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심정
누가복음 19장 37~44절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왜 종려주일이라는 명칭을 했을까?
성경을 좀 찾아보겠다.
마태복음 21장 8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고 표현하고 있다.
마가복음 11장 8절
"8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요한복음 12장 13절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누가는 나뭇가지 이야기를 뺏고
마태와 마가는 그냥 나뭇가지, 나무라고 했는데
요한사도만 종려나무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가지를 들어서
거기에다 깔았을까?
이사야 9장 14~15절
"14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15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종려나무가지는 머리고 갈대는 꼬리이다.
그래서 머리인 종려나무가지는 장로와 존귀한 자다 그랬고
꼬리는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이렇게 말씀하였다.
이사야 19장 15절
"15 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나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나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
여기서도 다시 한 번 머리는 종려나무 가지
그리고 꼬리는 갈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머리 중에 머리시고
예수님은 존귀한 자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예수님을 호산나
찬양하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7장 29~30절
"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왜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고
그 갈대를 빼앗아서 머리를 치고 있을까?
갈대가 꼬리이고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고 만왕의 왕인데 지금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은 꼬리이고
거짓 선지자라고 하면서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고 있다.
골로새서 2장 18~19절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천사 숭배함은 머리된 예수님을 붙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부터 생명과라고 하는
예수님 머리를 붙들지 않고 선악과라고 하는
타락한 천사를 붙잡아서 타락되었다.
처음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깔면서 예수님을 존귀한 자로
머리로 환영을 하였지만 결국은 그들도 다 예수님이
십자가 선고를 받을 때 갈대로 머리를 치면서
너는 머리가 아니고 꼬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핍박하였다.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주일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공생애 종려주일이 시작되는데 예루살렘에 입성한
그 종려주일의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가 2000여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마치면서 종려 주일날 마지막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그 종려주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니엘서 9장 말씀을 보겠다.
다니엘서 9장 25~26절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예수님이 종려주일날 왕이 되려고 메시야가 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을 따라
그날 오시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이 아닥사스 왕 때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한 이레가 7일인데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7년 만에 거리와 해자를 이루고 62이레를 합쳐서
69이레 만에 예수님이 입성하는데 아닥사스 왕이 중건한
명이 날 때부터 483년 69이레 만에 예수님이 종려주일날
입성을 하게 된다.
종려주일날 무조건 오시는 것이 아니었고 예언을 따라
메시야로 기름 부음을 받으려고 오셨는데
26절에 보니까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시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가 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는데
십자가가 달려 죽게 되고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70이레의 예언이 483년 종려주일이후로 끊어져
없어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을 받고 그 기간 동안에
이방인이 구원을 받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예수님이 다시 공중강림하면서 남은 한 이레
즉 7년 대환란을 거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 바로 종려주일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다니엘을 통해서 이미 정한 예언이고
이 예언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종려주일을 보내게 되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가 기억을 하면서
한 주간을 보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본문 가운데 41절 말씀에 보니까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그랬다.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시면서 예수님이 바로 우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이 여러 번 일생을 살면서 울었던 기억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 11장 33~35절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그 현장에
오셔서 많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며 민망히 여기시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시더라라고 하였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는가?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통분히 여기는 그 유대인을
보면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과 고통의
불행과 부활을 알지 못하는 그 인생들의 어리석음을 보면서
통분히 여기면서 우셨다.
히브리서 5장 7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계시는 동안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시니 곧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일생을 통하여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고
성으로 점점 가까이 오시면서 그 성을 보시고 우셨더라
말씀하고 있다.
다니엘의 예언을 따라서 483년 만에 한 이레를 남겨놓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지만 예수님은 저들이 죽일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아셨다.
결국 일시적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깔면서 예수님 당신이
만왕의 왕이십니다! 당신이 존귀한 자입니다! 하면서
환영하고 호산나를 외쳤지만 머지않아 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머리로 삼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과 멸망할
예루살렘을 보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우실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의 심정이었다.
본문 말씀 43절에 말씀하고 있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날이 이르면 이 날이 무슨 날인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그 날인데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AD70년에 멸망당하는 그때를 말한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는 그날인데 그 로마 군대들이
예루살렘을 쳐들어갈 때 마지막 저항했던 사람들이
마사다라고 하는 요새에서 다 죽었는데
그 요새는 천혜의 요새였다.
사방이 절벽으로 돼 있기 때문에 적들이 오랜 시간을
걸쳐서도 그 성을 함락하지 못해 결국 토성을 쌓았다.
지금도 그 토성자리가 이스라엘 가면 있다.
마사다 앞에 산 같이 토성을 쌓았다.
거기서 커다란 돌맹이를 대포를 쏘듯이 그 성을 날렸는데
이것을 공성대라고 하는데 그 돌맹이가 지금도
그 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마사다에서 항전하던 그 남은 사람들이 전부 끝내는
견딜 수 없어서 서로를 다 죽이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자살을 해서 로마에 굴복하지 않았던 그들의 정신을
보여줬지만 이 말씀대로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을 가두고" 이 마사다 마지막 항쟁의 역사가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복음 13장 34~35절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바라볼 때마다 주님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냈다.
나라와 민족이 위험하고 멸망당하는 그때마다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고 예루살렘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했다.
암탉이 날개 안에 병아리를 모으는 것처럼 그렇게
그 자녀들을 모으려고 했는데 수많은 선지자를 다 죽이고
결국 예루살렘은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예수님이 기름 부음을 받고 오실 때도
그 예수님마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너의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선민으로 택하셨고 장자로 택하고
샘플 민족으로 택하셨는데 결국 버릴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이 바로 예수님의 심정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중 강림하여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줄 그때까지 "너희가 다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을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탄식 하며
울고 계신다.
예수님의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모르고 멸망으로 가고 엉뚱한
일로 가는 그 인생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울고 계신다.
누가복음 23장 26~31절
"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여자의 큰 무리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고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며
따라가는데 예수님이 바로 28절에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너희를
위해 대속의 제물로 죽어가지만 대속의 제물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너희의 죄의 문제와 너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신다.
너희 자신들의 영혼을 향해서 울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21장 23절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이 큰 환란의 날이 오면 어린아이들이 제일 문제이다.
자기 앞가름을 할 수 없는 이 어린 인생들이 교육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 부모가 양육해야 하는데
대환란이 오면 그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기위해 그들을 위해
너희가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멸망할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울었던 예수님이 이 시대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녀들을 향해서 울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영혼을 생각하면서 우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누가복음 23장 31절에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푸른 나무는 살아 있는
나무이다.
마른 나무는 완전히 죽은 나무이다.
예수 믿고 주님을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은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푸른 나무도 이렇게 산들이 무너지고
많은 환란의 날이 오면 이렇게 어려운데 영원한 생명이
전혀 없는 마른 나무와 같은 인생들은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하는 것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우셨던
예수님의 심정이었다.
에스겔 9장 4절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에스겔 8장에는 수많은 우상 숭배가 나온다.
태양신을 섬기는 우상들과 담무스를 섬기는 음란의 우상들
그 마음속에 여러 가지 곤충을 섬기는 우상숭배 수많은
우상이 8장에 나오는데 이렇게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든 가증한 일 그 우상을 보면서
탄식하여 우는 자들 그들에게 이마에 표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들이 휴거 되는 자들이다.
에스라 9장 2,5,6절
"2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 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살육하는 기계를 잡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5절 6절에
뭐라고 말씀하는가?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성전에서부터 시작한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처녀와 어린이나 부녀를 다 죽이는데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만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이마에 표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온갖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생명에 떠나 있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이 우는 그들에게만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하고 있다.
내 성소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부터 그 일을 시작하고 있다.
푸른 나무인 예수 믿고 생명이 조금이라도 있는 그들도
다 멸망당하는데 하물며 마른 나무 같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그들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이스라엘 당시도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고 머리인데
그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인생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그 성을 보면서 우시는 것처럼 지금 우리는
내 심령에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지 되돌아 봐야한다.
돈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돈을 왕으로 모시고 정욕적인
문제와 오락과 게임과 술과 쾌락에 빠져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다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누가 울고 있느냐 그 말이다!
이것을 탄식하며 안타까워하며 우는 자만 이마에 표를 하고
그들만 하나님의 생명으로 건짐을 받게 된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하나님이 살육하는 기계에
의해서 다 쓸어버리는 것이 환란이고
이 환란이 바로 우리의 코앞에 지금 와 있다!
베드로후서 2장 6~8절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노아의 홍수는 물 심판에 본을 보이신 것이고 소돔 고모라는
7년 대환란 때 불로 심판할 본을 삼으신 것이다.
7년 대환란의 불 심판의 본을 소돔 고모라를 통해서
삼으셨는데 의로운 롯은 소돔 고모라의 그 음란한 행실
동성애가 만연하고 무법한 그들의 그 모든 행실을 보고
고통스러워서 날마다 보고 들음으로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고 하였다.
마음이 상하면 어떻게 되는가?
울게 된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당하는 그때의 의로운 롯이 경건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건짐을 받은 것은 그가 그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매일같이 심령이 상하여 울었기 때문이다.
이 우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다.
여러분! 자녀의 교육은 혈기로 하는 게 아니다.
자녀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선과악이라고 하는 이중론적인
그 기준이 선악과증후군인데 내가 정한 기준의 선과
악으로 내가 선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정한 선이
선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한 선이 선인 것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교육시키고 하나님이 바꿔줘야 되는데
내가 그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는 순간에 그들이 변화되는 것이다.
그 멸망당하는 자녀들을 보고 멸망당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울고 또 우는 사람들이 이마의 표를 받아 이들은 건져내시고
음란한 행실을 보고 우는 롯을 건지시는 것처럼
마지막 때도 그들을 향해서 우는 그 심령들을
하나님은 찾으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심정이다!
오늘 종려주일과 돌아오는 고난주간의 한 주간을 지나면서
여러분이 예수님의 심정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때에 따라 성전에 가서 그들의 성전을 뒤엎기도 하셨지만
이것은 거룩한 분노였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혈기를 가지고 다스리지 않으셨다.
나사로를 보면서 죽음의 문제 불행의 문제 죄의 문제 때문에
울 수밖에 없고 자신도 인생들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심한 통곡과 눈물을 자기를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께만
그렇게 통곡과 눈물로 드릴 때
예수님은 그 사명을 감당하시었다.
이 예수님의 심정을 깨달아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을
향해서 통곡과 눈물로 나갈 때 자신의 영혼도 구원받고
나의 자녀들도 변화가 되고 그들도 구원 받을 수 있게 된다.
내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종려주일을 지나면서 이번 주는 고난주간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생들의 죄 문제 때문에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버림당할 수밖에 없어 고민하고
죽게 되었던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고난주간 되기를 바란다.
기도하며 깨어있지 않으면 시험에 들까 두렵다고
베드로가 그랬다.
이 마지막 고난주간 한 주간을 지나면서 우리가 초실절을
맞을 때 여러분 모두가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자숙함으로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히브리서 12장 1~4절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이 신앙의 경주 일생을 통하여 달리게
하는 이 경주는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짊어질
경주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승리한 허다한 증인들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보다 앞서 갔던 세대의 많은 사람도 다 그 죄 문제를
가지고 갔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달리기를 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승리하고 어떻게 증인이 되었는가?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승리하였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런 예수님을 따라가는 나에게도 나에게 준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개의치 않아야 된다.
더 큰 가장 큰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셔서
결국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처럼
우리도 각자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한다.
우리가 울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 과정을 지나갈 때
우리도 승리하고 이 허다한 증인의 한 사람이 되게 된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주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이 고난 주간에는 이 모든 것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보내야 한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 대항치 아니하고"
내 한 가지 잘못을 고치려고
우리는 피흘리까지 싸운 적 있는가?
악습 하나를 뜯어 고치려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본 적이 있는가?
피 흘리기까지 우리는 싸워야만 한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찔리는 것이고 허리에 창을 맞는
것이고 피 흘리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만 한다.
예수님처럼 참아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봐야 된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 고난주간을 동참해야 한다.
종려주일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특별히 예수님의 심정이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나와 내 자녀들을 위해서
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내 눈물을 보시고 내 자녀를 변화시키시고
내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악습을 고쳐주시고
내 눈물을 보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영원한 부활의 생명으로 이끌어주신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가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머리가 온통 물이였다면
얼마나 좋을 뻔했냐고 하였다.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얼마 후에 멸망당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그 성안에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 영혼 하나하나의 얼굴을 기억하면서 계속해서
내 머리가 온통 물이었다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하였다.
이 시대는 눈물의 선지자가 그리울 때고
눈물의 선지자가 필요할 때이다.
이 눈물만이 영혼들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새롭게 할 줄로 믿는다.
이번 종려주일의 의미를 잘 기억하시고
이 고난 가운데서 예수님의 심정으로 우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