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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향연/메세지

세 가지의 질문

by Andrew Y Lee 2021. 11. 13.

세 가지의 질문

 

요한복음 19장 17절~25절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소통하는 것이다.

 

서로 소통이 안 되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소통이 안 되니까 그들은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소통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질의와 응답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 우리가 잘 아는 청문회 한다거나

공개 인터뷰를 할 때 소통의 방법이다.

 

질의와 응답은 더 나가서 학습하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으로도 필요한 방법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궁금한 것들을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

그래서 깨닫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질의와 응답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이것은 설교의 방법 중 하나이다.

 

우리가 질문을 제시한 것을 또 대답을 받는 방법으로 하는

설교의 방법 중에 하나가 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세 가지의 질문' 이렇게 잡았다.

제가 제시한 질문이지만 또 이것이 여러분의 질문이 되어서

대답 속에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 영적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경의 예언된 그대로 사셨다.

출생부터 공생애 죽음 부활 승천까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한 말씀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동정녀를 통해서 오신다고 한 것 그대로

동정녀를 통해서 오셨고

성령으로 잉태된다고 한 그대로 성령으로 잉태돼서 오셨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다윗의 가문에서 온다고 한 말씀은

다 그대로 이루어 졌다.

 

우리가 왜 재림을 확실하게 믿으면서

이 시대를 기다리는가?

 

모든 예수님의 삶이 성경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는데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도 300번 이상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도 예언대로 그대로 죽으셨다.

이사야 53 9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하는 부자의 묘실에 안치가 된다.

 

요한복음 3 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압 땅을 지나갈 때 식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원망 불평하니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서 물려죽게 하셨다.

그런데 그때 모세가 장대에 놋뱀을 만들어 달아서

그걸 쳐다보니까 다 살게 되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얘기를 하신 것이다.

 

놋뱀이 장대에 달린 것처럼 인자도 들려서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들린다고 하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명기 21 22~23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구약 시대는 죽을죄를 범하면 나무에다 달아 죽이는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고 말씀이었다.

 

신명기 27 26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구약의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않으면

저주를 받게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을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말씀들을 실행치 않는 죄인들

인생의 그 저주를 대신 받아서 예수님은 달려야 되시는 것이다.

나무에 달려 죽게 된 원인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은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예수님은 저주받은 인생이었다.

그래서 나무에 달리게 되셨다.

 

갈라디아서 3 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였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았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인생이 저주를 받는데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

나무에 대신 달려서 저주를 받은 것이 예수님의 죽음인 것이다.

 

그런데 나무에 달려 죽게 돼 있는 것은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로인데 십자가에 달려 죽겠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예언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한 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라는

그런 예언은 없다.

 

저주받은 자마다 나무에 달려 죽게는 되어 있지만

십자가라는 말은 없다.

고대의 사형법이 성경뿐 아니라 앗수르, 페르시아, 이집트

그들도 다 사람들을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틀을 사용했다.

 

이런 방법들이 그리스 로마를 거쳐서 예수님이 죽을 당시에

로마는 그 나무에 달려 죽게 하는데 그걸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들었다.

 

T자형으로 만들기도 하고 X자로 만들기도 하고

십자가로 만들기도 하였다.

 

나무에 달려 죽게는 하는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무를 썼다.

율법에는 땅을 더럽히지 말고 하루 만에 다 치우라고 했지만

가장 잔인하게 물과 피를 다 쏟아내면서 최고의 고통을 주는

그런 십자가의 사용법이 로마에 와서 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극악한 죄인 취급을 받으셨다.

반역죄였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다" 하면서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형틀의 방법을 십자가로 만들어서

사용했지만 하나님은 그 세상 사람들의 방법을 이용하셔서

그분의 뜻을 이루셨다.

 

그래서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것이다.

 

그럼 왜 많은 형틀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 첫 번째 질문의 요지이다.

흔히 많은 분들이 "십자가는 완전수다"

그래서 그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조금 더 묵상하면서

이 세 가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 보려고 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밖에 없는 이유

1) 십자가는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우리가 시간은 옆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위아래로

쌓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장소가 바로 십자가이다.

그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곳에서 예수님은 영원을 여신다.

 

전도서 3 11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 속에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 속에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을 향해서 나가게 된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영생이다.

 

영원히!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그 장소

이것이 영혼으로 가는 길이고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그 영생의 문을 영원의 문을 여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이다.

 

2) 우리가 이제 날일자를 쓰면 하늘 하나님

상하 그럴 때 날 일자 위에는 "상"이고 밑에는 "하"다

 

이 상하로 사람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장소

그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마음 한복판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우리 마음에 있다.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어디 가서 만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상을 절대로 세우지 못하도록

우상 숭배를 경계하셨다.

 

영으로 계신 분이니까

오직 그 하나님은 심령을 갖고 있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만

만나게 돼 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이다.

 

예레미야 17 9~10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인생의 마음이 모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이 부패해서

하나님이 그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옳고 변화 되는 것이 예수 믿는 은혜이고

구원받는 것인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신 성령을 보내시고 그 성령이 영으로 계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면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이 된 것이다.

 

십자가는 심히 부패한 마음이라고 하는 그 마음속에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 마음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창세기 3 20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최초의 여자인 하와를 산자의 어미라 그랬다.

 

하나님 본래의 계획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다면 인생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와를 통해서 모든 산자들의 후손을 그 태에서 생명이

있는 자들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하와는 아담의 범죄로

로마서 5 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죄에 이르렀다고 그랬다.

 

로마서 3 10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그랬다.

아담이래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욥기 15 14

"14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인생은 여인을 통해서 출생할 수밖에 없는데

죄를 짓고 나니까 여인에게서 난 모든 인생이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여인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태의 자리

사람의 구조상 그것이 열 번째 구멍인 것이다.

 

남자들은 9개의 구멍이 있지만

여자들은 10개의 구멍을 갖고 있다.

그 10번째가 모태의 자리다 그 말이다.

그 모태 자리가 바로 인생의 무덤이다.

모든 죄인이 태어나는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모태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자리에

영적인 모태를 열어주시려고

그 열 번째 자리에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한밤중에 주님과 말씀하였다.

"너는 선생이 되었으면서도 거듭나는 원리를 알지 못하느냐?

그 모태에 들어갔다 나오면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고 물과 성명으로 거듭나야 된다"

 

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그 영적인 모태를 열어주는 방법이 10번째인 모태의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가 되어야 했다.

이것을 열을 주신 것이다.

 

창세기 17 15~16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 사라를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셨다.

 

이삭은 육신적으로 난 자녀가 아니고 전혀 날 수 없는 때에

성령으로 난 자녀였다.

약속의 자녀였다.

그래서 최초의 성령으로 태어난 이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아브라함 사라를 열국의 아비로 삼으시고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가 와서 예수님을 낳게 되는데 그 예수님의 어미로

삼으시고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가 와서 예수님을 낳게

되는데 예수님을 성령으로 나면서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1장처럼 산자가 되셨다.

 

하와가 하지 못했던 산자의 어미를 마리아가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자로 성령으로 나셔서 그 죽음의

자리에서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십자가의 10번째 그 자리를 영적인 모태로 바꿔주는

사역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오후예배 시간에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냥에 팔았는데

예수님이 죽고 나니까 뉘우쳐서 성경대로하면 뉘우쳐서

그 돈을 제사장에 갖다 준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그거를 밭을 산다.

토기장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다 그랬다.

 

정리해보면

첫 번째는

십자가에서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세 가지였는데

십자가는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장소이고

영원의 문을 열기 위해서 였다.

또 하나님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그 마음이라는 자리

심히 부폐한 마음을 고쳐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10번째 자리인 모태를 영적인 모태로 바꿔서

인생들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려고 하는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두 번째 질문은

왜 골고다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는가?

 

오늘 본문 가운데 18절 말씀에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 19 18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누가복음 23 39~43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두 명의 강도가 나왔는데

왼편 오른편이라는 말은 성경이 없는데

오른편이 영적으로 오른편이니까 이 오른편 강도는

죽는 순간에 회개하여 낙원에 있으리라 하여

구원의 대상이 됐고 왼편의 강도는 끝까지 부인하고

죽은 그런 강도가 되었다.

 

성경은 왼편 오른편을 가리지 않고 중도를 지키게

그렇게 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5 32~33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28 14

"14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복 받는 말씀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면

신명기 28 1~13에는 복을 다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

 

여호수아 1 7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서 4 12에 하나님 말씀이

운동력이 있는 날선 검과 같다고 하였고

예수님이 요한계시록 2 12에 그 검을 가진 이가 나왔는데

그 검은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날선 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가야

된다는 것이다.

중용을 지켜야 된다.

이게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때부터 구약이 끝나고

신약이 열려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모든 인생들은

좌우편으로 나눠지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가는 길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 끝날까지 사람들은 좌편 우편을 나뉜다.

이것이 오늘날 좌익과 우익을 말한다.

이렇게 갈라지게 돼 있다는 것이다.

 

한 편은 공산주의고 한 편은 자본주의 이것을 우리가

시오니즘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이후에 세상 끝날 때까지 나타난 주의

이것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인데 이것을 좌익과 우익,

우편 좌편으로 나눠지는 인생으로 돼 있다는 것이

성경에 두 십자가를 통해서 알리는 말씀이다.

 

굳이 주의로 말하자면 기독교는 박애주의이다.

중도이다.

성경대로 사는 삶으로 가야 된다.

 

예수님 이후로 2천 년의 역사는 사탄이 인생을

좌편 우편으로 나누어서 인류 역사를 농락한 역사이다.

 

좋은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만든 게 아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자칭 유대인의 배후인 카잘들이 만든

것이 시오니즘이었다.

 

이스라엘을 건국 한 것이 그들이었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가지고 인생을 농락한 것이고

공산주의도 동시에 만들어서 인생을 농락한 것이다.

 

초대교회에 잠깐 보여주었던 유무상통한 삶,

내것, 네것이 없이 모든 사람이 유무상통하며 부족함이

없었던 초대교회가 박애주의인 것이다.

이것이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아닌

모든 사람이 사랑 안에서 내것 네것이 없이 함께

이것을 만나경제라고 한다.

 

만나는 더 걷은 사람도 적게 거든 사람도 똑같이

자기가 먹을 그 하루 치 외에는 다 스러져 없어져버렸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경제관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주의인 것이다.

 

그런데 두 강도 중 다행히 자본주의를 택한 우편에 있는

그들은 회개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구원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공산주의 자체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주의이다.

이것은 구원이 없다.

 

그게 바로 왼편 강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골고다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있어서

좌편, 우편은 2000년 교회역사 속에서 사탄이 우리에게

갖다 준 좌편 우편의 사상과 여러 가지 사탄의 역사였다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 어디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중도로 가면되고

말씀대로 살면 된다.

우리가 말씀대로 사랑을 이루면서 가면 된다.

 

마지막 질문은

요한복은 19 23~24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한복음 19:23-24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겉옷은 네 조각으로

잘라버리고 속옷은 제비뽑아 가지자고 하였다.

그 속옷은 자를 수가 없다 하였다.

말씀에 보니까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다"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 이런 옷이 어디 있겠는가?

바느질을 하지 않는 옷이라는 것인데 재봉을 하지 않은

통으로 짠 이음새가 없는 옷

이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옷이다.

천의무봉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잠깐 변화되었을 때 그 옷이 희기가

빨래 한 것처럼 그렇게 눈이 부신 그런 옷이었다.

하늘에서 입혀주신 옷인 것이다.

사람이 만든 옷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옷이 바느질 하지 않고 재봉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 속옷은 자를 수도 없고 그거는 제비 뽑아 나눠주도록

예언한 그대로 됐다.

 

그런데 겉옷은 네 깃으로 잘라서 나눠 가졌다.

이것도 좌편 우편의 강도처럼 2000년 교회역사 속에

나타날 모습들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라고 하는 진리가 네 파로 갈라져서 산산조각이

나게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이다.

 

진리는 찢어지면 안 되는데 교파 분열이 되고

진리가 갈라지고 잘못된 교리로 인해 갈라진 것이

겉옷이 네 조각으로 잘라진 것과 같다.

 

그러니까 형식과 모든 교파는 이 모든 것 속에서

전부 산산 조각 나 갈라졌는데 이것은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것일 뿐 중요한 것은 속옷이라는 것이다.

 

자를 수 없는 속옷!

이것이 예수님의 감춰진 순수한 진리고

이것이 드러나야 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다.

 

각 교파에서 주장하는 대부분의 진리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겉옷에 불과한 진리이다.

이것은 참된 진리가 아닌 것이다.

 

한국에 장로교가 3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 옷이 산산조각으로 잘라진다.

교단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속옷

그것이 참된 진리에 옷인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그것이 드러나야 된다.

 

오늘 세 가지 질문을 제가 말씀을 드렸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하는가?

예언된 말씀대로 이 세상에 그대로 오셔서

죽음까지 그대로 가셨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말은

예언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로마의 가장 악날한 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드렸다.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장소!

그래서 영원의 문을 열기 위해서 영생의 문을 열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장소!

이것이 사람의 심장이고 마음인 것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을 고쳐주어서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다리셨다.

 

그리고 아담 하와가 이 땅에서 만들어지고

하와는 특별히 산자의 어미가 되어야 했는데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죄로 말미암아

다 죄인이 되어서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인생은

다 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 모태 10번째 자리를 새로운 영적 모태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세 개의 십자가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가운데 있고 좌우편에 못 박은 것은

좌편과 우편 이것으로 이제 나눠지는 2000년의 교회 역사에

마귀의 궤계를 여러분에게 보여준 것이고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박애주의로

사랑을 완성한 초대교회와 같은 그런 모습으로 가야 된다.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이다.

미국에는 지금 할로윈 데이가 판을 치고 있다.

마귀가 판을 치고 있다.

 

사람들을 다 마귀들이 끌고 가려고 만들었는데

우리는 동참하면 안 된다.

 

영적으로 종교개혁주일이다.

종교를 개혁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다.

어제 "십자가의 도" 책을 다 마무리했는데

하나님이 "십자가의 도" 설교를 거기다가 부록으로

한 서너 개를 넣을 것을 감동으로 주셨다.

 

그래서 제가 오늘 이 "십자가의 도"를 거기다 넣으려고

이 십자가 설교를 특별히 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 그대로 살았는데 겉옷은 찢어 나눠 갖고

속옷은 천의무봉으로 통으로 짠 것이라는 것은

다 그냥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거기에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산산조각이 된 교파와 말씀은

겉옷의 진리이고 속옷의 진리는 우리가 가지고 가야 된다.

이것이 마지막에 나타나야 된다.

 

오늘 설교한 이 세 가지 질문 잘 깨닫길 바란다.

우리가 질문하고 대답하는 이 방법이 상당히 좋은 학습법이다.

 

그리고 설교도 이렇게 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도 이렇게

여러분 질문하시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제가 아는 자매는 일문이답의 은사를 갖고 있다.

얼마나 좋은가?

집중해서 질문 하면 하나님이 다 대답을 해 주신다.

이런 은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러분 가운데도 좀 그런 은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우리가 질문하고 대답하는 거

이것이 학습 방법이고 설교의 방법이고

인간의 소통의 방법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 방법이 필요하다.

 

여러분에게 많은 질문들이 있고 하나님의 대답도 있고

이렇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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