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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부활의 의미

by Andrew Y Lee 2022. 4. 9.

부활의 의미

 

고린도전서 15장 20-24절

 

 

 

오늘은 "부활의 의미"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초대교회 300년간 로마의 핍박 이후로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을 하면서 반전이 됐는데

기독교로 국교를 삼으면서 했던 일 중에 하나가

부활절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말로만 기독교를 국교로 카톨릭이 통합을 했지 사실은

그 당시에 모든 이방 종교들을 전부 통합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이스터 여신을 섬기는 제도를

기독교로 그대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제정된 것이 부활절이다.

 

그리고 부활절에 달걀을 깨는 것도

이스터 여신을 섬기는 모습이다.

 

이스터 여신을 섬기는 날이 춘분을 지나서

첫 번째 오는 만월 그 주일을 부활절로 삼았는데

올해는 춘분이 3월 21일이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만월일 4월 16일이다.

그래서 4월 16일 만월을 지나서 오는 주일이

부활절이 되었다.

 

우리가 몰랐을 때에는 카톨릭의 것을 기독교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따라왔던 것인데 이제는 깨닫게 되어

이것을 지키기가 어렵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일곱 개의 절기가 있는데

골로새서에 보면 이것을 그림자라고 그랬다.

 

그 절기 속에 그대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 달려 죽으시고 초실절이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흔들어 드리는 제사인데

예수님이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을

다 이루셨다.

 

오순절날 성령강림으로 오셔서 4개의 이스라엘 절기가

실제로 다 이루어져서 지나갔다.

 

앞으로 올 나팔절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휴거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고 나팔절이 지나면 속죄절로

7년 대환란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천년 왕국이 되면

초막절, 장막절이 된다.

 

이 절기는 아직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시간표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곱 개의 절기 중심으로 지나다 보니까

부활절이라기보다 초실절이라는 말로 지나게 된다.

 

4월 둘째 주가 종려주일인데 이 날은 여전히 우리에게

종려주일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으니까 그리고 고난 주간도 같다.

 

그리고 이스터의 여신을 섬기는 부활주일은 우리가

이제 초실절로 고쳐서 지나가야 된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몇 년 전부터 취하고 있다.

 

여러분이 잘 깨달으시고 금년에 4월이 부활의 달이고

셋째 주에 초실절이 있다는 걸 기억하시고

오늘이 4월 첫째 주인데 부활의 의미를 좀 생각하면서

부활의 날을 맞이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첫 번째,

부활의 의미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우리는 재생이라고 한다.

소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이러한 사건이 아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일은 많이 있었다.

 

구약 시대의 엘리야의 예를 한번 보면

열왕기상 17 21~22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 오고 살아난지라"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엘리야가

그 아이를 기도하여 살리는 모습이다.

 

이것은 재생, 소생이라고 하는 것이지

이것을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도 마찬가지다.

열왕기하 4 34-35

"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엘리사가 그 아이의 몸과 똑같이 포개서 그 아이를 살렸다.

이것도 재생이고 소생이지 우리는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의 말씀도 보겠다.

누가복음 8 52~56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야이로의 딸 어린 아이가 예수님 말씀으로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 그랬는데 이 아이가 예수님이 일어나라 할 때

영이 돌아와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것도 여전히 재생이지 부활이 아니다.

 

누가복음 7 12~15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예수님이 직접 살리셨다.

그런데 이것도 여전히 부활이 아니고 재생이다.

왜? 언젠가는 또 죽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 43~44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사로는 죽었는데 예수님은 잔다 그러셨다.

 

그런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도 우리는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사로도 또 죽을 몸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9 37,40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가 죽었는데 베드로가 "다비다야 일어나라" 40

말씀하니까 다비다가 눈을 떠서 다시 살아났다.

 

베드로에 의해서 살아난 다비다도 여전히 부활은 아니다.

 

사도행전 20 9~12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유도고라는 청년 설교 듣다가 졸아 떨어져서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예가 구약, 신약

예수님 당시 사도들에 의해서도 많이 일어났지만

이것은 전부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재생, 소생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6 11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예수님 안에 저와 여러분은 아담 이래로 영 육간에

죽은 인생인데 예수 믿는 순간 영적으로 살게 되었다.

이것도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심령이 살았다는 것이다.

육체까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을 때 우리는 이것을

부활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으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부활이고 영생이라고 한다.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누군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재생과 소생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게 될 때 이것을 부활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는

이 육체 속에 시공간을 떠나서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 세계가 이 시공간 안에 있는

육체 속에 들어와서 합쳐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음식을 잡수실 때 여전히 그 음식을 먹는 몸은

우리와 같은 몸이다.

그러면서도 벽을 그대로 통과하는 신령한 몸을 가지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뛰어넘어서 이 세상은 3차원 4차원 5차원 10차원까지

차원의 세계를 넘어서 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영원의 시간 속으로

합쳐 들어가는 것이다.

 

여러분 이 비밀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인생과 하나님의 중보자가 되신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도 머무를 수가 있고 이 세상의

시공간의 지배를 받는 그 육체의 삶도 여전히 머물 수 있는

이것들이 예수님 안에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이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고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신 그런 몸을 가지신 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말한다.

 

사도바울이 그 예수님의 부활을 본 받아서 어찌하든지

그 부활을 이루려 쫓아간다고 그렇게 표현을 하였다.

 

우리가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 안에

찰싹 붙어서 하나가 되어져야 그 부활의 생명을 받게 되고

영원한 영생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여러분 이 시간 부활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두 번째,

이 부활을 우리는 "영화로운 상태다" 하는 말로

성경적으로 정리할 수가 있다.

부활은 영화이다.

 

요한복음 17 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4 말씀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영화를 얻게

한다고 하는 말이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다른 번역에서는 영광이라고 그랬다.

 

우리가 영광을 돌리는 게 무엇인가?

예수 믿고 영광 돌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데

영광 돌린다는 게 무엇인가?

 

이 영광 돌리는 것은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영광 돌린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영화롭다고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은 본체신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은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에

이 세상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빛,

평화이시고 거룩하신 그 속성을 다 드러내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앞에 놓고 다시 한 번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영화롭게 해 달라 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영화가 뭐냐 하면 5 말씀에 있는 것처럼

"창세전에 가졌던 영화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창세전에 가지고 있던 영화 이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아버지의 성품을

다 드러내셔서 예수님도 거룩하게 사셨고 사랑으로 사셨고

빛이 되셨고 평화로 사시며 하나님의 성품을 다 드러냈지만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영생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영화

그 영광만은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지만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

이렇게 마지막으로 기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기도를 받으셔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

이것이 부활인 것이다.

 

사도행전 3 13~15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빌라도가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래서 예수님을

못 박아서 생명의 주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부활하셨는데 이 부활이 예수님이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는 그 기도대로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부활이 영화인 것이다.

 

부활이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창세전의 생명 이것을 부활을 통해서

영화롭게 하시어 그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은 신령한 몸이면서 영화로운 몸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얼마나 놀라운지 이 부활의 놀라운 경지를 우리에게도

주시려고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요한복음 17 20~24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셔서 창세전에 가셨던

영원한 영광 이것이 영화이다.

 

그런데 그 영광과 그 영화를 예수님에게 주신 자

곧 예수 믿는 자 그들도 하나가 되고 온전케 되어

그 자리에 있게 해달라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지가

창세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인 그 영광의 자리,

그 영화의 자리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다.

 

예수 믿는 자의 목적지가 여기이다.

 

여기에 있게 해 달라고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놓고

간절히 지금 기도하고 계신다.

 

로마서 8 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어떤 사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이 나온다.

 

우리를 왜 하나님이 부르셨는가?

의롭다고 하신 다음에 영화롭게 하시려고 하는데 그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화이다.

 

물질세계를 떠나서 창조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이것이 영화인데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그 영화를 가지게 됐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께 다 붙어서 하나가 되어

예수님이 부활한 이후로 이제 우리도 언젠가 부활하여

그 영화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광의 자리로 가는 것이 

부르심의 목적이다.

 

얼마나 놀라운 부르심인가?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연단 받고 병도 걸리고 이리저리

쫓겨 가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그 예수님의 영광 이것이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부르심이고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우리 신앙생활의 종착역이고 죽은 자는 부활시킬 수가

없지만 예수님은 산 자가 되어서 우리를 부활시킬 수 있는

자가 된 그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누가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가 있겠는가?

산자를 만들겠는가?

 

오직 예수님만 산자이기 때문에 예수님만 우리를 살게

하실 수 있다.

 

요한계시록 1 18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전에 죽었는데 부활하여 산자가 됐기

때문에 세세토록 살아있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살아계시고 세세토록 살아있는 이것을 성경에는 산자라고

하고 있다.

산자가 됐기 때문에 우리를 살려주신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 죄인들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고

예수님이 그 산자로 가는 그 길을 개척하여 처음 부활의

첫 열매가 돼서 나타난 것이 초실절의 의미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얼마나 이 의미를 알고 지나가야만 되겠는가?

 

부활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최대의 소망이고 우리가

바라봐야 될 것이고 우리가 가져야 할 최대의 믿음은

부활의 믿음이다.

 

고린도전서 15 12~19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부활이 안 믿어지는데 예수 믿는 것은 아무 쓸 데가 없다.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것이고 부활의 증인인 이 증인들의

말도 다 거짓이고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이 다시 사는 것도

없고 우리의 죄의 문제도 여전히 있게 된다.

 

우리의 소망은 부활을 얻는 것이고 이 부활의 믿음을

가져야만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감당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 58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초대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여전히 죽어가면서도

그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순교가

가능하였던 것이고 스데반집사가 돌로 맞아 죽으면서

하늘이 열려서 그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부활의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순교도 가능했던 것이었다.

 

저와 여러분은 부활의 믿음을 가져야만 흔들리지가 않고

견고해 진다.

또한 헛되지 않기 때문에 주의 일에 힘쓸 수가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오늘 본문 말씀에 성도의 최대의 소망이고 우리의 믿음의

근거인 이 부활이 23 말씀에 보니까 차례대로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각자 우리의 부활의 차례가 언제인지?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맞게 되는 건지?

그 부활의 차례를 전해보려 한다.

 

부활의 차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다음에

부활했을 때 부활의 첫 열매!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을 예수님이 입으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래서 이 부활은 고린도전서 15 말씀대로

예수님이 재림하여 다시 오실 때 그때 다시 부활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럼 예수님이 재림이 두 가지인데 공중에 오시는 것을

"공중 강림"이라고 하고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우리는 "지상 재림"이라고 한다.

 

이때 예수님 강림할 때 붙은 자는 교회 시대 동안에

14만 4천이라고 하는 영원히 먼저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

로마서 8에 죄에서 해방이 된 사람들,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 이 사람들이 처음 익은 열매가 되고

이들이 예수님 공중 강림할 때 죽었다가 부활하여

휴거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중 강림할 때 14만 4천 명 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변화가 되어서

함께 휴거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상 재림할 때 교회 시대 안에 순교자들과

대환란 때 순교자들이 함께 천년왕국의 부활체를 가지고

나온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20 "첫째 부활"이라고 말한다.

 

교회시대 동안에 14만 4천명이 처음 익은 열매이고

순교자들은 두 번째 익은 열매이다.

 

이들이 예수님이 지상 재림 할 때 첫째 부활로 천년 왕국의

부활체를 가지고 나온다.

 

그러면 나머지 우리가 사는 교회시대 동안에 처음 익은

열매 14만 4천명과 순교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세 번째 익은 열매인데 이들은 전부 대환란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전부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때 백보좌 심판이

지나서 고린도 15장에는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랬다.

 

이때 두 번째 부활이 일어 날 때 부활하게 된다.

 

사람 몸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의 머리

구원을 받는 예수님의 신부들은 공중 강림할 때

먼저 부활체를 입는다.

 

그리고 목에 해당하는 순교자들은 들러리 같은 사람들이다.

 

신랑 신부 옆에 있는 들러리처럼 머리와 몸의 중간인 목은

재림하실 때 부활에 붙어버린다.

목은 머리에 붙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지체는 백보좌 심판 때 부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몸이 한 사람처럼 완전히 나타날 때

부활이 끝나면서 새로운 새 하늘 새 땅이 부활체와 같이

이 땅에 나타나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의미를 잘 깨달아야 된다.

 

아담 안의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서 타락한 우주 만물과

사람의 심령과 육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으로 함께

들어가게 된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여 모든 것이 다 죄인 된 것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들어갔는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영원히

구원받은 사람의 육체가 먼저 튀어나온다.

이것이 차례가 있다는 말이다.

 

그 차례가 내가 구원을 머리로 받는지 목으로 받는지

육체로 받는지 그것이 첫째 부활인지 둘째 부활인지

우리 각자의 영혼이 익은 순서대로 받게 된다.

 

그러니까 죄에서 빨리 해방이 된 사람이 먼저 부활하게 된다.

 

공중 강림 처음 익은 열매가 부활이 되면

둘째 부활은 대략 천 칠년 뒤에 있는 것이다.

 

부활은 우리의 최대 상급인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 35에는 "더 좋은 부활"

얻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 오실 때 제일 먼저 부활하면  신령한 몸이 되어서

벽을 그냥 통과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500명에게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고 생각만 하면 즉시로 이동이 되지는

그런 몸이 부활의 몸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은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오게 된다.

 

이것은 성도의 최대의 소망이고 최대의 상이고

우리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

 

사도 바울이 이 토록 부활을 사모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4월은 부활의 달이다.

부활을 위해서 많이 묵상을 하시길 바란다.

 

다음 주는 종려 주일이고 고난 주간이다.

그리고 셋째 주 부활 초실절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함께

동참하며 신령한 은혜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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