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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영성의 신비가/이용도 목사

[스크랩] 용도신학

by Andrew Y Lee 201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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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도 신 학



1. 하나님

하나님에게 물어보지 않고는 말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에게 기도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며 성경을 보지 않고는 편지를 쓰거나 책을 보지 않으리로다. 이렇게 주님은 나에게 끌리시고, 나는 주님에게 끌리어,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일화)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키운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키운 바 되어 결국 나는 주의 사랑안에 있고 주는 나의 신앙 안에 있게 되는 것이었나이다. 아-오묘하도소이다. 합일의 원리여! 오-나의 눈아 주를 바라보자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자 잠시라도 한눈 팔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보세. 나의 시선에 잡힌 바 주님은 나의 속에 안주하시리라. 오-나의 눈아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자 주께서 피하시랴 피치 못하시게 다만 그만 바라보자.
생명의 공부 = 영원한 생명은 곧 하나님과 예수를 앎이라. 생명은 곧 진리다. 이 知는 연구 탐색의 知가 아니라 感하여 知하는 것이다. 感하여 知하는 일이 가장 物을 잘 知하는 법이다. 靈의 지식과 영의 생명과는 나누일 수 없는 동일한 생명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영적 생명이오 영적 생명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은 생명의 성질 또는 생명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상태에 있는 생명! 이것이 곧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본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으로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 받은 생명이다. 하나님이란 말에 두 형용사가 있으니 [獨一하신]과 [참이신]이 곧 그것이다. 이 두형용사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하는 말이니 하나님을 안다함은 곧 그의 [獨一이심],[참되심]을 아는 일이다. 하나님이 獨一이심과 하나님이 참이심 이는 무한한 제목이오, 장엄한 사실이라 이에 면하여 생명은 영원히 새로울 것이오, 영원히 자라고 자랄지니 한이 없는 문제라 누가 능히 설명하리요 만은 우리 믿는 영혼은 이미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시작되었고 그 생명에 참여하여 있으니 우리의 먹고 마실 바로다.


2. 예수(그리스도)

예수는 파괴적이면서 건설적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면 가루가 되리라. 예수가 들어가면 모든 불철저와 불완전은 깨어진다. 그리고 철저와 완전의 성행이 준공된다. 예수를 우리에게 주시오, 예수 그대로를-.
예수의 모든 아름다운 성격은 그의 십자가에 모두 집중되었습니다. 그 피에 모였습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에 그 신의 성품을 바라볼 때에-우리는 내 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 죄의 성품과 정욕으로 짓는 죄를 끊어 버리게 됩니다. 그후에는 성신이 늘 우리의 마음에 계십니다.
예수는 나의 구주, 다른 사람이나 돈이나 학식이나 부모나 자식이나 다-나를 구원하지 못하되 예수만 나를 구원하시는 구주가 됩니다.
우리의 배울 바는 예수의 생활 그것이다. 예수는 신자라고만 하여 죄인인 인간들이 감히 따라가지 못할 것으로 전하여 내려온 현 기독교 신학의 一流는 분명히 기독자로 하여금 기독에게서 무한히 멀게 만들었다. 예수의 생활은 외적으로 보아 아주 단순하였다. 복잡한 현대의 사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내용은 깊고 높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활을 알려면 그의 외적 표현으로만은 그를 알기에 부족하니라, 그의 내적 움직임 그의 움직임 그의 영의 요동,거기를 한 곳이라도 만져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 영과 나의 영과의 접촉으로부터 일어나는 愛의 전광 또 愛의 영성이 나의 생명 전체에 영향을 주게 하여야
한다. 곧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의 전체가 움직여지고 나는 나의 존재조차 찾지 못할 지경에 들어가야 한다.


3. 주(주님)

내 마음의 자각, 이힘이 심히 약함을 나는 압니다. 주여 당신의 형상을 보게 해 주소서 주의 형상에 미치고 끌리게 해 주소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고 안 보려고해야 한 볼 수 없어 내 앞에 있어서 힘있게 나를 끌어 주에게서 떠나지 않게 할 형상을 나는 바랍니다. 나는 그 형상을 나의 주라 부르고 나의 생명이라 부르나이다. 형상을 보고 따를 때에 세인은 나를 이상하게 보겠지요. 그리고 의심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실상 보는 것이 있고 거기에 끌려 그럼으로 나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주는 나의 자본이요, 나의 건강이요, 나의 친구요, 나의 힘이요, 위로, 소망, 생명이요, 구원이시었다.
다 주와 나와의 사이 같이 가까운 사이가 세상에는 없습니다. 이 앞으로는 있을 지 지금까지는 없었습니다. 이 앞으로 사람 중에 있대도 주님 다음으로 가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밖에 없겠지요.
주의 이름이 하나님과 인간을 친합하게 하고 사람을 친애하게 하였나이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 사람을 사랑하기에 이르렀나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평화의 왕이시요,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심중에 영접하여야 되겠나이다. 주님은 겸비를 자리로 하시고 그위에 앉으시며 마귀는 교만을 용상으로 하고 거기 오는 것이었습니다. 고로 항상 겸비하지 않으면 주님은 들어와 계시기가 어렵습니다. 겸비하소서.
형제여 주의 품 안에서 영생하소서. 육의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영의 주에게 끌리어 사소서 그 영에게 삼키운 바 되어 물욕의 인, 정욕의 인, 죄악의 인은 아주 무가 되소서 그리하여 몸은 땅에 있으되 영은 높이 하늘에 살으소서.
주안에 점점 들어갈수록 핍박은 점점 더할 것임을 깨닫는 동시에 핍박이 더할수록 은혜와 영광도 더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 중에서 예수의 정지를 더욱더 잘 깨달을 수있는 것이올시다.
주님! 모든 설계 다-주께 맡기고 오든 가든,앉든 서든,교역을 하든 농사를 짓든,주님의 생명만이 우리에게 있어 더욱 더 풍성하여 지기를 간구하는 외에 더 큰 일이 없을 것이로소이다. 이것 저것을 구한다는 것보다 주님만 소유하도록 다만 그 하나를 구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이라고 하면 주님 외에 달리 무엇을 구하오리까? 오-주님! 오-주님! 첫째도 주님,둘째도 주님! 또 세째도 주님이었으니 주님은 곧 우리의 알파요, 오메가로소이다. 교권하에서도 주님! 단상에서도 주님! 산중이나 거리 속에서도 주님 그저 어디서든지 주님이면 그만이요, 또 완성이외다.


4. 나

나는 세상을 향하여 죽겠습니다. 그리하여 될 줄을 앎이니이다. 세상은 또 나를 향하여 죽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하는 나의 나이요 새상은 세상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세상과 어울린다면 이는 [나]라는 나도 못되고 세상이라는 세상도 못되어 결국은 나도 아니요 세상도 아닌 일종의 기형물을 낳아 놓을 것입니다.
희생-나는 희생이 되려나이다. 참 희생이 되려나이다. 사람들이 나를 욕하면 그냥 가만히 욕을 먹겠나이다. 나를 못났다 하며 핍박하여도 나는 말 없이 그냥 달게 받겠나이다. 혹 나를 죽이려 든다고 해도 거기도 역시 아무 대항도 안하려나이다. 그냥 맞아 죽으려나이다. 곧 희생이 되려나이다 그 잘 잘못도 내가 가릴 바 아니니이다.
나는 본래 나의 일이 없습니다. 다만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는 것 외에 나의 일이 없나이다. 나의 일을 죽기까지 충성으로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1) 나의 위치(존재)피조물
나는 다시 나를 주께 드리나이다. 맡기나이다. 주께서 마음대로 주므르시옵소서 주무르시는 대로 주물림을 받을 점토(진흙)와도 같습니다. 무엇을 만들든지 聖意대로 만드시옵서소. 주여 나는 온전히 주의 피조물인 것뿐이로소이다. 주는 나의 창조주시며 나는 주의 작품이로소이다. 나의 존재는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能을 또 그 愛와 大知를 증거하고 있는 조각품이로소이다.


2) 나의 활동 공(球)
나는 주의 놀리시는대로 놀-공이올시다. 나는 공을 봅니다. 공은 나요, 그 주인은 주님이었습니다. 주여 사랑의 줄로 나를 매시옵소서. 그리고 마음대로 주께서 놀리시옵소서. 나의 운동은 그것이 나의 운동이 아니라 주의 팔의 운동이었습니다. 주의 팔을 펴서 끈을 늦추시면 나는 또 굴러 나갈 것입니다. 눈도 귀도 입도 수족도 다 없는 그냥 공이로소이다. 나의 눈도 버리고 귀도 잘라 버리고 수족도 버리고 전체가 구르기 쉽게만 되어지사이다. 나의 그것들이 있으면 나는 구르기에 거리낄 것이 심히 많겠나이다. 그러면 주께서 내가 보는 대신 보아 주시고, 듣는 대신 들어 주시고 통하는 대신 주께서 통케 하실 것이었으니, 나의 이, 목, 구, 비, 수, 족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이까 곧 주의 눈이 나의 눈이오, 주의 귀가 나의 귀였느니라, 나의 눈은 내 자체에 있지 않고 주에게 있나이다. 그런고로 나는 주를 통하여서만 듣고 주를 통하여서만 걷고 동작하는 것이었습니다.

3) 나의 순종 - 연
나는 한, 연이로소이다. 줄을 매어서 임자의 놀리는대로 노는 연이로소이다. 오르게 하면 오르고 내리게 하면 내리고 좌로 하면 좌로 우로 하면 우로, 퇴금 주는대로, 줄을 풀면 나가고 감으면 오고 하는 연이로소이다. 연은 항상 그 얼굴(정면)을 임자에게만 향하고 있음이 그 특생이로소이다. 만일 뒤집혀서 등이 임자 평에 온다면 이는 벌써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나이다.
주여 나는 언제든지 주의 편에 정면하고 주의 말만 듣게 하옵소서 말을 안 듣게 될 때 연은 땅에 곤두박질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주여 나는 말 잘 듣는 연이로소이다. 주님은 나의 산성이요, 반석이요, 구원의 뿔이로소이다. 내가 어디를 가서 서든지 따라다니며 지켜 주시는 산성이로소이다.
나의 앞에 죽음 밖에 없노라! 십자가! 나는 오직 그후에 오는 부활을 바라노라 이 육에 속한 體는 완전히 죽여 버리고 영에 속한 體로 바꾸려 하노라. 이것도 聖意를 기다릴 뿐이로다. 내能으로는 죽을수도 없고 더구나 사도라는 그런 영광을 감당치 못하노라. 오직 聖意에 있을 뿐이로다. 오-성령이시여! 나를 이끌어 골고다까지 아멘.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루라도 온전히 주의 뜻대로 살면 그것이 나에게는 큰 복이요 영광입니다. 늘 주안에서 기도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평안하기를 원치 않노라. 오래 살기를 원치 않노라.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노라. 나의 소원대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주기 바라노라.
나는 대중이 나의 상대가 아니요 다만 一人이 나의 최선이 상대이었으니 대중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버리지 못하나 一人을 위하여는 나의 전체를 희생에 共하는 것이외다. 회중에서 실패 인전에서 승리! 이것이 우리에게 있을 바 일이구려 우리가 회를 위하여 충의와 사랑을 다 - 하지 못하나 一人을 위하여는 생명을 아끼지 말 것이외다.


5. 신 앙

신앙은 이론이 아니고 곧 능력이다. 신앙이란 곧 생명의 역환의 일이외다. 세상에 살던 나의 죄악의 생명은 하늘에 사는 예수의 생명과 바꾸어지고 物을 바라던 나의 생명은 영을 원하는 그 생명과 바꾸어지고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 애쓰던 나의 생명은 환희와 평화와 용기로 날뛰는 그 생명으로 변하여지고 땅위에서 물욕과 정욕에 쌓여 오래 잘살기를 꿈꾸던 나의 생명은 이를 저주하여 버리고 天에 살려는 생명으로 바꾸어 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지상에 있는 나의 육이 이것의 욕심대로 물위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여 그 보수로는 번뇌와 고통 비애와 탄식 마지막으로 사망을 차지하게 되어 있는 그 생명은 예수에게 갖다 주어 십자가 상의 제물이 되게 하고 그 대신 천상에 있는 나의 영이 聖意를 따라 진리에서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얻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곧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이었습니다. 믿는다하여도 이 생명의 역환이 없어! 그는 아직 사망에 거하는 자올시다. 우리는 부절히 우리의 생명에서 불의를 찾아 가지고는 예수에게로 달려가서 그 생명의 의와 바꾸어 가지고 나오나니 이것이 곧 우리의 예배중에서 되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예배중에 있었다 할지라도 이 생명의 역환의 일이 되어지지 않았으면 이는 헛일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본업이었나이다. 이를 부업같이 취급하여 성취할 수 있는 바 아니올시다. 부업에 실패하여도 본업에만 성공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승리를 얻은 자이외다. 이 신앙에 살기 위한 최선의 노력은 기도 그것이외다. 그러므로 신앙 곧 기도[곧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신앙 곧 생활, 기도 곧 생활]이라고도 불러 가한 것이외다.
[생각보다 기도, 연구보다 신앙!] 이것을 [모토]로 하고 그냥 믿을 것이외다. 믿고 부르짖는 거기에 영적 광명은 나타나는 것이요, 심적 해방은 성취되는 것이외다.


6. 기 도

웅변은 사람을 동케 한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동케한다. 웅변은 금전을 나오게 한다. 그러나 기도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은혜를 내리게 한다.
기도하고서 하는 설교는 익은 설교요 기도 안 하고서 하는 강도(설교)는 날강도(날강도)니라. 진리를 알자. 그리고 생명에 불타 살자. 아는 것만이 신앙이 아니라 그 진리에 생명이 가해져야 한다. 진리를 알기 위하여(배우기 위하여) 설교를 듣자. 생명을 얻기 위하여 신께 기도 드리자.
은혜의 생활은 곧 기도의 생활에서부터 시작됩시다. 기도가 없을때 은혜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1) 기도의 생활은 용기의 생활입니다. 연약하고 겁많은 때라도 간절이 외쳐 기도하고 난때에는 큰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2) 기도의 생활은 위로의 생활입니다. 아무리 슬프고 외로운 때에라도 주께 엎드려 간절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난 때에는 마음이 시원하고 큰 위로가 오는 것입니다.
3) 기도의 생활은 거룩한 생활입니다.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생각이 끓어오르고 입으로 악하고 더러운 소리가 자꾸 나올 때에 기도를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면 모든 불평과 원망도 다 없어지고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이 됩니다. 기도의 생활은 일편으로 자기의 죄와 허물을 찾아서 참회하는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 공로와 그 사랑을 우러러 보며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자기의 죄만을 볼 때에는 괴로우나 주님의 십자가를 우러러 볼 때에는 기쁘고 감사한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곧 나의 기쁨이요, 나의 의미요, 나의 생명이요, 나의 일외이다. 기도가 없어 나의 기쁨도 없고 나의 존재도 의미도 없고 나의 생명도 없고 나의 일도 없습니다. 기도는 곧 나의 생명이요 나의 운동이올시다.
기도! 기도! 아-그리운 기도! 아-그리운 기도! 내 생명이 떠날까지 할 수 잆는 기도를 주옵소서. 기도는 나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어지이다. 나의 생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7. 사 랑

나에의 사랑과 신에의 사랑
나의 사랑은 죽이고 그리스도의 사랑만 나타낼지어다. 네가 무엇을 사랑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직접 그를 사랑하게 하라.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신앙은 허위의 신앙이니 이는 사람을 죽일 사랑이니라. 세상에 신앙에 사는 사람이라 하여 쟁투가 많은 것은 사랑에 근거를 두지 않은 신앙 곧 무애신앙의 소유자가 많은 까닭이니라.
사랑은 곧 생명이다. 사랑없는 신앙은 생명없는 신앙이니라. 교리와 신조의 송독, 교회 출입의 형식 이런 신앙의 형식(껍질)으로 신앙의 전부를 삼아 스스로 속는 자 그 얼마나 많은 현대인가, 네가 신앙의 소유자이냐 그러면 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될찌어다. 사랑이 없는 신앙은 불 꺼진 등이요, 맹인의 안경이니라.
사랑은 사람의 생명이라 고로 사랑은 곧 사람 그것이었느라 사람이 사람됨은 그 愛 즉 그 의지에 있는 것이요 그 지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느니라. 고로 그 知가 얼마나 고상하다해도 애가 저속하면 그는 비속한 인격이었느니라.

8. 교 회(기타)

교회는 신령한 은혜가 충만하여야 된다. 그리고 사회에 선구가 돼 모든 일에 선봉노릇을 해야 한다. 신령한 능력을 가지고 예수 이름으로 우리의 생활을 개척함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기독교의 현재의 위치
기독 교회는 그의 주 그리스도의 이해를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오늘까지 옮겨 놓으면서 왔다. 사람의 우매가 가장 완전한 생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 통하지 않으면 안될 여정을 통하여 온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그 인간의 우매의 무량을 나타내면서도 또한 그 이교세계를 정복하는 임무도 다하여 왔다.
기약이 차서 개혁이 행하여져 프로테스탄드의 신앙은 일어났다. 이는 인류가 그리스도 이해에 향하여 진보한 바 - 신기원이었다. 인류는 더 높은 신앙을 가지게 되고 성령은 더 높은 뜻으로 저희의 영혼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의 개혁 이후 합일에 이르기까지의 4세기간 사람들의 신앙은 개혁자의 종교 체험 이상의 진보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대개는 그 범위 내의 부흥이요, 개혁자들이 제창한 그 진리의 소화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개혁자들의 종교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그것보다는 진보한 것이지만-결코 종국적인 것은 아닌 것이었다. 과연 합일의 기독교계의현상은 어떠한가? 옛 신앙은 그 형체가 남아 있을 뿐이요. 그 초기의 생명과 힘은 잃어버렸고 새 신앙은 상상과 기대를 말할 뿐이요 신앙 그 자체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옛 신앙을 가지고서는 세계가 정복되지 않는다고 새 사람들은 옛 신조를 의심하며 부인하고 새 신조를 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합일은 정히 기독교계의 한 암흑 시대이다. 지금의 기독 교회는 세상에게 져있고(패북) 불신은 공연하게 개가를 불러 승리를 자랑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금일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는 금일의 세정에 상응한 폭탄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은 인류의 영계의 혁명기이다.
영과 육
새벽 일찍이 예배당에 나가 기도하다. 영의 승리는 육의 파멸에 있느니라. 육은 멸시를 당할 때 영이 윤택하여 지느니라 영의 대적은 육이었느니라. 영을 살리려면 육을 죽이라 영의 생은 육의 사에 있으니.
영이 安하려면 육에 苦를 주라. 영이 귀하려면 육을 천하게 하라. 영을 樂하려면 육이 悲하라. 육신의 명예는 영의 치욕이니라. 육의 환락은 영의 비애였느니라. 육이 영멸에 입할때 영은 영생에 입하나니라.
육의 멸! 이 곧 영의 흥이요 육의 死가 곧 영의 生이었느니라. 오 - 주여 나는 육에 죽고 영에 살려 하나이다. 나의 육을 죽이시고 영을 살려 주옵소서-.
청빈
무릎 위를 가리울 수 있는 작은 옷 한벌, 목을 축일 수 있는 물 몇 방울을, 그리고 지팡이 하나 이것만을 땅 위에서 전재산으로 소유한 자 그리고 하나님 품에 안기워 다른 아무 것도 더 필요치 않은 자, 저는 복 많은 자요 또 그가 곧 주의 은총을 받은 자이니라.
두 가지 사람
1) 의식을 위하여 고민하는 사람 2) 자기의 성격의 결함을 보고 고민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전자는 육을 위하여 고민하면서 사망의 길을 걷는 생활이요 후자는 영을 위하여 고민 하면서 영생의 길을 걷는 생활이니라.
소유의 이환
주님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는
세상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
舊를 버릴수록 新은 온다.
용기
베드로가 칼을 들어 말고의 귀를 잘랐다. 저가 칼을 들어 저희를 대적할 용기는 있었으되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며 순순히 잡혀 갈 용기는 없었도다.
전자는 육용이요 후자는 영용이요 애용 다른 제자들도 그때 일을 알고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였으나 미구에 다 달아나고 말았다. 칼로 치려는 용기는 있었으나 아직 사랑함으로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전자는 세용이요 후자는 聖勇이다.
성전
성전은 주님과 나와의 특별 면회소요 상담실이었느니라. 이는 나의 모든 문제의 해결처요 판결 골짜기였느니라. 나는 언제든지 때가 없노라 성전에 출입하는 일정한 때가 없노라. 주님이 그리운 그때가 나의 성전 행의 때니라. 아 - 성전은 나의 애인 주님을 조용히 만나는 면회실! 나는 거기서 내 신랑 예수님 품에 내 전신을 맡기노라.
입신의 계단
1) 예수가 같이 계셔야 함과 평안과 생명을 얻게 됨.
2) 예수가 내존 하시게 하자면 심중에 죄와 의심을 다 제거 청소 하여야 함.
3) 죄와 의심은 성신이 임하셔야 소멸됨. 성신은 간절한 곳에 오심 침식을 잃어버리도록 되는 간절함.
성화의 사대작용
1) 밝히 비치어 심중에 있는 죄를 드러냄
2) 그 드러나는 죄를 태워버림(통회의 눈물과 함께)
3) 가슴에 열을 일으킴
4) 주님을 증거하게 함
종교생활
종교생활은 - 1) 참회의 생활
2) 기도의 생활
3) 감사의 생활
4) 사랑의 생활
5) 희생의 생활

내가 죽는다고 낙심할 것은 없나이다. 다만 주를 믿으니 내 몸은 죽으나 사나 주는 나의 구주이시매.
주여 이제나 저제나 한번은 죽어 썩을 몸이오니 성하건 병들건 주께 이 몸을 바치오리다. 주여 달리 무엇에 쓰오리까 이 한 몸을!
狂(광)
아주 미칩시다. 예수에게 아주 꽉 미쳐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 성광을 이룹시다.

자매여 그대는 그대의 병을 기뻐할 수 있나이까, 만일 거기서 감사와 기쁨을 가질 수 있다면 자매는 진실로 구원을 얻은 성녀요, 병석에 있어 몸은 불운에 처해 있을지라도 자매는 영으로 천적생활을 하는 天의 人일 것이다.
오 - 내 사랑하는 작은 종아, 너는 이제 가장 나를 잘 배울 기회에 있음을 기뻐하라.
오 - 나의 사랑하는 소자야, 이는 하늘이 너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임을 기억하라.
진리와 애
진리는 강하여 초달같고
사랑은 유하여 눈물 같으니라.
진리의 일은 쓴 약같고
사랑의 일은 단 꿀 같으니라.
고로 진리의 사도는 세상을 책망하고
사랑의 사도는 사람을 위로하나니라
한 사도일지라도
진리의 신이 움직임을 받을 때
저는 책찍같이 나타나고
사랑의 신의 움직임을 받을 때
저는 눈물로써 나타나느니라.

 
 
출처 : 샘솟는 기쁨
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메모 :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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