영광을 보기를 원한다"는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한다고

하신 것이다.

 

21에 그렇게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7 21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어서

창세전에 있는 그 영광의 자리에 저희들도 하나가 되어서

그 자리에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하신 제목이다.

 

모든 피조물이 창조되기 이전 창세전의 그 세계,

피조물의 세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이 계신 창세전 세계

거기가 위의 것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예수 믿고 이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이제는 예수 믿고 사망권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생명이 일시적이라고 마치 여인이 아이를

가진 것처럼 그 생명을 받았다면 완전한 생명으로

그것을 낳아야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위의 것에 도착하여

영원한 영생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

 

창세전에 피조 되지 않은 그 세계에 하나님이 계신 곳

거기를 향하여 우리가 나가야 된다.

 

두 번째,

왜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시는가?

 

3 말씀에 보니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 안에 감춰져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거기가 위의 것이다.

 

그 감춰져 있는 그 생명을 얻어야 되기 때문에

위의 것을 우리가 찾는 것이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했던 것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된다.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주고 그다음부터 광야를

진행하였는데 성막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는

휘장이 있었다.

 

휘장은 문과 동시에 벽이다.

그 휘장이 벽이면서 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은 그 휘장이

어떻게 거기에 걸려 있었는가?

 

우리가 커튼을 달려면 무언가 달려 있어야

커튼을 걸 수 있다.

 

출애굽기 26 32~33

"32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받침 위에 둘찌며

33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조각목으로 네 기둥을 세워서 그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

그 휘장 걸어두라는 말씀인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휘장에다가 4개의 구멍을 만들어야 된다.

기둥 4개를 세워서 그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다가 걸어서

휘장을 거기에 걸어두는 것이다.

 

히브리서 10 19~20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여기서 예수님의 육체가 곧 휘장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4개의 못에 박히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이미 십자가 삶을 사셨다.

휘장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양손과 양발, 옆구리 허리 4개의 구멍으로

십자가에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휘장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어떻게 됐는가?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 지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걸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모형적으로 성막을 짓고 나서

광야를 진행할 때 그 지성소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돌판이 들어있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고

만나 항아리가 들어가 있었는데

그 법궤를 어떻게 운반을 했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민수기 4 5

"5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간 막는

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그러니까 행진하지 않고 진을 치고 있을 때는 그 휘장이

거기 달려 있었고 행진을 하게 되면 성전 봉사하는

네 지파에 의해서 그 휘장을 내려 법궤를 덮으라는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이 보면 안 되었다.

 

계속해서 5 말씀 이하를 보면

민수기 4 6~9

"6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 또 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8 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9 또 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대와 그 등잔들과

그 불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6에는 순청색 보자기

7에는 청색 보자기

8에는 홍색 보자기

9에는 청색 보자기를 취해서 그 성전 기물을 전부 쌌다.

 

개역 성경에는 증거궤를 덮어라 그랬는데

사실은 보자기처럼 휘장으로 싸는 것이다.

 

다른 성경 번역에는 전부 보자기처럼 싼다고 나와 있다.

다른 기구들은 다 홍색, 청색 보자기로 싸는 것처럼 

성전 안에 있는 휘장을 걷어서 그 법궤를 보자기처럼

싸서 레위지파 사람들이 메고 광야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법궤 안에 뭐가 들어있다고 하였나?

세 가지가 들어가 있다고 하였다.

 

모세를 통하여서 주신 돌판 즉,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

그리고 만나는 생명이다.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부활의 생명을 말하고 있다.

휘장이 예수님인데 예수님 안에 영원한 부활의 생명,

예수님 안에 생명, 예수님의 말씀이 그 휘장으로

보자기로 감싸는 것처럼 덮어져 있고

그 안에 감춰져 있다는 말이다.

 

지금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예수님 안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가

바로 인류 역사에서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난 그때부터 성막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까지 갈 때 계속해서

휘장은 필요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은 바로 천년 왕국인데 천년 왕국에

갈 때까지 7년 대환란을 지날 때까지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이 휘장 되신 예수님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때부터

그 예수님 안에 부활의 생명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 그 부활의 생명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 안에만 그 영원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그러면 이 위에 있는 영원한 생명,

예수님 안에 감춰져 있는 생명이

언제 나타나게 되느냐?

 

이것은 본문 4에 말씀하고 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여 다시 오시면 그때부터 예수님 안에

감춰져 있는 그 부활의 생명이 그때부터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것을 기다리고 이것을 원하고 이것을 생각하면

막연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피조되지 않은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이 오셔서

우리 각자에게 그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데

주님이 오실 때 그 일이 일어나게 된다.

 

빌립보서 3 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데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의 이 낮은 몸, 죽을 수밖에 없고 싸울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을 주님의 부활의 몸, 영광의 몸

창세전에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그 생명의 몸으로

그 형체와 같이 우리를 변화시켜주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부터 그 영원한 생명

예수님 안에 감춰져 있는 그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리라" 라고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 목적이 우리에게 창세전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 생명을 위해서 육체 된 그 휘장을

갈라놓으셨고 이제 4개의 구멍을 뚫어서 그렇게 매달리신

그분이 십자가의 삶을 살았는데 그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바라보지 않는 그런 자들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의 생명이 다 헛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신이 아니고

먹고 마시는 육신의 정욕인 배가 그들의 신이 되었다.

이것이 멸망인 것이다.

 

매일매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매일매일 위의 것을 찾고

하루라도 거르지 않고 하늘을 생각하며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며 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세상 것만 바라보고 육신만 바라보고

정욕을 바라보고 땅의 것만 생각하는 그들은

그들의 신이 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우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마침은 결국은 멸망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에서 기도하면서 내게 주신 자

하나도 빠지지 않고 그 창세전에 아버지와 예수님이

함께 계신 그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움이라는 것이다.

 

왜? 땅의 일만 생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 땅의 일만 생각하다가 멸망당하는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이다.

 

말씀드린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높은 곳이 바로 그 보다 높은 곳

바로 피조물 세계가 아닌 하늘의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그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가사인지 모른다.

내 뜻과 정성을 다 모아서 날마다 기도하면서

그곳에 나가는데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이

내 발을 붙으셔서 언젠가 그곳에 서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든 넘치는 곳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세상은 어둠의 세상이다.

사랑이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빛과 사랑이 영원히 있는 그 영원한 복락이

있는 그 곳, 기쁘고 참된 평화에 있는 바로 그 곳을

날마다 바라보면서 그 곳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매 순간 이것을 떠나버리면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고 그들의 신은 배로

끝나고 먹고 마시는 정욕으로 끝나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하였다.

 

이 땅엔 괴로움과 죄가 있지만 지금은 여기 살지만

빛나고 높은 저 곳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이

있는 그곳만을 날마다 바라본다고 하였다.

 

이것이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는 삶이다.

 

때에 따라 의심의 안개가 나타나지만 믿음을 통하여

의심의 안개도 걷히고 근심이 있지만 그 근심에 구름도

없는 매일매일 기쁘고 참된 평화만 있는 그 곳을 바라본다.

 

또한 이 길이 험하고 높은 길이지만 매일매일 싸우며

나가고 또 매일매일 기도하며 나갈 때 주님께서 나를

인도해달라고 그래서 주님이 내 발을 붙으셔서

결국 그곳에 서게 해달라고 노래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휘장 갈고리를 걸었던 것처럼

양손과 양발과 허리에 물과 피를 쏟으시고

4개의 구멍으로 피를 흘리면서 성전 휘장을 갈라놓으시고

이제는 우리가 그 높은 곳에 우뚝 설 수 있는 그 길을

열어놓으셨다.

 

이것을 잃어버리고 매일매일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돼 버리는 것이고

멸망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게도 높은 곳을 매일매일

바라보고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매일매일 기도하면서

매일매일 그곳을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죄가 없는 곳에 이를까?

어떻게 하면 빛과 사랑만이 있는 곳에 이를까?

이것은 먼저 내 개인의 심령 안에 이루어져야 된다.

내 심령 안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가?

지금 내 심령 안에 그 평화가 먼저 임해야 된다.

그 빛이 임해야 된다.

그 사랑이 먼저 임해야 된다.

 

그래야 주님이 오실 때 차례에 따라

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면서

그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여러분 하루에 TV 얼마나 보십니까?

TV에서 저 높은 곳을 이야기하는 것이 있는가?

 

전부 어떻게 하면 이 땅의 것을 생각하고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게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100% 땅의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사탄의 이 시대를 향한 전략이다.

모든 문화를 이용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지 않게 하고 위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것만 생각하고 저들의 신인 배만 두드리면서

배만 만족하려고 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그 삶을

그들이 문화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니까 TV에서는 땅의 것만 보여주고

땅 일만 생각하게 한다.

 

무더운 날씨이지만 매일매일 순간의 삶 속에서

정말 이 찬송가 가사처럼 죄와 두려움이 없고

사랑만 있고 빛만 있는 거룩한 것을 사모하고

매일매일 바라보면서 연약하지만 주님이 내 발을

붙드셔서 그 곳으로 인도하고 그 곳에 서게 해 달라고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서 더 가까이 한 걸음이라도

주님께 가까이 나가는 그런 8월이 되시고

여러분의 신이 배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십자가 앞에 서 있지만 십자가의 원수를 행하면서

무슨 십자가 앞에 서 있는 것인가?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공로가 헛되지 않고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 감춰진

그 생명을 바라보면서 그 영광이 나타날 그 때가

이제 임박하여 우리 바로 앞에 왔는데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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