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생명의 성령의 법(8:1-17)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고대하다(8:18-30)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8:31-39)
생명의 성령의 법(8:1-17)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7장에서는 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요. 그 죄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고 나오지요. 그래서 7장에서는 사실상 생명으로 거듭난 체험에 들어갔다기보다도 의롭다하심을 받음으로써 다 해결됐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가기까지만 구분해 놓고 마쳤어요. 사실상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먼저 죄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모형적 진리에서 보면 여호수아가 먼저 할례산을 통과할 때 할례를 받게 하고 가나안 7족을 전복하고 나서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골고루 공평하게 분배해주잖아요. 우리는 그 순서를 대단히 중요시해야만 됩니다.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런 말씀이 있지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계시록에서는 흰옷을 입었다고 하였지요. 영적할례라고도 하고요. 로마서 5장을 보면 확실하게 둘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 의롭다하심을 받아야만, 다시 말해서 득의 은총을 박아야만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의롭다하심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고,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은 천국백성으로 완전하게 인침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결코 거듭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순서는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씀은 했지만, 생명으로 거듭난 경험을 얘기한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다시 말해서 영적할례 받는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앞에서 죄 문제 때문에 지독하게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앞에서 죄 문제 때문에 지독하게 고민해 왔으니까요.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8장에 들어가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경험에 대한 진리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광야연단과정을 통하여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완전구원에 도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로마서 7장도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로마서 7장이 마치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해석하는데,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체험을 주시는 것도 이러한 죄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또 감동받은 상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길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이 로마서 7장 경험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철저하게 실천하고자하는 사람만이 로마서8장 경험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이지 결코 지식적인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은 상태가 된 것이 7장 25절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가지 기록되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나 행실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완전히 구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분리시키셨어요. 로마서 8장에 들어가면 실제로 생활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믿음만 생겼다하면 이 말씀대로 정죄함이 없다고 하거든요.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야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경험을 통해서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잖아요. 어떤 깨달음으로써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은 로마서 7장 25장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법칙 때문에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렇게 된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은 강력한 그리스도의 평강에 사로잡힌 경험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죄문제가 다 해결된 후에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나타나는 그 강한 평강의 능력에 의해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불안케 하는 상태에 있더라도,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박살나고 큰 위험에 빠질 것 같다 할지라도 속이 안 떨리는 거예요. 이 평강의 신비가 그렇게 사람의 가슴을 놀랍게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면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잖아요.
연결되는 말씀이지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이 말씀과 평안을 준다는 말씀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정죄함을 느끼지 않는 영적 상태가 되게 하신다는 거예요. 전혀 아무 상관없는데 적당히 그 부분에다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이 말씀과 함께 오는 평안의 놀라운 능력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지요. 물론 동시에 받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만 생명과 평안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 순서에 맞추어서 기록한 것뿐이지 사실은 동시적인 체험이라고 보면 되겠어요. 십자가와 부활로부터 오는 체험입니다.
죄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됩니다. 부정적인 죄의 세력을 모두 없애 버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 즉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은 단지 우리가 범죄하고도 용서받게 됨으로써 정죄의식이 없어진다. 그런 뜻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 문제가 모두 해결된 후에 오는 강력한 천국적인 평강이 그러한 체험과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 여기서 평강의 능력이라 보다 생명의 능력에서 나오는 평강이라고 해야 되지 않나요?
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오는 평강이지요.
▷ 평강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평안이 너무 독특한 심비이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을 해가면서 이해시키고 잇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타나는 것인데도 말이지요.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그때부터 제자들도 이 평강을 누리는 것으로 봐야 되겠네요.
천로역정에서 기독도는 전신갑주 입을 때 그 평강이 나타나는 거예요.
▷ 제자들도 똑같은 체험을 한 것 아닌가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셨잖아요. 그때는 사실상 그 말씀만 해주시고요. 실제적으로 열두 사도에게 그런 체험을 허락해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로역정에서 기독도와 같은 성장과정을 밟아 나가고 있는 성도라면 바로 전신갑주 입을 때 그 체험을 동시에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당시에는 그런 체험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라는 말씀은 꼭 하셨어요. 그럴 때마다 금방 불안했다가도 안정되는 듯한 그런 평안한 마음은 있었을 거예요.
▷ 성령충만 같은 것은 있었겠네요?
그런 경험은 있었겠지요. 그러나 근본적인 평안은 생명의 내주와 함께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할례 은총으로 정죄함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으로부터 나타나는 그 평강의 능력에 의해서 실제 불안한 상태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입니다.
▷ 생명이 내주합일 되어도 수축이나 팽창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수축될 때는 차이가 있어요. 잔잔한 바람이 이마에 불어오면 살살 건드리잖아요. 그런 것처럼 수축이 되면 살살 흔들리는 것을 느껴요. 그러니까 제일 바깥 부분, 평강의 덩어리 그 변두리에서 살짝 느껴져요. 팽창상태일 때 그런 것은 없고요.
▷ 마음이 설레는 것처럼 느끼나요?
설레는 것도 내부까지 침투하는 현상이니까 별로 해당이 안 되고요. 바깥에서 살살 건드리는 것처럼 있어요.
▷ 그런 강력한 평강을 체험하면서 이긴자들이 살고 있군요. 선생님께서도 가금 평강 덩어리가 속에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토마스 아 캠피스가 '내적 위안'이라고 한 거예요. 생명과 함께 그 평안이 언제든지 따라오는 것이니까요. 이은희 선생님이 입신 체험에 대해서 간증할 때도 "이긴자들이 받게 되는 그 만나가 뭡니까?"라고 질문하니까 평안이라고 말씀하셨다잖아요.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이 평안이라고 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마음이 잔잔하고 여러 가지 불안스러운 조건이 없을 때 평안하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니지요. 그보다 생명과 함께 나타나는 그 평강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 2절에 성령의 법이라고 했거든요. 죄의 법은 범죄 할 기회가 주어지면 번개같이 죄가 침투했다 사라지는 현상을 말하잖아요. 그러면 성령의 법은 교만할 수밖에 없는 기회가 주어져도 겸손이 나오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기회가 주어져도 사랑이 나오는 것으로 설명해도 되나요?
그런데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의 의지보다 앞서가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인간의 자유의지를 앞서지 않으신다는 것을 꼭 생각해야합니다. 우리의 선한 의지가 하고자 할 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앞서가면서 생명의 법칙을 나타내시지 않아요.
▷ 선생님께서 어떤 목사님 때문에 마음이 아프셔서 우신 것도 성령께서 도우셔서 된 것이지요?
그런 것도 우리의 의지로 하고자 할 때 생명의 법칙이 순간순간 도우시는 것이지, 우리가 안 하려고 하는데 억지로 나타내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겸손의 열매를 맺고자 할 때, 사랑의 열매를 맺고자 할 때, 온유의 열매를 맺고자 할 때 그 생명의 법칙이 돕는다는 것입니다.
▷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앞서지 않으시고, 우리의 의지가 하고자 할 때 도와주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군요.
그렇지요, 그게 하나님의 신사적인 능력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 선생님의 간증테이프를 들어보면 이긴자의 경지에 들어가셨을 때 워치마니의 간증을 보시고 눈물을 언제나 자유롭게 흘릴 수 있는 은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고 나오는데요.
그렇지요.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럴 때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눈물도 필요에 따라서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정신을 통일 시키고 마음을 집중하고 잡념 같은 것을 물리치려고 하면 그런 신비적인 생명의 능력이 도와주세요. 모든 게 신비롭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 가나안 정탐할 때도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어느 분과 문제가 있었잖아요. 그전에는 그분을 사랑해야 되는데 어떤 큰 바위덩어리 같은 것이 가로 막고 있어서 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가나안 정탐할 때는 그게 전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실천하고자 하면 즉시 자동적으로 되지요.
▷ 새벽에도 '일어나야지'하면 꼭 일어나요. 그때는 늘 3시 30분이나 4시에 나가게 되더군요. 그전에는 '어떻게 나가지?'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불도저 같은 것이 앞을 막고 있다가 그 기간 동안에는 사라진 것 같더군요.
마치 모래주머니 달고 달리기 연습하다가 떼어버린 것 같지요.
▷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가나안땅을 정탐할 때는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권능과는 또 차이가 있잖아요. 한 번 다녀오는 것뿐이지요. 그러니까 자그마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과정은 아주 강력합니다. 다윗왕 시대와 마찬가지의 큰 권능을 나타내 주시니까요. 사사 시대는 조금 작아져요. 사울왕 시대도 다윗왕 시대만은 못하고요. 그와 같이 우리 속에서 나타나는 그 생명의 능력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탐할 때의 그것은 아주 약해요.
▷ 그 당시도 목사 안수 논문 때문에 염려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 체험에 들어가니까 전혀 염려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 하실 건데,' 모두 맡겨버리고 전혀 떨지 않게 되는 그런 희한한 경험도 있었어요.
그런 경우에도 이러한 진리를 알고 그 경험을 했다면 더 선명하게 의식이 되고 더 강하게 역사가 되었을 텐데 알지 못했으니까 충분하게 의식하면서 넘어가지를 못한 것이지요. '이상하다, 신비롭다.' 이렇게 생각은 되더라도 말이지요.
▷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하나는 '내가 아직 젊은데 벌써 완전 성화가 된 것인가?' 성장론에 대한 진리를 모를 때니까요. 또 하나는 '믿음으로 다 되는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것이 이런 체험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 경험을 확실히 하다보니 이단종파의 교주들이 다 됐다고 주장을 하게 되어있는 것이지요. 한번 비췸을 얻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요. 그런데 그것이 잠깐 동안은 경험인줄 모르고 계속되는 것으로 착각을 해서 범죄하명서도 정당화하거든요. 그러다가 위성과 허례에 깊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 성령충만할 때도 비슷한 체험을 하기도 하잖아요?
성령으로 충만할 때도 경험을 하게 되지만, 이때는 몸 안에서 신비로운 생명의 감각이 나타나기 때문에 좀 차이점이 있는 것이지요.
▷ 선생님은 가족들을 만날 때 "주여,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시잖아요.
순간적으로 가족들과 육신적인 말을 하면서 세상적인 물결에 잠깐 동안이라도 휩쓸리지 않게 해달라는 뜻에서 "주여,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이지요. 아까도 어느 목사님이 이런 공식적인 모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혈육에게 전화를 한 것 아닙니까? 연구회가 처음 출발할 때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철저하게 다루셨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전화도 하지 않도록 하셨지요. 좀 더 순수하게 살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어디 집회를 인도하러 가셨거나 아니면 어떤 모임이 있을 때 가족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지 못하도록 하셨어요. 혹시라도 전화가 걸려오면 영적인 대화만 하려고 노력하고요. 우리가 먼저 거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요. 이렇게 철저한 영적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을 계시를 통해서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것에 휩쓸리지 않을 때 우리가 더욱 온전히 영적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헤서 그것을 완전히 다 끊고 생활할 수 없지요. 그러나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그런 육적생활은 벗어버리려고, 조금이라도 더 영적 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지요. 음식을 먹을 때도 달게 먹는다든가,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먹는다든가 하면 그게 다 정욕적인 행실이고 상급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 1절은 생명의 전신갑주를 입음으로 나타나는 평강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해석이 되어야겠네요.
네, 그것이 바로 죄 문제가 해결된 평강입니다. 그래서 정죄의식을 안 느낀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정죄는 죄를 범함으로써 느끼는 죄책감이지요?
잘못을 해도 두근두근 하거나 그런 것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 범죄함이 없기 때문에 정죄함도 없다는 건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어쩌다가 말이나 행동으로 실수를 할지라도 두근두근 하는 것이 없어요. 강한 평강의 능력 때문에요.
▷ 1절에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세요.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인데요. 만일 모래주머니를 달고 마라톤 경주에 나가기 위해서 연습을 한다면 그것이 참 귀찮잖아요. 떼어버렸으면 좋겠지요. 그것 달고 경사진 곳 올라가려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렇게 한참 애를 태우다가 떼면 참 자유롭고 마음대로 달려가게 되잖아요. 그렇게도 영적 생활하는 원리를 얘기해볼 수 있고요.
또 자전거를 타고 평지를 달려가는 것과 가파른 경사가 있는 언덕을 달려 올라가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해가 될 것 같아요. 평지를 자전거 타고 달려갈 때 어떻습니까? 옆에서 걸어가는 친구와 오순도순 애기하면서 조금 빨리 가고 싶으면 폐달을 좀 더 밟을 수 있고, 천천히 가고 싶으면 살살 가고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가파른 곳은 어떻습니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 폐달을 계속 밟아야만 되지요. 그래도 잘 안 올라가려고 자전거가 발버둥을 하잖아요. 그렇게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쉽지요.
▷ 완전히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정죄함을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인가요?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완전'이라는 말은 다윗왕의 큰 실패, 아니면 모세의 실패 등을 자꾸 얘기하게 되니까요. 저는 그 단어는 참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완전무결이라는 단어는 저심해서 사용을 해야지요.
▷ 다윗왕이 밧세바 사건 후에. 또 압살롬의 반역을 치른 후에 참회의 시를 쓰잖아요. 그때 아주 철저하게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내용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는 평강이 어디로 간 것인가요?
그때요? 평강이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수축상태는 있을 수 있었겠다고 봐요.
▷ 정죄의식을 갖는 것은 아니고요?
정죄의식, 범죄를 했기 때문에요? 다윗왕은 그런 죄를 범하고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을 받기까지 잘 몰랐잖아요. 그것도 아마 이런 평강의 능력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고요. 깨닫게 해주셨을 때 비로소 크게 참회하게 된 것이지요.
▷ 그래서 다윗이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전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1)라고 하셨군요.
그렇지요. 그것도 역시 그런 은혜 체험이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생각이 되고요. 또 에스겔 36장 26절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여기도 보면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런 표현이 영적할례 받는 경험이지요.
▷ 로마서 8장 1절과 2절은 같은 내용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잖아요. 전신갑주 입고 나서 생명수 폭주 체험을 하게 되는데, 여기 그 말씀은 없는 것이지요?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수 폭주, 다시 말해서 성령의 폭주에 대한 것을 따로 구분해서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 실제 경험상으로 볼 때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거기에 대한 표현이 로마서 8장에는 나와 있지 않지요?
그렇지요, 그런 체험이 따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밝히기는 어렵지요.
▷ 생명이란 단어가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어요.
7장에서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전혀 안 나오고 있어요. 단지 한 군데 나오지요. 7장 10절에 나와요. 거기서 말씀하신 것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그러니까 죄에 바지게 했다는 것이지요. '생명에 이르게 하라 그 계명'이라고 말했어요. 로마서 8장에서 비로소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의 체험담이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좁은 문, 효시의 집, 십자가의 언덕을 통과하면서 복음을 따르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많이 알게 하시잖아요. 그런 것이 로마서 7장에서 나와요.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되는 경험을 가나안 정탐할 때 잠깐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7장6절에 보면 나온다고요. 그리고 그 다음에 아주 극심한 내면생활로 말미암아 오는 죄의 법칙 때문에 고민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이 말씀도 성장의 순서에 맞추어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7:6) 여기서 '영의 새로운 것' 있잖아요. 이게 바로 사실상 가나안 정탐을 체험한 것입니다.
▷ 성장론적인 것이 암시되고 있다고요?
여기에 그런 것이 조금 암시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비로소 철저하게 내적 자아를 깨뜨리는 광정에서 죄의 법칙 때문에 극심하게 고민을 하다가 해결되는 장면이 25절에 나오지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이게 딱 한 번 나오잖아요.
▷ 전혀 새로운 경험이라는 뜻인가요?
그렇지요.
▷ 그 뒤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나가는 과정이 자아 깨뜨리고 소유 파는 과정이고요?
거기서 이런 내적 고민을 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라는 거지요. 이것만 봐도 성장론적인 하나님의 뜻이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한마디 한마디가 참 질서정연한 거예요. 그러니까 신광야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내적 고민을 하는 것은 사실상 그렇게 중요성이 없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