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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시간 개념: 선이 아니라, 반복적 주기
우선 인류가 - 시계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 - 때를 측정하는 것은, 물리적 시간에 의해서 측정되지 않았고,
육체적 주기성(Rhythmus)에 의해서 감지(感知)되었다. 예컨대 여인들은 자신의 생리(生理)를 통하여 한 달(一月)이라는 시간을 감지하였다.
그래서 여인의 생리(生理)를 ‘월경(月經)’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이러한 생리적 혹은 신체적 감각을 통하여 시간을 감지하였다.
철새들이 이동하는 날짜를 정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신체적 리듬에 따른 변화에서 이동의 시간을 결정하게 되었다.
개미가 장마를 앞두고 이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주관적인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잠과 깸’, ‘일과 휴식’, ‘식사 시간’ 등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충분히 잠을 자고 8시간 후에는 자연히 깨게 되는 것과 같다. 심지어 인간의 짧은 주기는 심장의 고동, 맥박, 호흡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 인간이 신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의 주기성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시점(時點)과 시점 혹은 하나의 지점(地點)과 다른 하나의 지점 사이에 존재하는 객관적 거리를 움직이지 않고도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밝음과 어둠의 규칙적인 교체, 혹은 달의 변화와 단계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이 주기성에 의해서 시간을 구분하였다.
그래서 창세기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시간을 무한한 발전 혹은 변화로 보지 않고, 일정한 주기의 반복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는 표현은 시간의 주기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수평적 시간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창조 역사가 ‘제7일 안식일’로 끝나고, 이스라엘 역사가 ‘주님의 날’로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역사가 ‘마지막 날’의 ‘안식’으로 끝나는 주기성과도 유사하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증언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기)”(사 44:6) 때문이고, 그분만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 45:5-7). 이렇듯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주기성’을 헬라인들은 ‘원’ 혹은 ‘순환’으로 생각하였다.
그 원인은 태양의 순환에서 본따 온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태양의 순환 운동이 시간의 방향 설정을 위해서 이용되면서,
동시에 태양의 순환 운동에 관한 표상이 해당 시간에 전용된 것이라고 오렐리는 말한다
(C. v. Orelli, Die hebräischen Synonyma der Zeit und Ewigkeit, geneisch und sprachvergleichend dargestellt, 32).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히브리인들은 태양의 운행에서 시간적 방향을 정하지 않고,
오히려 달의 변화 양상의 규칙적인 교체와 빛과 어둠, 더위와 추위의 주기적 교체에서 시간의 방향을 잡았습니다.”(Thorlief Bomann, Das hebräischen Denken im Vergleich mit dem griechischen, 허 혁 역, 히브리적 思惟와 그리스적 思惟의 比較, 왜관: 분도출판사, 1975, 159.) 그
래서 히브리인들은 인생도 주기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네(= 아담)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도 주기적으로 표현하였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1-5).
이것을 다시 전도서 기자는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고 말함으로써, 앞의 모든 일이 주기적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순환을 가리켜 히브리어는 ‘dor’라고 말한다. dor는 dur(순환, 원)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는 ‘주기’가 근본 사상이고, ‘순환’은 주기의 형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주된 것은 주기이다. 이 주기가 있기 때문에, ‘약속과 성취’라는 ‘역사의 유형’이 성립된다.
그러나 이 주기를 히브리인들은, ‘별들의 운행’ 혹은 ‘태양의 운행’에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원무(圓舞)에서 알게 된 것이라고 보만은 강조한다(보만, 같은 쪽). 그러므로 처음은 다시 돌아와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보만은 창세기 기자가 일곱째 날에는 저녁과 아침에 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은 이유를
“제7일은 그 자체가 안식일이며, 일주(一週)라는 더 포괄적인 주기, 즉 휴일 - 평일 - 휴일의 마지막(과 시작)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보만, 160).
따라서 월(月)의 주기는 초승으로부터 시작하여 - 만월(滿月: 혹은 월의 전환) - 초승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해 바뀜은 추수가 끝난 후의 가을이고, 즉 해가 기운이 쇠퇴하는 시기였다(Guthe, Bibelwörterbuch, 282.(허혁 역, 히브리적 思惟와 그리스적 思惟의 比較, 160에서 재인용).
한 인간의 일생은 - 창세기 3:19절에 의한 삶의 한 주기 - 흙에서 생겨나서 - 살다가 -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욥기는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음을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분히 히브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주기적 시간관’에 의하면, 작은 주기가 차면, 보다 큰 주기로 넘어간다.
예컨대 4주가 되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12번 반복하면 1년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그 단위를 7로 보았다. 그래서 7의 주기는 안식년과 희년의 주기가 되었다(Guthe, Ibid., 282, 250.).
그러나 어떠한 주기든 그 마지막은 ‘안식’이다. 이게 바로 희년이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레 25:10-13).
한마디로 말하면, ‘희년’에는 모든 것이 원위치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동양에서는 天干(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과 地支(자축인묘지사오미신유술해)를 순열식으로 계수하여 ‘60’을 인생의 한 주기로 보았다). 왜냐하면 7 x 7 = 49년 그리고 그다음 해는 ‘희년’(禧年)으로서 새로운 주기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년’에는 노예도 해방되고, 땅도 해방되고, 모든 것이 억눌리고 억압되었던 상태에서 자유를 얻는다. 이 희년의 해가 바로 모든 주기가 끝나고 새로운 커다란 주기가 시작하는 해이다. 그 해는 바로 ‘참 안식의 해’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 역사의 거대한 주기가 ‘제7일 안식일’로 끝난 것으로 기술하는 창세기의 역사관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이 세상의 종말을 옛 것이 지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1,4-7).
옛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이전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새 생명이 주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http://kerygma.kr/pamphlet/126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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