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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영성의 신비가/이용도 목사

[스크랩] 이용도 목사님의 생애

by Andrew Y Lee 201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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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님의 생애 연구




나는 홀로 주님을 따라갑니다.
나의 자랑의 머리도 깍아버리고
치례의 옷도 벗어버리고
그것은 세상의 자랑이요,
호사는 되되 주님께는 거리낌이 되니까요

나는 굴갓을 씁니다.
먹물든 장삼을 입고 새끼띠를 띱니다.
이제 갑니다.

홀로 향하여 가는 곳
남이 아는듯 모르는듯
다만 골고다로만
주의 뒤를 따라갑니다.



1. 출생과 시대적 배경 - 소년시대
20세기 초두의 한국은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외세의 침략세력으로 약해져가는 시절,나라를 사랑하고 민중을 깨우칠 수 있는 사람, 충성된 애국혼과 열렬한 신앙의 사람이 나왔으니 그가 곧 이용도였던 것이다.
이용도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흥씨의 세째 아들로 세상에 왔다.어려서 잔병이 많고 신경이 과민한 편이었고 울기 잘하는 점등은 보통 이하의 아이였다. 그러나 보통학교 시절엔 몸도 성적도 좋아졌고 친구들과 사교성이 많았다.
그러나 가정환경은 그리 좋은편이 아니었다. 부친은 대주가인데 모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집안은 항상 편안하지를 못했다. 부친은 신앙의 모친을 항상 박해 압제하였다. 그래서 모친은 어린 용도의 눈앞에서 양잿물 사발을 추켜든 떄도 수차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모친은 어린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 기도에 깊은 감화를 받은 아이는 세째아들 용도였다. 13세때 그는 벌써 기도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예배당 종각에 올라가서 여러시간, 혹은 밤새도록 기도를 올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13년경 국권을 빼앗은 침략자는 우리 동포에게서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썼다. 특히 교육기관에서 그러하였다. 시변리 공립보통학교의 교장 목촌은 기독교를 믿는 아이들을 학대하기로 유명하였다. 하루는 어린 용도가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도의 품행과 모범적인 학교생활때문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용도는 그 중심을 충분히 발로시켜 사랑, 열성, 희생, 봉사의 생활을 실천하여 집안과 근처에 점점 그 존재를 뚜렷이 알려주게 되었다.
(1) 어머니가 병중에 낳은 누이동생 순례를 위한 젖동냥 - 아침 등교전 그리고 하교후 젖동냥. 어린 누이에게 젖을 얻어 먹이다 용도는 누이가 울때 함께 울었고 누이가 배고플때 함께 굶었다.
(2) 어머니는 병약하고 집안살림은 가난해 그는 혼자 눈물과 땀을 다 쏟으며 세간살이를 받들었다. 구걸하고 물길어 주고 절구질하고 힘든 일하는 것등은 혼자 맡아 하였다.
(3) 구척이나 되는 마귀를 찬송으로 물리침
(4) 손재주가 좋았으며 근면하여 일이 끝날때까지 꾸준히 일하며 일을 붙들면 미친듯이 열중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결사면려하는 성질을 가졌다. 또한 말재주가 비상하여 15,6세때 그의 존재가 윤치호, 이상재, 양주삼씨에게 알려졌다.


2. 중학시대
시변리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용도는 1915년 개성 한영서원에 입학하였다. 4년 수업연한을 그는 9년동안 다녔다. 학비를 벌어 쓰느라고 반공을 하니 남이 1년하는 공부를 2년해야 하고 1919년부터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4차 투옥되었고 2년간의 징역 언도를 받고 복역하였으니 정식 졸업장도 못 받게 되었다.
(1) 반 노동과 학업 - 흙일, 학교 부설 직조장의 일, 1백 40여리의 등학교길
(2) 1919 - 1924년까지 5년동안의 애국(독립)운동시대 - 명석한 두뇌와 예리한 관찰로 필요할 때 일을 꾸미고 주의깊고 쾌속하게 일을 진행시켰다. 또한 대중앞에서의 열변과 웅변으로 형사까지도 감탄하곤 하였다. 그는 언제든지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벌을 혼자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였다. 그래서 동지들이 벌을 받지 않게 하려고 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하도 진실하고 정성되고 뜨거운 웅변에 취조하는 입장의 모든 사람들이 용도를 동정하고 아끼고 우대하였다.
서대문 형무소 복역시 겨울을 당해 철갑을 두손에 밤낮 채워두는 사형수의 손목에 얼음이 꽂혔다. 이 철갑과 얼음에 얼어붙은 손목을 그는 가끔 제 뱃속에 품어주어 녹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배고파하는 죄수들에게 자기 밥을 주고서 고요히 기도를 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


3. 신학시대
서대문 형무소 출옥후 용도는 송도 보통학교를 찾아갔다. 이때에 학교 교장은 곤란에 빠졌다. 그래서 연구하고 애쓴 결과 용도를 신학교에 보내기로 하였다. 처치 곤란의 악질 애국병자를 멀리 격리, 추방하는 마음에였다. 오직 애국심에 불타고 독립운동에만 열광한 그는 아직 신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만세를 불러 목을 터지고 찢어버리고 매를 맞고 맞아 살이 다 말리우고 뼈가 부서져 가루가 되면서라도 독립운동을 하여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요, 또 그것만이 조국과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교장과 선생들이 하도 권하고 또 곰곰히 생각하니 그 끊는 가슴을 촌구석 어디가 있어서도 식힐 도리가 없으매 눈물의 걸음을 걸어 서울의 협성신학교 영문과 일학년에 입학하였다.

(1) 강동행 이전의 신학생 용도
애국의 불이 확확 불고 있는 가슴을 부여안고 밀리우고 몰리워서 신학교에 들어온 용도는 마음없는 공부에 억지로 마음 붙이려니 괴롭고 안타까웠다. 신학생다운 품행보다는 그저 신문, 잡지, 시가, 소설, 법률, 정치서적등이나 읽고 이론이나 캐고 논쟁하는등 경건치 못하고 얌전치 못한 행동으로서 가슴속의 애국심을 달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론가, 논쟁과, 말썽꾼, 경우꾼, 싸움패, 과격파로 알려졌다. 그러나 차츰 마음이 진정되고 자리가 잡혀 그는 유년지도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시, 노래, 연극등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용도는 가슴 한편 구석에 그 누구도 모르는 특유의 고민과 우울이 계속되고 있어 그의 오랜동안의 심적 불안과 성격의 분열은 몸과 마음을 아울러 파괴하여 2학년 둘째학기를 마치는 1925년 겨울에는 폐병 제3기, 공부를 쉬라는 의사의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때에 폐병 제3기라는 진단은 사형선고였다.

(2) 강동에서 되어진 일
겨울 방학이 되자 용도는 3원짜리 ‘부루도제’ 한병을 사 가지고 진해와 함께 강동으로 요양차 갔다. 그곳에서 수일 지내노라니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도 조르는 바람에 피할 도리가 없어 부흥회를 인도하기로 하였다. 내일부터 부흥회를 인도해 본다는 결정을 한 둘은 곧 밖으로 나갔다. 대동강 상류의 얼음판 위에서 밤이 깊어지도록 기도하였다. 그 이튿날도 새벽 일찌기 나가서 저녁때가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날 찬송을 인도한 용도는 149장을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부르다 울고 그동안 예배당은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다음날 설교는 용도가 맡기로 하였다. 용도는 떨리는 마음에 밤새도록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기도로서 밝히고 새벽에 강단에 나섰다. 나서니 찬송을 불러도 눈물이요, 기도를 올려도 울음이다. 설교도 좀 해내려 가다가는 그저 울음에 떨려 말소리가 흐리워지는 것이었다. 용도는 어느덧 자기를 잊어버리고 제몸을 잃어버렸다. “조용한 곳에 가서 약을 먹으며 고요히 치료를 하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몸이 의사의 명령은 잊어버리고 그런 생활은 해 볼 생각조차 안하였다. 주님께서 불러 세우시는 것이었으니 이 자리에서 한마디라도 외치고서 죽는다는 결심이 열정으로, 열변으로 화하여 그냥 결사적으로 외쳐댔다. 이렇게 한주간을 인도하니 원기왕성해지고 밥도 전보다 두배는 더 먹게 되었다. 또한 자진해서 타교회의 집회도 인도하였다.
(3) 강동행 이후
강동에 다녀온 용도는 딴 사람이 되었다. “바치라, 그저 완전히 바치라. 주님께 완전히 바치기만 하면 내 모든 문제는 주님께서 맡아 주관하시고 내 몸 전체도 주님께서 뜻대로 잘 맡아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얻은 주님의 사람, 주님의 기개, 하늘에 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벌써 죽었을 사람이 죽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더욱 새힘을 얻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됨을 얻은 그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는 동안에는 내 생명을 거두시지 않을 것이니 그 뜻을 따라 그 뜻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만 기도하고 준비하고 노력하기로 결심하고 또 맹세하는 것이었다.
강동을 다녀온 후 여전히 아동을 상대로 한 동화, 동요, 무용에 몰두하나 전날의 것에 비해서 퍽 깊고 신령하고 신비스러운 내용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점점 아동에서, 학우로, 일반 신도상대로 그 목표는 넓혀지고 높아지고 깊어지는 것이었다. 신학교 재학중 많은 아동극등 각본과 동요곡등의 작곡과 성극, 아동극에 출연및 지휘를 하였다. 특히 비극의 주역으로 나서는 그는 장안남녀의 눈물을 한없이 자아내는 명배우였다. 그는 또한 음악에 재능이 특출하여 신학교 찬양대에서 제일 유능한 멤버였고 풍금은 배우지 않고서 찬송가를 능숙히 쳤고 가야금도 배우지 않고 명곡을 잘 탔다.
신학 4학년 가을학기 연희가 있어 용도를 재학중 9월 13일에 파송하였다. 이때에 그가 처음 파송받은 곳이 강원도 통천구역이었다. 그때 이후 그는 공부보다는 깊은 명상에 잠기는 일과 애타고 끊는 기도의 생활에 치중하는듯 보였다.
졸업을 이삼개월 앞둔 1927년의 성탄 - 이날에 협성신학교 학생회 주최의 ‘십자가를 지는 이들’은 용도의 원작이었고 주역도 그였다. 십자가를 진다는 많은 군상들이 지나간후 뒤를 이어서 나타난 이용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비틀걸음으로 힘들게 힘들게 형장인 갈보리 언덕까지 올라가 쓰러지는 그의 모습은 이천년 전의 그리스도 수난의 광경을 너무나 분명히 눈에 보여주는 것이어서 회장은 통곡의 눈물의 골짜기로 화하였다.

(4) 신학교 재학 4년간의 생활 - 심리면
* 사상적 고민의 시기
사상 전향을 위한 고민. 끓어 오르는 애국심은 왜적과 일전하고 싶은데 지상의 것을 초월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계명의 고랑에 매여지는 것은 참으로 창자를 끊어내는 애닮음이었다.
* 이성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연애의 고민
그는 어렸을때부터 근처 처녀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결혼한 후 이방면에서 말썽없이 평온 무사하였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와서 여러가지 방면에 특출한 소질을 나타내게 되니 장안의 여학생의 일부가 그에게 관심을 집중하였다. 특히 ‘Y’라는 처녀의 유혹은 대단하였다. 여러가지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어 은근히 열렬히 끌어당기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 이년 이상은 이 사건으로 고민하였다.
* 빈곤과 병약을 중심으로 한 고민
일면에서 그럴듯한 유혹에 둥글둥글 끌려 들어갔으면 학비쯤은 문제없이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나 고민하며 고생하면서도 내몸을 지키고 양심을 살리려니 생활은 늘 궁핍하였다. 그래서 기숙사에 있지 못하고 셋방을 얻고 나가서 좁쌀죽을 쑤어 먹은 때도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 그의 몸은 극도로 약해져서 그의 폐는 약해지며 피를 토하게 되었다. 이상에 말한 세가지의 고민이 겹치고 겹쳐 약한 그를 무자비하게 내려누를때 용도는 가끔 비명을 올렸다. 고민하고 몸부림치던 나머지 한강에 투신 자살을 하려고 밤중에 나가서 노들강변을 밤새도록 헤매다가 밤이 다 밝아서 돌아온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 장래를 위한 고민
주님의 일꾼으로서 주님의 명을 따라 주님의 양을 맡아 길러야 할 장래를 생각할 때 그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있었다.

(5) 신학교 졸업
1928년 1월 28일, 협성신학교 제14회 졸업식에서 그는 졸업장을 받았다. 애국심, 예술심, 신앙심이 그의 가슴속에서 범벅이 되어서 요동을 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었다.


4. 성역시대
(1) 교회 담임기
1928년 1월 28일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그가 그 이튿날 29일에 파송받은 구역 통천으로 향해서 떠났다. 교회 담임 초기의 그를 한마디로 평한다면 분명히 이성적인 전도인이요 문화적인 교역자이었다. 본래 이성적이고 예민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그인지라 신앙적인 생활보다는 문화적인 활동이 항상 앞서는 것이었다. 더우기 그당시는 한국 사회는 민족주의 사상에서 사회주의 사상에로 전향하고 있는 때이었음에 사회 사조의 대세에 영향받는 바도 있어 그는 점점 사회적, 문화적으로- 말하자면 인본주의 신앙에로 전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부임 초기 약 반년간은 사상적 위기 신앙적 타락의 상태에 빠져가고 있었다. 전도활동이란 것도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기의 입장과 처지를 발견한 그는 깜짝 놀라 자기 자신의 신앙혁명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느끼었다. 그러다가 박재봉이라는 청년과 함께 기도 생활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의논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둘이서 떠나 산기도를 드리려고 산으로 향해 들어갔다.

(2) 금식 산기도 10일간
통천읍의 서북쪽에 있는 백정봉의 깊은 산골에 산기도를 드리려 들어가는 둘은 의논하고 결심하였다.“내 들어가 엎드리거든 내가 일어날 떄까지 나를 깨우지 말고 만일 여러날이 걸리어서 혹 집에서나 교회에서 찾아오는 일이 있어도 내가 일어나기 전에는 나를 누구든지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고 10일을 불식불음 절대 금식의 산기도를하고 무사히 하산하였다. 10일간 산기도를 드린 후부터 그는 전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생활하는 사람이기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말하는 전도자이기 전에 기도하는 기도군이 되었다. 기도에서 예측못할 힘을 얻은 용도는 그 힘을 다바쳐 일에 면려하였다. 교우의 가정심방, 노방전도, 우물을 파고 예배당을 자신이 수리하고 병약자를 병원에 업고 다니고 거지를 집으로 데려다가 대접하는등 복음전파와 육체노동을 겸해서 심신이 아울러 최대한의 일을 해내는 것이었다.

(3) 마귀의 격퇴
일에 최선의 면려를 하는 그는 기도생활에 더욱 열중하였다. 그래서 그는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이나 그 언제든지 때를 가리지 않고 그저 나가 엎드리는 것이었다. 하루는 새벽 3시쯤 되어 자기의 규례대로 그는 또 성전으로 나갔다. 이때 그의 기도는 “아버지여 나의 혼을 빼어버리소서 그리고 예수님께 아주 미쳐버릴 혼을 넣어 주소서 예수님께 미쳐야겠나이다. 예수님께 미치기 전에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없사옵고 또한 마귀와 싸워 이기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몇시간을 기도하고 있을때 무서운 마귀가 나타나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무섭기도하고 끔찍하여 몸을 돌려 보아도 먼저 앞질러 와 마주 서는 것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어 “아버지여 아버지여”라고 울며 부르짖었다. 그러다 자세히 보니 이런 마귀들이 성전에 가득히 그리고 밖에도 많이 있어 그 얼굴을 들이밀고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러므로 그는 주먹을 들어 마귀를 내어 쫒느라고 덤벼 들었다. 밤새도록 혈전을 하니 기진맥진 이었다. 이때에 아직 한마리의 마귀가 있어 소리를 높혀 “사탄아 물러가라 이 집은 아버지의 성전이니 물러가라”고 주먹을 들어 치려하니 그때야 도망하니 권사님댁으로 다시 통천시가를 다 지나서야멀리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마귀를 격퇴하고 할렐루야를 부르며 돌아올 때는 벌써 날이 다 밝았다. 이와같이 마귀와의 격전에서 승리를 얻은 그는 이때부터 하늘의 권능과 용기를 얻어 기도와 설교와 신앙생활에 더욱 더 굳센 힘과 생명을 얻게 되었다.
참고)1929년 1월 4일의 일기 내용 발췌
새벽 4시반부터 기도, 창세기17장. 죄를 떠나자. 주의 손목을 붙잡자 큰불이 내리다. 오전 10시경부터 11시경까지 성화로서 죄인을 소살(태워죽임)하는 성몽(거룩한 꿈)을 꾸다. 아멘.
성신이 임하시옵소서. 이 양양 집회에서 성화의 성몽(聖夢)을 본후 그는 전체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말씀만 전하 다가 죽기로 결심을 다시 새로이 하였다고 함.

4)성탄절의 큰 역사와 부흥
1928년 12월 24일 새벽에 이런 놀랄만한 사건이 있은 후 그는 전날의 그가 아니었다.육체는 몇날 못 살 것같이 보이나 그때 이후로 그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으로 움직이는 듯 하였다, 성탄절 설교로 모인 심령들이 통곡하며 거꾸러 지는 것이었다. 이후로 구역내의 전교회가 이삼개월내에 완전히 부흥하였다. - 덕적도, 평양교회등지의 부흥회 인도.


5. 주일학교 사업기
평양의 부흥회를 끝낸 후부터 부흥사로서의 이용도목사의 명성은 날로날로 높아가고 더욱더 멀리멀리 알려져 1930년의 대부분도 역시 이곳 저곳의 부흥회 인도에 끌려 다녔다. 평양 중앙교회에서의 큰 역사는 앞으로 평양 방면의 전도의 길을 열었고 황해도 신천 교회에서의 역사는 황해도 방면에 성령의 불을 켜는 시초여서 이해에 이루어진 큰 역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수상한 것은 원산 지방안의 동역자(교역자)들의 눈치가 좀 이상해 지는 것이었다. 그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라든가 모이면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는 눈치가 아무래도 이상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교회는 안 지키고 돌아다니기만 한다. 제 구역이나 돌아볼 것이지 남의 구역에는 왜 다니는 거야. 여기 저기서 이용도는 왜 끌고 다니느냐 제 교파 안에서나 다닐 것이지 타교파(장로교등)에는 왜 다니는가?등 염려해 주는 말 같기고하고 아끼는 말 같기도하나 그말이 나오는 근원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그런 마음에 있는 것이었다.
눈치로만 보이던 그 이상한 괴물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났으니 그가 원산 지방(통천구역)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부흥집회를 다니는 부흥사를 주일학교 연합회 간사라는 부흥 사업과는 아주 거리도 멀고 방면도 다른 일터로 가라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영전 같으나 좌천이요 아주 부흥집회를 못하게 하려는 심보에서 취하여진 것이다. 그래서 교역자 이동의 시기도 아닌 10월 16일(1930)에 삼년 동안 눈물과 땀을 흘리며 길러 놓은 정든 양떼들의 석별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이용도목사는 통천을 떠나는 것이었다.
주일 학교 연합회 간사로 서울에 온 이용도목사는 이상하게도 각 방면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인기를 집중하였다. 그러나 인기가 높아지면 질수록 그의 등 뒤에는 검은 손이 움직이는 것이었으니 주일 학교 연합회에서도 웬일인지 그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가 보였다. 말하자면 말썽군이요 처치 곤난이었다. 그래서 생각된 것이 미국 유학이란 이름으로 멀리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결정하고 이렇게 준비하며 그때 오기를 그는 기다리고 있었는데 약속의 그때(1931년 가을)에 이르러서 누구 하나 그의 유학을 고려하는 자 조차도 없어 결국은 미국 유학이란 것은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931년 초두에 그는 주일 학교 강습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충북 영동에 갔다. 여기서의 강습회 기간은 8일간이었는 바 이 강습회가 그에게 있어서는 주일 학교 연합회 간사로서의 최대의 활동이고 최후의 노력이었다. 여기서 그가 주교련 간사라는 괴물의 손에 붙들려 탄식하며 고민하면서 그 손에서 벗어나 성신의 손에 이끌려 오직 주의 복음만 전파하고 주님의 직접 역사를 세상에 알리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영동을 다녀온 후 얼마 있다가 서울 어떤 곳에서 주일 학교 지도자 강습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주일 학교 사업계에서 유명하다는 강사는 다 모였는데 그에게도 어떤 과목을 맡김으로 거기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극히 중대한 사건이 생기었으니 집회 사흘째 되는 날에 강습생 전부가 모씨의시간에 한명도 참석을 않고 그 다음 시간에도 또 그리하더니 그의 시간에만 전원 참석하여 열심히 수강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주최자는 그에게 가서는 심히 괴상한 말을 하였으니 “이목사는 강습회에 나오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아무 말없이 다시 그 강습회에 나가지 않았다.
주일 학교 지도자 강습회에서 그런 사건이 있은 후 그는 문제의 인물이 되었다. 마침 연회가 열리게 되었으므로 그는 경성 지방 순회 목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경성 지방 감리사의 명령하에서 경성지방을 순회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거리에 말 못할 사정이 많음과 주님의 섭리를 말로 다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그저 하늘만 우러러 보며 기도로서 오직 주님과만 연락하면서 지시에 의해서 그저 주께서 주신 무기 혀와 주께서 주시는 능력 - 말을, 통하여 주님의 역사에 복종만 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이용도목사는 자기의 아호를 是無言 -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 라고 정하였다.


6. 전국 순회 부흥 전도기
어느 한 곳에나 어느 한 기관에 놓으면 자꾸 문제가 생기는 용도를 지방 순회 목사로 정한 것은 부득이한 최선의 인사이었다.그러나 얼마 안되어 다시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으니 감리 교회의 경성 지방만 순회하여야 할 처지에 있는 이용도 목사는 전 한국 각교파의 각 교회에서 좀 와달라고 간청 애원의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으매 그의 입장은 딱하게 되고 교단본부는 염려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민의 생활, 기도의 생활을 계속하던 그에게 한 결정이 생겼으니 이제부터는 오직 기도를 그려서 내리우시는 지시에 의해서만 움직이기로 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용도목사는 1931년 여름경에는 벌써 각처에서 “그는 바울이야, 세례 요한이야” 혹은 “그는 사람이 아니야, 성신이야, 예수님의 그림자야”하는 경탄의 존경과 함께 전 한국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다.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삼천리 강산에는 큰 부흥이 일어났고 이용도 목사라는 이름은 2천만 동포(불신자도 포함)의 입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참고 . 재령집회)
재령 교회에서의 너무도 엄청난 역사는 분명히 일부분의 사람들에게 시기나 질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여, 이용도 목사는 무교회주의자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평양에 이용도 목사가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령 방면에서 그는 무교회주의자라는 선전이 강렬한 바람을 타고 평양에 들어왔다. 그래서 남문밖 교회에 집회가 시작되자 은혜 받으려는 사람도 많았지만 염탐하고 책잡으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나왔다. 하루는 한국 교회의 거성 길■주 목사를 필두로 한 평양성내의 거물 목사 7,8명이 그의 집회를 감찰하고 책을 잡기 위하여 갔다가 의외에도 모두 거꾸러져 통회하고 자복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용도 목사가 아현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다가 현장에서 축출을 당한 그 무렵에 황해노회에서는 공회의 결의로 이용도 처분안이 통과되었다. 상인천역에서 호산나 소리가 높은 즈음에 평양 노회에서도 한 법안이 통과되었으니 그것은 기도를 제한하는 악법이었다.
1932년 연말에 명촌과 산정현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평양성의 신도들이 이번 여름의 명촌 신암의 집회에서는 결정적으로 신앙의 내용과 생활 태도에 변동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런 변화 - 성령에 의해서 신도들이 새로 지음을 받는 일이 교권자 - 목사들에게는 공포와 위협으로 나타났으니 무능한 교역자들이 자기의 지위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양노회는 또 한개의 다른 법안을 통과시켰으니 이용도 목사를 평양노회 지경 안에는 들이지 말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 HCM 사건과 이용도 목사 >
이용도 목사의 일생을 관찰하고 분석할 때 1932년의 10월까지 - 안주 해주 집회 - 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든지 말 들을 것이 하나 없고 책 잡힐 것이 절대로 없었다. 황해노회, 평양노회등에서 아무런 소리를 한대도 그것은 시기, 질투가 아니면 못난 인간들의 생트집이지 말이 되지도 않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10월말에 이르러 한 사건이 생겨서 이용도 목사에게 욕을 뒤집어 씌우게 되었으니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HCM사건 - 즉 HCM등의 예언 운동(入流라고도 함)사건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것은 H는 이용도의 파당이라고 하면서 H의 욕은 잊어버린 듯이 그만두고 그를 몰아 세우고 또 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평양 교계가 야단 법석을 하고 있을 때 이용도목사가 평양에 들리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눈에 보이는 H를 설명한 후 결국 H는 나쁜 사람이오 교회를 망치려 다니는 자라고 단언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말없이 눈을 감고 한참동안 묵도를 올리시더니 입을 열어 “나의 신앙태도에 다소간 다른 점이 있다는 H는 고사하고 도적이나 음부나 살인 강도라고 하더라도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다가 죽기를 원하고 힘쓰는 자입니다. 만일 여러분 보시기에 양해 못할 점이 있든가 용인 못할 것이 있거든 버리든가 내쫓든가 하십시요. 나는 나의 원하는 바는 세상이 버린 사람, 세상에서 쫓겨나거나 몰리워가는 사람을 받아 그를 거두어 손을 잡고 울며 살려고 합니다. 내쫓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요 임무일런지 모르거니와 나는 쫓기우는 자를 거두어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황해도 신계읍으로 집회를 인도하려 가는 도중에 평양에 잠간 들렀다가 이용도 목사는 이상히도 송박사가 그리워져서 만사를 제지하고 그를 만났다. 그랬더니 송박사도 역시 H는 나쁜 자라고 욕설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에 송박사에게 편지지로 약 8,90장을 썼는데 여태까지 지나온 이야기와 자기의 견해와 소신을 말한 후 그런 생각을 가지신 형님과는 신앙적으로 멀어질 수 밖에 없다고 써 보냈다고 한다.
HCM 사건은 분명히 이용도 목사의 일생에 극히 중대한 한 선을 긋는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험구, 욕설, 공격, 박해를 말없이 받는한 무저항의 구도자가 되었으니 그것은 세상이 나쁘다는 사람, 세상이 죽여 버리겠다는 사람을 사랑하다가 그와 운명을 같이 하겠가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7. 在天居地時代(재천 거지 시대)
1932년말 부터의 이용도 목사는 몸은 땅에 붙들려 있으나 마음은 온전히 하늘에 가서 속하여졌다. 이유없이 말썽을 부리고 잘못도 없는데 구박을 해오다가 저의 눈에 좀 틀리게 보인다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단이니 염병쟁이니 떠들석하는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오래 살기를 원치 아니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때 이후의 이용도목사는 그저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대로 하다가 주께서 부르실 때에 가려는 하늘의 기계, 하늘의 부속품으로서 그저 하나님의 명령에만 복종하고 하나님의 조종하시는대로 밖에 달리 움직이지 못하는 주님의 막대기가 되었다. 그래서 1933년 초두 이후의 이용도 목사의 일거 일동은 그저 고요히 기도하다가 주의 음성의 지시를 듣고서 움직이는 것이오 눈감고 기도하다가 주님의 빛이 인도하시는 방향에 따라 가라는데까지 가려는 절대 복종의 생활 - 몸과 목숨이 땅에 있으나 영과 정성은 하늘에 가 있는 생활이었다. 1932년의 연말과 33년의 초두의 한국 교계에 대 소란이 일어나 - 조사 책벌 공회결의등 험한 풍운이 사납게 일어나 이용도 목사로 하여금 “사방에서 핍박과 멸시가 조수같이 밀려 들어와 나는 거리를 걸을 용기 조차 잃는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민망한 때도 있구요! 그래도 주님 도우심으로 이겨 나갑니다.”라는 탄식을 발하게 하는 것이었다.
평양에서 집회를 인도한 이용도 목사는 곧 이어서 안주읍에 가게 되었으니 이것도 주님의 가라고 하시는 지시에 의해서 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곧 안주노회가 소집되었고 이용도 매장의 논의가 가결되었다.
해주에서 마지막 공적 집회를 있는 기운과 땀과 피를 다 쏟은 이용도 목사는 겨우 서울집(현저동 산12의 15)까지 몸을 끌어올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그냥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누워 있는데 1933년의 중부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열리자 연회에서 강권 발동으로 휴직 처분(강제 절연을 의미하는 것)이 내렸다.
소위 HCM사건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 욕하고 비방하며 밀어내고 몰아대던 자칭 정통 교회에서 그를 구박하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이용도 목사가 이단이 되어 가지고 새 교파를 조직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1933년 10월 7일 평양 연화동 예배당에서 열린 평양노회는 이용도 목사 입족금지를 결의하였다. 이렇게 지내던 그가 4월 10일에 원산에 갔다. 여기에 이르러 이용도목사는 욕먹을 밑천을 또 하나 벌었고 그의 운명은 거의 결정되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무리들과 밀리워 다니더니 새 교파까지 조직했다”는 것이 그를 욕하는 자들의 말거리가 되었다. 여기서 많은 동지는 돌아섰다. 이용도 목사가 몰리우며 욕먹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위하여 기도하던 진실한 사모자들도 하나, 둘씩 정을 끊으며 눈물로 헤어졌다. 이용도 목사의 편지를 하늘의 복음같이 소중히 여겨 품속에 품고 다니던 이들이 그 편지를 아궁이에 던져 버리고 재령 부근에 퍼졌던 천여장의 이용도 목사의 사진이 모두 찢기워 버림을 당하였다.


8. 승천입영(昇天入榮)
1933년 7월 26일 오후 1시! 부산을 향해서 평양성을 떠나려는 기차 가운데 몸이 심히 쇠약 수척하고 호흡곤란에 괴로워하는 환자 하나가 올랐으니 이가 과거 3년 동안 삼천리 강산의 박수 갈채를 혼자서 받고 자난 3년 동안에 이 평양성을 여러번 오락가락하며 평양성 사람의 눈물을 한없이 자아내며, 그들에게 또 무상의 큰 기쁨을 가져다 주던 주의 사자 이용도 목사이었다. 평양역을 떠난 이용도 목사는 그날밤 경성역에 내려 역전 여관에서 일박하고 그 이튿날 아침 원산행 기차를 탔다.
1933년 10월 2일! 목사님이 가시는 날이왔다. 부모, 형, 처, 동지, 학생등 이십여명이 둘러 앉았다. 일생 동안 그렇게 앉아보지 못하고 누워보지 못하시던 목사님도 이때에는 누워 계시었다. 삼십 평생에 그렇게 말을 많이 하시던 그 목은 침묵을 지키시었다. 별사람 별인물이 다 와서 별소리를 다 해도 그는 잡은 바가 있는 듯이 엄연 자중하셨다. 아마 저녁 네 시가 지난지도 오래였을 때이었다. 환하게 그 얼굴에 광채가 나타나며 눈을 번쩍 뜨시더니 목사님이 함께 찬송을 부르자고 하시며 손으로 박자 놀리는 형용을 하신다. 마지막 줄 “우리가 서로 만나겠네”까지 박자를 놀리시던 목사님께서 손을 맥없이 푹 놓으시며 눈을 힘없이 감으신다. 얼마 후에 다시 눈을 뜨며 얼굴에 미소를 띄우는데 그 얼굴의 환하고 평화스러움과 그 빛나고 영광스러운 광채는 거룩하고 존귀한 인상으로 오직 눈에만 남아 있을 뿐이고 말로나 글로서 형용하기는 어렵다.
1933년 10월 2일 오후 5시 ■분 주의 사자 이용도목사는 33세에 천국을 향하여 이렇게 세상을 떠나시었다. 어느 부인이 베옷을 지으셨다. 목사님은 그 옷을 입으셨다. 널이라고는 하나 생겼으나 상여는 없다. 나무쪽 몇개를 비끄러 매어서 그것을 상여로 삼았다. 그위에 널을 올려놓고 광목 한 조각으로 둘렀다. 상여가 묘지에 도착되었다. 이제 곧 하관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은 어떤 험상스럽게 생긴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여기는 매장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개인 소유의 산이요, 공동묘지가 아니니 못 묻는다는 것이다. 개인 소유의 산이요, 공동묘지가 아니니 못 묻는다는 것이다. 아주 거칠은 말씨와 난폭한 행동으로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빌고 애원하여 평토장을 하기로하고 겨우 매장을 하였다.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심술궂은 모 방면의 사람들이 그런 행위를 선동했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잘못한 것 없이 몰리우고 주님의 뜻대로만 살려했기 때문에 쫓기어 다니던 이용도 목사님은 매장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구박을 받는 것이었다.

출처 : 샘솟는 기쁨
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메모 :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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