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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해하기/말세(종말)와 심판

노아의 홍수와 표면장력의 은혜의 시간

by Andrew Y Lee 2020. 10. 22.

노아의 홍수와 표면장력의 은혜의 시간

 

 

그러면 초림의 때를 마지막이라고 하는 표현과 재림을 전후하는 시기를 마지막이라고 하는

이 간격의 의미는 무엇이며, 성경적인 말세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24:37-39을 보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주님의 재림의 때가 노아의 때와 같다고 주님이 마24장에 직접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여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하셨다.

이것이 노아 때의 심판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6:5-7)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주시어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6:8)

 

그것은 하나님이 창세기3:15에 언약하신대로, 여인의 후손이 오셔서 세상을 구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비록 세상은 죄가 관영했지만, 경건한 자 얼마를 건져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베드로후서 2장을 보라.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후2;5, 9)

 

그러므로 온 세상이 죄가 관영하여 멸망하기로 정하셨지만,

경건한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은혜를 베풀어 방주를 만들게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인류 구속 역사를 이어가도록 그 언약을 갱신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심판을 기다린 것이다.

 

이것을 물그릇에 비유하여 보자.

물그릇은 자기의 용량이 있다. 맨 윗부분을 뚜껑으로 막아 버리면 그 안에 물이 들어가는

용량이 된다. 그런데 실제 뚜껑을 열고 물을 부어보면 그릇의 용량보다 얼마간 물이 불룩하게

솟아 있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것을 표면 장력이라고 한다. 물끼리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

실제 용량보다 더 담기는 현상이다.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짓고 방주에 들어가서 나오는 시간까지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는데, 이것이 표면장력과 같은 원리다.

 

세상에 죄가 관영한 것은 죄가 가득 찼다는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죄의 용량이 찼기에 심판을 하셔야 하는데,

경건한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방주를 예비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의 시간을

허락하셨는데, 이 은혜의 시간이 표면장력으로 물의 용량이 늘어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가 같다고 하셨으니 같은 이치다.

예수님이 초림 하여 오신 것이 마지막이었고 심판이 와야 했지만,

하나님은 경건한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이스라엘과 이방인 가운데 경건한 자 얼마를 건지시기 위하여 은혜시대인 교회시대를

여신 것이다. 이 은혜의 때인 교회시대가 표면장력의 기간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해했다. 그의 표현을 보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 중,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69이레(483)가 지나고

나머지 한이레(7)가 교회시대를 마치고 7년 대 환난으로 오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세례요한은 심판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물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3:9,17)

 

이렇게 주님이 오시면 당장 심판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말씀이나 전하고 병이나

고치시고 심판이 나타나지 않자 그렇게 물은 것이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11:2-3)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표면장력의 은혜의 시간인 교회시대를 열어 얼마간의 경건한 자들을 구원하려 오신 것이다.

그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형적인 대속죄제를 실제적으로 이루신 것이다.

얼마간의 경건한자들은 초대교회 12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새 언약

안으로 들어 온 사람들이다.

 

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합쳐 바울은 한 새 사람이라고 에베소서 2장에 표현하였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6-17)

 

다만 빛이 오면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는 것처럼,

예수님이 오시므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나누어지는 심판이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 것으로 말이다.

 

마치 노아의 때를 물로 심판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 까지 믿지 않고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집을 짓고, 시집장가 가는 일에만 열중했으므로

물로 심판을 받고, 믿고 방주를 예비한 노아와 그 가족은 심판을 받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9:39)

 

이 말씀에서도 심판이 나오는데 이도 분리하여 나누려 오셨다는 의미의 심판이다.

보는 자들과 보지 못하는 자들로 나눈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경은 눈도 떴지만 예수님이 경건한 자요, 메시야임을 보게 되어 영적인 눈이 열어지고

눈이 멀쩡한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출회가 두려워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은 초림 하여 오셨을 때 빛으로 오셨으므로 저절로 나누어지는 심판을 행하셨지만,

이방인과 경건한 유대인 얼마를 건지시기 위해 표면장력의 은혜의 때인,

이방인의 시대, 곧 교회시대를 열어 재림하여 오실 때 까지 그 심판이 미루어졌다.

하지만 교회시대 동안에도 빛 된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빛으로 오는 자와 오지 않는 자의 나누는 심판은 계속 되어 온 것이다.

 

소돔 고모라를 멸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표면장력의 은혜의 때가 나타난다.

소돔 고모라도 죄악이 가득 차 심판의 때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18:20-21)

 

소돔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었지만 그 중 의로운 롯을 하나님은 구원하셨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후2:6-9)

 

그러므로 의로운 롯이 소돔 고모라를 떠나 소알로 가기까지 심판이 지체되었다.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19:20-22)

 

이렇게 롯이 소돔 고모라를 떠나 소알로 들어가는 시간이 표면장력의 은혜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믿지 못하여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세상에 버려지는 것이다. 나누어지는 심판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원리로

초림 때도 마지막이라고 하셨고,

다시 재림하여 오실 때도 마지막이라고 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표면장력의 은혜의 시간이 들어가는 것이다.

 

주님이 빛(생명, 진리, 성령)으로 오셨을 때,

이미 저절로 나누어지는 심판이 시작되었고 마지막이었다.

 

빛으로 오는 자와 오지 않는 자.

생명을 얻은 자와 얻지 못한 자,

성령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경건한 자와 경건치 않은 자,

진리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복음을 받은 자와 받지 않는 자로 나누는 것이다.

 

마치 물로 심판을 한다는 것을 믿고 방주를 준비하는 노아와 그 가족과 믿지 않고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 까지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소돔 고모라를 불로 심판 할 때 의로운 롯과 소돔 고모라의 사람들이 나누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면 마지막이 되고 심판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그야말로 은혜의 때이다. 방종하지 말고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안 된다.

주님은 언제 오시든지 개인적인 마지막(종말)이 오면,

표면장력의 은혜의 시간이 끝나고 큰 환난의 심판에 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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