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주제는 월간 Church Growth(교회성장) 별책 부록, "설교뱅크"(2010년 1월호부터)에 연재될 것을 회원들을 위하여 원본을 미리 올려 놓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예수님과 바울”
-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을 읽어라! -
김재진 (케리그마신학연구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겸임교수)
I. 왜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설교자가 설교준비 하기 위하여 설교본문을 분석하고 해석할 때, 가장 거침돌이 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설교자의 예비지식이나, 성경의 원어에 대한 지식, 혹은 설교자의 성경해석 능력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오히려 2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자뿐만 아니라, 신학자 그리고 일반평신도에게 이르기까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오히려 독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 전이해, 혹은 사유체계’이다. 즉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유체계’와 독자가 가지고 있는 ‘사유체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사유체계는 ‘히브리-셈적’ 사유체계 혹은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전통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인도게르만적’ 사유체계 혹은 사고방식을 갖고 성경을 읽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유체계는 서로 아주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 지중해 연안과 팔레스틴 및 고대 근동을 점령한 이후로는 유럽 문화사에 두 가지 사유체계가 혼합 내지는 종합 - 때로는 히브리-셈적 사유체계가 상당부분 그리스 사유체계와 융합 혹은 모형변형Paradigmawechsel 양식으로 - 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많은 학자들은 ‘헬레니즘 기독교’(스토아 철학과 신新-플라톤주의, 그리고 Lxx(구약성경의 70인 번역본)의 출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에 의한 성경의 최초의 알레고리적 해석 등) 혹은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라고 특징지어 말한다. 예컨대 이러한 점을 불트만R. Bultmann은 ‘기독교의 헬라화’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교리사와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 그것이 어느 쪽이든 - 사람들에 의해서 신학적 논쟁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은 학자는 두 사유체계를 아주 잘 종합 또는 융합하여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의 신학을 기초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서로 그들 자신들의 일면적인 진리만 주장한 나머지, 그 중 어느 한파가 학문의 장에서 퇴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예컨대 ‘안디옥’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을 분리시켜 ‘인성’을 강조한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혼합시켰다. 그래서 초기 보편적 교회는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배척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기본요소만 진리로 수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기독교의 교리로 선포하였다.(451년 칼케톤 신조에서 예수는 참신 참인간vere deus, vere homo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종교개혁과 문예부흥Renaissance을 통하여 그리스-인도 게르만적, 바꾸어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체계에 기초하여 발전된 중세 스콜라Scholar 철학적 신학에 반기를 든 히브리-셈족 사유체계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예컨대 미켈란제로의 동적動的 조각품은 조화된 고전적 그리스 조각품과 비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의 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서로 비교되었다. 즉 미켈란제로(Michelangelo, 1475-1564)의 동적 조각품은 조화를 강조하는 그리스 고전적 조각품을 대신하게 되었고, 칼릴레오의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대신하게 되었고, 루터의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개혁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누스(Thomas Aquinas, 1225 - 1274)에 이르는 그리스 철학적 신학을 대신하게 되었다. 즉 루터의 사상과 종교성은 가톨릭교회의 시각적 관조적 경건성에 반하여, 다분히 동적이고 청각적이었다는 점에서 히브리-셈적 사유체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는 -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를 막론하고 - 대부분 어느 사상이 히브리-셈적이고, 어느 사상이 그리스-인도게르만적 사유체계인지를 세심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문화 혹은 서양사상 -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인도게르만적 사유체계 - 으로 교육받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자신의 교유한 ‘사유체계’를 - 대부분 도덕적 혹은 인과응보적因果應報적 사유체계를 - 가지고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 가능한 한 그리고 필수적으로 -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인물들의 - 예컨대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에 이르기 까지 - 사유체계에서 성경의 증언을 읽을 때, 성경의 증언하는 바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그리스적 사유체계와 히브리적 사유체계가 서로 종합 혹은 융합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성경이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히브리적-셈적’ 전통의 사유체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저자들은 모두 히브리인이요, 신약의 저자들도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모두 히브리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의 사유체계’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컨대, 예수님께서 어느 날 “한 서기관이 나아와 …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마 8:19)라고 말하였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예수의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8:21)라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히브리적 사유체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즉각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어떻게 장사하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자연과학적, 더 자세히 말하면 생물학적 혹은 그리스-인도게르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죽은 자’란 ‘靈的으로 죽은 자’라고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결코 그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적 사유체계는 그리스의 사유 체계처럼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 더 자세히 말하면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히브리적 사유체계에서 ‘죽음’은 곧 ‘공동체로부터의 분리됨’을 뜻한다.(참조 시 88편) 다시 말하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에서 분리되면, 죽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유목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은 집단적 공동체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는 유목 공동체가 서로 단결하여 외부의 침입을 막아냈다.
따라서 ‘가족 혹은 씨족 혹은 유목민 공동체’에서 일탈하면,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가인Cain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는 징벌을 받았을 때,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라고 하나님께 탄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벨을 살해한 죄 때문에 사막으로 쫓겨났으며, 그래서 그는 유리방황하는 자가 되었다. 이 사실은 광야 유목민의 ‘바슴’(표시)에서 식별되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은 무법자들이 표류하는 광야에서 방랑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하갈은 아브라함 가족 공동체에서 내어 쫓김을 당하여 광야에서 사지死地를 배회한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창 21:14) 이러한 증언들을 고려해 볼 때, 히브리인의 사유체계에 의하면,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공동체에서 출회당하는 것’은 ‘죽음의 형장’으로 내어 쫓기는 것이다. 예컨대 아담Adam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은 “네(= 아담)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아담의 죽음을 선포’하시면서, 그를 ‘에덴동산 공동체’에서 내어 ?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Eden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 3:23)
그래서 예수님도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병행 15:32)는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은 천국잔치에 대한 아들의 ‘혼인 잔치’에 대한 비유(마 22;1-14)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성 밖으로 내어 쫓으라고 명하신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2-13) 이와 상응하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공동체 혹은 교회 공동체에서 떠나 있었던 이방 사람들을 ‘죽었던 자’로 표현한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상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히브리인의 사유체계로 기술된 구약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은 그 사유체계에 있어서 서로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기록한 사람이나, 예수님 그리고 사도 바울 모두가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히브리인의 사유체계’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히브리적 사유체계’에는 어떠한 특성이 있는가? 이점에 대하여 앞으로 연재될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을 읽어라!”에서 하나, 하나 취급해 갈 것이다. 그러나 우선 그 개괄적 특성을 이야기 하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II. 유목민 히브리인들의 동적-공간적 사유체계
우선 모든 사유체계가 그러하듯이, 히브리적 사유체계 역시 그들의 지역적 문화적 배경에서 형성된 것이다. 즉 히브리인의 삶의 정황 속에서 그들의 사유체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히브리인의 사유체계는 그들의 언어, 곧 ‘히브리어’ 때로는 ‘히브리어’와 동류인 ‘아람어’에 잘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한 민족, 혹은 한 종족, 한 인종의 특수성은 그 고유한 언어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히브리 민간 방언을 사용했다는 비르켈란트Harris Birkeland의 가설이 옳지 않다면, 그들은 히브리어와 동류인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히브리인의 언어체계 위에서 그리스도교는 태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주후 70년 이후부터는 그 뿌리인 히브리적 사유체계에서 급격히 일탈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보다는 그리스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의 증언을 기초하고 있는 히브리적 사유체계는 본질상 전적으로 다른 헬라어라는 언어적 옷을 덧입게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언어와 결부된 표상 및 사유방식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읽는 유럽인이라면, 누구든지 히브리 언어와 그 표현 방식이 아주 독특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점을 강조하였다. 독일의 헤르더Herder도 구약성경의 시문학의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상응하게 현대 언어학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훔볼트W. Humboldt도 자신의 언어철학에서 ‘언어가 그 민족의 - 아주 원시적인 민족이라 할지라도 - 독특한 사유체계를 표현해 준다고 강조한다. 그는 히브리 語根들이 3字 어간으로 되어 있는 것을 히브리어의 특성으로 볼뿐만 아니라, 사유의 더 높은 발전을 위해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히브리적 그리스도교 유형과 그리스적 그리스도교의 유형의 차이점을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명한 사람은 스웨덴의 신학자 니그렌Nygren이다. 그에 의하면, 성경-히브리적 사랑의 개념인 ‘아가페Agape’는 그리스-헬라적 플라톤의 사랑 개념 ‘에로스Eros’와 전적으로 대비된다. 즉 ‘아가페’는 신神으로부터 와서 인간에게 밀어닥치는 자유롭고 대가없는 사랑인 반면에, 에로스Eros는 인간에게서 유래하여 신神을 향해 추구하는 사랑이다. 비록 니그렌의 이러한 구별에 대하여 오르딩Hans Ording, 크리스챤 바우어F. Chr. Baur 등의 반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그렌의 해석에 일리一理가 있는 것은, 그가 히브리적 사유체계 혹은 히브리적 사유체계에 기초한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강조하는 ‘사랑’의 종교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적 사유체계에서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철저히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헬라적 신 개념은 철저히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며 ‘비-인격적’이다. 히브리인의 사유체계가 ‘인격적’이기 때문에 구약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사상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이다. 이점을 우리는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시내산 계약문서, 곧 ‘십계명’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심지어 인간과 자연(물질)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이점에 대하여 앞으로 계속해서 보다 자세히 분석할 것이다) 예컨대 십계명의 다음과 같은 규정들은 철저히 인격적이다: “너(= 이스라엘 백성)는 나(=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3-6)
히브리적 사유체계와 그리스-헬라적 사유체계의 차이점은, 전자가 ‘공간적’이라면, 후자는 ‘시간적’이다. 그러나 반대로 폰돕슈츠Dobsch?tz는 “그리스인들의 사유는 공간적이고, 히브리인들의 사유는 시간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분명한 것은, 시간에 대한 사유에 있어서 히브리적인 사유체계와 그리스-헬라적 사유체계가 같이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점을 명백히 밝히려고 오스카 쿨만O. Cullmann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대가인 유대인 캇시러Ernst Cassirer는 “모든 언어에 있어서 공간적 사유와 공간적 표현들이 원래적이며, 공간에서 시간으로 전이轉移되었다고 생각했다.” 보만Thorlief Boman에 의하면, 박식하고 심오한 언어논리학자 우어반W. M. Urban 역시 이점을 승인하였다. 반면에, 그라슬러Graßler에 의하면, “시간은 하나의 띠Band와 같이, 또는 사건들로 채워질 준비가 되어 있는 형용의 모순contadictio in adjecto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히브리적 사유체계가 ‘공간적’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히브리인들이 ‘죄의 결과인 죽음’을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로 이해한 것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히브리인의 사유체계가 ‘공간적’이라는 것에 상응하게, 그들은 그리스-헬라인들의 ‘정적 사유’에 비하여 ‘동적 사유’를 선호한다. 그래서 보만은 “누구든지 이스라엘적 사유를 성격 지으려고 하면, 우선 그것이 동적動的: dynamisch, 힘찬, 정열적인, 그리고 때로는 거의 폭발적인 성격을 지적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상반되는 것은 그리스적 사유의 정적靜的: statisch, 평온한, 중용적, 조화적인 것이다” ‘동적인 것’이 생명력, 활동성, 주체적이라면, ‘정적인 것’은 석화石化된 것, 생명력이 없는 것, 비-활동적인 것, 그리고 객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정지는 곧 부동이고, 불변’이다.
히브리인들의 동적 사유는 특히 히브리어의 동사動詞들에서 명백히 나타나는데, 히브리 동사들의 기본 의미는 언제나 ‘움직임’ 혹은 ‘작용’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동사가 ‘앉아 있다’ 또는 ‘누워 있다’와 같은 정지 상태를 표현해야 할 때도, 그것은 움직임도 표시할 수 있는 동사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히브리적 사유는 ‘통합적’, 혹은 ‘복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앉아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앉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히브리적 사유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통합적’이다. 즉 하나의 단어가 - 우리들의 사유 방식에 의하면 - 두 가지 서로 상이한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일어에서 ‘k?nnen’의 동사가 ‘할 수 있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 할 수도 있다’ 혹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일례는 ‘동작’과 ‘서 있음’이 - 우리가 생각하듯이 서로 대립이 아니라 - 서로 유사類似하여 그것들이 합하여 일체一體를 이룰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하여진 것’과 그 말의 내용 사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예컨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 말은 확고하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모든 말은, 그 말을 발설한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말의 주체가 있기 때문에 모든 말의 내용은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주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 말의 내용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不動하는 것’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며’, 움직이는 것과 그 어떤 것이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빈말’이란 있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동작만이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정적으로 표현된 서술이라도 그것은 정지에로 넘어간 동작을 의미한다. 예컨대 ‘앉아 있다’는 표현은 ‘계속해서 않는 행위를 한다’거나, ‘앉는 행위로 넘어간 동작’을 의미한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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