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시간관과 교회력
여는글 발표: 박승규 (Thm 3학차)
기독교는 항상 우리가 시간과 영원사이의 교차점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축소해서 생각하거나, 때때로 지나간 역사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일하고 역사하심을 기억하고 그 시간을 추적할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일을 위하여 매 주일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러 가지의 절기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심을 기억한다.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등 익숙한 절기와 사순절, 주현절, 대림절등의 중요성 또한 재인식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모든 절기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심지어 어떤 교회들의 신자들은 하루의 시간을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과 시간으로 삼는다, 즉 하루를 그분을 기억하는 시간으로 삼는다. 결국 기독교는 이렇게 시간을 즉 날들과 절기와 그리고 역사적인 시간들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들어오셔서 역사하신 순간들로 발견하고 지키고 있다. 만일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혼동가운데 빠질것인가? 달력, 계절이 없다면 우리는 삶속에서 아마도 많은 굴절이 생겨 나게 될 것이다.
1. 기독교의 시간관
1)시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시간을 말함에 있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시간의 신학을 말함에 있어어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현재는 우리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 생각하고, 과거는 주로 역사의 범주에 집어넣고, 미래는 경험 저편에 있는 것이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개념에서 우리는 현재를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과거는 현재의 서론정도로만 생각하고, 과거역사를 오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며, 미래 또한 별로 상관없는 것, 관계가 먼 것으로 생각하며 현재 일에 집중하고 그것에만 신경써! 라고 말한다. 천국, 종말등을 말할 때 어떤 종교적인 열병에 의해서 갖게되는 부정적인 것, 미래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시간과 개념은 시간은 연속성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움직이고 있는 끝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재가 실제가 아니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는 언제나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끝이라는 말이다. 예를들어 내가 어떤 책을 읽을 때 내가 잃어야 할 단어는 미래의 한 사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읽은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된다. 그렇다면 과거는 단지 서론이 아니며, 미래는 먼 꿈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항상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고 현재는 마치 그것이 혼자 그것의 삶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인 양 따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님 앞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조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시간개념으로 볼 때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출애굽으로까지 돌아가며, 그리고 새로운 세계,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계까지 나가게 된다. 우리는 현재라고 하는 시간위에 서서 한손으로는 과거라고 하는 유산을 쥐고 또 한손으로는 미래라고 하는 소망을 쥔다.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일뿐 아니라 영원히 시간과 교차되는 바로 그 순간이라 할수 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역사안에 간섭하시고, 영원토록 시간속에 들어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속으로 들어오심과 간섭하심은 인류의 역사전체에 걸쳐 이루어 졌고, 이루어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이다. 특별히 십자가 사건은 바로 이 하나님의 숨어서 역사하심, 중재하심, 그리고 역사 속에 들어오심, 간섭하심을 우리의 눈으로 확실헤게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가운데 계셨고, 역사하셨다는 사실이다. 즉 시간과 영원은 계속해서 교차되어 온것이다는 말이다.
2) 아남네시스(Anamnesis) 과거를 현재로 가져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의 믿음과 확신에 의하면 오늘 현재 가운데서 계속하여 예배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경험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행동을 통하여 과거가 현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기억(Remember)또는 기념(Remembrance)이라는 말을 예배와 관련하여 사용할 때 단순한 어떤 정신적인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적인 과정(ritual process)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성만찬에서 예수님을 단순히 생각하는 것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해신 것을 통해서, 즉 행동으로 그를 기억한다. 떡과 잔을 취하시고 축사하시고, 떡을 떼시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전해주신 주님을 기억한다.
‘아남네시스’는 과거의 경험을 내 경험의 세계속으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예전적인 행위는 그것들을 오늘의 세계로 가져옴을 뜻한다. 물론 아남네시스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시간을 하나로 쥐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모든 것들을 우리의 기억속으로 가져다주어 오늘 현재 나의 삶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3) 프로렙시스(Prolepsis) 미래를 현재로 가져옴
프로렙시스(Prolepsis) 라는 말은 “ to take beforehand" 라는 뜻을 가진말이다. 즉”어떤 것을 우리의 경험속에 미리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함”을 의미한다.
이말은 하나님의 미래를 우리의 현재속에 가져오는 의미를 말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런점에서 부활은 미래의 사건을 현재경험하는 사건(Proleptic event) 이다. 즉 부활은 하나님의 미래가 아직 우리의 현재의 삶속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의 현재속으로 가져올 수 있는 사건이다.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바로 예배의 현장에서 이다. 과거의 사건을 오늘 나의 사건으로, 그리고 매래의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한다.
특별히 은총의 교회력은 예배현장에서 과거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사와 미래의 구원의 완성을 오늘 현재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초대교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은총의 교회력을 따라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과거의 사건을 현재에 재현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교회력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안에서 완성된 성도들의 구원역사를 매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시대 똑같이 적용된다. 성도들이 교회력을 따라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매년 그들의 삶속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속에서 과거의 구원사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오늘 우리의 것, 현재의 사건으로 화(化)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예배를 통해 실제의 사건에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라 할 수 있다.
2. 교회와 시간
1)기독교는 시간을 중요시하는 종교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시간은 어제와 오늘, 시작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 속해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순간과 시간과 날들과 언들의 제한을 받고 있는 우리드을 위하여 시간속에 역사하신다. 역사의 사간속에 일어난 실제 사건들속에서 자신을 계신 하신 하나님께서는 신 구약의 많은 사건들 통해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다. 그 수많은 사건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이다. 이 사건이 역사의 전환점으로서 무한하시고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유한한 역사안에, 시간안에 들어오셔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Self-disclosure)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역사(시간)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이요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현장이요 도구이다. 즉 역사나 시간은 하나님의 활동영역으로 인정되어지는 것이므로 기독교는 역사적인 시간을 중요시 하는 종교이다.
2) 예배와시간
기독교안에서 신간의 중심성이 잘 반영되어진 곳이 바로 예배의 현장이다. 기독교 예배는 시간의 기초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기독교예배는 날(Day), 주(Week), 그리고연(Year)의 반복되는 리듬위에 그 구조를 이루고 그래서 시간의 흐름과 주기를 축하하는 것으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아 왓따. 시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예배를 통해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고 미래의 하나님의 행동을 오늘 현재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간은 기독교 예배에 있어 중요한 언어이자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이다.
3)시간과 우선순위
사람들이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은 그들 인생에 가장 잘 나타내주는 지표중의 하나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중요하다. 여기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기에 자기의 시간을 어떻게 분배하는가를 보면 그사람을 판단할수 있다. 시간을 사용한 면에있어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신자들이 교회생활을 통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교회생활을 통해 어떻게 시간을 상용하는 가를 통해 신자들의 믿음과 행함에 있어 무엇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수 있게 된다.
4)초대교회의 최우선 순위 - 부활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게 여겼던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었고 그다음이 교회에서 경험하게 된는 성령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바로 재림신앙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중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부활신앙”이었다. 즉 초대교회가 시간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살펴볼 때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신앙이 바로 부활신앙이다. 이 부활신앙 때문에 교회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가지 시간 주기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날(The Lord's)을 중심으로 한 주간 주기(the weekly cycle)요 또하나는 부활절을 중심으로 한 연 주기 ( the Annual cycle)이다.
3. 교회력(The Christian Year)
1)주일을 중심으로 한 주간 주기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일년 단위 교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 처음에는 매주일을 중심으로 모여 예배드리는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사건을 재현하고 있었다. 신약성경을 통해 구체적인 시간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바울사도를 통해 “매주일의 첫날” (고전16:2) , 이날은 “안식후 첫날”(행20:7), 기록 으로 보아 초대교인들은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말씀을 듣고 떡을 떼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날은 “주의날”(계1:10)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1세기 한 주간의 첫날이라는 기독교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고, 교인들은 주일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예배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있다.
또한 초대교회 교회들의 서신서에도 정확하게 드러나는데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주후 115년에 마그네시아(Magnesia) 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대인의안식일은 지키지않고 예수와 그의 죽음 때문에 우리의 삶과 또한 모든 이의 삶이 빛난 주일을 지키 사는 사람들” 데 대하여 말하고 있다.
주후90년경에 씌여진 『열두사도의 가르침』Didache 은 “주의날 함게 모여 떡을 떼며 성만찬을 가질 것” 이라 말하고 있고, 비시니아 (Bithynia)로마 총독이었던 폴리니(Pliny)가 로마 황제 트리얀에게 보낸편지에 비시니아 기독교 굥동체는 일주일에 두 번모인다. 아침일찍 말씀과 예전과 세례를 위하여 그리고 식사를 위하여 저녁에 이렇게 두 번모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세기에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the Martyr)은 주후155년경 그의 변증문(Apology)에서 이교도들을 향하여 “우리는 공동예배를 주일마다 드립니다..)
이후 초대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떠오르는 태앙에 비교하였고 이날을 바나바의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 에서는 “제8일 곧 다른 세계의 시작이며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나신날” 이라고 불렀다. 바나바가 말한 새 창조와 빛은 종래의 일요일(Sun day: 태양의 날)의 개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부활의 날로 기념하고 있었음을 가르쳐 준다.
결국 초대교인들에 있어 주일은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그들은 주일에 주의 사랑과 죽음을 기념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초대교인들은 “작은 부활절”로 매 주일을 맞이하고 한 주일의 첫날인 주님의 날을 전체 교회력 구조의 핵심으로 오스카 쿨만은 말하였다.
“ 초기 기독교인들의 주님의 날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잔치의 날이다. 매 주님의 날은...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유래 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예배를 위한 원시 공동체의 모든 모임의 의미를 제공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또한 스테일리 는 교회력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한다.
“ 주일, 곧 주님의 날은 교회력에서 나오는 모든 축일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초창기부터 지켜왔다. 이날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주마다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모든 잔치의 기원의 날이다. 이날은 교회의 달력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모든 날 을 변화 시켰기에 주님의 날은 기독교인들이 지키는 시간의 근원이 된 것이다.
초대교인들은 주일뿐만 아니라 평일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시간으로 보내었다. 『열두사도의 가르침』은 초대교인들에게 하루 주기도문을 하루 세 번하도록 가르치고 있고, 히폴리투스는 3세기 초 하루 일곱 번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4세기말 동방교회의 교부 크리소스톰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뜻대로 일할 것임을 구하는 기도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하루전체가 하나님 것임을 인정하고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로 하루 일과를 마칠 것을 권하였다.
결국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고난과 핍박의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매일 의 삶을 통하여서도 그리스도를 기념 하였다는 사실이다.
2) 부활을 중심으로 한 연 주기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매 주일을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것처럼 일년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한단위로 생각하기 시작 하였다. 처음 3세기 동안에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죽으심, 부활하심을 부활절에 기념하였다. 그리고 2-3세기때에 교회는 이 유월절 기간(부활절)동안 세례와 성찬식을 통해 새 교인의 탄생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예배를드렸다. 4세기 초에 와서 유대인의 유월절이 한 주간 중 어느 날에나 올수 있는 것과는 달리 부활절은 주일에만 축하하도록 되었다. 이것은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이때 논쟁을 퀘토데치만(Quartodeciman) 논쟁이라고 한다.
부활절은 3월22일 부터4월25일 사이이며, 이것은 춘분다음 첫 만월 후 첫째 주일이다. 그리고 그 주일이 만월이면 그 다음 주가 부활주일이 된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날을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부활절이 음력으로 결정되었다. 그들은 성금요일은 히브리 니산월의 열 네번째 날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주중에 상관없이 성금요일 3일후에 왔다. 즉 성금요일이 화요일이 오면 부활절이 목요일에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주중의 어느 날에도 될 수 있었다. 이런 주장하는 자들을 퀘토데치만이라고 부른다.
서방교회에서는 부활절은 언제나 주일에 지켜져야 하며, 십자가 처형은 언제나 금요일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주장은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서 해결되었다. 그래서 부활절은 춘분 다음 만월후 첫째 주일이 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매주, 매년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가 공고히 다져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부활절을 전후에서 사순절(40일)과 부활절기(50일)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4세기 전반에 이르러 하나님을 증거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과 관련된 주현절이 등장하며 이것이 후에 성탄절과 나누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탄절을 맞이하기 위한 대림절이 등장하므로 주후 4세기말에는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회력의 기본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4세기 후 교회가 제도화 하면서 교회력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성모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성자의 축일들이 교회력의 근본적인 틀을 깨기 시작한 직후부터 중세에 이르기 까지 우상을 섬기는 축일들로 변질되어 나중에는 365일도 모잘랄 정도 온갖 축일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교회력에 대해 새로운 시도로 마틴루터는 주일과 주님과 관계된 축일만 지키고 모든 성자축일은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 다시 교회력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과 믿음의 내용을 형성하고 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을 다시한번 평가 하여 초대교회가 기지고 있는 교회력을 회복하려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70년에 Roman Calendar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회력에는 아직도 성자들의 축일들이 남아있어 초대교회 골격은 회복하였으나 그 순수한 교회력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1970년대 이후 루터교회, 성공회, 장로교, 연합그리스도교회, 예수제자회, 연합감리회, 등 여러 개신교회들은 예배회복운동의 영향으로 교회력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이 공동성서일과(Common Lecionary)를 함께 만들면서 1970년대 말 전 개신교회가 초교파적인 교회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력이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수난, 죽으심,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안에서 완성되어진 우리의 구원역사를 매년 재현하는 것이다.
나가는말
기독교가 시간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한주간을 중심으로 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일년을 주기로 하여 여러 절기를 지케게 되었다. 그리고 주일이 한 주간의 중심인 것처럼 일년의 중심은 파스카(Pascha:부활절)기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력은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과 믿음을 만족하게 반영하는 절기로서 발전되어 갔고,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과 성령님이 함께 하심 그리고 다시오실 주님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예배가 다양성과 흥미를 갖게 하려면 교회력을 회복하여 충실히 따르는 방법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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