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성경의 '내력'이란 번역어의 원어는 히브리어로 '톨도트'이다. 표준새번역은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다'라고 풀어서 번역하여 톨도트란 명사를 흐릿하게 약화시켰다. 히브리어 톨도트는 '태어나다/아기를 낳다'란 뜻의 동사 '얄라드'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일대기는 그 사람의 톨도트가 된다. 사람의 경우 '일생'이라든가 '일대기'라고 번역하면 알맞다. 그러나 사물일 경우 그 물건이 생산되어서 소멸되기까지의 과정을 가리킨다. 이 경우 '내력'이 적절한 번역이다. 하늘과 땅이 생겨 났으니 이제부터 그 성장과 소멸의 과정을 살펴보자는 것이 4절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문체가 다르다고 해서 굳이 전후반절을 반으로 쪼개어 따질 필요가 없다. 마소라 전통을 따라 창 2:3까지 한 문단으로 자르고 2:4부터 새로운 문단이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창 2: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이제부터 천지 만물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히브리어로는 '톨레도트'이다. '하늘과 땅의 내력'이란 말에서 '내력'의 원어가 '톨레도트'다. 이것은 천지가 생겨나고 소멸되는 전 과정을 가리킨다. 창 1:1은 '태초에(버레쉬트)'란 첫마디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피조물로서 '시작'이 있고 또한 그 '종말'로 향해 가고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한마디로 창조론은 종말론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천지의 생기(生起)는 창세기 1장이 제시하고, 천지의 소멸(消滅)은 요한계시록이 선포한다. 신기하게도 창세기 앞부분의 말씀이 신약성경의 끝부분의 말씀까지도 다 포괄하고 상응하고 있다.
 
창세기 전체의 짜임새는 '톨도트'의 도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경 서론인 창세기 1~11장 안에 톨도트란 단어가 일곱 차례 등장한다(창 2:4; 5:1; 6:9; 10:1, 32; 11:10, 27). 맨 처음은 창 2:4에 언급되었고 두 번째로는 5:1에 나오며 세 번째로는 창 6:9에 나온다. 개역개정역에 의하면 2장 4절에는 천지의 '내력'이라고 번역했고, 5장 1절에는 아담의 '계보'라고 번역했으며, 6장 9절에는 노아의 '족보'라고 번역했다. 노아의 족보란 노아의 일대기를 가리키는데 개역성경은 역사라고 번역했다('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번역어들은 다양하지만 모두 다 동일한 톨도트의 번역어들이다. 10장 1절에는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라고 번역했으며 이어서 32절에는 '그 백성들의 족보'라고 옮겼다. 창세기 10장을 보면 순수하게 족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정도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 중간 중간에 도시들과 지명들이 끼어 들어와 있다. 그래서 족보라기보다는 살아온 이야기들 내지는 일대기를 표현하고 있어서 일정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 작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1장에는 10절과 27절에 이 단어가 나온다. 10절에는 셈의 족보라고 번역했고, 27절에는 데라의 족보라고 했다. 데라의 족보 안에 아브람이란 이름이 등장하며 비로소 12장부터 전개되는 족장기로 원역사라 불리는 서론부를 원활하게 접속시켜 주고 있다. 12장에는 '아브라함의 족보'라는 표현이 없다. 그러나 이삭의 톨도트와 야곱의 톨도트란 표현은 나온다(창 25:19; 37:2). 이삭의 톨도트에 앞서 이스마엘의 톨도트가 나오며(창 25:12(이스마엘의 ('족보'), 13(그 '세대'대로)), 야곱의 톨도트 앞에 에서의 톨도트가 장황하게 선행한다(창 35:1, 9).
'데라의 톨도트'라는 창 11:27의 표현에는 아브람과 롯의 이야기가 얽혀서 데라의 일대기 속으로 편입해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아브람과 롯은 삼촌 간이기 때문에 부자지간이 아니므로 톨도트로 둘을 엮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롯의 할아버지이자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를 중심으로 아브람과 롯을 엮었다. 아브람 이야기는 롯 이야기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엉켜 있다.
 
톨도트란 개념 안에는 부모가 죽기 이전까지 펼쳐진 자녀의 생애가 부모의 톨도트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창세기 25장에서 아브라함이 죽자 바로 이삭의 일대기가 시작되는데 이것을 창 25:19은 '이삭의 족보'라는 톨도트의 표시로 나타낸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동안에 이삭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간주된다. 창세기 35장에서 이삭이 죽기까지 그의 일대기를 보도하면서 그 안에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삭이 죽자 곧장 에서의 톨도트가 독립되어 나오고(창 36:1, '에돔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이어서 야곱의 톨도드가 따로 펼쳐진다(창 37:2,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 창세기 37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야곱의 일대기에 야곱의 열두 아들들의 이야기들이 주로 펼쳐지며 야곱 자신의 이야기는 매우 적은 분량을 차지한다. 야곱이 사망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야곱의 톨도트다. 이 안에 유다의 이야기(38장)와 요셉의 이야기(37~50장)가 들어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창세기는 요셉의 사망기로 끝나는데 요셉의 톨도트란 언급은 별도로 나오지 않는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면 아래와 같다.
 
<창세기의 톨도트 짜임새>


   
 
창세기에 쓰인 톨도트의 용례를 이와 같이 살펴볼 때 창 2:4의 톨도트가 의미하는 뜻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천지 만물이 생성하여 소멸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보여 주겠다는 뜻으로 책을 여는 서장의 역할을 맡고 있다. 톨도트는 언제나 일대기를 시작하는 맨 앞줄에 언급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일대기 맨 앞에 톨도트가 언급된 것과 마찬지로 천지의 생성 소멸 이야기를 시작하는 맨 앞에 톨도트란 말을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면 창 2:4부터 천지 만물의 생성 변화와 발전과 소멸의 이야기가 보다 상세하게 펼쳐진다는 뜻이다.

이사야서는 맨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전한다. 인간이 오염시킨 낡은 세계는 종말을 고하고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새 세계가 펼쳐진다. 요한계시록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노래한다. 이것이 종말의 희망이다.
 
또한 히브리어 성경에서 맨 마지막 책은 역대기다. 창세기로 시작해서 역대기로 끝나는 책이 히브리어 성경이다. 역대하 36:21을 보면 창세기 2:1~3의 말씀이 반복되어 있다.
 
대하 36:21
[개역]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NKJV] to fulfill the word of the LORD by the mouth of Jeremiah, until the land had enjoyed her Sabbaths. As long as she lay desolate she kept Sabbath, to fulfill seventy years.
[새번역] 그리하여 주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땅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어, 그 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다 누리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역대기의 이 구절에 안식일과 안식년 및 땅의 안식과 회복이라는 종말의 희망이 뚜렷하게 표명되어 있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의 맨 뒤에 나와서 성경 전체의 결론 구실을 한다. 그런 만큼 히브리어 성경의 초두에 있는 일곱째 날 안식일 제정사인 창세기 2장 1~3절과 상응하여 성경의 앞과 뒤에서 성경을 안식일 주제로써 감싸고 열고 닫는다. 이것을 포괄법(inclusio)이라고 부르는데 이 현상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처음과 끝은 공히 안식일 사상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말이다. 안식일을 통하여 종말의 희망을 선포한다. 이런 의도로 안식일은 포괄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종말의 희망이 창 2:4의 톨도트에 내포되어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진술한다.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펼쳐 보여 주는 책이 성경이다.
 
창세기 1~2장에는 시간의 흐름에 일정한 매듭을 짓고 있는 모습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안식일 모티프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을 창조하셨는데 빛의 창조로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 시간의 리듬은 일정한 규칙을 따라 흐르는데 엿새 동안 운동하고 하루는 멈추어 쉬는 안식일 리듬이다. 제 7일에 하루를 쉬지 않는 생명은 결코 건강하게 살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정하신 창조의 법도다. 이것은 오늘날 일반 사회에서 일요일을 공휴일로 선포한 제도로서 나타나 있고, 교회에서는 주일 성수라는 신앙생활의 기조로서 나타나고 있다.
 
천지의 운행은 멈추지 않고 7일 동안 계속 된다. 이 운동의 연속체 속에서 일하는 하나님께서 일을 멈추시고 쉬신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하는 사람도 이날에 손을 멈추고 쉬어야 한다. 창세기의 안식일 말씀은 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쉰다는 히브리어 샤바트에는 멈춤이란 뜻도 들어 있다. 쉬고 멈추는 시간에 하나님과 숨결에 따라 자신의 숨결을 고르고 맞추어야 한다. 삶의 근본 뜻을 되새기고 말씀으로 묵상하며 천지의 기운에 접속하여 새 힘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참된 쉼이다. 그러므로 쉼은 하나님 예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물질 활동을 멈추고 주일에는 무조건 쉬면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이야기 제1부는 창 2:3로 끝난다. 창 1:1~2:3이 하나의 커다란 문단이다. 4절부터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가 이 안식일 리듬에 따라 어떻게 시작되고 펼쳐지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창조의 경위를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땅의 창조 이야기와 사람의 창조 이야기가 다시 좀 더 상세하게 상론되고 있다. 천지의 내력이 창 2:4부터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제도권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신앙 세계를 추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할지라도 이 천지 운행의 리듬만은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주일 성수를 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숨을 고를 여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에 성공하려면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어 살기 바란다. 그것은 6+1=7의 주일 성수 원리다. 여기에 조금 더 보태어 응용하자면 3+3+1=7의 원리를 세우면 어떨까 싶다. 그것은 수요 삼일 예배를 엄수하자는 취지다.
 
삼일 예배는 한국교회 전통에서 주의 재림을 유념하여 기다리는 예배다. 천지창조의 리듬 중에서 특별히 중간지점에서 종말에 있을 주의 재림을 확신하며 기원하는 기도의 시간! 이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전통을 깨뜨리지 말아야 하겠다. 세상의 산업사회가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고 사람의 혼을 다 빼놓을지라도 교회는 끝까지 주일 성수에 수요 삼일 예배의 전통을 고수하여 미친 듯 돌아가는 세상에 끝까지 저항하기를 바란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말 것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요 16:33).'




이영재 / 전주화평교회 목사, 전주성경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