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의 조명 (고전15:19-22)
오늘은 성경 밖에서 죽음을 관조해보고자 합니다.
정말 죽으면 끝일까요?
조지몰건 목사님이 메사추세스 주에서 목회를 할 때, 톰이라는 아이가 휠체어를 타고 주일학교를 다녔습니다. 부활주일이 되어 주일학교 교사가 모든 아이들에게 플라스틱 계란통을 주고 이 안에 생명이 될 만한 것을 담아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아이들 모두 다양한 것을 안에 넣어가지고 주일에 교회에 왔고, 톰은 빈껍질을 가지고 왔습니다.
선생님이 톰에게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도 괜찮다고 위로를 하자, 톰은 준비를 못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있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답을 하고 10개월 후 톰은 하늘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진실로 믿었던 것입니다.
한 연못에 물강아지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중 할아버지 물강아지는 연못 안과 밖을 왔다갔다 거리는 개구리의 행동을 관찰하고는 연못 밖 다른세계가 있음을 알고 다른 어린 물강아지들에게 알려주려고 개구리를 초대해서 바깥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개구리는 꽃, 나비, 풀밭, 각종 동물들이 있음을 이야기해주었지만 어린 물강아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몸이 이상함을 느끼고는 갈대위로 올라가 죽었습니다. 이어 허물을 벗은 할아버지 물강아지는 잠자리가 되었고, 개구리가 말한 눈앞 풍경에 할말을 잃고 맙니다. 연못에 대해 큰 소리로 외치지만 연못 속까지 들릴리 만무합니다.
일어서려면 앉아야 합니다.
다시 살려면 죽어아 합니다.
치욕의 고난에 참여해야 부활할 수 있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들 말합니다.
만에 하나 끝이 아니라면 크게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죽으면 끝이라는 사람들이 죽은 영혼을 위로한다고 위령탑을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며, 진혼곡을 만들어 죽은 영혼을 위로합니다. 이는 죽임이 끝이 아닌 것을 증명하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태아가 건강해야 실제 태어난 아이가 건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건강할 때 영원의 삶이 건강합니다.
육신의 죽음은 곧 저 세상에서의 출생입니다.
태아가 아무리 튼튼해도 태어나서의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영원한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론화하고 신학화한 사도입니다.
모든 인류가 죽으면 부활한다는 사실의 첫 출발을 예수님이 하신 것이고,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으면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리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내 뜻을 죽이고 포기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 들어가지만 정작 아무런 맛도 모르는 숟가락과 같이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매를 피하기 위해 예수님을 달래기 위한 회개를 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하며, 질적 양적으로 성숙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내일부터 작정 새벽기도를 시작합니다.
2주간 30시간을 채우려면 하루에 2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예수님을 알고, 부활에 동참함으로 부활을 알고, 영광에 동참함으로 영광을 알아가는 귀한 기간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