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영혼의 글/영성 글 모음

시편 23편

by Andrew Y Lee 2020. 7. 15.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23:1-6

이 시편 23편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시로 알려진 것입니다.
다윗이 베들레헴의 목자로서 자기가 직접 양을 치면서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단순한 목가적인 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양떼들’인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그 나라의 전략과 역사, 경영하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저는 진리의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짧은 시편 안에는 ‘진리의 일곱 기둥’(잠1:9)의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 짧은 시편 안에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일곱 가지 경륜이 들어 있고,
그것을 위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신 일곱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작은 힌트를 드린다면 첫 구절에는 어떤 이름이 들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여호와 로이’, ‘여호와 목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이름은 ‘목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주신 언약의 역사,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사들과 다윗과 열왕들,
선지자들의 시대에 이 '목자'라는 이름의 역사는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교회에도 정확히 적용됩니다.
그 이름의 의미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인 교회를 향하여 드리신 ‘겟세마네’의 중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중에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17: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6

저는 예전부터 이것에 깊이 주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그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신 것이라니요!
그렇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는 '양'으로서 반드시 이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이 총체적으로 계시된 '복음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득차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하여 애를 썼는데...참으로 전율하는 감동과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모든 여정은 아버지의 이름을 계시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동안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요?
표면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권고대로 우리는 옛사람의 체질을 벗고 '그리스도께로 돌아 가야' 합니다(고후3:16).
그럴 때 문자의 수건이 벗겨지고 그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영이 보일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 그분의 말씀하신 음성을 듣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여, 주여"하지만 진정으로 목자이신 주의 음성을 듣는 것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진정으로 양이 되고,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말, 추구가 하나도 없으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는 양들이라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아버지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저와 함께 시편 23편을 공부하고 나면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길,
이름을 알게 되고 그분의 깊은 경영하심 가운데 설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갈망합니다.

이 시의 처음 부분에 [다윗의 시]라고 나오는데 '시(詩)' 라고 하지만 사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미즈모르', 즉 ‘악기의 연주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런 것 하나도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하십니다.
앞으로 그것의 의미를 배우겠지만 그 둘은 모두 '진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성령을 통해 주신 진리의 일점일획도 잃어버리지 않고, 경외하며 떨림으로
깊이 살피는 중심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자에 갇히고 좁은 틀에서 집착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나누는 것은 성경에서 ‘시’와 ‘노래’는 다른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시를 통해서 ‘신령한 노래’, ‘새 노래’를 부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하 23장을 보면 다윗의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나옵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삼하23:1,2

이것은 참으로 독특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조상이고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데 고작 자신의 프로필을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부른 노래들이 ‘시’가 된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고 그가 하프를 켜면서 주시는 영감으로 노래를 했는데
그것이 '신령한 노래'가 된 것입니다.
대부분 일상적이고 영적, 현실적인 상황에서 부른 노래인데도 거기엔 놀랍고 깊은
진리의 본질들이 계시되어 나타납니다.
다윗은 그것을 여호와의 영, 성령이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시, 노래들은 곧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입니다.
‘다바르’는 그냥 기록된 말씀 이상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혀에 있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시는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게 한 것입니다.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길을 다윗이 노래한 시들에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예언’이 되었고 하나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시편을 매우 단순한 영적인 말씀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부터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노래한 시들은 예언적입니다.
우리가 시편 22편을 보면 알지만, 이 다윗의 노래는 자기가 곤고한 가운데
사울이나 악한 세력이 괴롭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하프를 켜면서 노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된 것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23:6-8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23:16-18

시 22편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너무나 구체적인 예언이라는 것을 이미 아실 터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는 그동안 주목하지 않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에 대한 계시가 있습니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시22:30,31)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후손’은 히브리어로 ‘제라’이며 그것은 ‘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후손이 바로 그의 '양 떼(교회)들'이고 25절에서 이들은 ‘큰 회중’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라브 카할’인 그 말은 ‘충만한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어린 양이 고난을 당하는 목적이 '후손(제라)을 보기 위함'(사53:10)것을 알았을 때에
매우 놀라고 감격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 신부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진정 그들을 낳기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측량못할 경륜으로 인하여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존재들이며 그리스도의 자손, 양 떼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 양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시는 경륜이 바로 다음 시편인 것입니다.
22편의 십자가와 신부들의 예언, 그 다음 23편은 양들을 인도하시는 하늘의 전략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23편이 단순한 목가적인 노래를 넘어서서 우리를 특별한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하늘의 전략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시24편은 마지막 때에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 ‘시온 산’에 오른 진정한 신부들이
누구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시24:3-6

'여호와의 산'은 '시온'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4장 ‘시온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선 거룩한 신부들’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23편을 공부할 때에 22편부터 24편까지의 연속 선상에서 깊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편이 이런 연속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 해도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성령님의 영감과 개입으로 엮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 외에도 시편 안에서만 이런 연속성을 가지고 영적 의미를 연결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진리의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고 구해야 합니다.

시편 23편은 그동안 생각해온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영혼 치유의 시편 이상입니다.
그것은 목자이신 하나님(예수님)께서 당신의 ‘양 떼’인 ‘이스라엘’과 ‘교회’를 이끄시는
역사와 경영의 본질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존귀히 여기냐에 따라서 이 말씀도 우리에게 존귀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나아가야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가게 됩니다.
이 진실한 중심의 태도와 낮아짐으로 본격적으로 목자의 인도하심에 들어 가기 원합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고향 베들레헴의 목자로 성장했습니다.
시편23편은 베들레헴의 풍경과 그곳에서 양치기로서 경험한 일들이 기초적인 배경입니다.
물론 진정한 영적 배경은 다윗의 인생에 목자로서 개입하시고 이끄셨던 여호와의 사랑, 은혜, 인도하심입니다.
베들레헴은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생애를 간직한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에서 대표적인 양을 치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인근 지역이어서 성전의 제사에 쓰일 수많은 양들을 기르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예수님의 생애는 '양과 목자'그리고 '성전(여호와의 집)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미가서의 예언처럼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작은 곳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다스릴 목자가
나오는 곳'(미5:2)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당시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크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약속과 다스리시는 임재가 있는 곳이 가장 큰 곳입니다.
비록 두, 세사람이 모여도 그것이 수천명보다 더 클 수가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약속, 그 마음, 그 임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주께서 우리의 생을 실제적으로 인도하고 계시느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시편23편의 영적 원리가 우리 삶에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은 목자로서 이 원리의 본질로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제쯤에서야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지식, 관점, 본질을 소유하게 될까요?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가치매김과 다르고 그것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런 베들레헴의 목자로서 다윗이 이런 노래를 부르고 예수님이 그곳에서 태어나시게 된 근원이나
그런 배경을 이해하면 시편 23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5장의 '야곱의 여정'과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자주 말씀 드리지만 성경은 그물처럼 직조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숨어 계시는(사45:15)', '감추시는(잠25:2)'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매우 절묘하게 감추어지고 치밀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구하는 자들에게만 여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보화들이기에 그 가치를 알고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구하려는 진정성을 가진 이들에게
열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경외함과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중심에 품지 않고 그저 쉽게, 떠도는
주장들에 팔리기 때문에 문자나 외모에 갇혀서 그 본질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그랬고...그 회개의 애통으로 뒤늦게서야 말씀 공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에브라다를 가보면 고대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걸어간 '족장들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와 벧엘, 베들레헴등을 잇는 고대의 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걸어간 여정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족장들의 여정, 그들이 연결된 지명이나 움직이고 행하는 동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내야 합니다.
거기에 아버지의 계획, 일하심의 비밀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고 싶어서 이스라엘에 가서 많은 탐구를 하였습니다.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창35:19-21

저는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이 사건이 시편23편과 영적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서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거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그 길가에 묻고 조금 지나서 ‘에델 망대’에 부근에
장막을 쳤다고 합니다.

이 지명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장막을 친 곳은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델’은 히브리어로 ‘양떼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계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도 베들레헴 근방 에브라다는 옛날부터 양들을 치던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망대들의 흔적이 있습니다.
제가 왜 이것을 나누냐면 이 '에델망대'가 시편 23편과도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예언인 미가서 5장 앞에 아주 의미심장한
예언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
미4:6,7

여기서 ‘그 날’은 마지막 때이며 '메시아가 오시는 날'입니다,
예언서의 ‘그 날’은 ‘메시아의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의 날’인데 그날에는 쫓겨나고 환난 받고 흩어진 자들, 발을 저는 자들,
'남은 자'들을 모아서 강한 나라가 되게 한다고 하십니다.
바로 '메시아 왕국'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온 산’에서 영원토록 그들을 다스리는 것으로 예언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구상이요 전략입니다.
우리는 미가서에서 이런 예언들을 읽어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워도 진리의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며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리다 보면 어느새 언약의 지평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봅니다.

그동안 저는 이런 예언들이 나오면 그냥 넘어가고 필요한 구절만 찾아서 취했습니다.
그런데 시편23편을 연구하는데 이것들이 함께 조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통해서 목자로서 이방(사나운 짐승)에 포로로 사로 잡혀 살던
잃어버린 양떼인 이스라엘을 그 땅에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 왔고 또 왔지만 아직 '그 날'의 진정한 본질이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언약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이 말씀이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주님은 오셔서 '시온산'에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에 보면 시온산에 어린 양이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의 신부들이
함께 서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가서의 이 언약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미4:8

저는 이 구절에 주목하였습니다.
마지막 때에, 메시아의 왕국에 돌아오는 세 가지 언약이 나옵니다.
처음의 ‘양 떼의 망대’는 앞에서 나눈 ‘에델 망대’입니다.
그리고 딸 ‘시온의 산’, 그리고 ‘이전 권능’ 곧 ‘예루살렘의 나라’가 함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엇인가요?
그동안 우리는 이런 것에 깊은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속한 '교회'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의 개인적인 신앙생활도, 우리 교회도 영적으로 힘겨운 판에 이런 이해되지 않는
다른 개념들을 알아야 하는지 의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것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6:33)는 주님의 말씀을 알지만

도대체 ‘그 나라와 의’가 무엇인가요?
여기서도 ‘이전 나라’라는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히브리어로 ‘맘라카(מַמְלָ*9;ָ*2;)’인데 ‘왕국’, ‘다스림’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바실레이아’와 같은 것이지요.
그 전에 통치하던 곳. 예루살렘이 이전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던 곳입니다.
양 떼의 망대, 딸 시온, 이전의 왕국이었던 예루살렘, 이 세 가지가 그 날에
다 돌아온다는 것이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씀(다바르)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앞으로 계속 공부하겠습니다.
그들이 다 돌아오고 합해져서 마지막 하나님이 다스리는 ‘시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다음에 나오는 예언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목자가 나올 것이다”(미5:2)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시편23편과 연결이 됩니다.
뭐가 연결이 된다는 거야...머리만 아프구만...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몇 명 느껴지는데,
곧 알게 되시니 마음 편하게 먹으셔요.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아버지는 당신의 말씀,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이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이 주시는 진정한 지혜와 지식(고전12:8)이 없으면 아버지가 일하시는
그 경륜을 보지 못하고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이 너무나 작아집니다.
우리는 깨어서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 가를
살피고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은사로서의 지혜와 지식을 구하며 정확한 눈으로 그 일하심 보아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지금 현실 속에서 그것을 읽어내야 합니다.
미가서의 이 예언 앞에 나온 다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4:1,2

이것은 이사야4장2절에도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 선지자가 동일한 내용을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 날(메시아의 날)'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시편23편은 많은 이방인들(열방)을 '여호와의 산' 곧 '시온'으로 인도하시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대한 인식이 매우 협소합니다.
매우 자극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들에 갇힌 개념들이 난무합니다.
물론 성경엔 오형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두렵고 다양한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외모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그것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본질을 읽어내야 합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끝 날의 본질은 열방이 ‘여호와의 산’에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산이 ‘시온산’이며 ‘예루살렘’이며 '여호와의 집'입니다.
이것 역시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약간 조심해야 합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것을 아전인수로 해석하여 미혹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 미혹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향, 처소는 '하늘'에 있습니다.

마지막 때는 하늘과 땅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될 것입니다.
그것이 재림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23:6

이것이 시편23편의 마지막 지점입니다.
목자이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최종적인 목표와 방향은 '여호와의 집'이며
양들인 우리가 거기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꿈입니다.

창세기에 계시하신 아버지의 나라이며 마음, 기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너무 너무 너무 이 날을 사모하고 그리워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웃으며 노래하며 즐기며 쉬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함께, 우리 예수님과 함께....말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마지막 비전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하나님의 장막, 그 집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뛰어 놀 것입니다.
생명수의 쉴만한 물가, 진리의 푸른 초장, 생명나무와 완벽한 식탁....시편23편과 계시록의
마지막 비전은 같은 영적 풍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끝 날'이요 '그 날'입니다.
저는 이것을 너무나 고대하고 꿈꿉니다.

그래서 그리로 인도하시는 여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 아버지는, 예수님은 어떻게 그 나라로 인도하시는가....
이 전략, 여정은 주님의 오시는 대로와 연결이 됩니더.

시편23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그 장막(집)으로 인도하시는 그 여정, 전략,
역사의 본질을 계시한 성령의 노래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셔서 '의 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23편은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길입니다.
이것을 알 때에 우리는 '곁 길'로 가는 '잃어버린 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대로, 열정과 애씀만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거기엔 자아가 개입되고 미혹과 바벨론의 가치매김이 교묘히 틈을 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애쓰나 점점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마르다'의 체질에서 '마리아'의 체질적인 교회로 변형되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칭찬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집중하였기에 '향유옥합'을 깨어
죽으심을 예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향유 옥합'을 깨 여인조차 오해하여 '막달라 마리아'니 '창녀'인 죄인이니
하는 잘못된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언제야 우리는 이런 무지에서 벗어날까요?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되찾아 올까요?
그녀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는 제자들도, 바리새인이던 시몬도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이 생각하던 전통, 메시아에 대한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서 주님의 죽으심을 예비한 것은, 늘 그 얼굴 앞에서
말씀을 주의 하여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눈물로서 예비한 것입니다.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아1:3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들인 우리들의 영적 본질을 계시란 노래입니다.
진정한 신부의 영을 가진 이의 '이름'은 '쏟은 향유'입니다.
마리아는 이 전율하도록 아름다운 계시를 성취한 여인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영'이며 '본질'입니다.
마리아가 이 진리의 본질 가운데, 신부들이 사랑하는 그 본질 가운데 들어 가게 된 것은
주님의 음성을 집중하여 듣는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역사, 열방, 그 시간에 이 여인의 '행한 일'도 함께 증거되야
한다(마26:13)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누가 진정한 양입니까?
목자의 음성을 듣는 자(요10:4)입니다.
정말 '들을 귀'가 절실한 때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아버지가 정하신, 인도하시는
그 길에 서야 합니다.

이 지식과 전략이 너무나 중요한 때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이 말씀이 성취되는 엄청난 때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많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이것이 세 가지 언약이
다 합해져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모든 것이 합해져서 시온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거기가 양 떼의 망대. 그리고 5장에서,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미5:1

하나님의 딸, 시온의 딸들이 양 떼를 모으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시23:4)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 '막대기'로 싸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양떼들을 모으시는 이 배경들이 시편 23편에 이것이 연결되어 하나님의 전략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개념들이 지금은 약간 막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23편을 공부해 나갈 때에 지금 나눈 것들이 입체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전에 중요한 포석들을 깔아 두었습니다.
계속 목자이신 주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눈을 정확히 뜨고 진실한 마음으로 따라가지요.
샬롬.

되새김질 - 김우현

 

'영혼의 글 > 영성 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 시대와 하나님의 도미노  (0) 2020.09.04
아아, 아리엘이여!  (0) 2020.09.04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1) 2019.02.06
기도의 단계  (0) 2018.09.30
[스크랩] 아가서 신비주의 - 성 버나드  (0) 2017.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