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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말씀의 향연/메세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by Andrew Y Lee 2021. 11. 13.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요한계시록 2:8-11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고 지고 깊은 가을로 들어가는데
이런 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게 보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니엘서 12 4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이때가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는 건 교통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자동차 문화가 한 100여 년 됐는데 얼마나 급속도로
교통수단이 발달하였는가?
비행기 같은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주위에 수많은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거기에 지식이 발달해서 인공위성을
올려서 통신 수단도 많이 발달이 되었다.


내비게이션이 나타나고 카톡, sns. 페이스북
최근에 페이스북이 이름이 메타라고 바뀌었는데
"죽은" 그런 뜻이다.
이 이야기는 주도권자가 바뀌었다,
페이스북의 주도권자가 바뀌어서
이제 새롭게 되었다는 그런 뜻이다.


이런 여러 가지 교통수단, 통신수단이 많이 있다.
가장 오래되고 고전적인 통신수단이 있는데
이것은 편지이다.


이 편지는 아주 오래된 통신수단인데 지금도 여전히
활용을 하고 있는 그런 통신수단이다.


요한 계시록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하라"
이렇게 해서 주신 편지의 내용이다.


요한계시록 1 11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이것이 내용이 좀 많기 때문에 책과 같이
이렇게 표현을 했지만 장문의 편지이다.


이 요한계시록이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그 일곱 개의 편지을 통해서 교회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전부 말씀을 주시고 계신다.


여기 나오는 칭찬, 책망, 권면, 약속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인 우리에게도 주시는 편지고
또 이것이 주님 오실 때까지 시대적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의 말씀은 그 일곱 교회 중에서
서머나 교회에게 보내신 편지이다.


서머나 교회에게 보내신 편지를 "우리에게 주신 편지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여기서 주시는 교훈을 함께 받아
누리기를 원한다.


첫 번째,
받고자 하는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교회의 형편과 그 사정에 따라
나타나신 모습이 다르다 하는 것이다.


일곱 개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이 다 다르다.
일곱 교회의 예수님의 모습을 전부 합치면
요한계시록 1 13~16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이 구절에서처럼 밧모 섬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밧모 섬에 나타난 일곱 가지의 예수님의 모습이
각각 그 모습 가운데 모양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렇게 교회 사정과 형편에 따라 예수님이 나타나신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나 잘 아셔서 거기에 알맞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라는 이런 뜻이다.


서머나 회에 나타나신 모습은 본문에 보니까
요한계시록 1 8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이 서머나 교회는 처음과 나중 되신 주님으로
그다음에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이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인데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나타나셨다.


그 왜 서머나 교회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


일곱 개의 교회는 시대마다의 교회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
에베소교회는 초대 교회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한 34년에서 약 100년까지의 교회의 모습이고
서머나 교회는 100년 이후에서 313년까지의
그 시대의 교회를 상징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00년에서 313년 그때는
그 유명한 로마의 박해가 있던 그런 때였다.


박해가 굉장히 심해서 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많이 순교하셨고 우리가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음과 박해를 피해서 카타콤에 숨어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것이 다 이 서머나 교회 당시의 상황이다.


예수님이 그 서머나 교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나타난 것은 이 서머나 교회에 순교자가 많고 죽음을 앞둔
그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비록 순교하고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처럼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1 17~18
"17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이 이제 산 자로 죽었다가 살아난 자로
부활한 자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모습을 보면서 위로받고
그 신앙을 가지고 순교를 각오하면서 달려가게 된 것이다.


서머나라고 하는 말 자체가 향기라는 뜻이다.
서머나 지역에는 바닷가 쪽인데 몰약 생산지로
아주 유명하다.
온 세계의 몰약의 대부분 다 여기서 나온다.


이집트는 사람이 죽으면 미라를 만든다.
전부 이 서머나 지역에서 몰약을 수입해서
미라를 만들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몰약으로 장사를 하게 되는
바로 그 몰약이다.


냄새가 은은하고 향기가 좋다.
서머나의 향기라고 하는 그 이름 그대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처럼 순교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은은한 향기를 드러내면서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가는
신앙이라는 뜻인 것이다.


향기라는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라"
순교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부활의 신앙을 가지라"
이런 주님의 뜻을 가지고 서머나 교회에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교회마다 합당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은 당연히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가장 합당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요한계시록 2 23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모든 교회의 모든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신다.


그러니까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뜻과 마음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였다.


마음의 중심을 아시고 그 비밀을 아시고 그 사람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전부 아시고 계신다.


여러분 이러한 예수님에게 마음을 다하여
나오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마음과
뜻을 살피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분의
모습을 통하여 위로받게 되고 축복을 받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있으며 참된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에게 우리는 꼭 나와야만 한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와서
배우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누가 죄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죄인 앞에 나타나겠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도 죄인들과 여러 가난한 자들에게
형편에 맞게 그 눈높이를 맞춰주셨다.


하늘의 왕이시고 하나님 자신인 그분이 육신을 입고
내려오기까지 겸손하였지만 더군다나 그 죄인 앞에
죄인인 그들이 예수님 앞에 오도록 자기를 낮추셨던 것
이것이 온유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눈높이로 자신을 낮춰서 모두가 예수님께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의 모습을 오픈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이렇게 모든 형편 처지에
따라서 우리 앞에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에게 위로가 되시고
평안이 되고 축복이 되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그 주님 앞으로 순간순간 나와서
그 주님을 통하여 위로받고
그 주님을 통하여 복을 받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두 번째,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그 의미가 뭔가 하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하는 그 의미는
1) 그분은 죽음을 경험하신 분이었다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죽음을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이 죽음, 예수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임상학적인 그러한 단순한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망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먹고 그때부터 사망이 와서
마귀가 합법적으로 사망 권세를 가졌는데
그 성경적인 사망의 죽음이라는 의미는
단순한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 되신 하나님과 단절이 됐다는 말이다.
이것을 사망이라고 한다.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우리가 다 죄인으로 아담으로 인해 사망권세에 빠진 인생으로
하나님과 단절돼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분이 바로 우리와 함께 이 사망권세를
이기기 위해서 대속의 죽음 내가 받아야 형벌을 대신 받는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사망을 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달리실 때 온 천지가 어두우면서
하나님이 완전히 버리시었다.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았다는 죽음의 의미이다.


단순한 육체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망을 당하셨다.
우리가 당할 사망을 그분이 대신 당하신 것이다.


전에도 한 번 제가 말씀하였다.
90년대 초반에 강원도 화천 아바공동체에 가서 세미나를
하면서 어느 자매님이 입신을 하셨는데 천국을 보여줄 때는
그렇게 좋고 놀라운 영광 가운데서 기뻐했는데
그다음 날 또 한 번 입신해서 지옥을 갔는데
끓는 기름 가마에 어느 여인이 마치 튀김처럼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그 고통과 아픔을 느껴져서
놀라서 깨어났는데 그 순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게 바로 너였단다" 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하였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 대속을 바로 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면서
우리가 받을 그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대속은 우리가 100만 원을 빌려서 갚지 못해 볼모로
잡혔다면 100만 원을 갚아줘야 하는 것이
대속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걸 갚아줘야지 꺼내 올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 주님이 형벌을 대신 받는
지옥 고통을 대신 받아 죽으신 것이다.


2)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위해
죽으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마귀가 사망권세를
가졌어도 예수님을 잡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
이것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요한복음 11 25~26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죽음을 맛보고
사망권세에 계셨지만 죄가 없으신 그분이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라 이것을 내가 믿느냐"
그래서 예수님은 죽었지만 부활하셨다.
이것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3) 그 주님이 믿는 자를 부활시켜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자의 하나님 앞에 예수님도 산자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된 그 모든 권한을 이끌어서 우리를
부활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의 의미가 된다.
부활권세를 가지신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5 24~29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25에 있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것은 첫째 부활을 받는 휴거 성도들이 휴거하는 모습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익은 열매가 된 그들이 예수님이
공중강림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때
살아나는 이 때가 휴거 사건이다.


그다음에 28에 있는 "이를 기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것은 천년 왕국이 끝나고 둘째 부활을 맞이할 때
첫째 부활에 동참하지 못한 모든 성도들이 다 부활하는
둘째 부활을 말한다.


이 부활을 생명의 부활이라고 29에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천년왕국이 끝나고 둘째 부활을 이룰 때에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 모든 불신자도 영원토록
고통 받기 위해서 영벌의 부활을 하게 된다.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 하였다.


그래서 모든 인생들이 다 부활이 끝나면
이 땅과 처음 하늘, 땅이 다 없어지면서
새 세상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다 부활하게 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데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
갈라지게 된다.


믿는 자는 요한복음 12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죽어도 살고 현재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도 않고 부활의
몸을 언젠가 다 입게 된다는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바로 사망을 경험하신 분이고 그러나 죄가 없으므로
부활하신 분이고 우리를 부활시킬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이런 모습의 세 가지로 의미하고 있다.


세 번째,
가장 좋은 신앙은 부활의 신앙이다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일 좋은 신앙은 부활의 신앙이다.
우리는 부활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장수한다고 할지라도
이건 영원이 아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복을 받아도 그건 영생이 아니다.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된다.
우리가 다 나그네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살아야 한다.


야고보서 4 13~17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 사도는 "너희의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 하였다.


잠깐 안개가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허망한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 말하였다.


내일일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에 가서 1년 동안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이것이 다 허탄한 자랑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바로 죄라고 말씀한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허탄한 자랑이 다 악한 것이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들이 무슨 계획을 세워서
뭘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피고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확증을 해야 한다.


지난주에 어떤 분이 상담을 요청해서 상담하면서
세 가지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으로 확증하고
내 속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 그 감동으로 확증하고
환경 안에서 나타나는 환경 가운데 확증을 하라고
이 세 가지로 3중으로 확증을 해야 된다는 하였다.


이 마지막 때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적고
그렇게 세 가지로 확증하는 것이 기술인데
"이것을 네가 배우면 하나님의 뜻을 찾는 많은 영혼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평신도이신데 이런 사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매 순간에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법,
내 속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는 법, 그다음에 환경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는 것, 이렇게 3중으로 확증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면
우리가 그것을 행해야 한다.


이것이 선이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인데
내가 이거 하겠다, 저거 하겠다,
이게 전부 악하고 허탈한 자랑이 되고
이것이 죄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안개와 같은 인생이다"라는 이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반드시 갖고 살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1 24~25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야고보 사도는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고 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풀과 같이 모든 영광이 풀과 꽃과 같이 마르고
떨어지는 그런 인생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제 가을이 오니까 그 여름 동안에 화려하게 피었던 꽃들과
여러 가지 풀들이 전부 마르고 잎이 떨어지고 낙엽이 지는
이런 계절을 맞이하게 된다.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철저한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나그네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살 것인가
이걸 가지고 기도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나그네와 같이 잠깐의 안개처럼 들의 꽃과 풀과 같이
사는 인생인데 오늘 어떻게 죽을까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까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죽을까
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은 의식주를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5 44~45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은 불의한 자에게도 햇빛을 공급해 주시고
또 비를 내려주신다.
이것이 창조의 계획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셔서 이 땅에 생명으로 보내주셨으면
기본적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다 주시고
그 은혜를 누구나 믿든 안 믿든 공급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에 우리가 기도할 이유가 없다.
모두에게 이렇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을 하셨다.


마태복음 6 30~34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에 가야 되는 인생이기
때문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셨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각 열어주는
분깃이 있고 그걸 따라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살면 되고
또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면 되며 중요한 것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것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에 관심을 가져야 된다.


이제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본받아서 우리는 분명한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죽어야 한다.


그 초대교회의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 소망을 다 가졌다.


예수님이 죽은 것을 목격한 사도들에게서 이것이 전승되면서
100년 넘어갈 때쯤 되면 그때만 해도 우리도
예수처럼 죽어야 되겠구나!
순교의 신앙으로 그 불이 일어나는 그런 때인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부활의 신앙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 것일까?
이걸 가지고 살았던 때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
로마서 4 19~21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죽었기 때문에
자녀를 낳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사라의 태도 죽었음을 알고 때문에 자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네 몸에서 후사를 주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부활의 신앙인 것이다.


이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에 창세기 22장에 이삭을
모리아산에 갖다 바치는 이삭을 번제를 드리려 하는
믿음을 보였다.


왜냐하면 "네 몸에서 후사를 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삭을 드려도 또 아들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약속이 있으니까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로 양을 준비해 놓으셨다.
우리가 여호와 이레의 모든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는 믿음이 여기까지 가야 한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이다.


믿음이 약해지지 않는 것이다.
이루실 줄 확신하였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나님이 여기셨고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역시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로마서 4:24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킨 이것을 믿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도 똑같이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는 그 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것이다.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그 부활에 동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교통수단과 지식의 고도로 발달하면서 마지막 때가
됐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님이 오시면 순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도 있는 그런 때인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더디 오셔도 그 종말을 준비하면서 살아서
순교할 수 있는 그런 순교자가 될 수도 있는 확률이 있는
때를 살아가고 있다.


정말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렵고 거칠고 사나운 환경이 오지만
서로 사랑하는 말씀을 붙잡고 정말 내 속에 하나님 사랑이
부어진다면 그 주님이 언제 오셔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사랑이 부어져서 이미 영적으로 합일됐고
아무 때나 주님 오시면 거기에 순서에 맞춰 부활할 것이니까
사랑이 부어지는 게 더 중요한 급선무란 말이다.


이렇게 되어 지면 이것이 산 순교가 되어지는 것이다.
이 시대는 우리가 정말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산 순교할 수 있는 이러한 기회가 우리에게
지금 주어지는 그런 때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급변하게 변하는지 모른다.
급변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러한 때에
우리가 주님이 오셔서 환란 가운데 순종할 수 있는
기회도 있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에이 말씀을 지키면서
익은 열매가 되어지는 그런 기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속에 부어지는 그런 기회,
이걸 우리가 붙잡고 살아가야 된다.


매 순간에 말씀을 지켜보려고 몸부림치는 이런 싸움이
있어야 되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이런 영적 싸움이 없으면 우리가 살아있는 순교를
감당할 수 없다.


오늘 서머나 교회 나타나신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고 이것이 서머나 교회에 가장 위로가 되었다.


환란 핍박이 심하고 "열흘간 환란을 받겠다" 이렇게 했는데
40일을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40년으로 말한 것처럼
열흘간은 10년간이다.


그래서 10대 박해의 마지막 10년이 가장 극심하다.
그 10년간 그 박해 속에서 많은 순교자를 만든 것이
서머나 교회인데 그러나 그 가운데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그 아름다운 익은 열매로
귀한 길을 갔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냈다.


이런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서머나 교회처럼
아름다운 예술의 향기를 드러내면서 여러 가지 거칠고
사나운 환경 속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시면서
특별히 부활의 신앙을 굳게 잡아서 아무 일도 흔들지 말고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달려가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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