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
요한계시록 3장 7~13절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때에 따라 하나님의 어린 양 어떤 때는 목자 또 어떤 때는 포도나무, 새벽별, 보배 그리고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여러 가지 사물과 여러 가지 동식물로 표현하면서 우리가 인지하도록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아가서에는 주님을 사과나무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 달콤한 실과를 먹고 그 나무 그늘 아래 쉼을 얻는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열린 문"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명칭 가운데 "우리의 문"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우리의 문"이시다. 요한복음 10장 7~9절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우리가 양인데 주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심과 동시에 그 양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시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이 우리의 구원의 문이 되시고 또 우리가 그 문에 들어가며 꼴 양식을 얻게 된다. 이 세상에서 양식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는가?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양식을 얻는 그 문을 만드셔서 우리가 꼴을 얻게 하시고 그 양식을 먹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신다는 것이다. 문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건물마다 다 문이 있고 집에도 다 문이 있다. 또 우리의 삶속에는 취업문이 있고 입학의 문이 있고 출세문이 있고 이런 모든 문이 있어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을 여는 문이 되셔서 하늘의 생명으로 가는 길을 여시는 그런 분이 되셨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19절에 있는 성소는 번역이 잘못되었는데 지성소로 번역을 해야 맞는 말이다. 휘장이 곧 예수님의 육체인데 그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질 때 하나님이 계신 그 보좌에 있는 속죄소, 하나님이 계신 시은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래서 그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막는 벽이면서 동시에 문이다. 오늘날 커튼과 같은 개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지성소로 들어 갈 수 있는 그 길을 여시는 문이 됐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이 없었다면 우리는 양식을 얻을 수도 없고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이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는 사람 편에서 들어가야 하는 문이 있다. 물론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우리 각자가 의지를 드려서 들어가야 하는 문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은 세 가지인데 1) 좁은 문이다. 누가복음 13장 23~25절 "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많습니까?"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이 좁은 문은 마태복음 7장에 나와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좁은 문이 바로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출입문인 것이다. 신앙의 싹이 나고 출애굽하는 그런 문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사람 편에서도 의지를 드려서 생명으로 얻는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을 좁은 문이라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 좁은 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닫혀버린다 왜 그런가? 성경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이 정해놓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순교자의 수를 정해놓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신부될 새 예루살렘 땅에 들어가는 그 숫자를 14만 4천명으로 정해놓으셨다. 그 수가 다 차면 그 문이 닫혀버린다. 그러니까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를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였다. 하나님은 다 숫자를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서로 침노하여 먼저 그 문에 들어가야 된다.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고 협착한 길을 다 지나야 생명을 얻는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고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고 좁고 협착한 길을 다 지나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좁고 협착한 길을 가야 되기 때문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고 넓은 문은 멸망으로 가는 문인데 길이 넓어 많은 사람들이 끌려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정말 생명을 찾아서 걸어가는 이 길은 좁은 문이고 좁고 협착한 길을 다 지나야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 길에 그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된다 주님은 말씀하고 있다. 2) 제2의 성경이라고 하는 천로역정에서 말하는 좁은 문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좁은 문이 아니다. 천로 역정에서 말하는 좁은 문이다. 이 기독도가 살고 있는 죄악 세상을 천로역정에서는 장망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장망성은 장차 망할 성이다. 그래서 이 죄악 세상은 반드시 망해서 없어질 것인데 이 장망성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니까 이 기독도가 성경을 들고 장망성을 떠난다. 떠나면서 제일 먼저 가야 하는 문이 천로역정에서 나오는 좁은 문이다. 생명, 생명, 생명을 외치면서 그 좁은 문이 장망성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 좁은 문을 목표로 하여 희미한 빛을 따라 좁은 문을 향해서 떠나는 것이 기독도의 삶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 세상인 애굽을 떠날 때 그 애굽을 떠나는 목적이 시내산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시내산에 도착해야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그다음에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짓게 하셔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와 똑같은 것이 바로 천로역정의 좁은 문인 것이다. 그 좁은 문을 들어가야 가지고 왔던 모든 등 짐들이 그 십자가 언덕에서 다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이르는 것과 똑같은 과정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성막을 짓고 그때부터 하나님께 제사드리면서 본격적으로 가나안을 향해가는 분기점이 바로 그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는 사건이다. 천로역정의 그 좁은 문이 십자가언덕에서 등짐이 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천성을 향해서 가는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아이의 신앙에서 청년의 신앙으로 바뀌어지게 된다.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그 율법에 근거해서 명령을 지키지 않고 말씀을 지키지 않은 육십만명이 죽게 된다. 그러니까 육십만이라고 하는 옛 사람 자아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죽기 시작하니까 청년의 신앙이 되는 새로운 신앙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 좁은 문을 들어가서 예수 믿는다고 하더라도 제2의 성경이라는 천로역정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청년의 신앙이 되지 못하고 자아가 깨어지지 못하는 이런 어린아이 같은 신앙으로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게 된다. 좁은 문을 들어가면 두 번째 제2의 성경이라는 천로역정의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 써야 한다. 3) 우리가 힘써야 하는 문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아이와 청년의 신앙을 지나서 아비의 신앙으로 가야 되는데 요한일서 2장에는 신앙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요한일서 2장 12~14절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신앙의 단계가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 바로 아이들, 청년들 그다음에 아비들이 있다고 말씀한다. 어린 아이 하나가 태어나면은 점점 자라서 이 아이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다 똑같은 자녀들이 아니고 그 자녀들에게 세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신앙의 단계가 있고 청년의 신앙의 단계가 있고 아비들의 장성한 자의 신앙의 단계가 있다고 말씀한다. 이 청년의 신앙에 들어온 사람들이 더 성장하여 아비들의 신앙이 되어지는 그 문이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있는 그 문을 말하고 있다. 그 문을 주님이 두드리며 "그 문을 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람 편에서 그 문을 열어야 한다. 처음 신앙에 출발할 때도 내가 예수 믿기로 결단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그 문도 내가 열어야 하는 것이고 청년의 신앙으로 들어가는 그 좁은 문도 내가 열어야 되고 본격적인 아비가 되어지는 이 신앙의 문 이것이 내 영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인 것이다. 이것도 내가 열어야만 한다. 내 의지를 드려서 열고 힘쓰고 애썼기 때문에 이것이 상급이 되는 것이다. 나의 열심 없이 하나님 은혜로만 다되어지면 그게 무슨 상급이 있겠나? 신앙생활은 손바닥이 마주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시면서 동시에 우리 편에서는 의지를 드리고 힘 써야 그게 상급이 되어 진다. "줄탁동시"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가 되면 밖에서 어미가 알을 쪼아서 껍질을 깨뜨려준다. 안에서는 병아리도 껍질을 깨뜨리면서 동시에 밖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동시적인 것이다. 그 안에 있는 병아리는 자기 힘으로 그 알을 깨고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바깥에서 어미가 부리로 껍질을 깨줘서 안에 있는 병아리는 동시에 그걸 밀치고 나오는 양쪽에서 동시에 역사를 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전부 이런 원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셔서 은혜로 가지만 동시에 나도 힘쓰고 애써서 줄탁동시로 하나님의 은혜와 내 의지가 합쳐져서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 가지 문을 열기를 우리가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내 의지를 드려서 예수 믿기로 결단하지 않으면 무슨 생명이 있고 무슨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겠나? 내 의지를 드려야 한다. 청년의 신앙으로 가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갈급하게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서 끌고 가신다. 그 마음의 동기를 주시는 건 은혜이다. 이와 함께 내가 힘쓰고 애쓰는 내 편에서의 의지도 드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힘써야 할 문들인 것이다. 세 번째인 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도 마찬가지이다. 늘 내가 힘쓰고 애쓰지 않으면 그 문은 우리에게 열려지지 않는다. 그 문이 열어지도록 우리가 힘쓰고 애를 써야 한다. 우리 자신들에게 그러한 갈망과 그러한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마음의 동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소생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우리에게 갈망을 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은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화를 그린 화가의 의도는 그 문은 밖에서 열 수 없는 고리가 없고 안에서 열어줘야만 그 문이 열려지는 그런 의도로 그 문을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릴 때 안쪽에 있는 우리가 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는 본문에 있는 열린 문인데 이 문은 우리가 여는 문이 아니고 주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열어줘야 하는 문이다. 세 가지 문은 내가 힘쓰고 내가 의지를 드려서 열어야 하지만 오늘 본문에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이 열린 문은 요한계시록 3장 8절 "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이 문은 닫을 사람이 없고 그리고 3장 7절에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오직 예수님만 열고 닫을 수 있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열고 닫을 수 있는 그 문이 주님이 열어주셔야 하는 그 문이기 때문에 그 문이 열려지기를 우리는 소망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계시록 2장 3장의 일곱교회는 시대적으로 이루어질 교회의 모습을 말한다. 아시아의 그 일곱 교회가 그 당시에 교회가 일곱 개만 있었던 게 아니고 오늘날 아시아 일곱 개가 있었던 터키지역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다. 많은 교회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일곱 교회를 하나님이 택정하셔서 그 일곱 교회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되어지는 교회의 모습으로 말씀하셨다. 일곱 교회가 이렇게 인류 역사 되어 질 과정의 교회들로 보이면서 동시에 그 교회들을 향한 칭찬과 생명과 권면과 약속의 말씀은 교회 시대에 모든 성도들에게 동시에 해당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시대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 교회를 모형으로 하여 우리에게 칭찬하시고 책망하시고 권면하시는 이 모든 내용은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다 적용되어지게 된다. 이런 원리로 해석을 해야 한다. 사데 교회라고 하는 다섯 번째 교회에 요한계시록 3장 1~6절까지 나온 이 사데 교회가 종교 개혁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16세기 말이니까 1500 후반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그 교회인데 그 교회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사실은 죽은 교회다 그랬다. 또 두아디라 교회는 당시에 로마 교회를 말한다. 이건 누구나 종교 암흑시대라고 말한다. 로마 교회는 기독교를 국교를 삼으면서 많은 혼합적인 종교들을 다 가지고 들어왔다. 이스터 신을 가지고 부활절을 만들고 태양신 섬기는 날을 성탄절로 정하고 전부 이런 식으로 모든 종교를 짬뽕 해놓았다. 또 이세벨을 용납해서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교회였다. 그리고 사데 교회는 종교 개혁을 했는데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여전히 죽은 자로 종교개혁에 부족한 점이 많이 있었다. 사데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는데 개혁을 했지만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얼마간의 성도들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 종교 개혁을 했던 주역들 이들이 다 이긴 자들이었다. 흰옷을 입은 자들이 종교개혁을 한 것이다. 그런데 개혁을 했어도 여전히 불안전한 요소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아직도 죽게 됐고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그러면서 이어서 나타난 빌라델비아 교회가 새로운 세계선교시대에 나타난 교회가 되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그 열린 문은 종교 개혁 이후에 하나님이 세계의 선교를 통해서 부흥되어지는 그 문을 여셨다는 것이다. 그 문을 여신 것이다. 그 당시에 감리교를 창시했던 요한 웨슬리,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드 길하성 같은 전도자들이 활동하는 시기 그래서 개신교회가 이만큼 부흥되는 그 기초가 바로 이때 세워지게 되었다. 다시 선교에 전념하고 성령의 불을 지폈던 그 시대에 문이 열렸던 것이 바로 열린 문인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그 시대에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마태복음 13장 31~33절 "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겨자나무 비유이다. 겨자나무의 씨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씨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 심겨지니까 풀보다 큰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 드린다.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의 성도 안에 지극히 작은 겨자씨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서 그것이 자라면서 신앙이 아비의 신앙이 되어 지고 하나님이 그 장성한 신앙의 사람들을 통하여서 열린 문을 여셔서 많은 성도들이 와서 깃드는 것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든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6장 26절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는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이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는 자들이 장성한 겨자나무 같이 영적으로 성장한 그들이 된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도 이렇게 열린 문을 두었는데 그 열린 문을 그때 한 번 두 번 끝난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이 이러한 성도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시대 시대를 살려내고 그 시대에 공중의 새떼들을 불러 모아서 양육하게 하는 이런 섭리를 가지고 계셨다. 한국교회 비유를 한다면 일제시대 때는 모두 신사 참배해서 신앙이 죽을 수밖에 없는 때였다. 주기철 목사님 같은 순교자를 하나 우뚝 세우셔서 그 순교자의 본을 받아서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예수 믿고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는 그런 샘플로 주기철 목사님을 세우셨다. 이것이 주기철 목사님이라고 하는 장성한 겨자나무로 그 시대의 교회를 살리고 많은 순교자를 통해서 그 시대의 세대들을 양육하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님 전기에 보면 어떻게 하다가 감옥에서 한 번 나왔는데 집 마당에 들어오니까 오정모사모님이 "아니 당신이 갑자기 이 시간에 감옥에 있지 않고 여기는 웬일이세요" 그러면서 감옥에 있던 그 목사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고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대접하지 않고 "당신이 예수 부인하고 감옥에서 나왔다면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섬길 마음이 없소" 그렇게 내쫓아버렸다고 한다. 그 모진 고문과 감옥 생활을 7년이나 하셨다. 그 7년이 그분의 세 번째 연단이었다. 감옥 생활을 7년이나 하고 수많은 매를 맞고 그러면서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끝내 순교의 길을 가신 그 일사각오의 정신 그 신앙이 그 시대에 한국교회를 살리게 되었다. 이성봉 목사님은 많은 곳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만주에 가서도 교회를 세웠는데 일화 중에 만주에서 한국 사람들이 많은 곳에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 만주에 있는 원주민들과 대립되었을 당시 원주민들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교회를 다 부숴버리겠다"고 하자 그 수모를 참으면서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그 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가기도 하였다. 어린 딸이 둘이 있었는데 그 어린 딸을 보니까 이 한 겨울에 양말이 다 구멍이 나 있고 먹을 것도 떨어지고 했을 때 그런 두 딸을 남겨놓고 부흥회를 위해 만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떠나야 했었다. 이렇게 순간순간 인간의 애정과 욕망들을 절제하면서 어떻게든지 예수님의 향기와 빛과 그 주님의 말씀대로 전달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그런 소망을 가지며 살아가셨다. 이런 분들이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고 예수님의 진리를 드러내면서 그 시대 시대를 살려서 그 시대의 공중의 새들을 양육하였다. 오늘날 같은 대형 교회를 만들어서 조직으로 인기몰이로 편의주의로 하여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그런 교회들이 아니었다. 정말 예수님의 빛을 보고, 예수님의 향기를 보고, 예수님의 진리를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의 새들처럼 이렇게 양육되어지면서 그 시대 시대를 살려가는 이러한 열린 문들이 곳곳에 열렸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있었고 마지막 때에도 이 문이 열려야만 한다. 여러분 이런 문이 열리도록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한다. 이렇게 장성한 겨지나무를 사용하셔서 열린 문을 여시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그 문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영적 성장을 사모하면서 하나님 편에서 그 문을 열어주시기를 마지막 때 많은 공중에 새들이 양육되는 그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문이 열려지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그 문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오면 주님과 합일되는 것인데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사도 바울이 고백하던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다"는 신앙의 경지가 이루어지면서 그렇게 되면 함께 더불어 먹고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4장 31~34절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제자들은 양식을 구하러 다녔지만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생수 문답을 하고 여러 가지 문답을 하면서 그 영혼 하나를 살렸다. 그리고 그 사마리아 여인이 "와보라" 해서 그 동네가 다 부흥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 사마리아 우물가에 예수님을 보냈던 그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제자들은 양식을 누가 갖다 드렸는가? 이렇게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말씀하셨다. 주님의 양식은 바로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래서 장성한 신앙의 아비들이 되어 지면 주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일이 내 일이 되고 내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됐기 때문에 남편의 사정이 아내의 사정이 되고 아내의 사정이 남편의 사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게 된다. 하나가 됐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신부의 사정이 남편인 예수님의 사정이 되고 남편의 일이 신부인 이 아내일이 되어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온전히 이루어드리는 도구가 되어진다는 이 말씀이다. 이 마음이라고 하는 가루 서말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인 누룩이 떨어지고 부풀면 여자가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마태복음 13장에 비유에 나와있다. 이렇게 부푼 것이 무엇인가? 점점점 인격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고 모든 것이 다 변해서 여자가 원하는 대로 빵을 만들든 도너츠를 만들든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하나님의 일에 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격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는 변화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전히 다 부풀어야 주님이 원하는 대로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성한 겨자나무가 같은 이들은 다 부푼 사람들이고 인격이 변화된 사람이고 영적인 성장이 되어졌기 때문에 신부가 되어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고 그 뜻대로 하나의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나가는 사람들이다. 오늘 설교 말씀처럼 이렇게 놀라운 문들이 열려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개인적으로는 좁은 문이 열려서 출애굽하지 못한 분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이 오셔서 출애굽의 문이 열리고 어린 나이에 신앙에 있던 사람은 청년의 신앙으로 올라가는 천로역정의 좁은 문이 열려지고 두 번째 연단을 마친 청년의 신앙은 아비의 신앙이 되어지도록 마음에 다시 지성소의 문이 열려지도록 힘쓰고 애써야 한다. 힘쓰고 애쓰는 것은 상급이 되어 지는 것이다. 상급은 영원한 천국의 위치를 정해준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주님이 성도와 교회를 향해서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열린 문을 주셔서 그 시대를 살리고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문이 열려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놀라운 열린 문이 열려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문이 열려지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뤄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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