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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영성의 신비가/이용도 목사

[스크랩] 시무언(是無言), 한국 기독교 신비주의자

by Andrew Y Lee 2011.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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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귀한 자료를 발견했다. 열정의 설교자이자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사셨던 이용도 목사님! 암울했던 1920-30년 대에 영적인 빛을 밝히 증거하셨던 목사님의 행적을 읽노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피터스 선교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불태웠다.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주님의 꼴을 먹이셨다. 핍박을 하면 핍박을 당하셨다. 그렇지만 곧 사랑으로 승리하셨다.

그러나 그 열정은 너무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사단의 집요한 공격은 곧 승리를 했다. 광명의 천사로 다가온 사단의 공격에 그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영분별의 은사가 있었다면 사단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기존의 교단도 이용도 목사님을 극도로 고립시켰던 면도 없지 않다. 그들의 교권주의는 결국 이용도 목사님을 핍박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말았다. 바리새인의 영은 그만큼 치명적이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다"(요 2:17).

하나님께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다(수 1:9). 치우치게 되면 사단의 공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무언(是無言), 한국 기독교 신비주의자

 

Victor Wellington Peters/박종수 역

 

 

 

역자서문

 

시무언(是無言)!

사실 말이 필요없다. 행동하는 눈빛만 보아도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그의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시무언 이용도 목사님은 우리 곁에 있다. 그가 떠난지 65년이 흘렀지만 그의 숨결은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기인(奇人)이어서 일까? 아니면 그가 기독교회에서 배척받고 이단으로 여겨졌던 특이한 신비주자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예수님처럼 33세의 꽃다운 나이에 열정적인 신앙운동을 일으켰던 부흥사였기 때문일까? 이 모든 것은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의 삶의 일부를 보고 평가한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가 아직도 살아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은 그의 설교나 부흥운동이 아니라 아마도 그의 인격일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으로 자신의 몸과 혼을 불살랐던 그의 인격이 아직도 우리에게 조용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피도수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이제는 이용도 목사가 이단이었느냐 혹은 아니었느냐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진다. 죄인된 인간은 어차피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한계를 안고 살아간다. 이용도 역시 인간인지라 여러 가지 기준으로 볼 때 잘못된 점이 있으리라. 그러나 사실 그가 저지른 잘못된 일은 우리의 잘못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그는 너무 시대를 앞서 갔으며,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구속에도 억매이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믿었던 잘못밖에는 없다. 그것이 기성교회의 눈으로 볼 때 교리적으로나 교회전통 면에서 잘못된 것으로 보여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이용도의 선교사역을 하나하나 지켜보셨던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하나님의 진리를 오랜 세월에 걸쳐 가시화되는 역사는 이용도를 어떻게 평가할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말자. 대신 겸손하게 그에게 배우자.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짧은 시간에 너무도 많이 해버린 시무언! 우리는 그를 정죄할 어떤 명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말없이 조용히 그를 만나보자. 그리고 판단은 나중에 하자. 우리도 우리의 삶을 마감하고 주님곁으로 가기 바로 전에 시무언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보자. 그 때는 모든 아집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좀더 진실하게 시무언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이용도 목사에 대한 별로 아는 바가 없는 역자가 이 글을 쓴다는 것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님의 친구이자 선교사였던 빅토 웰링턴 피터스(皮道秀) 선교사가 썻던 이용도 전기가 소개 된지 60 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 우리말로 번역이 되지 않았기에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고 이 일을 착수하기로 했다. 아직도 미국에 살고 계신 피도수 선교사님을 모시고 이용도 목사에 대한 증언을 듣기를 원했으나 거동이 불편하신 관계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이용도신앙과 사상연구회>의 초청을 받은 피도수 선교사께서 한국에 나오는 대신 짤막한 글을 써주신 것을 <이용도 전기>와 함께 소개한다.

여기에 소개된 <시무언(是無言), 한국 기독교 신비주의자>는 피터스 선교사가 1935년에 서울에서 발간된 기독교문학회(Korean Literature Society)라는 잡지에 12회에 걸쳐서 연재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그동안 변종호 목사의 글이나 그 밖의 글들을 통해서 이용도 목사의 전기가 대부분 소개되었지만, 외국인이 직접 목격한 이용도의 진면목을 소개한 이 글은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의 가르침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처음에는 역자주(譯者註)를 통해 좀더 자세히 설명할 생각도 했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독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원문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소개했다.

이용도 목사의 전기와 아울러 그 동안 발표된 논문을 함께 싣기로 결정하였다. <예수의 사람 이용도>라는 이 책의 제목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1998년 무인년에는 특별히 IMF 한파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심각하게 어려운 상황에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회복해야 할 것 같다. 너무 국수적이서도 안될 것이며, 너무 개방적이어서 우리의 간과 쓸개를 모두 내주어서도 안될 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가 진리안에 거한다면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예수의 보편적 사랑은 우리를 끊임없이 진리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그 동안 신학 일세대들을 통해 이용도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지금부터 신학 이세대를 통해 모든 교파의 장벽과 사상의 벽을 허무는 개혁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이단시비에 휘말리기보다는 좀더 건전하고 진취적인 한국신학을 수립해야 할 것이며, 교권의 비대화를 막고 평신도지도자들의 건전한 육성을 통해 바람직한 교회상을 정립해야할 것이다. 동시에 한민족에게 책임적이며 역사를 바로 이끌 의식있는 한국교회 지도자를 배출하는데 모든 교회와 신학교육기관이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뜨거운 가슴이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이웃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승화될 때, 우리는 이용도 목사님과 다시 한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말이 필요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고 증거하면 그만이다. 말하다 보면 또 싸우지 않겠는가? 부족한 점은 서로 보충하고 사랑으로 한된다면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이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번역 출판하도록 허락해주신 피터스 선교사와, 이 책이 나오도록 여러 가지 면에서 <이용도신앙과 사상연구회>를 후원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어려운 경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출판에 동의해 준 한들출판사 임직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무엇보다도 아빠의 학문활동을 도와준 딸 선형이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피터스 선교사의 시적인 표현과 1930년대의 필법을 현대어로 고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이가 바로 이제 대학 2학년인 맏딸인 것이 자랑스럽다. 아무쪼록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독자제위의 따뜻한 질책을 바라며, 이 책이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이용도 목사님을 만나보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1998년 무인년에

역자 박 종 수(이용도신앙과 사상연구회 총무)

 

 

목차

역자서문

제 1 부

시무언(是無言), 한국 기독교 신비주의자(Victor Wellington Peters/박종수 역)

서 문

제 1 장 아버지와 가족

제 2 장 어머니의 신앙

제 3 장 상한 몸을 이끌고

제 4 장 그리스도의 몸을 치유하다

제 5 장 죽음에서 일어나다

제 6 장 덤으로 산 시간

제 7 장 내 양을 찾다

제 8 장 다른 양

제 9 장 광채

제 10 장 황혼

제 11 장 샛별

제 12 장 시무언의 열정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며

 

 

서문

주제넘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 인물의 자서전에 흥미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이 책을 통해 한국의 특출난 인물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한다. 내가 쓰는 이 글은 가정이나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님을 우선 밝히고 싶다. 이용도는 나의 절친한 친구이다. 이 책에 서술된 대부분의 사건은 이용도로부터 내가 직접 들었거나 목격한 것이다.

시무언(是無言)은 이용도가 자신을 지칭하는데 애용했던 아호(雅號)이다.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그 의미를 설명했다. "시무언! 이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말하지 않는 것은 옳다.'" 그는 기독교인의 주된 의무를 자주 강조했다. 그리고 매번 침묵을 그 첫 번째로 꼽았다.

그러나 시무언 만한 달변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는 그의 아호와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는 위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자 이제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단순히 주님께 나아갑시다. 오직 우리의 총체적인 선교에만 충실합시다.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기도 시간에는 기도하고, 설교 시간에는 설교를 합시다." 이와 같이 그는 전도서 3장 7절의 교훈처럼, "침묵을 지킬 때와 말을 해야 할 때"를 잘 가려서 처신함으로써 "시무언"을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Kempis)는 발언과 침묵의 조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자발적으로 침묵을 지킬 수 있는 사람만이 말을 잘 할 수 있다." 따라서 말을 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지 않는 한, 침묵을 지켰던 시무언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이름이 시사하듯 말을 할 때에도 무언(無言)이었다.

이 글의 목적은 그의 인생 전체를 완벽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데에 있지 않다. 나는 이용도의 영적인 특징들과 그가 겪은 다섯 가지의 시련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사람, 이용도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보다 깊은 신앙, 기도, 열정, 그리고 헌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을 자신보다 높게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묵상하며; 땀방울이 흘러내릴 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제 1 장 아버지와 가족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교회를 가려고 한다 이거지? 내가 바보인줄 아나? 내가 다 봤다고. 여기서 다 봤어. 망나니! 망할 놈! 멍청이! 날 망하게 하려고 모두 짰어!"

이러한 욕설과 함께 몽둥이가 왔다 갔다 했고 깨진 접시 조각이 사방에 흩어졌다. 아이들은 이것을 피하기 위해 뛰어다녔고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만은 뜻밖이었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연약한 여인이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펄럭이는 치마 자락에 매달리는 아이 세 명을 데리고 이웃집으로 피난하는 이 가련한 모습을 보며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날 일요일 아침은 모든 것이 원활하게 진행됐다. 날씨는 쾌청했고 무엇보다도 그날은 아버지가 멀리 신촌에 있는 시장으로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는 걸어서 세 시간 거리를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떠났다. 따라서 식구는 교회 갈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두 번 드리기 이전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올 가능성도 없었기 때문에 식구들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날이 온 것이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에는 교회를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럴 때, 그가 눈치채지 않게 예배보러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이들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의 절대적인 말을 거역하고 교회를 갔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엄청난 난장판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어머니는 끝까지 아버지를 교화시킬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이들은 모친을 통해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이덕흥(李德興)은 "소 거간꾼"이었다. 즉 그는 동사무소의 허가를 받고 우시장에서 거래를 조정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직함을 보여주는 빨간 띠를 왼쪽 소매에 매고 다녔다.

가구 수가 200 안팎이고 인구도 약 천명이지만, 장촌(Marketville)에는 그 마을에서 두 번째로 큰 우시장이 있었다. 그 시장은 면적이 몇 천 평에 다다르는 매우 거대한 것이었다. 우시장은 11월부터 3월까지 장이 열릴 때마다 소 200∼300 마리, 때로는 약 천 마리의 소가 거래되는 장소였다. 맥풀린 소 떼 사이에는 몇 년의 경험으로 숙달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동물을 싸게 사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 우선 팔뚝에 빨간 천을 두른 사람에게 살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그러면 거간꾼은 내세운 조건에 알맞은 동물은 있으나 주인이 내세운 가격이 너무 높다고 말한다. 그렇게 훌륭한 동물을 주인이 싸게 팔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거간꾼은 최선을 다해 가격을 흥정해보겠지만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기고는 떠난다.

주인을 설득하기 위해, 거간꾼은 길을 나선다. 그렇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말을 한다. 이제 그 동물은 더 이상 그 "훌륭한 소"가 아니라 "쓸모 없는 소"가 된다. 거간꾼은 그 소를 깎아 내리기 바쁘다. "어떤 멍청이가 이런 늙고 볼품없는 소를 사려고 백원이나 내겠어?" 거간꾼은 이런 식으로 계속 주인을 설득하다가 포기하는 듯이 뒷걸음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좋다고. 거기서 그렇게 원숭이처럼 떠들고 있으라고. 그러다간 팔기도 전에 소가 죽어버릴걸. 그때 나한테 매달려도 소용없어."

"잠깐만요!" 그제야 기다렸던 반응이 나온다. "오늘 이걸 꼭 팔아야 해요. 다른 일도 있는데, ..."

"그럼, 말을 좀 들으라고." 거간꾼은 멈춘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렇게 차갑게 말한다.

이제부터는 흥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마지막에 순진하기만 한 양쪽이 도장을 찍고 소가 새로운 주인을 따라갈 때까지 거간꾼은 원하는 데로 일을 이끌어간다.

매 거래시 백원당 삼원은 거간꾼에 의해 동사무소로 넘겨진다. 그리고 동사무소는 그 중 일원을 거간꾼에게 준다. 그렇지만 5일에 단 한번 장이 열릴 뿐만 아니라 그것도 일년에 다섯 달밖에 우시장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거간꾼은 농사를 짓거나 물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시무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큰 장이 열리기 이전에 아버지는 작은 동네 장터로 걸어가서 물품을 싸게 산 뒤 다시 팔아서 이익을 남겼다. 장촌은 약 20∼30 마일까지 뻗어 가는 곡창지대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버지는 평화산(Peace Mountain), 평탄고개(Flat Valley), 신천(新川), 그리고 그 주변을 돌아다녔다. 약 30 마일의 거리를 걷고 돌아올 때는 소까지 끌고 오다보니 한번 나가면 왔다갔다하는데 이삼일 걸렸다. 그리고 다음 장날까지는 적어도 소 세 마리는 있어야 본전을 뽑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 술버릇만 버릴 수 있었더라면 그의 가족을 잘 부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영생을 얻기 위해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는 너희를 그렇게도 모으려 했건만, 너희는 그렇지 않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괴팍한 성격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는 유혹과 싸워가면서도 그 유혹으로부터의 구원 또한 거부했다.

공교롭게도 일요일에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 아버지가 집에 있게 되었다. 결국 그런 날은 가족이 교회에 갈 수 없는 날이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번 장날이 일요일이 되었을 때에는 비가 와서 취소되었고, 그 다음주에는 아버지가 집 근처에서 쟁기를 수리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 다음 주일에는 아버지가 감기로 누워있었고 그 후에는 명절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경사스러운 일요일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신천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 날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는지 다행스럽게도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가족 모두는 지금쯤이면 그가 집에서 상당히 멀리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자녀가 맨 첫 번째 찬송가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찬송가 한 곡도 놓치기 아까웠다.

옷장에서 아이들의 가장 좋은 바지를 꺼내면서 양마리아(Yang Maria) 또는 서구식으로는 이씨네 부인(Mrs. Lee)은 하나님의 보살핌에 감사하고 놀고있는 아이들을 불렀다. 장남인 용채(Using Diversity)는 만으로는 열 살, 한국 나이로는 열 한 살이었기 때문에 혼자서도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곱 살인 용웅(Hero)도 혼자서 옷을 입었다. 그러나 방금 네 살이 된 용도(Admit-the-Truth)는 옷입는 데 실증이 났는지 발가벗은 채로 다시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아직 한 살나기 아기인 용구(Live Forever)는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근완(Near Perfect)이와 막내이며 외동딸인 순례(Obedience)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시무언으로 자칭하게된 용도는 이미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아 그들이 항상 교회에 갈 수 있도록 아버지를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다.

삼 십 분 후에 이들은 스페인의 함대처럼 당당하게 집을 나왔다. 그들은 잿빛 빨강, 노랑, 그리고 하얀 옷을 입고 푸른 들판을 가로질렀다. 어머니와 네 명의 아이들은 들 뜬 분위기로 지금 교회로 가는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었다. 팔월의 찜통 더위 사이로 차가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교회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적어도 여자 쪽은 꽉 차 있었다. 남아 있는 좌석이 별로 없었다. 여덟 칸 방 중앙을 가로지르는 하얀 커튼의 반대편에는 남자들이 앉아있었다. 찬송가를 부를 때 흘러나오는 약간 어울리지는 않지만 힘찬 남성적인 목소리를 통해서 남자의 숫자를 짐작할 뿐이다. 목사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양쪽을 다 볼 수는 없었다. 물론 아버지는 결코 교회를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에게 남자 쪽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알려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장남이 어머니 곁을 떠나 남자 쪽에 앉을 때까지는 아직 일년이나 남아 있었다.

이번 예배는 양마리아와 자녀에게 감회가 큰 것이었다. 교인이 알고있는 찬송가는 "예수 날 사랑하심"과 다른 것, 두 곡밖에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설교도 딱 적당했다고 느꼈다.

이제 그들은 부닥칠 고난은 상상도 못한 채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신천으로 가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속인 것이다. 그는 나가는 것처럼 꾸민 다음에 가족이 그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곳에 몸을 숨겼다.

아버지는 가족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 기독교를 믿는 것을 고집하는 것을 보아 자신을 거역하고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는 그들을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는 다시 한번 교회에 가면 죽이겠다고 그들 얼굴에 칼을 들이댔다.

따라서 십대 이전에 죽은 용웅(Hero)을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은 어머니의 신앙교육과 아버지의 협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특별히 세 번째 아들은 어머니의 기쁨이었다. 그의 눈물과 기도는 열 살된 아들이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말했을 때 보상되었다. 학교 선생이 예수를 믿는 모든 아동은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고, 다른 교회 다니는 모든 아이들이 더 이상 교회를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유독 용도만 혼자 그 맹세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 일로 퇴학당했다. 그는 집에서 5일 또는 6일을 보냈다. 그러자 그 무식한 선생은 용도의 고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시 학교로 불러들였다. 그는 자신이 정한 규칙을 고수하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특별히 예외를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 작은 초가집으로 된 교회는 뾰족한 종탑이 있는 널찍한 벽돌집으로 바뀌었다. 이제 이용도는 교회 선생이었고 멀리 있는 도시의 기독교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그는 대단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유명한 맹인 목사인 길선주 목사가 그 교회의 학생을 위해 부흥회를 개최한 것이다. 기도는 시무언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고 그는 교회에서 한밤을 기도하며 세웠다. 교회 학교가 시작하기에 전에 그는 항상 교회에 일찍 도착했다. 그리고 종탑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한 시간 이상 기도를 한 다음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내려왔다. 오랫동안 그의 동료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냈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지는 못했다. 실수 한 적도 없지는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학비를 스스로 보충해야 했다. 아침에는 공부를 하고 학교 관련 제분소에서 방과 후 일을 했다. 그렇지만 교회 일을 너무 많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그는 저녁 일을 부탁했지만 조정될 수 없었다.

의혹과 불안정이 학생 세대의 특징이었다. 어떤 학생들은 기독교보다는 공산주의가 그들의 요구에 부합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나머지는 완전히 혹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의 인생관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용도는 명석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 역시 이런 분위기에 완전히 동떨어져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어머니의 하나님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사건이 터졌다. 그는 진심으로 열심히 일을 했지만 기숙사비를 낼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배고픔의 아픔은 이 학생에게 결단을 내리게 하였다.

 

 

제 2 장 어머니의 신앙

 

학생 식당의 식비를 내야 할 날짜는 이미 몇 일 전에 지났지만 시무언은 그것을 낼 돈이 없었다. 결국 돈을 지불할 때까지는 먹을 수 없다는 통고를 받으며, 그는 돈 있는 학생들만이 식당으로 몰려드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갑자기 억눌려 왔던 생각들이 무너진 강둑을 넘어 넘쳐흐르는 물처럼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너희들은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해. 나 역시 그래야만 해." 억누를 수 없는 격정이 몰아쳤다. "너희들은 먹지 않으면 죽겠지. 나도 그래. 나도 너희들처럼 몸과 피를 가진 인간이야. 그러나 너희들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돈이 있어야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단지 너희들과 나 사이의 차이는, 너희들은 돈이 있다는 점이고 나는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혼자 서 있자니 그는 수치스러웠고 창피했다. 모두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돌아서서 그곳을 나왔다. 용도는 자기를 비웃는 눈길과 뒤통수에서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기숙사 뒤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혼자 앉아 있었다. 아니다. 혼자는 아니었다. 천 구 백년 전에 홀로 외로이 굶주리고 우리처럼 모든 유혹을 겪었던 그분도 함께 계셨음이 분명하다.

용도는 풀 더미에 앉아 기숙사 넘어 펼쳐있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외국인의 삼층 건물은 실로 거대했다. 그의 눈에는 모두 궁궐 같았다. 사치스러운 자동차가 기적을 울리며 거리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배고픔과 거친 감정으로 배나 민감해진 그의 두뇌는 이 모든 것을 머리 속에 영원히 새겼다. 그 후 그는 다시 학생 식당으로 눈길을 돌렸다.

빌어먹을 식당! 저주나 받아라! 식당 안에는 그의 학우들이 모두 모여 먹고 있었다. 돈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먹고 있었고 그는 여기서 굶고 있었던 것이다. 구수한 밥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밥냄새가 그곳까지 퍼질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잘 익은 김치와 시원한 깍두기 냄새도 함께 맡을 수 있었다. 그것들이 마치 거대한 젓가락에 매달려 그의 혀끝을 간지럽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는 달가닥거리는 접시와 요란한 소리를 내는 스푼이 비어있는 선반 위에 놓여지는 것만이 들릴 뿐이었다.

"죽어라!" 모든 소리마다 죽음의 선고가 내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어라. 너 가련한 사람아! 밥먹을 돈마저 마련할 수 없는 너. 이 세상은 지불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다. 돈, 금! 그것이 없으면 너는 그냥 죽어."

그의 손가락이 따끔따끔 저려왔다. 눈동자는 벌겋게 달아올랐으며, 그의 혀는 바싹 타올랐다.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나? 필요이상으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면 모두 똑같은 식욕과 정욕을 가지고 있을 텐데, 이들은 그를 조롱할 것이다. 왜 조롱을 들어야 하나? 단지 지불능력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가버려, 동전 한푼 없는 녀석!" 그들이 빈정거릴 거야. "번쩍번쩍 빛나는 동전을 가져와. 그렇지 않으면 굶어죽어!"

이용도는 비참한 심정으로 혼자 씨름하였다. "당신들은 나를 죽이고 있어. 당신들이 잘 먹고 잘 살고있는 동안, 내는 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지?"

바로 그때 천사들이 내려와 그를 도와주었다. 용도는 거의 먹지 못하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생각이 떠오르자 위안이 되었다. 성녀(聖女)같은 그의 어머니는 굶주린 자식들을 모아놓고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와 축복의 말씀에 감사드렸다. "나는 너를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버려진 어린애처럼 홀로 놔두지 않을 것이다. ... 모든 것이 너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너와 함께 거하리라."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는 종종 이 말씀들을 반복하였다.

머리를 쳐들고, 용도는 고개를 단숨에 내려와 기숙사로 향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조롱하는 눈빛을 두려워했을까? 이제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 용도는 버림받지 않았다. 그에게 빵이 없는 대신 하나님이 계셨다.

"재난과 축복, 고통과 즐거움, 그것들은 십자가로 의로워 졌느니."

이런 학교생활의 고통이 그 때 일어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용도가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에 온 나라를 적신 민중봉기(3.1운동)는 그를 무시무시한 고난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밤들을 쫓기고 핍박받으며 보내야 했다. 결국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직접 개입했다고 밖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 관료가 용도를 동정하여 그를 풀어준 것이다.

용도는 시골 학교에서 1년간 가르치고 난 후에, 일과 공부를 교대로 하면서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공산주의의 홍수에 압도당하고 육체적 시련의 물결이 한번 지나간 후에 어릴 적에 형성된 신앙의 반석은 노도의 물결 속에서도 우뚝 서 있었다.

송봉애와 결혼한 후에 그는 복음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이 속한 교단의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전신)에 들어갔다. 그는 영어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교회활동도 왕성했으며, 연극 프로그램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할수록 용도의 신앙생활은 오히려 퇴보하였다. 결국 기도가 결실이 없고 차가워지자, 용도는 "눈물"로 주님을 찾기 시작했다. 또 한번의 밀어닥친 위기의 순간에 어릴 적에 이어받은 어머니의 신앙이 그를 구해주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용도에게 "눈물"을 주셨는데, 이것은 확실히 은혜의 내면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후에 용도는 실제로 눈물을 많이 흘려 소금기가 어린 눈물이 아무런 가식 없이 흘러 내렸다. 이용도는 이 경험을 "주님께서 눈물을 주신 바로 그 때"라고 항상 증언하였다.

이제 용도는 말할 수 없는 심한 울부짖음과 번민을 통해 자기 속마음을 아낌없이 쏟아 부을 수 있었다. 밤부터 동틀 때까지 언덕 꼭대기에서 기도하면서 긴 시간을 보냈다. 이후부터 시무언은 어떤 순간이라도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을 늘 찾아 나섰다. 밤이 늦었거나, 거리가 멀거나, 날씨가 추운 것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러 가는 곳곳마다 자신의 육적인 것을 탓하는 눈물과 애곡이 있었다. 그 때마다 시무언은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는 은혜를 구하였다. 연회를 즐기며, 연극을 좋아하고, 학문을 사랑했던 그의 태도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아직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알지 못하는 이천만 동포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려는 깊은 열망이 용솟음쳤다.

이렇게 해서 신학교 시절이 빠르게 지나가고, 이제 졸업식이 가까이 왔다. 젊음, 열정주의, 희귀한 능력, 단호함, 불타오르는 신앙, 이 모든 것은 그의 것이었다. 아버지의 반대, 세속적이며 신을 부정하는 철학, 고난, 그리고 남성적인 욕망은 그의 진로를 어머니의 이상으로부터 되돌리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의 운명은 황해도에 있는 작은 이엉집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랴. 죽음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의사는 용도에게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사실 본인도 자신의 야위고 창백한 얼굴, 그리고 바르르 떠는 몸집을 볼 때면 임박해오는 죽음을 실감하곤 했다. 용도는 어느 날 기가 꺾인 채로 상념에 사로잡혀 학교에서 집으로 왔다. 제대로 살아보기도 전에 그는 곧 죽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침에 잘 자랐다가 저녁에 베임을 당하는 풀 한 포기와도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조롱하기라도 하듯 운명은 그에게 부흥회를 이끌어 달라는 초대장을 보내왔다. 그 때는 그가 아무 힘없이 자리에 누워있었던 때였다.

그가 명상하면서 누워있을 때, 그의 눈에는 소년시절에 만났던 대구의 한 여인에 대한 기억이 스쳐갔다. 그 여인은 장촌에 있는 자기 집 맞은편 집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영매무당이었는데, 시무언이 30세 이전에 바로 죽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러나 용도가 30세를 넘기거든 나에게 알려달라"고 덧붙였다. "30세를 넘기면 그는 비상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고 그 여인은 예언하였다.

"주님께서 우리 생각을 당신에게로 인도했음을 믿습니다." 북쪽에서 온 목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이용도를 인도자로 초대한다는 부탁의 말을 했다.

"우리는 성령의 강림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무언은 쇠약한 상태로 누워 있었기에 그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웠다. 혼자 생각에, "나는 곧 침대에서 죽게 될 터인데. 그래. 일어나서 죽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닐 거야. 아니고말고. 오히려 이 일이 주님을 위한 내 생애 마지막 봉사라면 나무토막처럼 누워있기만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은 아닌가? 그래 일어나자. 그리고 죽자. 죽어야만 한다면 죽자. 전쟁터로 가는 길 위에서."

이용도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가족들은 모두 놀랐다. 그들은 충고도 해 보았고, 항의하면서 따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각오에 차 있었으며, 그 작은 체구 안에는 확고한 의지가 자리 잡고 있어서 어떤 반대에도 그의 길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나는 서강(West River)으로 갈거요." 용도는 거의 도전적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의 아내 봉애는 어찌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간청했다. "왜 그러시는 겨죠? 당신은 역으로 갈 힘도 없어요. 어떻게 혼자 부흥회를 인도하겠다는 거예요?"

"아니오. 내가 여기 누워 멍청이처럼 수치스럽게 죽어야만 한단 말이오?" 용도의 눈은 번쩍였다.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아니오. 나는 가다가 죽을거요. 그것이 곧 영광이 될 거요."

그리고 용도는 역으로 향했다. 한번 더 불굴의 신앙이 승리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상태가 호전되고 있음을 느꼈다. 용도는 서강으로 가는 열차표를 구입했다. 서강 북쪽에서는 사람들이 그가 오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멀리가면 갈수록 그는 더욱 생기를 얻었다. 여덟 시간이나 걸리는 열차와 버스가 그를 지치게 하지 못했을 때, 용도는 이미 안식을 느꼈다.

첫 집회가 다가 왔을 때 용도와 그의 친구는 어둠이 짙은 소나무 숲 사이로 기도하러 갔다. 용도는 주님 앞에 죄인 된 심정을 모두 드러내 놓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은 채로 설교주제를 구했다. 희미한 불빛 띠가 교회창문의 가장자리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러나 용도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는 기도만을 계속했다. 아직도 여전히 설교할 메시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날을 고대하고 있던 일 이 백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즉각적인 찬송가의 선율이 어둠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것에도 마음에 둘 여유가 없었다. 그는 오직 기도할 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목사는 집회를 열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더욱더 분명히 일치된 목소리의 찬송이 들려왔다. 그 찬송들은 외롭게 무릎 꿇고 기도했던 용도에게 익숙한 노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기도만을 계속할 뿐이었다. 아직도 환상이 열리지 않았다. 찬양은 멈추고 누군가가 용도에게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중이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그는 일어서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만족된 상태는 아니었다. 강단에서 그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희미해지자, 목사는 그들의 간구함을 정리하는 기도를 하였다. 결국 시무언은 일어섰다. 이제야 그는 주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것이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용도는 이전에 한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설교해 나갔다. 회중들의 마음이 녹아 내렸다. 몇몇 사람들은 밤새도록 남아서 영적인 적과 싸웠다.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은혜의 보좌로 들어 올렸다. 시무언은 아직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혼자만의 새로운 체험을 만끽했다.

말씀은 계속되었고 교회는 두 번째 밤을 적시는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또 다른 필사적인 몸부림이 그 나무아래 있었고, 이어지는 강력한 설교가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나갔다. 그와 같은 부흥회는 서강에서 이전에 볼 수 없던 것이었다.

시무언의 명성은 널리 퍼져갔고, 각처에서 초청이 쇄도했다. 용도는 매일매일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선물(말씀)에 의존하면서도 자신의 몸은 아끼지 않았다.

그의 첫 목회는 통천이라고 불리는 금강산 근처에서 순회 목회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한자어를 같은 음의 다른 글자로 바꿈으로써, 기독교인들은 그 도시 이름을 "통천(通川)"이라고 부르는 대신, "통천(通天)"이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그것을 우리는 "하늘의 성찬"(Heavenly Commun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무언이 그곳에 갔을 때 하늘의 성찬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교회는 두 파로 나뉘어서 갈려 있었다. 한 파는 청년회 회장으로 있던 유원복에 의해 주도되었고, 다른 한파는 교회 학교장이었던 김석호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시무언은 아무도 없는 교회에 기도하러 갔다. 바닥에 얼굴을 대고 어둠 속에서 기도하는 중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용도는 갑자기 사탄이 창문으로 들어와 자기 옆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땀이 교회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이미 온 것 같았다. 사탄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점점 가까이 와서 마치 용도를 잡아 삼킬 것 같았다. 드디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그는 온 힘을 쏟아 격렬하게 외쳤다: "여기서 떠나가라, 사탄이여." 그 순간 사탄은 발광하면서 다른 쪽 창문으로 사라져 갔다.

이후 즉시 용도는 홀로 기도하기를 계속했다. 그는 동일한 적대자(사탄)가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면서 교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악한 생각을 심어주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는 어둠의 왕자가 밖으로 나가 유원복의 집으로 가는 것을 뒤따라갔다. 그 집 문 앞의 땅위에 그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용도는 그와 같은 악마의 용모가 청년회 회장의 잠자는 얼굴위로 떠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악마와 도덕적인 싸움에 들어갔으며, 적이 물러날 때까지 싸움을 계속했다.

그 때 멀리서 용도는 악마가 김석호의 집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곳으로 그는 달려가서 다시 투쟁을 계속했다. 전투는 아침 내내 이 집 저 집으로 옮겨가서 교인들의 잠자는 몸체와 가슴위로 이어졌다. 그 대적이 완전히 물어나자 시무언은 집으로 돌아와 늦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장차 일어날 사건들은 이것이 쉽게 치유되지 않은 전형적인 고린도 교회가 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구역회를 개최할 시간이 되었다. 그 해의 운명은 이 모임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이 모임이 축복의 시간으로 입증된다면, 그 한해는 유익한 한 해가 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람들은 상실감을 겪을 것이다. 모임의 성공은 지도자에게 달려 있었다. 따라서 설교자들과 전도부인들은 삼일기도회를 위해 먼저 모이도록 계획되었다. 이 모임은 교회사무원을 위한 5일 간의 부흥집회에 이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구역회의 나머지 모든 것이 개최되었다.

 

 

제 3 장 상한 몸을 이끌고

 

1928년 11월 5일 월요일 저녁, 금강산에는 온천이 있었다. 열 명의 설교자와 세 명의 전도부인, 그리고 그 밖의 한 두 사람이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삼일간의 기도모임에 동참했다. 이 모임은 한국교회사에 있어 주목할만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원산구역회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때에 진행하는 일상적인 일은 하나님과의 생동적인 만남이 없이는 소용이 없다. 지도자들은 우선 활기찬 기운을 받아야 한다. 이런 취지로 그 열다섯 사람들은 모인 것이다. 원산지역의 교회간부들을 위한 그 기도모임은 5일간의 부흥집회로 열렸는데 마지막 이틀간에 걸쳐 구역회 일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브라난(L. C. Brannan) 형제가 기도모임을 이끌었고 축복기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시무언이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이 간부들의 부흥집회에 동참하자 그 열기는 뜨거워졌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학교 전시회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단한 집회의 효과는 별로 빛을 보지는 못했다. 토요일에는 다음 월요일에 용도와 동행했던 김창희 외에 시무언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세 명이 더 합류했다. 유치부 교사였던 김재경과 고씨라고 불렸던 한 청년과 당시 한쪽 파당에서 불화의 고삐를 쥐고 있었던 청년연합회 회장 유원복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 삼일 늦게 도착했다. 그런 태도는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직책상 그 밖의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그 부흥집회에 우선적으로 참석하지 못한 점이었다. 시무언은 그들이 부흥집회보다는 휴가를 즐기기 위해 산으로 올라온 것처럼 느껴졌다. 시무언을 실망시켰던 또 다른 요인은 그 네 사람들이 모두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배타적인 파당을 이루고 있었다. 만일 다른 파당의 지도자가 오지 않았다면 불화는 해소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 혼재된 동기와 갖가지 시련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도는 여전히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켜 주시기를 바라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자정 무렵에 친구 현목사가 찾아와 시무언에게 말했다: "자 조용한 교회로 가서 기도하세나."

캄캄한 교회 안에서 시무언은 기도하고, 이어 현목사가 기도했다. 그리고 조용한 기도가 이어지면서 가끔 아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큰 소리로 기도했다. 가을밤의 공기는 쌀쌀했다. 그러나 언제 기도했으며 어디에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시간은 흘러갔다. 몸부림치는 기도 속에서 섬광과 같은 불빛이 시무언에게 나타났다. 그는 이 불빛이 무언가 이상한 사건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결국 누군가가 교회 문을 열고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소리를 들었다. 다시 이목사와 현목사는 교대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그 사람은 조용히 밖에 나갔다가 곧 다시 들어왔다. 그는 현목사 뒤에 앉아 말하기 시작했다. 이목사는 기도를 끝내고 그 사람이 의사를 찾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손님은 이 마을의 학교선생이었다. 이목사는 그가 좋은 기독교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의 아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용도는 그 사람 집을 방문하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현목사가 그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갈 때, 시무언은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들어올리면서 그들과 함께 가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서(Saw)씨를 찾은 후에, 이용도 목사는 네 명의 교인과 함께 그 선생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인간의 손을 벗어난 어린애가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무언에게는 그 아이가 마치 불신자들의 세계와 미온적인 종교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병이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실 것이다."

여러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 때 하나의 분명한 인상이 시무언에게 비춰졌다. 한 목소리가 말했다: "물을 따뜻하게 데워 그 아이를 씻어라."

여러 사람이 교대로 기도하는 동안 시무언은 따뜻한 물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발광하는 그 아이를 진정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무언은 하나님께 아이를 진정시켜주기를 기도했다. 정적이 엄습했다. 그들은 기도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아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지 않는가? 기도는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기도로 발전했다.

따뜻한 물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아이는 거의 생명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 아이의 몸을 씻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반대로, 못 씻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아이는 어차피 죽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를 씻고 난 후에 다시 기도했다. 그들은 이제 아이를 치유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달라는 기도를 했다.

그들은 교대로 할 수 있는 한 모든 형태의 기도를 했다. 일요일 아침 거의 다섯 시 무렵에 아이의 숨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치유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겼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후에 그들은 그 집을 나왔다. 시무언은 기도하러 산으로 갔다.

조반을 먹기 전에 아이가 편안하게 잠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시무언과 다른 두 사람은 이상하리만큼 심각한 복통을 앓고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매일 아침 기도모임을 담당하고 있었던 시무언은 오늘 어떻게 그 기도모임을 인도할 것인지 막막했다. 그 때 서씨가 이목사에게 말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아이의 병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그 사람들이 그 병을 이겨내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지만 교회문제는 아직 남아있었다. 아이의 몸은 회복되었으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생한 교회의 분열은 치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일요일 아침 예배 전 상황은 특히 암울했다.

유치부 선생인 김재경이 시무언의 방으로 왔다. "목사님, 나는 아침 기도모임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산으로 갈까 합니다. 떠나기 전에 저에게 부탁하실 말씀은 없나요?" "물론 교회보다는 산에서 더 많은 즐거움과 축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용도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오늘은 주님의 날입니다. 당신의 여정에 다시 오지 않을 특별한 기회입니다. 나는 산에 가지 말고 이곳에 머물라고 말하고 싶군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그녀는 일어나 나갔다. 이 목사는 그녀에게 경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기도 중에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인도하실 때 산으로 가든지 교회로 가든지 그대로 따르십시오."

그녀가 떠나갈 때 시무언은 다시 기도했다. 성령님께서 이 젊은이들을 이끄시사 그들에게 새로운 체험을 선사하시길 기원했다. 시무언은 교회로 갔다. 김재경이 어떻게 할 것인지 다소 궁금해 하면서 앉아 있었다. 그 때 너무도 기쁘게도 그녀와 다른 네 명의 청년부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예배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얻은 것 같았다.

그날 오후 2 마일 남짓 떨어진 근처의 큰 절(新川寺)로 하이킹을 가고자 했다. 하나님께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한 순간, 시무언은 그들이 기도모임을 떠나기 전에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고뇌에 빠져들었다. 김재경 외에도 유원복과 고씨는 월요일에 일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유원복은 시골읍사무소에 근무하고 서씨는 법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상황은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주일학교장 편에 섰던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파벌주의를 실제로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은 당분간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한 쪽 파벌의 지도자들만 진실로 회개한다면, 시무언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자기 교회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김재경이 월요일 아침에 시무언에게 왔다. "목사님, 조반을 먹은 후에 저는 가야 합니다." 그녀는 숙소 문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우아한 하얀 실크 블라우스와 주름잡힌 검은 스커트가 바닥 베란다 위로 약간 비춰졌다. "가능하다면 가지 말아요. 여기 머물러 더 큰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시무언은 이렇게 부탁하면서, 보조교사가 오늘 하루 혼자서 아이들을 모두 돌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반쯤 돌아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단풍나무가 타오르는 10월의 겉옷을 벗었고 거친 바람 속에서 수척하고 우울한 상태로 서있었다. 유치원에 난로가 새로 마련되었다. 아이들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선생 혼자서 학급을 운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날은 어머니들의 모임이 있었던 날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젊은 남자들이 돌아 올 때쯤 그들과 함께 버스 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른 버스를 타야했다.

시무언은 그녀의 반항적인 행동에 하나씩 반박했다. 난로와 어머니 모임은 그녀 없이 하루 동안 잘 어우러질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젊은 남자들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미 그들과 함께 왔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비난을 초래했다. 그들이 함께 돌아간다면 상태가 더 심각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과 나에게 맡기시오." 시무언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당신을 변화시키는 축복을 받는 것은 오직 당신을 위한 일이오. 그리고 나서 돌아가 아이들에게 실제로 좋은 지도자가 되시오."

그녀의 눈이 슬픈 기색을 하고 치켜올려져 숙소 지붕 위의 거대한 수정 모서리를 향했다. 밤의 냉혹한 추위가 그것을 별들의 성전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는 천사들이 창조주 앞에서 경배하기 위해 모여들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를 바라보면서.

"저, 그렇게 하겠습니다. 축복을 받고 난 후에, 그리고 나서 가겠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젊은 청년들이 돌아오자, 시무언은 밖에 나가 그들에게 유치원 선생이 축복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노라고 전했다. 그는 유원복을 처음 만났다. 그러나 처음 보는 순간 그 역시 변화되어 있었다. 그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역시 큰 축복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당신은 머무를 수 없어요. 가는 길에서 기도하세요. 당신은 여기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는 길에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무언이 이렇게 말하자, 원복은 눈물을 흘렸다. 시무언은 그가 일하러 가야 하는 일과 축복 받기 위해 남아 있는 일 사이에서 얼마나 깊이 갈등하고 있는가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 둘은 울었다. 바로 그때 한 두 사람들이 들러서 잠깐 머물렀다. 그러나 고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가지 않는 거죠?" 시무언이 그 무리에게 물었다. "우리 역시 더 많은 축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오늘 가지 않으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시무언은 이 때가 기도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을 팔로 감싸며 산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얼마나 그들이 기도하고 고뇌하면서 증오하는 마음과 파벌의식을 고백했는지!

그 때 시무언은 원복에게 말했다. "이제 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직장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여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내 친구 고씨도 축복을 받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원복은 이렇게 간청했다.

그들은 숙소로 내려왔다. 아침식사 시간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고씨를 만났다. 그는 식사 중이었다. "원복과 창희는 기도하기 위해 머무르는 중입니다. 당신도 머무르시죠." 시무언은 말했다. 그는 김재경이 남아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신중을 기했다. 고씨는 갑자기 자신이 먹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직감했다. 그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시무언은 눈물이 글썽하여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요? 조반을 드세요."

"저 또한 머물러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시무언은 참으로 기뻤다. "아침 식사를 들고 나서 교회로 가세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제 4 장 그리스도의 몸을 치유하다

 

그 월요일에 네 번 예배가 있었다. 유씨, 김씨, 고씨, 그리고 통천교회의 유치원 선생 모두 그 예배에 참여했다. 시무언이 그들을 위해 계속적으로 기도하자 그들 모두 은혜를 받았다. 화요일이 되자 그들은 계속 머물렀다. 화요일이 마지막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날 밤에 연회가 시작될 계획이 잡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날 일은 곧 일어나고야 만다.

결정적인 순간이 예상외의 방식으로 발생했다. 시무언 교회의 한 분파의 지도자 격인 주일학교장 김씨가 왔다. 그것은 분파주의가 이제 치유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이런 기회는 없을 것임을 의미했다.

구역회가 열릴 무렵 리셉션에 이어 그날 저녁 예배가 있었다. 한밤중이 되서야 그 파티는 끝났다. 그들이 밖으로 나올 때 원복은 시무언 뒤를 따라 나와 예상했던 대로 인사를 했다. 시무언은 그가 더욱 깊은 은혜의 역사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이 기도합시다." 시무언이 이렇게 제안하자, 원복은 "예, 그렇게 하죠." 하면서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붙잡았다. "산으로 갑시다." 둘은 일어나 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절벽에 서서 고뇌하는 소리가 온 산을 울리도록 기도했다.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니, 그 사람이 유치원 교사는 아니었다. 여하튼 어떤 이가 그렇게도 쏟아 부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였다.

반시간 동안 함께 걷고 난 후에야 둘은 돌아왔다. 기도소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춥고 어두운 산 속에 메아리쳤다. 이제야 그들은 그 기도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교회의 전도부인이 하는 기도소리였다.

원복과 시무언은 따로 마련된 곳에서 무릎을 꿇었다. 원복이 어찌나 기도를 하던지! 특히나 자신이 미워하는 대상을 위해 그는 기도했다. 그들이 내려올 때는 거의 두 시였다. 그들이 헤어질 지점에 이르자 시무언은 "서둘러 주무세요." 라고 격려했다. "아닙니다. 저는 잠자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원복은 시무언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그들이 헤어질 때 시무언은 이렇게 말했다: "부흥집회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아침에 일어나거든 친구들을 데리고 교회로 와서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원복은 떠났고 시무언은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그의 룸메이트들이 모두 방바닥에서 잠자고 있었다. 방금 도착한 석호는 잠에서 깨어나 시무언에게 물었다: "어디에 있었습니까?". 시무언은 원복이 은혜 받은 것에 대해서 그에게 말했다. 그는 나가면서 일렀다: "아침에 일어나거든 교회로 오시오." 석호는 시무언이 밖으로 나가 다시 추운 곳에서 기도할 것이라고 여겨 외투를 빌려주려고 했다. 시무언은 외투를 걸치고 교회로 가서 청년부원들을 위한 자기의 목회사역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가 기도할 때 여자들이 있던 쪽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도소리였다. 이전에 산에서 기도했던 전도부인의 기도소리였다. 용도는 다시 한번 그 여인의 기도에 하나님께 찬양드렸다.

그녀가 기도를 끝냈을 때 시무언은 말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청년부원들이 오늘 아침 기도모임을 위해 이곳에 올 것입니다. 당신도 오세요." 그리고 나서 둘은 기쁜 마음으로 함께 기도했다.

문에서 삐꺽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시무언과 전도부인은 계속하여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한참동안 듣고 있다가, 새로 온 사람이 합류했다. 그 사람은 석호였다. 말썽 많은 분파주의자인 석호가 온 것이다. 그는 가슴을 두드리며 땅을 치고 통곡하며 뜨거운 눈물을 홍수처럼 흘리며 고백하기 시작했다. 시무언이 울면서 그와 함께 기도할 때, 석호는 그에게 가까이 와서 자기 팔로 시무언을 감싸며 말했다: "저를 용서하세요. 내가 죄를 지었어요." 눈물과 회개의 외침이 뒤범벅이 되어 가까이 있는 교회기숙사에 기거하는 사람들이 깨어날 정도였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시무언은 그가 원복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석호가 일어나 원복에게 가서 그의 팔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두 대적들은 서로 만났다. 그것은 기도모임을 통해 이루어졌다. 불같은 부흥집회를 통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때 바로 그 때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불길이 떨어졌다. 성령께서 그의 온전함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점점 교회는 사람들의 기도로 가득 찼다. 더 이상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시무언은 자기 숙소로 달려가서 교인들을 불렀다.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빨리 오세요. 성령께서 강림하셨어요!"

그 때 그는 브라난 형제가 다른 숙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하기도 하고 환희에 젖어 그는 신발도 신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가는 도중 시무언은 갑작스러운 생각이 떠올라 실망하고야 말았다. "문이 잠겨 있을까?" 하지만 그는 기도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당신께서 베드로와 바울을 위해 감옥 문을 여셨듯이 저를 위해 이 문을 열어주소서."

그는 숙소에 당도했다. 희망을 안고 문을 잡았다. 아, 문이 열렸다! 너무 기뻐 외쳤다. "아멘! 성령께서 문을 열어 주셨어!" 그는 안으로 들어가서 브라난 형제를 불렀다.

"빨리 와요. 신기한 일이 발생하고 있어요. 와서 모임을 인도해 주세요."

교회로 다시 돌아와서 그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목사님 가운데 한 분, 원산의 이호빈을 기억하고 급히 그를 다시 한번 불렀다. 또다시 괴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런 식으로 주도권을 잡는 것은 호의적인 태도가 아닐지도 몰라. 이 일을 이곳 목사에게 맡기거나 감리사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냉정한 이성을 소유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충만해 있었다. 그런 때는 어떤 것도 법칙대로 가지 않는다. 그는 달려갔다.

교회로 돌아오자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유치부 선생과 고씨가 생각났다. 그들을 찾았지만 방에는 없었다. 시무언은 다시 밖으로 급히 나갔다.

이전에도 두 번이나 그랬듯이 이제 다시 어려움에 직면했다. 어떻게 남자인 그가 김 선생을 깨울 수 있을까? 여자들만 사는 곳에 남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는 달리면서 기도했다.

그가 여자 숙소에 도착했을 바로 그 때 숙소 여주인이 밖으로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성령께서는 어려움을 부드럽게 해결해 주셨다.

"선생님을 불러주세요." 그는 기쁜 마음으로 부탁했다.

"선생님! 선생님!" 그 여인은 계속 불러댔다.

"예, 김재경, 유치부 선생님입니다." 시무언이 설명했다.

조금 후에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문 쪽으로 왔다.

"밖으로 나오세요.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시무언은 손짓몸짓으로 설명했다.

"나는 잘 수가 없어요. 나는 번민에 빠져 있었어요. 곧 내려갈게요." 그녀는 말했다.

그녀가 왔다. 그녀는 교회 안에서 깊은 시름에 잠겨 무릎을 꿇고 바닥을 치며 울면서 기도했다.

네 시가 지나고 다섯 시가 되었다. 불빛도 없었다. 그러나 따뜻했다. 땀방울이 얼굴에 흘러내렸다. 형제 앤더슨과 형제 브라난이 가운데 서서 서로 호흡을 맞춰 , "오, 주님!" 하고 외쳤다. 시무언은 그들에게 김선생과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부탁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온 마을에 소문이 퍼졌다. 여섯 시였다.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일곱 시. 여덟 시. 아무도 조반을 먹을 생각을 못했다. 오직 기도와 회개의 고백만이 있었다.

"어떻게 하죠?" 시무언은 결국 브라난 형제에게 물었다. "구역회를 연기합시다. 이 일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계속합시다." 브라난 형제가 동의해 주었다.

그 날 하루 종일 모임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원했던 구역회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다시 온 것이다. 50-60명이 교회에서 밤새도록 기도했다. 목요일 아침에도 성령이 충만했다. 대체로 교회에 일찍 온 사람들은 모여 앉아 얘기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도소리 외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어떤 인도자도 필요치 않았다. 오직 성령만이 그 일을 주관할 뿐이었다.

그날 대여섯 사람들이 마을을 돌면서 심방하면서 성령의 불길이 각 가정에 내려 온 것을 확인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광채가 가득했다.

그날 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자 성령께서 다시 권능으로 계시하셨다. 시무언은 다음날 아침에 있을 추가 모임을 광고했다.

"언제라도 깼을 때, 교회로 오십시오. 그 시간은 성령께서 당신들을 인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들은 밤낮으로 금식하며 거의 쉬지 않고 기도했다. 그들에게 이런 힘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기적적이었다. 시무언은 두 시에 교회로 가서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여섯 시까지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시무언은 또 다시 다음날 아침에 있을 기도모임을 알렸다. 그 이후 아무런 광고도 없이 아침 기도모임은 5-6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없었다. 결국 구역회는 열렸지만 예정보다 이미 6-7일이 지난 뒤였다. 이것은 실로 부흥회의 연속이었다.

새롭게 거듭난 삶에 나타난 즉각적인 결과 외에도 부흥회의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만나기를 원했으며, 그들은 군인처럼 씩씩하게 밖으로 나가 반발하는 사람, 경솔히 행동하는 사람, 그리고 "내일"의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집안으로 들어가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기적적인 병고침이 일어났으며, 그들이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불길이 내려왔다.

두 번째로 이 부흥회를 통해 구역전도계획의 구상이 탄생되었다. 원산구역에 있는 수천의 기독교인들이 일년에 일원씩 복음전도단에 기부하기로 동의했다. 유명한 전도자 정남수가 그 모임의 회장이 되고 시무언은 그 운동의 재정을 보았다. 이 운동은 송도와 수원구역에도 퍼져 나갔다.

세 번째로 구역 소속 청년들이 볼셰비키 사상의 유혹에 수년간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그러한 불길한 조짐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네 번째로 거듭난 새로운 삶이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천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구역의 주일학교에 새로 등록했다. 새신자들이 아무런 인도도 받지 않고 교회로 오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를 몰랐던 가장들도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했다. 60-70 마일이나 떨어진 양양 지역에도 그 소식은 전해져 성령의 불길은 퍼져나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다섯 번째로 통천교회의 파벌주의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실망시켰던 교회의 모습은 이제 실로 하나님이 교통하시는 장소가 되었다. 봄에는 이제 친구가 된 원복과 석호, 창희와 고씨, 그리고 다른 청년부 회원들은 교회에서 한 달 동안 새벽기도회에 참여했다.

이미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4월 9일 화요일 저녁에 부모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그 날 백 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통천교회로 몰려들었다. 교회가 작아 모인 사람들의 반이나 자리를 잡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창문 가까이 언덕 쪽에 모여 은혜 받기를 갈망했다. 심지어는 믿지 않은 사람들까지 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 약 100원이 헌금으로 모여졌는데, 오늘 저녁은 1500원으로 불어났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창문으로 손을 뻗쳐 헌금바구니에 헌금을 하기도 했다. 헌금 외에도 구두, 옷, 반지 등을 기증하기도 했다.

"나는 이 돈 때문에 지옥에 갈거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제물을 가져왔다.

"나는 이 물질을 제거하니 행복하기 그지없소."

어린 소녀에 대한 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빠는 그 소녀에게 오랫동안 꿈꿔왔던 새 신발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녀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소식을 듣고 자기 아빠에게 신발을 선물하는 대신 그 돈을 교회에 헌금해주기를 요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이 때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한 유치부 어린이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 어린애는 부흥집회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배웠던 아이였다. 그 여자아이의 선생이었던 김재경이 들어와 그 아이가 마치 자기 아이처럼 울었다. 그 아이가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 그녀는 찬송가 한 곡을 부르면서 교회더러 종소리를 한 번 더 들려달라고 청했다. 마지막 울린 아름다운 종소리가 고요한 방에 울려 퍼지자 그 어린 영혼은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떠나갔다. 어린아이의 얼굴이 광채를 띤 것을 본 아이의 부모는 기뻐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전체 도시에 그 슬픈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날 밤 교회로 왔다. 성령의 불길이 또 한번 강림했다.

이런 일들이 이어지는 동안 한 청년이 시무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한 사건이 있었다. 청년의 앞길은 밝아 보였다. 그 청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노기를 띠고 있는 아내와 마주쳤다. 아내는 그에게 비단으로 만든 조끼를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그 조끼를 남편의 가방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청년이 그것을 아내에게 사준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 조끼는 다른 여인을 위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 5 장 죽음에서 일어나다

 

1929년 1월, 원산 구역회는 부흥회의 열기로 가득 찼다. 동해안에서 낚시도시로 유명한 창전에서 시무언과 원산에서 온 그의 동역자 이호빈은 특별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새벽기도회에, 전에 본적이 없는 대략 28세쯤 보이는 청년이 주저하면서 문으로 들어섰다. 그는 천천히 신발을 벗고 어색하게 안으로 들어와서 뒤쪽의 매트리스바닥에 앉았다. 시무언은 그의 처신을 보고 그가 기독교인이 아님을 직감했다. 설교가 끝나고 기도와 회개의 고백시간이 돌아오자 그 남자는 일어났다.

"저의 이름은 우선모입니다. 원산에서 전신업무를 보고있는 기사입니다." 그 남자는 말했다. "수개월 동안 나는 일하러 창전에 와서 항상 교회 맞은편에 있는 숙소에서 머물렀습니다. 이른 아침에 자는 도중 나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종소리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해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나는 눈앞에 있는 작은 종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말이 목에 건 종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아해 하면서 나는 일어나 정원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내 발은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무릎을 꿇었을 때 나는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그 방안에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내 죄를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믿지 않는다면 나는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후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던 강단 위에 작은 종이 바로 그곳에 있어야 했다. 방문객은 그 종을 보자 즐거워했다.

"바로 이 종을 내가 오늘 아침 환상 속에서 보았습니다. 이 종을 저에게 주신다면, 내가 그것을 방에 걸어 놓겠습니다. 그 종이 나로 하여금 나의 결심을 되새기게 할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는다면 그 종이 내게 회개할 것을 깨우칠 것입니다."

목사는 허락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4일 동안 매일 아침, 오후, 저녁의 모든 집회에 참여했다. 마지막 집회가 있는 날 밤 그는 라디오를 가져와 그것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증했다. 사람들은 기꺼이 허락했다. 그는 라디오에서 어떻게 소리가 나는 지를 설명한 후에, 비유를 통해 좋은 설교 한 편을 전했다. 소리를 듣기 위해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이, 우리의 생각 역시 하나님께로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이전에 우리가 공중에 있는 소리를 붙잡을 힘이 없었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이제 겨우 예수를 믿은 지 4일 밖에 되지 않는 청년의 입에서 그런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것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흥집회가 끝나자 그 남자는 원산으로 돌아갔다. 원산에 오니 일전에 아내가 자신의 가방 안에서 발견한 여자 조끼가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의심받은 물건이다.

"이게 무엇이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죠?" 그녀는 큰 소리로 항의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나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내가 그것에 관해 말하리다." 그 남자는 평상시와 달리 조용히 말했다.

수요일 저녁에 기도모임이 있었다. 그 여인은 남편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여겼다.

"좋아요. 갑시다." 여인은 화가 나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에서 3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 시간 동안 걸어서 교회에 왔지만 모임은 이미 끝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간 뒤였다. 그 때 이호빈 목사가 문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목사님 앞에서 아내에게 말할 내용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전도부인과 상담을 한 후에 그들은 모두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들 앞에서 그 남자는 죄의식을 갖게 한 숙고사 명주조끼를 펴 보였다.

"작년에 나는 다른 여인과 정을 통했습니다." 그 남자는 숨죽이며 듣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찬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대담한 고백은 사람들의 가슴을 빠른 속도로 뛰게 했다. 그들은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 여인에게 주기 위해 이 조끼를 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한 사람이었기에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다시 만날 기회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창전으로 가서 교회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교회로 들어가서 회개했습니다. 이제 나는 이 조끼를 나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주기를 원합니다. 나를 용서하세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호빈 목사와 전도부인이 아내를 향해 말했다. "우씨가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았으니 그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이 명주조끼를 하나님께 바치기 바랍니다."

우씨의 아내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하고 나서 자신 역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우씨는 아내가 개종하지 않은 것을 알기 시작했다. 그는 하늘나라에 온전하게 이르지 못한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아내에게 계속적으로 죄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인의 삶이나 가정, 국가, 그 밖의 모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믿어야 한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후에 거리로 나가 있는 힘을 다해 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으며, 직장에서는 직원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다.

어느 날 매우 추운 밤에 설교자와 전도부인이 그들을 방문했을 때, 그는 곧 자리를 떴다. 마침내 일본인 한 명과 조선인 일곱 명의 친구를 데리고 와서 따뜻한 방에 앉혔다. 책을 한 권 들고 거기에 일원 짜리 지폐를 놓고 성냥불을 그어댔다.

놀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성냥을 지폐아래 놓고 다 탈 때까지 불을 지폈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미쳤군, 돈을 태우다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잠시 침묵한 후에 그는 대답했다. "당신들만큼이나 미치지는 않았소. 당신들은 내가 손으로 일원을 태웠다고 말하지만, 당신들은 입으로 수십 수백 원을 태웠소. 당신들은 얼마나 많은 돈을 지금까지 태웠소? 나 역시 당신들과 다르지 않았소. 그러나 이제는 예수를 믿고 더 이상 담배를 피워 돈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소. 이것 뿐 만이 아니오. 우리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술로 낭비하고 있습니까? 지금부터 술과 담배를 끊고 예수를 믿으시오."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설교했다.

이목사의 짧은 설교가 끝난 후에 그 일본인 친구는 실로 감동하여 자신도 일본에서 삼 년간 교회에 나간 적이 있으나 조선에 와서 기독교를 반대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지금 나는 큰 번민에 빠졌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교회에 나가 다시 믿음생활을 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거기 있는 조선인 역시 모두 감동하여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

정남수 전도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원산에 있는 남촌(Southville) 교회에 왔을 때, 우씨는 삼 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매일 저녁과 아침 모임에 아내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아내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교회 가는 것마저 뜸해지자, 그는 여러 번 화를 냈다. 어느 날 밤 말다툼 끝에 그는 아내를 심하게 구타했다. 그 때 그녀는 냉소적으로 조롱했다. "그래, 기독교인은 모두 자기 아내를 때린다지!"

그 때 그는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점점 깊어질수록, 아니 그것을 깨닫기 전에 이전의 즐거움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동안 내 아내를 잘 인도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내가 진실로 축복을 받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통회하면서 자신을 반성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그는 교회에서 매번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오히려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만약 내가 축복 받을 수 없다면, 나는 내 아내와 함께 지옥에 가게 될 거야."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벽에 걸린 종을 바라볼 때마다, 주님의 축복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가득 찼다. 그러나 그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어느 날, 그는 긴 칼을 사서 종이에 쌓다. 벽에 걸린 종을 내려 자기가 산 칼과 함께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교회로 갔다.

교회로 가는 길에 그는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밤 나에게 은혜를 내리시지 않는다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어."

바로 그날 밤 시무언은 원산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몇일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예배에 참가한 후에 축도 후 그와 만났다. 시무언이 보기에 그 남자는 심한 상실감에 젖어 있었고 집으로 가기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시무언은 그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는 오늘 밤 집에 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교회에 남아 기어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야 말겠습니다." 그 남자의 각오는 대단했다.

시무언은 그의 가슴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이끌고 교회 뒤 언덕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승리를 위해 기도했다. 밝은 달빛 아래서 그 두 사람은 언덕 꼭대기에 조용히 앉았다. 마침내 시무언이 입을 열어 그에게 말하면서 훈계와 기도를 하였다. 우씨는 일어나 호주머니에서 한 뭉큼 된 것을 꺼냈다. 천천히 그것을 열고 무엇인가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놀라 바라보는 시무언 앞에서 펴 보였다. 긴칼은 달빛에 반사되면서 번쩍번쩍 빛났다.

"이게 무엇이오?" 시무언은 놀라서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나는 내 아내를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집은 행복하지 못하고 내 머리는 심히 괴로워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스스로 결심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평화를 주시지 않는다면 난 이 칼로 자결하려고 합니다." 호주머니에서 종을 꺼내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종을 우리 집에 걸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축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 그것을 부숴 버리기 위해 가지고 나왔습니다. 오늘 저녁 목사님을 만나 뵈니 이제 충분히 만족하고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이후부터 나에게 더 큰 축복을 마련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내를 구타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를 위해 기도하렵니다."

시무언은 말했다. "당신이 죽으려고 한 것은 사탄의 유혹이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 당신을 축복하셨으니 이제는 축하할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들이 머리를 들고 기도를 끝내자, 우씨는 시무언에게 그 칼을 기념으로 주었다. 그후 그 칼을 볼 때마다 시무언은 사탄이 사람들의 가슴으로부터 어떻게 평화를 빼앗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지를 기억하곤 했다.

교회로 돌아와서 그들은 아침까지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도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우씨와 같은 처지로 고난을 받고 있을 것이기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그 날 아침 기도모임에 시무언은 우씨의 아내가 보이지 않자 그에게 집에 가서 그녀를 데려오라고 했다. 전도부인 집에서 그들은 서로 만났다. 그 방은 일전에 위기를 겪은 기억으로 가득 찬 방이었다.

"어젯밤 당신은 거의 과부가 될 뻔했습니다." 그들이 둥그렇게 앉자 시무언은 우씨 부인에게 말했다. 그 젊은 여인은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당신은 오늘 온종일 무덤까지 가면서 울다가 당신의 남편을 땅에 뭍을 뻔했습니다." 시무언이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를 전개하자 그 여인의 얼굴에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의 남편과 함께 가졌던 오늘 아침 모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남편의 생명을 회생시키셨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간음했던 사람이요, 자기 아내를 구타한 사람이며, 자살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남편은 새사람이 되어 좋은 남편이요 진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오늘은 당신을 위해 새로 마련한 결혼식날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남편의 말을 듣지 않아 그가 죽을 뻔했습니다. 그것은 내 죄입니다. 이제부터 남편을 잘 섬기고, 그를 믿으며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이번 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생각하고 우리 사진관에 가서 시진을 찍읍시다." 시무언은 이렇게 제안했다.

그들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행복한 신랑 신부 옆에는 정전도사가 마치 자신이 결혼식을 하는 양 서 있었고, 그들 뒤에는 이호빈 목사와 시무언이 있었다. 시무언은 그 후 그들의 "형제"가 되어 그들의 집에서 가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제 거의 30세가 되가는 시무언의 예고된 수명은 마지막을 치닫고 있었다. 그의 인생 70년은 이미 물 건너갔다. 그러나 만약 여력이 있다면... .

여력? 이 기진맥진한 체구에 무슨 여력?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것이 있었다. 그의 여의고 핏기 없는 얼굴, 그리고 힘없는 손을 본 사람은 시무언이 떠날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웬일인지 어떤 곳으로부터 놀라운 힘이 생겼다. 그것은 신비 그 자체로서 엄청난 것이었으며 최상의 상태였다. 아무도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할 수 없었고, 그런 힘이 어디서 생겨났으며 얼마나 오래 갈지 몰랐다.

 

 

제 6 장 덤으로 산 시간

 

30년의 세월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연약한 육체를 가진 불신자였던 영매(靈媒)가 이 꺼지지 않는 불꽃을 예견했던 나이였다.

금강산에는 1928년 11월 내내 부흥회가 이어졌다. 원산 지역 전역에는 2년 내내 성령의 역사를 증거 하는 간증이 넘쳐흘렀다. 이제 1930년 10월, 시무언은 주일학교연합회 서기로 일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주일학교연합회에서 발행한 유익한 교재의 대부분은 시무언이 미리 준비한 원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표현의 재능이 뛰어 났고 가슴을 두드리는 특별한 은사를 지녔다.

그러나 사무실의 일은 그의 사역의 일부에 불과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주일학교 단체들은 시무언을 사방팔방으로 몰아쳤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의 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는 항상 이 단체들을 부흥회 단체로 바꿨다. 일반 교회의 성도들이 그 교재를 펴면 그들의 불신앙적인 가슴이 열리곤 했다. 그들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모였고 기도하기 위해 남았다.

그 이면에 발생한 조용한 사건들은 여전히 더욱 놀라울 정도였고 특별한 것이었다. 한 사건이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발생했다.

시무언이 내 집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저녁에 기도할 때 그는 여느 때와 달리 감동된 모습이었다. 그는 이기심, 나태함, 자만심, 자기도취, 증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지적하는 모든 잘못을 고백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피를 흘리듯이 깊이 몸부림치며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기 위해 소리 높여 울부짖었다. 내가 완전히 부끄러움에 빠질 때까지 시무언은 울부짖었다. 그 후 나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가 간구했던 그 낮은 곳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감당하는 가난과 추위와 박해와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을 내가 주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나의 목석같은 가슴을 위해 자비를 구할 뿐이었다. 마침내 로마서 8장에 기록된 대로 성령께서 간구하기조차 연약한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서 기도해 주신다는 사실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우리 두 사람은 따뜻한 방에 누워 잠시 쉬었다.

그 밤은 유달리 추웠다. 따뜻한 담요의 감촉이 좋았다. 거의 자정 무렵이 되자 우리는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 때 시무언은 일어서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나는 구유 앞에서 찬양하는 목자들을 만나기 위해 나가겠소." 이렇게 말하는 시무언의 모습을 본 나는 의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이 그 일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정도 내 자신이 초라하고 무가치함을 느꼈고 그런 말들이 나처럼 둔한 영혼에게는 반쯤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것이 내가 필요로 하는 분명한 설명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영적인 실제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말 외에는.

어둠 속에서 나는 시무언이 곧 나갈 준비가 다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주님을 만나야 했다. 나는 그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지는 그렇게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목자들과 구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추운 날에 밖에 나가는 것이 과연 좋은 시도인가? 나는 계산적이었다. 나에겐 여전히 이 추운 날에 불필요하게 밖에 나갈 이유가 없다는 걱정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추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나를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주님께서는 나에게 용기를 주셨다.

"나도 갈까?" 나는 마지못해 물었다.

시무언은 같이 가기를 원하면서 단순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만약 당신이 간다면 꼭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나갈 준비가 되었을 때, 시무언은 그의 담요 일부를 집어들고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가 추울 것 같소."

그날 저녁 시무언은 교회 가는 길에 만났던 어린 소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맑은 눈을 가진 그 소년은 심하게 다친 상태로 아무 것도 뒤집어쓰지 않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거지가 입는 외투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대화 중에 시무언은 그 소년에게 동냥을 해서 먹이고 있는 절름발이 형이 있는 것 외에는 아무 친척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두 형제는 다른 절름발이들과 함께 미국 영사관 담벽 아래 있는 대피소 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기로 되어있는 그 기독교인 소년이 거처하는 곳이 바로 "구유"였다.

시무언이 삭막한 거리를 따라 달려갈 때, 나는 헐떡이며 그를 뒤따랐다. 그는 나에게 "그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 뛰어가고 있다"고 말했다(눅 2:16).

회색 영사관의 높은 돌벽 뒤에서 우리는 풀과 썩은 깡통이 쌓인 흙무더기에 걸려 넘어졌다. 한 쪽 끝에서 흙이 패여 두 세 발자국을 만들었다. 좁은 입구에서 몸을 구부려 시무언은 그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문이 열렸을 때, 랜턴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 안에서 우리는 땅위에서 서로 엉켜지듯 모였다. 그 방은 우리의 가냘픈 혈기에서 나오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열기로 따뜻해졌다.

나이 먹어 보이는 한 소년이 일어나서 자기가 형이라고 대답했다. 작은 아이도 일어나서 눈을 번쩍였다. 그러나 그 소년은 너무 졸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무언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리고 그들에게 위로품을 전했다. 공손하게 감사를 표시한 후 그 두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고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는 그 낡은 벽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의 목소리를 높였다. 주여! 저 가엾은 영혼들이 우리가 방문한 이유를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발견하게 하소서! 돌아오는 길에 시무언은 고기잡이 가는 소년처럼 껑충껑충 뛰었다. 따뜻한 방안에서 편안하게 쉬면서도 그는 고통을 받았다. 바람 한 점 없는 황량한 밤길을 걸으면서 시무언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다. 고통과 신음은 모두 지나갔다. 무엇인가 이상한 힘이 그를 행복하게 한 것이다!

집에서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누가복음 2장 20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며 돌아갔다.' 그리고 29절에 기록된 바, '이제 당신의 종이 평화롭게 가게 하라.'"

그리고 나서 그는 이전에 가졌던 가장 행복했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어느 날 그는 거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성찬을 나누는 것과 같았다. 거지들이 가끔 문전으로 와서 찬밥 한 덩어리를 받아 가곤 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이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쳐다보시며 문 밖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연다면, 내가 네게로 와서 너와 내가 같이 식사를 할 것이다." 그 때 그는 쌀 한 줌을 주면서 주님을 문밖으로 내보냈다. 시무언은 아내에게 이제 다음 거지가 찾아오면 안으로 맞아들여 정성껏 대접하여 천사를 대접하는 것처럼 하자고 말했다.

어느 날 식사가 조그만 상에 차려진 순간 시무언은 한 거지가 살며시 떠밀려 문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달려나가 그를 안으로 데려왔다. 그 거지는 어리둥절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거지는 곧 안심하고 미안해하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시무언은 그 거지 앞에 자신의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놓았다. 그 사람은 어쩔 줄 몰랐다. 보통 10집을 방문하면 한 집 정도가 거지에게 적선하였기 때문이다. 시무언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환희를 그 때 느꼈다고 말했다.

이제 12월의 이른 아침, 조용한 시간에 그에게 다시 광채가 서렸다. 그는 참으로 이상하였고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오늘 밤 나는 구유 안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점잖게, 그러나 단호하고도 아름답게 말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의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무언처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기억한다면, 우리 대부분이 보지 못하는 감추인 것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크리스마스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교회가 북적거렸다. 하지만 열성적인 교인들은 다음날 아침에 곧 실망하고 만다. 그렇게도 북적거렸던 사람들이 이젠 모두 사라지고 교회 벽에 달라붙은 금이 간 문짝과 열려진 창문만이 덜렁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한창 열기가 무르익었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의미 있는 순서를 담아내는 프로그램 제작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어느 날 밤 오직 시무언만이 떠들썩한 프로그램을 피해 혼자 집으로 오는 도중 한 비유를 말했다. 나는 군중들이 교회를 가득 채우고, 예고된 시간 보다도 훨씬 전에 온 사람까지 접근하기 힘들게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공연하는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들은 출입구 이용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수 없이 바깥에서 밀어붙이는 동안 군중들은 안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모두 지쳐서 결국 한 사람도 남지 않고 흩어졌다.

어쨌든 시무언은 훌륭하고 현명한 왕에 의해 다스려지는 넓고 영화로운 땅에서 자신이 집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해마다 왕의 생일이 가까이 올 때, 사람들은 그의 자비로운 통치에 감사하며 그 왕을 특별한 방식으로 즐겁게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통치를 예고하면서 화려한 행사를 준비했다. 그 행사는 특별한 건물을 필요로 했고 준비과정은 몇 달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 날은 가까이 왔다. 그리고 모든 왕족과 초청된 귀족들, 그리고 그 땅의 위대한 사람들이 모였다. 왕을 위해 아름다운 의자가 마련되었고 거기서 왕은 화려한 행렬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왕은 피곤해져서 일어나 기분전환을 위해 걸었다. 모두가 최상의 기분을 유지했다. 프로그램이 너무 잘 진행되어 아무도 왕이 없어진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문 밖에 서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나자, 자신이 거지와 절름발이와 과부와 고아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위에 떨고 있는 한 노파가 이 축제를 힐끔 쳐다보고 있다. 왕은 자기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여기 배고픔에 못 이겨 울부짖는 가련한 아이가 있다. 왕은 파랗게 얼어붙은 그의 손위에 동전 하나를 쥐어 준다. 여기에 신발 한 켤레 없이 피곤해 지친 노동자가 있다. 왕은 자기 신발을 벗어 그에게 준다.

그 때 왕은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리지 않고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를 팔꿈치로 뒤로 밀어내지 않는가? 그의 왕권은 사라졌다. 그들은 그를 무단침입자로 간주했다. 거기 모인 모든 손님들은 왕의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즐기면서도 그가 사라진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무언은 구유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과 그 날에 보좌에 앉으실 왕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사람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차례로 빚진 자가 되어 이상하게도 죽음을 정복하고 떼를 지어 부요함을 가져왔다. 왕은 먹을 고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고기인지 알지 못했다. 그 고기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일이 이루어지면 그 자체로 하루가 끝났다. 만약 내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또 빌려주실 것이다.

 

 

제 7 장 내 양을 찾다

 

1931년 1월 어느 날 밤, 시무언은 한 가련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날은 그 해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이었고 온도계는 영하 23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이것은 시무언이 영동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도대체 이런 추운 날에 누가 길거리에 나와 있는 걸까!" 시무언은 생각했다. 그 울음소리는 절망의 소리였다. 시무언은 그 불쌍한 것이 그대로 방치된다면 그 신음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결국은 소멸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어떤 사람이 싸늘하고 경직된 죽은 시체를 발견할 것이다.

"교회 사람들은 나에게 안락하고 따뜻한 여관방과 충분한 양의 쌀밥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이 가련한 것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따뜻한 곳으로 데려다 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몸에 걸치고 있는 천 조각으로 조금이라도 더 몸을 감싸려는 작은 거지 소년이 길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의 바지는 무릎까지만 덮었고 나머지 다리와 발은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사탕무와 같이 빨갛게 되었다. 그의 긴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그의 수척한 손은 거지들이 들고 다니는 깡통을 움켜쥐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밥은 먹었니?" 몇 마디의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에 시무언은 소년에게 물어보았다.

"아니요, 못 먹었어요." 소년은 훌쩍거리며 말했다.

"무엇인가 먹었다면 그렇게 춥지는 않았을 텐데." 시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추위에서 더 이상 이렇게 말만 나누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시무언은 결단했다. 그리고 그는 소년에게 말했다, "자, 가자." 여관주인이 그를 내쫓을 것이라는 사실에 시무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이 소년을 반드시 따뜻한 곳으로 인도해야 했다.

"어제 저녁 뭘 먹었니?" 가는 길에 시무언이 물어봤다. "찬밥을 먹었니 따뜻한 밥을 먹었니?"

"찬밥을 조금 먹었어요," 소년은 울음을 그치며 대답했다.

"어디 아프지는 않니?"

"아니요." 소년은 한 음절씩 강조하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오!" 시무언은 생각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작용하는구나. 보통 사람들은 이런 생활을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찬밥 한끼로 이틀을 견뎌야 한다면 오늘 같은 날에 우리는 병들었거나 죽게 되겠지. 하지만 주님은 이 아이를 돌보는 방법을 다 마련해 놓으셨다. 어제 밤 나는 따뜻한 방바닥에 이불을 두 개나 뒤집어쓰고 그 위에 두루마기까지 덮었지만 추어서 잘 수가 없었다. 이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보살핌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관방에 도착하자 시무언은 소년에게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았다.

"여덟 살이요." 소년이 말했다. 소년은 그의 나이에 비해 왜소해 보였다. 문을 열고 그들은 방으로 들어왔다. 시무언은 소년을 가장 따뜻한 방구석에 앉혔다. 그리고 시무언은 그의 두루마기로 소년을 덮어 주었다.

"어제 저녁에는 어디서 잤니?" 시무언이 물었다.

"장터에서요." 장터에는 벽도 없고 철판으로 된 지붕에 기둥 몇 개를 세워놓은 천막이 있었을 뿐이다. 간신히 비나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이런 장터는 마을이나 고을의 중심지에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덮을 것도 없이?"

"네. 아무 것도 없었어요."

"이 얼마나 사악한 세상인가!" 시무언은 소년의 작은 체구에 또 하나의 이불을 덮어주면서 생각했다. 시무언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돌보지만 하나님은 이 소년을 돌보신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살아 계시니?"

"두 분이 싸우셨어요. 엄마는 독약을 마시고 돌아가시고요, 아빠는 미치광이가 되셔서 집을 나가셨어요."

"죄 값이여, 무시무시한 죄 값이여!" 시무언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죄에 의해 고난을 받는구나. 아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시무언은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좀 따뜻해졌니?"

"네."

"그럼 조금 있다 뜨거운 죽 한 그릇을 먹자. 그런데, 네 이름은 뭐니?"

"억성." 소년이 대답했다. 억을 만든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아이가 거지가 된 것은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은?"

"최."

"집은 어디에 있니?"

"여기서 20리 떨어져 있어요. 우리 누나가 지금 거기서 살고 있어요. 누나는 13살이에요. 나는 한번 거기에 갔는데 사람들이 저를 내쫓았어요."

"교회는 알고있니?"

"네, 알고 있어요."

"너의 마을에 기독교인은 있니?"

"네, 많아요. 여기에도 많지 않아요?"

"그래,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은 많겠지." 시무언은 고심했다. "하지만 그 중 아무도 너를 측은히 여기지 않았지."

그의 생각은 여관주인이 문을 엶과 동시에 멈췄다. 여관 주인의 아들이 이목사와 거지 소년이 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시무언은 여관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세상은 명예와 이익에 의해 움직인다. 그렇다면 정의와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여관주인에게 뜨거운 만두 국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서 시무언은 생각했다. "사악한 시대여! 정의를 구하리라." 다시 소년에게 고개를 돌리며 시무언이 물어봤다.

"언제부터 구걸하기 시작했니?"

"2년 전부터요."

"6 살부터!" 시무언이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버지하고 제가 같이 구걸하러 갔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정신이상이 생겨 도망가고, 난 혼자 남았어요."

여관주인이 방바닥이 더러워질 것이라고 불평하자 시무언은 화가 치밀었다. "사악한 세상이여, 회개할지어다!" 소년의 다리와 발은 추위로 인해 갈라져 있었고 그 상처에서 나온 피는 거리의 흙과 뒤범벅이 되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여관주인이 불평을 할만도 했다.

시무언은 뜨거운 물을 요구한 뒤 소년의 발과 손을 씻겨주고 연고를 발라 주었다. 일단 치유사역이 시작되자 시무언은 끝까지 다 해야했다. 깨끗한 몸에는 깨끗한 옷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무언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저고리와 바지를 소년에게 입혀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의 조그마한 발에 비해 너무나 큰 자기 양말을 신겨 주었다. 그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일로 같이 웃었다.

아이에게 양말을 신겨주고 있을 때 여관주인의 아내가 때마침 시무언의 방을 지나쳤다. "그래, 이 아이에게 여자 속바지를 입히려고!" 그녀는 깔깔거리며 지나갔다.

일이 다 끝나자 시무언은 본인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귀여운 것!" 시무언이 소리를 칠 뻔했다. "나는 내 친아들에게조차 이렇게 해준 적이 없다. 고작 헌 옷을 나눠 준 것뿐인데..."

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 옷들을 겨우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입히다니!"

그들을 서로를 다시 쳐다보고 웃었다. 소년의 얼굴이 환해지고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조용히 그의 목에서 나왔다. 그 소리는 어미 닭의 따뜻한 날개 죽지 밑으로 파고드는 병아리가 지저귀는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시무언은 묵상에 빠졌다.

"너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고 너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다. 네가 울 때 내가 울고, 네가 웃을 때 나도 웃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친근감인가! 이것을 목자와 양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을까? 주님과 그의 양 떼와 같은?"

이 때 그가 주문한 국이 들어왔다. 음식을 다 먹은 후 둘은 같이 누웠다. 시무언은 그 옆에 있는 베개 위에 있는 길고 흩어진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머리카락의 주인공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꼭 양과 같군. 비록 검은 양이지만." 그는 속으로 웃었다. "나의 불쌍한 양이여! 길을 잃고 배고픔과 추위로 울고있는 너를 나는 찾았다. 나는 너를 찾았다. 그렇지만 하나님, 목자가 되는 일이 쉽지만은 않군요. 하나님 이 어린양에게 양식을 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시무언 또한 잠들었다.

시무언은 십자가에 대한 한 편의 찬양시를 썼다.

"하나님이 죄인 가운데 거하실 때,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다.

죄인이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죄인 또한 그 고통을 감수한다."

"인간이여! 생명을 얻으려하는가?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아라

위로 올려 본 십자가의 고난을,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라."

"십자가의 고통을 받은 모든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며

영원한 사랑이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거주하리라."

여기에 흔히 볼 수 있는 명상이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은 주님을 위해 해야 한다. 우리의 사적인 일도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그 속에 있는 주님의 뜻을 밝히고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옷과 여행, 지식, 이 모든 것도 주님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것으로 인해 주님의 영광을 보일 수 없다면, 우리는 먹거나 입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 금식하고, 깨어 기도하고, 벌거벗고 학대받는 것만큼 더 커다란 축복은 없다."

 

 

제 8 장 다른 양

 

다음 날 시무언은 억성이 콧노래 부르는 흥겨운 멜로디에 일어났다.

"춥지는 않았니?" 시무언은 옆에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추워요?" 억성의 눈썹이 놀라움에 올라갔다. "춥다니요. 너무 더워서 땀까지 흘렸는 걸요!"

새벽 기도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무언은 억성에게 웃으며 말했다. "배가 고픈 걸. 너 나가서 우리 아침밥이나 구걸해 오려니?"

억성은 고개를 들려 미소를 보냈다. "물론이죠." 그는 열성적으로 말했다. "깡통 끝까지 차게 얻어 올 거예요."

"아, 그래. 그럼 우리 둘은 잘 살 수 있겠군." 시무언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이렇게 한참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아침 식사가 나왔다. 이런 잔칫상이 언제 한번 나왔겠는가.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마치 천당에 있는 것 같군." 시무언은 생각했다.

저녁 식사로 여관주인이 국수 두 그릇을 보내왔다. 소년은 계속 자기 몫을 시무언의 그릇에 덜어 주었다. 아이가 끝까지 자기 몫을 열성적으로 덜어주자 시무언은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시무언은 아이의 대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무언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서 아이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유일한 것, 바로 그 국수 한 그릇을 시무언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시무언이 교회에서 돌아왔을 때, 억성과 여관 종업원인 경종(Tinkling Bell)이 같이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동안 경종이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을 보고 시무언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너의 마음에도 주님의 영이 계시는구나."

경종은 23살의 남자였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을 끝마치고 교회도 한동안 다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왔기 때문에 여기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5-6년 동안 봉급이나 옷을 받지도 않고 이 여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왜 떠나지 않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그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여기에 남아서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야 한다고 답하곤 했다.

"이 세상의 고난을 항상 그런 식으로 받아드리게." 시무언은 그에게 자신의 저고리와 내의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체적으로는 힘들겠지만 항상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자네와 함께 하기를 바라네. 아멘."

이목사와 억성은 몇 일 동안 함께 먹고 자고 기도했다. 그 어린 아이는 이목사를 마스코트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심부름 거리가 있거나 다른 일이 있을 때 이목사를 돕기 위해 사방을 뛰어 다녔다. 시무언은 소년이 할 일거리를 미리 마련해 놓곤 했다. 아침마다 억성은 방을 청소했고 편지를 붙이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시무언이 어디로 외출하려고 하면 억성은 그의 신발을 가져와 문 앞에다 놓았다.

시무언이 떠날 때가 되자 아이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시무언에게 서울에 집이 있거나 다른 곳에 집이 있다면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었겠지만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무언은 경종에게 2원을 주면서 거처할 곳이 마련될 때까지 억성이 누나 집에 머물 수 있게 하도록 주선하게 하였다. 시무언이 짐을 챙기고 있을 때 억성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안타깝게, "같이 갈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

그 말에 시무언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그의 마음은 아팠다. "목자가 그의 양을 버리는 일이 있는가? 그 위대한 목자이신 주님과 같이 나도 내 양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내가 그에게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야'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주님이여, 저희가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많은 사람들이 시무언을 배웅하러 기차역에 나와 있었다. 그 분주함 속에서 시무언은 억성의 얼굴을 놓칠 뻔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자기 두루마기를 무엇인가가 비비고 있는 것을 느꼈다. 시무언의 두루마기 끝을 애처롭게 잡고 있던 그 불쌍한 아이는 두려움이 가득찬 눈으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추운데 왜 여기 왔니? 어서 돌아가렴." 시무언이 소년에게 일렀다.

소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머리를 두루마기의 부드러운 주름 속에 파묻을 뿐이었다.

한달 동안 각종 회의에 참석하느라 시무언은 매우 바빴다. 하지만 그는 가능한 빨리 억성을 위한 거처를 찾으려 했다. 결국 시무언은 억성이 서울의 한 고아원에 머물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었다. 시무언이 참석해야 했던 회의가 아이가 있는 곳과 가까운 옥천에 있었다. 그래서 시무언이 그곳에서 아이와 만나도록 일정을 잡아 놓았다. 하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여관 종업원은 시무언에게, "아이를 데리러 사람을 보냈지만 둘 다 돌아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시무언은 한숨도 못 잔 채 기차에 올라야 했다.

또 다른 회의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온 시무언은 그를 기다리는 두통의 편지를 읽었다. 경종에게서 온 것이었다. 한 편지는 억성이 그와 함께 있지만 앓고 있기 때문에 서울에 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시무언은 나머지 편지를 뜯어보았다.

"존경하는 목사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억성은 어제 숨을 거두었습니다."

시무언은 편지의 나머지 내용을 간신히 읽어 갔다. 눈물이 앞을 가려 편지의 글씨가 어렴풋이 보이기만 했다.

"저는 끝까지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그의 조그마한 몸을 산턱에 묻었습니다."

삼일 후 경종은 억성을 돌봐줬다는 이유로 여관주인에게 해고당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가는 데 백 마일을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길을 걸어서 올라왔다. 하지만 시무언과 경종은 경종의 여행길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그 소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 차가웠어요." 경종은 일을 짧게 요약해서 말했다. "그는 먹을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그냥 죽었어요."

시무언의 마음은 후회로 가득 찼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양을 나는 버렸다. 오 주님, 비록 한번만이라도 저는 언제쯤 주님과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요? 나의 설교는 말뿐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금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설교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주님이여, 사랑에 대한 진정한 설교는 제가 못했습니다."

어린 억성의 자리를 수천 마리의 양이 차지하게 되었고 시무언의 사랑에 대한 설교는 그 절정에 다다랐다.

시무언은 열흘 동안 학원 부흥회에 초대받아 중부지방의 어느 대도시로 가야했다. 기차역을 떠나 시무언은 가장 먼저 교회에 갔다. 그 곳에서 기도를 했다. 그 후 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소녀에게 주변에 있는 괜찮은 여관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았다. 소녀는 시무언이 입고 있는 검은 무명옷과 낡아 떨어진 모자 그리고 고무신을 슬쩍 훑어보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 소녀는 차갑게 말했다.

시무언은 계속 걸었다. 마침내 시무언은 괜찮은 여관을 하나 찾았다. 돌벽을 따라 대문 밖에서 "이리 오너라"라고 불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시무언은 문을 두드렸다. 그렇지만 이전과 다름없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여관에 가서 또 그렇게 해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옆에 또 하나의 여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관문 역시 닫혀있었고 개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네 번째 여관에 다가갔다.

반대편 문 뒤에는 여인네들이 서로 모여 낄낄 웃으며 소곤거렸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집을 두드려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이 그렇게도 재미있었나 보다.

네 번째 여관에서조차도 응답이 없자 시무언은 바로 밑에 있는 집을 찾아 나섰다. 그곳에는 그가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머물렀던 곳이었다. 비록 여관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좁은 골목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무언은 옛날의 두 방랑자를 상기했다. 그들도 여관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결국에는 마구간에 머물지 않았던가. 그도 오늘밤은 양들과 함께 자야하는 걸까? 주님도 그렇게 오셨는데 뭐 어떠랴. 주님은 그의 종들을 위해 오셨지만 그들은 주님을 반기지 않았다.

마침내 학생의 안내를 받고 시무언은 언덕 위에 있는 여관에 이르렀다.

"이리 오너라. 아무도 없소?" 시무언이 불렀다.

열 다섯 살 정도의 소녀가 나왔다.

"여기에 투숙할 수 있겠니?"

"들어오세요." 그녀가 말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그는 안도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시무언은 소녀에게 예수를 믿느냐고 물어봤고 소녀는 그렇다고 했다. 소녀는 서부교회에 다닌다고 했다. 시무언이 그녀의 부모에 대해서 물어보자, "아버지는 예전에는 신자였지만 지금은 아니고, 현재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다닌다"고 그 소녀는 답했다. 소녀는 시무언을 작은 방으로 안내하고 떠났다.

"여기가 나의 구유이군." 시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비록 춥고 누추하지만 그 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시간이 좀 지나 소녀가 그에게 "불을 때고 있을 동안 안방에 계시라"고 했다. 시무언이 안방에 있자 집 안주인이 들여다보고는 그에게 어디 출신인지 물어보았다. 시무언이 시골 출신이라고 하자 안주인은 그냥 평범하게 "아, 그래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 대한 옆방 사람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그 옆방 사람은 여관주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열 일곱이나 열 여덟 살의 젊은이였다. 그의 공부방과 안방을 나누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종이 한 장이었다. 이 젊은이는 시골 촌놈에게 한 수 가르쳐줘야 된다고 결정을 했는지, 찬송가를 우렁차게 부른 뒤 일본어로 된 책을 큰 소리로 자랑스럽게 읽고 그 절정의 끝으로서 그의 유창한 영어를 뽐냈다. 그는 "P-i-c-t-u-r-e"라는 철자를 또박또박 말한 뒤 "픽차"라고 멋지게 읊어댔다.

시무언은 소녀를 부른 뒤 여관의 머슴이 있으면 시무언의 부탁 하나를 들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소녀는 머슴이 없다고 말한 뒤 어머니를 부르러 갔다. 그러자 안주인이 나와 시무언의 짐에 대해 물어봤다. 그의 짐이 아직도 기차역에 있다는 것을 듣자 그녀는 아들에게 그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화를 내며 불평을 하고 나서 결국은 시무언 방의 문을 열어 젖히고 소리쳤다.

"짐은 어디에 있소?"

시무언은 짐표를 보여주며 역에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무겁겠죠?" 젊은이는 시무언에게 다그쳤다.

"별로 무겁지는 않아요." 시무언은 천천히 답했다. "하지만 갈 필요는 없어요." 시무언은 의미심장한 어투로 "내가 가겠소" 라고 말한 후에 여관을 나섰다.

거리에서 시무언은 기도를 올렸다. "주님 저는 이런 짐을 단 한번도 짊어 져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해야 할 때겠지요."

역에 도착하자 시무언은 나뭇가지로 만든 상자를 요청했다. 그 상자는 부흥회를 하는 동안 학원에서 가르칠 책과 잡지로 가득 차 있었다. 시무언은 이것을 등에 짊어지고 터벅터벅 역을 빠져 나왔다. 곧 저녁 열차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시무언이 거리를 가고 있을 때 그는 역으로 향하는 몇몇 남자들과 여성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비싼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들의 대화를 통해 추측하건 데 교회목사와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날 부흥회를 시작할 그 유명한 이목사를 만나러 역으로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거운 버들 상자를 지고 허리를 구부리며 지나가는 이 사람을 보고 누가 이 사람이 이목사라고 추측할 수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시무언은 새것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닌 평범한 검정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시무언을 한 번 흘끗 보더니, 그 위대한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 역으로 갔다.

짐을 방문 앞에 내려놓자마자 시무언은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거렸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몇 분이 지나자 소녀가 와서 살짝 문을 열고 문틈을 통해 그가 무릎을 꿇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뒤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엄마, 그 남자는 기독교인인가 봐요. 방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어요."

저녁 식사를 한 후 그녀는 숙박계를 가지고 와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경찰이 조사하러 오면 보여줘야 하는 것이었다.

"직업은 무엇입니까?" 그녀가 물었다.

"나는 전국 곳곳을 돌며 설교를 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시무언은 '직업'이라는 칸에 그렇게 쓰려고 했다.

"아, 그렇게 쓰지 마세요. 그냥 장사꾼이라고 하세요." 그녀가 재촉했다.

"하지만 난 장사꾼이 아니요."

"그럼 농부라고 하세요."

"나는 목사이니 목사라고 해야겠소."

그녀는 목사라는 말에 경찰이 찾아와 귀찮게 할까봐 염려하는 눈치였다. 아니면 그녀는 이런 사람은 목사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이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 목사라는 칭호와 그 외의 모든 사항을 꼼꼼히 적은 후 시무언은 소녀에게 숙박계를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예언적인 어투로 "이것을 가지고 간 다음에 신약 성경의 요한복음 13장 7절을 보렴."

교회로 떠나기 위해 그는 소녀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아들에게 그 일을 시켰다. 그는 거부했고 소녀도 그랬다. 결국 둘은 서로 누가 갈 것인지 싸우다가 소녀가 가게 되었다. 길의 반 정도 가서 시무언은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는 혼자서 교회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있었다. 교회목사와 다른 교회지도자들은 이미 모두 단상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들뜬 목소리로 곳곳에서 속삭였다.

"왜 목사님이 안 오셨지?" 한 사람이 불만을 토로했다.

"글쎄, 사람들이 그를 마중하러 나갔는데 흔적도 안 보인다는 거야." 다른 사람은 이런 알쏭달쏭한 소리만 했다.

"올 수 없었으면 전보라도 쳤어야지. 나 원 참." 다른 사람은 분개하듯 말했다.

"정말 난처한 일인걸."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그 동안 시무언은 교회의 맨 끝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일어섰다. 교회가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시무언은 약간 망설이며 서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시무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람들은 많았지만 모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시간이 꽤 지나자 그는 뒤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그들은 목자를 불렀다. 하지만 막상 목자가 왔을 때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시무언은 기도를 하면서 사색에 잠겼다.

"기도는 나의 기쁨, 나의 본질, 나의 생명, 나의 일이다.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나에게는 즐거움이 없을 것이고, 내 인생은 무의미해질 것이며, 나에게는 할 일이 없을 것이다. 기도는 나의 삶의 근거이며, 내 활동의 모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자주 기도할 수 없는 시간들이 있다."

"기도가 없는 슬픔이여! 기도가 없을 때의 나의 영혼의 초라함이여! 발가벗음보다 더 초라함이여!"

"오 하나님, 저에게 기도를 주십시오! 나의 영혼에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기도할 말씀을 주십시오. 내 맘속에 기도가 없는 것은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방으로부터 내쫓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 주님, 제가 기도할 수 있게 하소서. 제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기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사탄은 나의 기쁨을 빼앗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명합니다. 그는 나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의 믿음과 열정을 직접 가져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악함에 대항하는 나의 모든 것에 맞설 정도로 그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는 그런 바보가 아닙니다. 그는 매우 영악합니다. 그는 단 하나 오직 기도만을 가지려 합니다. 기도가 사라지면 믿음, 열정, 기쁨, 그리고 평화가 모두 저절로 사라집니다. 나의 신앙의 근본은 기도에 바탕에 두고 그 위에 세워 집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이 모든 것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나는 사탄의 이런 행위가 가장 두렵습니다."

"오 주님, 사탄의 의지를 가로막으소서."

"기도! 기도! 오 달콤하고도 향기로운 기도여! 내가 죽는 날까지 나에게 기도를 주시옵소서. 기도는 나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나의 인생이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게 하소서. 아멘."

 

 

제 9 장 광채

 

그 어떤 교인도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람이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 옛날 다윗 왕이 추방되었을 때, 왕을 복귀시켜야 한다는 말을 마지막에 와서야 한 사람들은 바로 유다의 장로들이었다(사무엘 하 19:10).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 교회의 교인들도 기회를 놓쳤다.

한참 뒤에 시무언은 바로 앞에 있는 소년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그리고 목사님이 누구인지 물어봤다. 소년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제 아버지가 목사님인데요." 소년이 말했다.

시무언이 목사님을 뵙고 싶다고 하자 소년은 교회 앞쪽으로 걸어가 제단에 있는 사람과 상의를 하였다. 그러자 그는 소년을 따라 시무언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목사는 아들에게 얼굴을 돌렸다.

"저기요." 소년이 시무언을 가리켰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 신사는 시무언에게 말했다.

"제가 이용도입니다." 시무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목사님?" 그가 놀라며 소리쳤다. "아 그래요?"

이 두 마디의 말을 한 뒤 목사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 이목사가 이렇게 생겼다는 것이지. 난 그가 유명한 목사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목사는 재빨리 그의 속마음을 숨기고 정중하게 물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한시 반에 왔습니다. 교회에 맨 먼저 들리고 마을을 좀 돌아 다녔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그렇게 일찍 오실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자 앞으로 가시지요."

저녁 예배가 끝난 후에 모두 이 위대한 목사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시무언에게 그들이 마련해 놓은 주변의 좋은 여관 방에 투숙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놀라운 날들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몇 년만에 판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동안 얼마나 상투적인 관습에 젖어 생활했는지 깨닫고,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서 기뻐했다.

어느 날 시무언은 교회 목사와 다른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당신들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설교가들이 외국 옷과 안경, 금시계 줄에 가죽 신발만 신고 다닌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들이 역으로 갔던 그 날, 당신들은 기다리던 목사를 만나러 나온 것이 아니라 값비싼 물건으로 치장한 신사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목사를 만나러 나왔다면 당신은 그를 만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초라한 옷차림의 한국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 몇 일 동안 사실을 인정하고, 성령이 큰 능력으로 오시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이목사가 왔다는 소식은 건초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과 같은 속도로 곳곳에 퍼졌다. 그리고 매 모임마다 2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교회를 꽉 매울 때까지 계속 모여들었다.

예정된 열흘이 끝날 때쯤, 시무언은 첫 날 밤에 구유를 찾은 그 여관에 다시 찾아갔다. 그곳 사람들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들은 모임에 참석했었고 성령의 감동을 몸소 체험했다. 가족 전체가 소리치며 그를 마중하러 나왔다. "목사님이 처음 오셨을 때, 목사님이 누군지 알았었다면!"

그 열 다섯 살의 소녀는 신약 성경을 들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시무언을 올려 봤다. 그리고 그가 언급한 성경 구절을 읊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라."

시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맞이할 준비가 항상 되어있는 사람은 그 자신도 모르는 채 그리스도의 심부름꾼도 만나게 되는군."

시무언이 그곳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 지방 군수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이 시무언이 떠나는 것을 보러 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울며 시무언에게 온갖 선물을 건네주었다. 시무언이 아무런 선물도 주지 말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떠나가는 기차 창문으로 선물을 던졌다.

시무언은 선물을 수 백 번 받아 보았다. 선물은 그에게 짐이었다. 그는 항상 빈손으로 마을을 떠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역으로 가는 도중에도 선물로 받은 손수건이나 옷 또는 과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 했었다. 집으로 무엇을 가지고 가면, 그는 왠지 잘못한 것 같아 그 물건을 재빨리 처분해 버렸다.

나라 곳곳에서 이목사에게 준 비단 옷을 그 다음날 주변의 거지가 입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시무언은 그의 정력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간주하고 즉시 그것을 활용하였다.

시무언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이것은 그가 만주의 용정에 있는 모임에 참석한 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쓴 것이다. 이 편지는 1931년 3월 4일에 쓰여진 것인데 내가 지금까지 묘사한 일이 있고 난 다음 한 두 달 후에 쓰여진 것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능력에 대한 청지기직분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이 곳 만주는 매우 사악한 곳이라네. 하지만 주님의 위대한 도움으로 인해 나는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네. 그 뿐만 아니라 교회와 마당까지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에 고개를 숙였어.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지배를 받아들였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나의 마음은 기뻤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구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구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내가 내 몸만 챙기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지. 나의 허약함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야. 자네도 알듯이 십자가는 그다지 편한 것이 아니라네.

나는 진리의 성령이 자네의 마음에 불과 같이 역사하기를 바라네. 오늘의 힘을 내일이나 다음 해를 위해 저축해 두지 말게. 인생은 죽을 때까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어. 주님은 내일 해야 하는 일을 위해 내일 힘을 주실 것이며 내년에 해야 하는 일을 위해 내년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네. 나는 내가 부흥회를 이끌었던 천평에도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가 나타날 것이라 믿는다네.

형제여. 힘내고 용기를 갖게. 당신의 하나님은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시네. 형제여, 희망을 잃지 말게.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 뒤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오.

만주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진심 어린 안부인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길 바라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당신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네. 이들의 기도는 당신에게 언젠가는 큰 힘이 될 것이라 믿네.

여행길에서 ... .

친애하는 시무언

그 해 시무언은 부흥회 일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교회교사협회에서 탈퇴했다. 1년 동안 전국 방방곳곳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일정을 짰다. 시무언은 행사가 있기 몇 달 전부터 일정을 짜곤 하였다. 그는 많은 요청을 거부해야 했다.

그는 이제 절정에 다다랐다. 누군가가 시무언이 참여한 모든 모임에 따라 다녀야 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하는 것도 불가능 할 정도이다. 그는 한반도 전역과 만주까지 미치는 번개와 같았다. 그는 곳곳의 사람들에게 가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설교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의 추종자는 그를 몇 백 마일이나 따라다닐 때도 있었다. 지금도 서울의 한 교회에서 발생한 극적인 장면을 기억한다. 1932년 봄 일요일 아침이었다. 우리는 예상보다 길었던 모임을 막 끝내고 있었다. 시무언은 예수가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복음서 대목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애수가 섞인 영광에 대한 잊지 못할 설교를 남겼다.

그는 애정 어린 어투로 설교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바로 이때 생전 처음으로, '왕에게 호산나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의 나라는 지상의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소리쳤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 순간 그곳에 있었다면 나 또한 예수님의 발밑에 나의 코트를 깔고 종려나무 잎을 흔들며 '할렐루야'를 외쳤을 것입니다."

"영국인과 불란서인 그리고 미국인에게는 그들이 사랑하는 조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타지에 있어도 조국의 공사관을 볼 수 있고 비록 작은 땅이지만 조국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는 땅 위에 설 수 있습니다. 일본인은 자랑할 수 있는 군대가 있습니다. 신문을 읽어보지 못하셨습니까? 조그마한 어린아이까지도 푼돈을 모아 만주에 있는 용사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웅장한 목소리로 설교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역시 국기가 있고 전쟁도 있습니다. 내가 자정이나 그 이후에 잠들고 새벽 세시에 일어나도 저는 허리띠를 풀 시간도 없습니다. 나는 전쟁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단에 쌓여 있는 헌금 주머니를 바라보며 그는 외쳤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세금조차 낼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한 나라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나라를 어둠에서 이끌어내어 그의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그들의 세금이 무엇에 쓰이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구원과 생명과 사랑을 위해 빚졌다는 것,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빚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천국을 소유하고, 우리의 왕께 제물을 드리기 위해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 그 무엇이라도 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쁨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비록 나는 지치고 연약하지만, 예수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셨습니다. 비록 나는 가난할 지라도, 예수는 가난을 정복했습니다. 나는 유혹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곁에 계십니다!"

이러한 감동적인 대단원을 끝으로 교회 사람들은 일어섰다 그리고 목소리 높여 찬송가 '주 예수 이름 높이어'를 불렀다. 사람들이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도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도시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주님 외에는 다른 왕을 섬긴 일이 없었다. 이들은 서서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영광을 드높였다:

"모든 족속, 모든 민족,

"이 동그란 지구 위에,"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세."

"그리고 주님의 머리 위에 왕관을 올리세."

바로 그 때 나는 사 백년에 걸친 이스라엘 신정국의 웅장한 메아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것은 영광스러웠다. 하지만 그 영광은 해짐의 영광이지 오후의 밝은 빛이 아니었다. 짧은 그 한 순간 태양은 하늘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태양은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먹구름이 몰려들어왔다. 그러나 그 찬란함 후에는......

 

 

제 10 장

 

황혼 이쯤이면 이 목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 목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할 예기가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소문을 퍼트렸다. 몇천명이 모여 기도를 하면서 그들은 울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귀신들린 사람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들과 함께 멀리서 울리는 천둥과 같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물길이 세지는 것을 보며 태풍의 전조를 눈치챘다. 시무언은 예상과는 달리 서른 살을 넘겼다. 하나님은 그에게 일 년, 이 년, 그리고 지금 삼 년을 더 주셨다. 아마도 시무언은 그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영광은 서서히 사라지는 황혼의 빛이었다. 사람들은 시무언이 공식석상에서 통렬하게 목사들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반발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하늘 높이 올라갔던 시무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예배 후에 하는 기도 시간에는 불을 켜놓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해는 지기 시작했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 졌다. 그들은 시무언이 여성들은 너무 가까이 한다고 했다. 해는 더 밑으로 떨어져, 다른 구름이 그 붉은 빛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시무언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한 계시를 구하게 하고, 그들을 흥분시켜 울게 하면서 평화를 주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것으로 해는 서산 뒤로 넘어갔고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러한 이유로 시무언은 많은 강단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러한 소문은 시무언이 부주의해서 발생한 것이지, 그가 죄의 늪에 빠져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위에 상관없이, 소문들은 시무언에게 커다란 타격이었다.

물론 설교가들이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이나 소그룹에서 제기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물론 기도하기 위해 불을 끄고 실내를 어둡게 하는 것에는 타당한 심리적 이유가 있고 그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사회적 풍토에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목사가 여성 신도들을 멀리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시무언은 당시의 사회적 규범에 좀 더 민감해야 했었다. 물론 기독교에는 신비스러운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초신자들은 무익하고 거짓된 계시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시무언을 위해 변호할 말이 있었다는 사실도 이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뒀더라면 시무언은 점차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고쳐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소문과 관련된 사항들은 쉽게 오해가 풀리지 않았다. 여기에 시무언 신비주의의 핵심이 있다. 시무언은 성령의 능력과 인도를 무제한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 어떤 계시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성령을 조절하거나 유도하려 하지 않았으며, 성령은 스스로 역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도 성령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결과적으로 알 수 없는 방언과 거짓 은혜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을 터 놨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설교가 끝난 후 흔히 그렇듯이, 모든 사람들이 통성으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있다. 이렇게 모두 기도하고 있을 때 시무언은 교인들에게 안식을 주는 내용보다는, 그들의 감정을 고조시켜 울게 했다. 그러면 교인들은 몇 시간 동안 교회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땅을 치면서 울며 소리를 지르고 몸을 부르르 떨면서 실신을 하곤 했다. 시무언은 이 모든 행위를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는 뜻하지 않는 함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모습이 시무언 자신의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충고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는 다른 신비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내적인 빛을 충실히 따라갔을 뿐이다. 수년 동안 거의 매일 죽음을 경험했던 시무언은 이런 비판에 흔들리지 않았다. "나의 적은 계속 늘어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보다. 예수님은 그의 성모와 형제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었고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 또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떠날 것 같다."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조금씩 나를 적대시한다. 날 믿었던 부모님도 더 이상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이해하고 동정했던 형제들도 이제 더 이상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로 나의 길이 가로 막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는 데 차질이 있을까 두렵다."

"현재 사탄은 내 주위를 맴돌며 무자비하게 나를 사방에서 공격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사로잡혀 거의 죽을 뻔했지만, 주님이 나를 모든 면에서 지켜 주시기에 나는 견딜 수 있었다. 할렐루야. 아멘."

시무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그의 자신감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주어졌다. 전에 말했던 네 가지 지적 사항은 이번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가 말했듯이 사탄은 그를 사정없이 공격하고 있었으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약점을 찔렀다. 이미 지적한 대로 시무언의 약점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파멸했지만 시무언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너무나 쉽게 초자연적인 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거룩한 능력뿐만 아니라 사탄의 능력까지도 그를 방문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바로 이 점을 그의 영악한 적인 사탄이 노린 것이다. 사탄은 특유한 방식으로 시무언을 속이려 했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둔갑한 것이다. 1932년 2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몇몇 젊은 여성들이 무아지경에 빠져서 그들이 전혀 몰랐던 다른 사람들의 과거지사를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들은 소위 미래의 일도 계시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런 현상은 원래 시무언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렇지만 시무언은 필연적으로 그 일과 연관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달 안에 그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집단과 적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자주 함께 기도를 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그 중 한 사람에게 신이 내려와 그룹이나 한 개인에게 말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시무언이 이런 모임에 참가하고 있을 때, "성령"이 내린 한 여성이 그를 꾸짖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설교를 하고 다니느냐?"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과연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내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너의 설교와 부흥회 활동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 기양에서 너는 실패하지 않았더냐? 그 어떤 꿈도 환상도 없지 않았더냐. 그것들 없이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봐라 나는 이 시대 마지막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있다."

"이런 죄 많은 사람들에게 왜 계시를 내리십니까?" 한 번은 시무언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내가 죄인을 사랑하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광을 받고 싶다."

"왜 이 무식한 여인이 당신의 종이 되어야 합니까?" 시무언이 물었다.

"내가 유식한 사람의 입을 통해 말을 한다면 너는 그가 나의 말이 아닌 그의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 할 것이다. 너는 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 다른 계시가 있었을 때 시무언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이것이 사탄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 저는 진심으로 알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을 시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 종을 시험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오 하나님. 이것이 진정한 당신의 일이라면 이렇게 묻는 저를 용서하소서."

"네가 믿을 수 있었더라면." 여인은 한숨을 쉬며 이 결정적인 말을 뱉었다.

"오 도마여, 네가 나의 옆구리를 만지지 않고 믿을 수 있었더라면, 너는 더욱 더 큰 은혜를 받았을 것이다. 네가 시험해 본 후에야 믿겠다고 하니 네 믿음이 작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시무언은 믿었다. 그가 들은 메시지는 매우 영적이었으며 이어진 사건들에 의해 증명되었다고 시무언은 생각했다. 그의 결론은 확고했다. "이것은 사탄의 행위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의 행위가 분명하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친구들은 경고했고 동료들은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이 너무나 확고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시무언은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무언을 비이성적이며 고집불통이며 사탄에 현혹된 감상적인 인물로 여겼다. 그는 마치 마지막 항구로 끌려가는 고장난 배와 같이 애처롭게 보였다.

이러한 혼란의 시간이 끝나기 이전에 괴상하고 엉뚱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전국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시무언의 이러한 행동은 필연적으로 평생 동안 유지했던 인연들과 이별을 고하게 하였고, 결국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게 하였다. 이 집단은 신비스러웠으며 감정적이고 진지하며 고난을 추구하고 사도적이었다. 결국 이 모든 사실을 공표하는 일만 남았다.

1933년 3월 그는 그가 속한 교회와의 인연을 단절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모임이 조직화하는 정점에 이르렀다. 1933년 3월 19일, 그는 아버지에게 이 편지를 썼다. 감리교 연회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질책을 받았습니다. 나는 결국 목사로서의 직위를 버려야 했고 이번 2월부터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탄은 나를 매우 힘들게 하지만 주님은 그의 은총을 통해 나를 더욱 더 지키십니다. 제 몸은 점점 더 허약해지고 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걱정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저를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합시다. 항상 감사하고 고난을 감수합시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무슨 종파에 속해있는 가를 따지지 말고 그를 사랑과 애정으로 받아 드립시다. 할 수 있는 한 그를 최대로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조금이라도 불안해하거나 걱정하거나 비판적이지 마십시오. 검소하고 조용하게 살고 기도와 찬양에 내 자신을 다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 당시 시무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보통 우울한 듯 하면서도 간청하는 말투였으며 원로로서 하는 말이었다. 그의 편지에는 그가 그 중대한 결심을 내리기까지의 단계들을 설명하고 있다.

맨 처음에는 그 발상 자체가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 고통은 하나님이 내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교파인 예수교회의 선도감이 되는 일에 동의를 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새로운 교회의 선도감이라는 칭호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이 고통은 날카로운 가시와 같네. 나는 내 이름을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았네. 하지만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이것이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가시면류관일까? 주님은 나에게 위대한 평온과 기쁨을 주시지. 그는 또한 나에게 거대한 아픔과 고난을 주신다네. 이것이 비록 죽음과 지옥의 고통을 줄지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그래, 그 굴레를 나는 거부할 수 없네. 오, 주님 가능하다면 이 잔과 왕관을 나에게서 가져가 주옵소서. 그렇지만 오 주님, 나의 의지보다는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시간의 흐름이 왜 이렇게 엇갈리기만 하는지! 사건들은 우리를 혼란시켜 결국은 우리가 어디에 매여 있는지도 모르게 한다. 마지막임과 동시에 시작이 왔다.

이제 시무언은 많은 옛 우정을 버리고 새로운 교회의 시작에 힘써야 했다. 한국 교회사의 상당 부분이 대체로 평범했다. 하지만 시무언의 개인적인 삶에서 볼 때 그 역사는 분명하지 못했다. 석양 후에는 새로운 새벽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시무언은 이 시구처럼 될 것인가? 해는 떨어졌네, 샛별이 보이고 그리고 나를 부르는 뚜렷한 소리 들리는가?

 

 

제 11 장 샛별

 

시무언은 네 가지 중요한 갈등의 요소들을 모두 겪었으며 그것들을 다 이겨냈다. 그러나 시무언이 이 다섯 번째 갈등을 이겨냈느냐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말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총을 내리고 성령과 확실히 교통하며, 하나님의 심오한 일에 대한 감동적인 말을 듣는 이 모든 행위는 한 때 시무언의 장점인 동시에 약점으로 작용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증언이 있을 때면 시무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눈시울이 적셔지곤 했다. 시무언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의심을 버렸다. 그는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사탄이 의도했던 대로 시무언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성실함, 정직함, 그리고 기적적인 능력이 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며 신자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경우도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런 것들이 신실한 신자들에 의해 지지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계획에 차질을 빚으려는 사탄의 계획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사탄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경고를 잊곤 한다(마태복음 24: 24).

우리는 사탄의 흉내를 "그 열매에 의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탄의 열매는 십 년이나 한 세대가 지나서야 그 정체를 드러내곤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열매가 진정한 곡식의 알곡인지 또는 가짜인지 식별하지도 않는다. 기

독교인들이 잘못된 길로 어떻게 안내될 수 있는가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사탄의 역사를 구별하는 몇 가지 특징을 같이 살펴보자.

1. 사탄은 예술가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뿔과 발굽이 달린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라 매력적인 가짜 신이다(고후 4:4). 그는 미와 사랑과 종교를 우리들 앞에 제시할 수도 있다. 그는 그리스도만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coronation)을 지연시키는 것뿐이다.

2. 속임수는 사탄의 방식이다. 속임수가 지능적일수록 사탄은 더 좋아한다.

3. 따라서 사탄이 내세우는 정의의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킨다. 그는 그럴싸한 일을 많이 하기도 한다.

4.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험하기 위해 사탄의 일이 진실과 유사하도록 허락하신다(신명기 13:3). 그러나 하나님은 확실한 지침을 마련해 놓으셨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현상이 진실한 것인가의 여부는 교리에 의해 판단된다. 즉 진정한 역사는 이성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이 운동은 신비주의적이었으며, 이상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물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여,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오시는 초월적인 주님보다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들이 일반적인 가르침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교리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교리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항상 심각한 문제를 암시한다. 따라서 이런 기준에 따르면 이 운동은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이번 경우에는 또 다른 보다 실용적인 시험이 적용될 수 있다. 이 집단은 예언자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신명기 18:20-32에 제시된 시험기준을 적용해 볼 수 있다.

예언 가운데 한 부분이라도 사실로 판명되지 않을 때, 그 예언자의 말은 허구에 불과하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경우는 논란의 여지가 없이 사형이 선고되었다. 한국의 이 운동은 많은 예언이 사실로 들러났다고 주장했지만 적어도 어떤 예언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그 집단은 시무언에게 위대한 인물이 될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으나 신생아는 여자아이였고 출생 후 얼마 안 되어서 죽었다.

하나님의 분명한 시험기준에 의하면 이 운동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성서에 의한 시험 외에도 다음과 같은 주된 특징들, 즉 세 개의 심리학적 특징과 네 개의 물리적 특징들을 가진 다른 운동들과 한국의 이 운동을 비교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1. 반주지주의(Anti-intellectualism). 시무언이 계시를 전달하는 한 여성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를 물어보자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나의 지적능력을 무시하고 감정에 따라 말을 합니다." 한 세기 전에 어빙(Irving) 운동에 참여한 한 사람의 고백이 이 여인의 발언과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인간의 이해능력을 비난하며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항상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도록 요구하신다."

2. 사소한 일에 대한 집착(Triviality). 몬타니스트(Montanists), 케미사드(Camisards), 어빙주의자(Irvigites), 오순절주의자(Pentecostalists)들이 주로 그러하며,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이와 유사한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주의는 대개 진부하며 우발적이다. 그들은 특별한 증언을 통해 선다싱(Sundar Singh)이 "하늘로 승천"했으며, 몽고에 선다싱의 가짜 화신이 나타날 것이며, 예수의 진정한 생일은 1월 3일이며 그의 부활일은 4월 14일이라고 증언했다. 한 여성은 그녀의 신적인 능력을 뜨거운 난로에 손을 집어넣는데도 부상을 입지 않는 것으로 증명하려 했다. 이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은혜와 구속에 대한 교리에 대해서도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전반적으로 무식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내용물에 비해 포장만 요란했다. 만약 영광의 그리스도가 선택된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로 말씀하신다면,

이런 식의 계시보다는 보다 심오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주님의 말씀은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과 일치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보다 심오할 것이며 온 우주에 적용될 수 있는 광범위한 내용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또한 역으로 이 시대의 특수한 상황과 긴박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을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나 심오해서 초자연적인 현상과 함께 할지라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3. 분리(Divisiveness). 이 집단의 사람들이 분파주의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행위로 인해 분리가 부득이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순교자로 여겼으며, 유대인과 로마인에 맞선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 집단과 동일시했다. 절실한 신자들이 그들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을 헤롯이나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그들은 말했다. 이와 비슷하게 이전의 어빙주의자는 "계시를 받아들이느냐와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분리하려는 경향"을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경향은 매우 예외적이며, 바벨론 이름 하에 정통주의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좋은 전통까지도 던져 버리게 하였다."

4. 육체적 현상(Physical Phenomena).

(a) 시무언이 주최했던 마지막 부흥회들에서 두드러진 것은 몸이 비정상적으로 떨리는 현상이 잦았다는 것이다. 스와미 비시타(Swami Vishita)가 그의 저서 진정한 영매술(Genuine Mediumship)의 237쪽에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은 한국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그것과 유사하다: "영적인 능력이 내릴 때 매우 특징적인 떨림이 나타난다. 갑자기 손이나 팔에 경련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온 몸으로 확산되기도 한다."

(b) 한국의 종교현상에서 나타나는 신내림(무아지경의 상태)도 항상 일 분이나 이 분 동안 가끔씩 숨을 급하게 들이마신 후에 발생한다. 이와 비슷하게 한국의 무당들도 혼령이 자신의 몸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작은 휘파람 소리로 나타냈다. 그리고 앞에 언급한 저서 "진정한 영매술"에서도 한 영혼이 몸으로 들어오면 빠르고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c)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증언하였다. 이것 또한 "진정한 영매술"의 236쪽에 나온 내용과 일치한다. "무아지경(황홀경) 상태에서 말을 하는 영매가 되면 마치 기절을 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을 얻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느낌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계속 될 수 있다."

(d)무아지경에 빠지게 되면 그 후의 현상은 "진정한 영매술"의 239쪽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신은 영매의 성대를 부분적으로나 완벽하게 조절한다. 그리고 신은 청중에게 마치 그가 본인의 성대를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한국 무당의 경우도 이와 같다. 마귀를 숭배하는 것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는 이런 특징들은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나는 이 현상을 하나님의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시무언은 이 운동을 지지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이것으로 누구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며 단지 시무언의 결정에 대한 나의 개인적 견해를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시무언은 이 운동에서 은혜의 요소들을 느꼈다. 그러나 비록 작게 보일지라도 중요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시무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된 상태였으며 이번 사탄이 준 시험이 너무나 교묘했기 때문에 시무언이 그 유혹에 넘어 간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리고 동료들에게서 외면을 당한 시무언에게 있어 이 새로운 집단의 열정적인 지지는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생의 마지막에 접어든 시무언에게 이 집단 외에 친구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었나?

그러니 이제 시무언의 과오를 덮어주자. 연약한 몸에 상처받은 가슴을 안고 그의 새로운 친구들의 품으로 들어간 시무언은 마치 내려지는 닻과 같았다. 그는 겨울바람처럼 세차게 몰아치는 모든 비난과 갈등을 뒤에 두고 따뜻함과 환대와 연대감 그리고 기도가 있는 곳에 닻을 내렸다. 이 집단은 모든 것을 서로 공유했다. 그들은 서로 친밀한 가족적 분위기에서 서로 형제와 자매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웃고 일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부흥회를 여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성찬식도 그 성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가족의 식사와 유사했다.

방방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소박한 환대를 나누려고 이 집단을 찾아왔다. 그들은 그들 주변의 활기 없는 상황에 실증이 나 있었다. 이처럼 나약해진 시무언에게 이런 마지막 위로를 그 누가 비난하겠는가? 그것은 장례를 위해 향을 쏟아 붓는 것이었다. 비록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형성된 집단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종의 마지막 날들을 편안하게 보내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의한 것일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무언이 이러한 위로를 그의 옛 일터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예수교회의 선도감이 되자 시무언의 건강은 더욱더 하향선을 그리게 되었고 그는 설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그런 몸으로, 그 진실한 기독교인에게 더 이상의 새벽은 없었다. 이제는 그의 샛별이 떠오르는 시간이 되었다.

한국 나이로 서른 셋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무언은 이미 노인이된 시몬(베드로)이었다. 아마도 그의 일이 끝났기에 그가 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나보다. 하지만 1933년 5월 1일 시무언은 그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불굴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줬다: "나의 마음은 평온하고 잠도 잘 자고 매일 같이 누워서 휴식을 취하네. 한 인생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는가. 주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소중히 하시고 나에게 음식을 주시네. 그러니 나를 다시 내 보낼 날이 올 거라 난 확신하네. 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힘을 모으고 있네. 그 날이 오면 나는 힘찬 소리를 지르며 나아갈 것이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여기서 그냥 말라죽지는 않을 거니까." 게 하소서.

 

 

제 12 장 시무언의 열정

 

열정(열심)!

바로 이것이 신비주의자 시무언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당신의 집의 열정이 나를 삼켜버렸다." 이 구절은 시무언이 즐겨 인용한 구절이며 또한 그가 몸소 실천해 보인 것이기도 했다. 열정에 휩싸인 사람을 본지 하도 오래되어서 그 누구도 시무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사탄은 그 불을 끌 수가 없으니까 이제는 그의 친구가 되어 그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려 했다.

열정? 열정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주님 역시 열정의 외투를 입었다는 것을 모르는가?(이사야 59: 17)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혼자서만 날뛰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았던가? 그리고 예수 그 자신도 열정적인 시몬을 그의 열두 제자 중에 하나로 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뜨겁든지 차갑든지 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피러 오셨다. 성자 윗필드(Whitefield)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설교를 했다."

한 목사는 그의 꿈에서 열정에 대한 분석을 내렸다고 한다. "열정의 총 무게는 100 파운드인데, 야망, 위선, 칭찬에 대한 애착, 권력에 대한 집착, 명예에 대한 자부심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4 파운드, 인간에 대한 사랑은 3 파운드, 따라서 순수한 열정은 총 열정의 100 분의 7에 해당된다." 그러나 적어도 시무언의 열정은 이렇지 않았다.

자, 이제 시무언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순수한 열정은 마귀 사탄에 의해 시험당했다. 사탄은 시무언을 다른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겁한 방식으로 그를 쓰러트렸던 것이다. 겁쟁이만이 연약해진 사람을 때리듯이 사탄은 그렇게 시무언을 공격한 것이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시무언을 신비주의로 몰아넣어, 감리교단으로부터 그를 몰아내고 거짓된 운동과 관련지어 시무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이 새로운 교단은 "시무언의 정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비록 우리의 공식적인 관계는 변했지만 그와 단절할 필요는 없다. 그 역시 바울사도나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같은 친구이자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각각의 재능과 봉사하는 방법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하나다. 시무언의 형의 이름인 용채(Using Diversity)와 동생의 이름인 용구(Live Forever)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구원자는 세상에 있는 그의 모든 종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며 그의 임종의 시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아들이여,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시무언은 바로 이 사랑에 항상 의존하였다. 한 편지에 그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이 세상이 어려울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나라가 망할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사회가 격동할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사람들이 학대하고 비웃어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몸이 아플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육체는 죽을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시무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말구유에 누워있는 초라한 아기 예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는 또한 머리를 대고 편히 쉴 곳도 없었던 보잘 것 없는 나사렛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예수였다. 예수는 산 속에서 밤을 새며 기도했던 중재자이셨으며, 가족조차 미쳤다고 오해를 했던 만인의 스승이었다. 그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 49)라고 말씀하신 열정적인 분이었다. 예수는 제자의 발을 손수 씻겨준 겸허한 분이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멸받고 거부당했던 슬픈 운명의 특출난 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최후의 순간에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외친 사역자였다. 시무언은 예수의 이런 사역을 위한 뛰어난 청지기였다.

많은 점에서 시무언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주님의 종이었다.

1. 그 첫 번째로 우리는 사랑을 언급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나눈다는 사명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는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는 사람의 속 모습을 보십니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그리고 외국인이나 내국인 또는 아동과 어른을 똑 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는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십니다. 창녀를 멸시하고 거지나 문맹인, 그리고 아동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의 사랑을 모른척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와 같이 시무언의 사랑은 새와 나무와 바위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는 바위를 하나님의 제단이라고 부르고 차갑거나 딱딱하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낮의 새들은 그의 설교 동료였고, 밤벌레들은 그의 기도 동료라고 시무언은 말했다.

2. 기도는 이러한 사랑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기도는 그의 삶의 일부였다. 따라서 그의 설교나 대화는 자연스럽게 기도로 이어지곤 했다. 듣는 사람은 그 변화를 느낄 수조차 없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구슬과 같다. 아름답지만 서로 연관성 없이 일방적으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실에 달려있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시무언은 설교를 하면서 성경구절을 읽고 난 뒤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까지 인도하였다. 그러면 시무언은 "아, 아버지..."하며 기도를 드렸고 당연히 우리는 무릎을 꿇었다. 그 만큼 기도와 설교의 전환이 자연스러웠다.

기도로 된 전보를 받은 적이 있는가? 한 대규모의 부흥회를 하고 있을 때, 시무언은 나에게 전보를 쳤다. "주님, 피목사를 즉시 보내시옵소서."

"기도로 살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몰라." 그가 말했다. "기도는 우리의 일이야.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이니. 우리의 본일에는 충실하지 않고 부차적인 것에만 매달려 사는 것은 힘든 일이지." 그리고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열정적인 기도는 살아있다는 것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학대를 당한다 해도 기도합시다. 외면 당한다 해도 기도합시다. 최후의 승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3. 그의 세 번째 장점은 겸손함에 있었다. 그의 겸손함은 그의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했지." 그가 말했다. "거지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아이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달라고 나는 기도했어." 그는 탕아와 어린이들, 문맹인들, 불교 신자들, 그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가 얼마나 많이 배우는지 자주 언급하곤 했다.

"누구와 함께 있든지 나는 항상 그에게서 무엇을 배우려하지. 내가 그들보다 열등한 것이 있다면 나는 겸손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서 배우는 일은 당연하지 않는가. 평생을 거쳐 학생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네. 모든 것이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야."

"겸손은 맨 마지막에야 가질 수 있는 미덕이네." 시무언이 말했다. "사랑이나 믿음과 같은 것은 겸손보다는 훨씬 더 빨리 가질 수 있어. 내가 기도할 때 나는 단지 이렇게 말하지. '주님, 당신의 구원을 목격하려고 기다리는 시무언입니다.'" 내가 한 모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축하해주자 시무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성령의 일을 단지 지켜봤을 뿐이네." 나는 그때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4. 시무언의 사랑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은혜로 이어졌다. "주의 십자가 있는데"를 부른 후 가족 기도회 시간에 시무언은 바로 다음 대목에서 그의 기도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 고통을 알게 하소서 주님이 몸에 짊어지셨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는 입고 있는 옷까지도 수 없이 나눠주셨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피를 제외하고는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때, 바로 그때서야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

5. 당연히 우리는 그의 세속적이지 않은 면도 높게 평가해야 한다. "세상이 너를 외면했다고 해서 슬퍼하고 있나?" 시무언이 친구를 꾸짖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자네를 환영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수 천 번씩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몇 년밖에 되지 않더라도 내가 온전하게 기도하고 성령이 일할 수 있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나도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네."

어느 날 나는 주님의 짧은 생애가 이상적인 것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고 그와 논쟁을 벌였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것과는 다르다. 그는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오셨으며,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고 다시 부활하여 우리가 전파할 수 있는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자네도 몸을 돌보게." 나는 이렇게 충고했다.

"내가 일찍 죽고 싶은 것은 아니네."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싶네. 웨슬리(Wesley)나 에디슨(Edison)의 긴 생애는 그것이 길었기 때문에 가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지칠줄 몰랐기 때문이지. 흘러가는 세월에 가치를 부여한 것은 그들이 이룬 사역이네. 몸을 돌본다고 해서 다 오래 사는 것은 아니지.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이야. 내가 오늘 사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오늘을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서만 쓰고 싶네. 주님께서 내일도 날 쓸 수 있다면, 내 생명을 연장해 주실 것으로 믿네. 내가 모임에 가면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하지. '주님, 내가 이 모임이 끝나기 전에 죽는다면, 나의 마지막 힘과 생각을 당신께 바치게 하소서.'"

그의 비세속적인 면은 금전에 대한 무관심에도 잘 나타났다. 그가 돈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주위 사람들과 그 돈을 다 썼다. 그리고 그에게 돈이 없을 때면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은 어떻게든 충족되었다.

시무언을 말했다. "내 가슴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써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는 많은 역경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어려움을 호소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밥상에는 밥과 오이밖에 없다 해도, 그는 부담없이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그의 아내인 봉애는 오이 요리를 다섯 종류로 마련하여 반찬부족을 기가 막히게 잘 감췄다.

그의 비세속적인 면은 시간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에도 잘 드러났다. "나는 미래를 준비하지 않네." 시무언은 말했다. "나는 오늘만을 생각하지. 나는 지금 주님의 은총을 깨달아야 한다고 믿네. 그리고 나는 과거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아."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에 내가 과거의 방법을 다시 사용해서 성령이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나는 이미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거야. 이전의 승리와 축복은 어떤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한 것임을 믿네. 내가 새로운 은총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단지 성령과 연합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네."

시무언은 계산에도 연연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다른 세속적인 사람들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예배를 보러 소수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시무언은 주님께서 특별히 더 유익한 말씀을 건네주시라고 기도했다. "대중 앞에서는 정의가 실패하지."그가 말했다. "그러나 개인 앞에서는 정의가 승리해. 따라서 우리가 대중에 의해 그리고 단순한 수단에 의해 승리와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개인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실패를 하고 말지. 대중에 관해서는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각 개인에 대해서는 불가능해지지. 하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각 개인을 고려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네."

따라서 수명, 돈, 시간, 그리고 숫자와 같이 육적인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은 시무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쉘리(Shelly)가 말했던 "조금씩 퍼져나가는 세상의 죄의 더러움"에 말려들지 않는 이런 사람을 우리는 소리 높여 부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실패는 두려워하지 않지만 오히려 사람답게 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데이빗 그레이슨(David Grayson)이 말했듯이,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순간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살아야 한다."

이제는 그의 열정의 비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이 "이 순간"이 그에게 가져온 모든 것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는 그 대범함. 그가 편지에 썼다. "형제여, 나에게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그 어떤 계획이나 방식이 없다네. 심오한 철학적 원리를 내게서 요구하지 말게나. 죽음! 그것만이 나의 계획이며 나의 방식 그리고 나의 원칙이네. 매일같이 나는 죽음을 직시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척하면서 전진하네."

이것이 성령이 그리스도의 지체 안에 거한 시무언에게 특별하게 선사하신 5-6개의 은혜이자 모든 이들을 위한 그의 장점이다. 만일 한 사람이 영광을 받으면, 모두가 그로 인해 기뻐할 것이다.

"황혼, 샛별, 그리고 분명히 부르는 소리..." 3월에 그는 일을 그만 두었다. 4월과 5월 동안 휴식을 취했으나 그는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지길 바랬다. 여름이 지나자 가망이 없었고 시무언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를 존경하던 한 젊은이는 시무언을 대신해서 죽기를 기도하였다. 시무언은 그 젊은이에게 편지를 썼다:

"서서히 사라지는 나의 인생을 위해 진정으로 날 대신해서 죽고 싶은가?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 병상의 자리를 대친 차지하려 하지 말게. 자네의 몸의 기력이 사라지고 땅에 묻힐 때까지 진리를 선포하며 기도하며 사람들의 외면을 견뎌내게. 나를 대신해 자네가 의미 없이 죽기를 원하지 않네. 하지만 진정으로 나를 따라, 십자가를 짊으로 내 진리를 채우게."

시무언은 몇몇 온천을 찾아가 봤지만 그의 건강은 여전히 악화되었다. 8월에 그는 원산에 있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왔다. 1933년 10월 2일 시무언은 1928년의 아름다웠던 부흥회를 회상하면서 조용히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새로운 친구들은 그의 임종을 같이 하였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인상적이다.

"주님, 저에게 3년만 더 주소서. 그러면 저는 저의 모든 힘을 거지들에게 설교하는데 쏟겠습니다. 저는 그들과 같이 굶고 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웃고 울 것입니다. 오 주님, 저 거지들을 위해서 저에게 삼 년만 더 주소서!"

시무언의 어머님인 양 마리아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근완(Nearly Perfect)은 이년 반전에, 순례는 몇 달 전에 저 세상으로 갔다. 용채와 용구만이 남았을 뿐이다.

시무언이 마지막 숨을 들이 쉴 때 형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형, 내 눈을 봐. 죽음이 보여? 아니야, 죽음이 아니야. 형, 거기에는 삶이 있어. 생명이!"

시무언에게서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했던 형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받았다. 그는 어린 소년 시절 황해도에서 살던 때 이후 처음으로 주님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때 가족과 의견이 대립되었던 아버지도 지금에 와서 마침내 가족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슬퍼 보였다. 그러나 모순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더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 해 봄에 그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다. 어느 날 자정 경에 그의 신음소리가 가족 전체를 깨웠다. 그리고 새벽에 이르기까지 가족 식구들은 그가 죽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어두운 영혼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 그는 구세주를 대면했다. 주님께서는 못자국에 상처 입은 모습으로 의를 위해 부활하셨다. 평온이 있었고, 드디어 이씨 가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초대교회에는 그 나름대로 열정적인 시몬(베드로)이 있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열정적인 시무언(이용도)이 있었다. 그들의 덕목이 그들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앙적 열정? 주님, 그렇습니다. 열정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를 드리며, 그 이상의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 그와 더불어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그래서 우리가 사탄의 속임수를 알아 볼 수 있게 하소서. 열정과 지혜, 이 두 가지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갈망합니다. 주님, 그 열정과 지혜가 구체화되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방문할 날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화덕에 따뜻한 불을 지피게 하소서.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며

지금 이용도 목사가 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조용히, 그리고 겸손하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오고 있다. 간소한 복장이지만 깨끗한 차림을 하고 있다.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인사를 하며 우리가 먼저 말을 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점잖은 미소로 응답하자 우리는 이내 그를 좋아하게 된다. 우리가 그의 사역에 대해 더 질문하고자 하면, 그는 우리의 생각을 그 자신으로부터 떼 놓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신 일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잘 듣는다면,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아마 어떻게 성령이 신자들에게 강림하시며, 또 어떻게 완악한 죄인들이 영화롭게 구원받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한 불꽃이 그의 영혼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 사역을 바라보는 구경꾼에 불과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왔는지 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알아차리질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가슴 안에서 활동하신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이 목사는 우리를 정죄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면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무언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고백하기 전에 우리는 이 목사가 이미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헌신이 부족함을 고백하고 있다. 마치 그가 죄인인 것처럼.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비하게 할 때 몇 시간이 흘러간다. 새로움이 온다. 이전 것은 지나갔음을 느낀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에 대해 증거하기를 갈망한다.

이용도와 나는 1930년 같은 해에 서울에서 감리교단에서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30년 연회에서 그는 서울에서 주일학교 협의회의 일을 보도록 파송받았다. 그가 서울에서 기거할 방이 없었기에 나는 그를 초대해서 함께 살았다. 나는 사직동에 있는 다섯 칸의 방이 있는 한국식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거처할 곳을 찾아 가족들을 동해안에서 서울로 옮길 때까지 3-4개월을 함께 살았다. 우리 집 옆에는 영어교사였던 한인수 목사가 그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이용도는 나에게 참으로 정다운 친구요 형제였다. 나는 내가 한 성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를 생각나게 했다. 그는 가끔 티벳에서 그리스도를 전했던 인도의 성자 선다싱을 찬양했다.

나는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이용도가 방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고 그의 설교를 들었다. 나는 그로부터 그의 생애에 대한 나의 글 "시무언"을 위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글은 1935년에 서울에서 발간된 기독교문학회(Christian Literature Society) 회지에 실린 것이다.

나는 그가 자기 집으로 옮기자 못내 서운했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이용도는 예민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는 그가 한국 주일학교 협의회를 위해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그 직책을 맡기에는 너무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대신하여 그 일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처럼 설교할 수는 없었다.

다음 연회에서 감독께서 이용도로 하여금 대중 전도사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아무런 봉급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스톡스(M. B. Stokes; 도마련) 박사와 나는 그를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이용도는 나라 전역에 걸쳐 유명해졌다. 부흥회에 초청하는 부탁이 전국 각지에서 쇄도했다.

우리 대부분은 일상적인 습관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하루의 시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잠자는 동안에 밤새도록 기도하고, 감독(bishop)보다는 거지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는 그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예수께서 에 있는 환전상들을 몰아 내셨을 때, 주님께서는 오해를 받았다. 예수께서는 사욕으로 가득 찬 거래행위와 큰 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사려 깊지 못한 행동들을 보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잠잠할 수 없었다. 그런 경우에 그는 개인의 인기에 집착할 수 없었다.

이용도는 그런 예수와 거의 닮았다. 그는 자주 다음의 성구를 인용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다"(요 2:17). 그는 결코 냉담하거나 차갑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 안에서 행해진 자기들의 일상적인 행위를 비판한 예수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이용도와 같은 사람의 열심은 필연코 다른 사람의 비판을 받게 마련이다. 생각컨데 많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현재위치에서 부적절하게 느낀다. 나도 역시 그렇다. 그는 어떤 목회자에게도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저울질 당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몇 가지 점을 지적하신다. 아마도 많은 목회자들은 냉정함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며 집으로 갔다. 한 소문이 돌았다. 그것은 이용도가 공개적으로 목사들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용도가 여인들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는 여인에 대한 남자의 공개적인 관심은 금지되어 있었다. 영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마 이용도로 하여금 당시에 통용되었던 몇몇 제한사항들을 무시하게 하였다.

1932년 경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이용도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났다. 젊은 여인들이 성령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그들에게 관심이 쏠렸다. 이것은 마치 그가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라면 본능적으로 어디라도 가려는 것과 같았다. 그 여인들 가운데 한 여자는 "계시"를 받은 것처럼 이 목사를 비난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설교하느냐?" 그녀는 이 목사를 향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너는 기양(Kiyang)에서 실패하지 않았느냐? 계시 없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자 보라. 나는 이 시대의 마지막에 새로운 일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언젠가 분명히 성령의 영향을 받아 말하는 다른 한 여자는 사랑에 대해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다.

감리교의 동역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이 목사는 당시 비난의 화살을 받기에 용이한 상태에 있었다. 시무언은 성령을 위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 모임에서 그는 성령께 물었다. "당신은 어찌하여 무식한 여인을 통해 말씀하시려 하십니까?" "내가 만약 지식층 남자를 통해 말한다면, 너는 그가 자기 자신의 지식을 통해 말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여인에게서 나온 대답이었다.

이용도는 다시 한번 그 영에게 말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여인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저를 용서하소서. 그러나 저는 이 일이 진정 성령의 역사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 여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 도마여. 네가 만약 내 몸을 만지지 않고 믿을 수 있었다면, 너는 더 큰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너의 믿음이 어찌하여 그렇게 약한가?"

그 순간 이용도는 확신했다. "이것은 사탄의 말일 수 없다. 이 말은 성령의 말씀이 분명하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원산에 있는 청년들의 모임을 방문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처럼 날마다 한 마음으로 모여서 이 집 저 집 방문하면서 떡을 나누고, 한 마음으로 즐거움을 나누면서 식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행 2:46). 그들은 나를 그들 한가운데로 청하면서 환영했다. 나는 신기한 따뜻함을 느꼈다.

그들 가운데 계시를 받은 듯한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성령의 계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진부한 것들이었다. 더구나 나중에 전한 예언까지도 거짓으로 판명났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이야말로 "빛의 천사"로 나타나기를 좋아하는 가장 큰 사기꾼임을 알아야 한다(고후 11:14).

나는 이용도가 이 점에 있어 미혹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비방할 수 없다. 그의 감리교 동역자들은 그를 떠났지만, 이 새로운 모임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은 그가 필요한 따뜻한 애정을 주었다. 1933년 감리교 연회에서는 그를 의문시하여 그에게 목회사역을 중단할 것을 공식화했다. 그를 중심으로 모인 친구들은 예수교회를 설립하고 이용도를 초대 선도감으로 선출했다.

전형적인 겸손함으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오 주님, 내가 이 가시면류관인 선도감직을 수락해야 합니까? 가능하다면 이 잔과 가시관이 나를 빗겨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오! 주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그 당시 이용도는 육체적으로 매우 연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요양하는 것 외에 많은 일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은 점점 분명해졌다. 주님께서는 1933년 10월 2일에 그를 불러가셨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오라,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자여. ... 내가 굶주렸을 때 너는 나에게 빵을 주었고, 내가 방황할 때 너는 나를 안으로 맞아들였다"(마 25:34).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바르게 행함이니, 자비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걸으라"(미 6:8).

나는 예수교회 사람들이 이용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일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1933년 3월에 한국을 떠나야 했다. 감리교 선교국은 병중에 있는 한 미국인 선교사가 귀국하는 길에 나로 하여금 그와 동행하도록 주선했다.

나는 1934년 8월에 한국에 돌아왔다. 그 후 1-2년 동안 이용도의 부인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나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4년간 신학을 공부했다. 졸업하기 석 달 전에 나는 여전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다. 1928년 2월 10일 금요일 저녁, 나는 중국 본토 선교회의 미국담당자를 만나보러 갔다. 그는 프린스톤에서 살고 있으면서 학생부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선교사역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반가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셨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중국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갈 생각을 마시오." 그는 계속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움직일 분비가 되셨다면,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은 바로 이것이오. 마치 중국인이 손님에게 안녕인사를 하듯이, 만만소(천천히 가시오). 그것이 당신에게 주는 내 충고요."

이틀 후, 2월 12일 일요일 밤에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조선(Korea)에 복음전도자로 가게 될 것이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살고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들은 답장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네가 조선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한 달이 지나 감리교 선교국에서 전보가 왔다. "청원이 받아들여짐-일하시오-조선(한국)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나의 모교회(母敎會)에서 나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문은 활짝 열렸다.

1928년 7월 31일, 나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조선으로 갈 배 위에 있었다. 나는 8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나는 조선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고 생각했다.

한인수 목사는 나에게 조선어를 가르칠 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양주삼과 함께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제 일반에 속해있었다. 약 두 달 후에 나는 처음으로 조선어로 설교를 했다. 마태복음 2:10을 본문으로 나는 용산 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양주삼 박사는 나에게 조선 이름을 선사했다. 나의 한국이름은 피도수(皮道秀)였다.

12월에 나는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솜이 든 조선옷을 입기 시작했다. 1년 동안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일한 후에 나는 사직동에 있는 조선인 집으로 이사갔다. 서울 지역의 선교를 위한 내 일자리는 종로 근처에 있었고, 서울 동부 지역의 선교를 위해 의정부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나는 신설리와 성북동에서 천막집회를 가졌고 그 두 곳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1934년에 미국에 돌아 온 후에, 감독은 나를 1년간 개성 선교사로 파송했다. 한 시골교회에서 부흥회가 있는 동안 나는 빨갛게 달아오르는 열로 심하게 앓았다. 1935년에 나는 철원지역으로 파송받았다. 김화교회에 담임목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살기 위해 갔다. 그러나 나는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대구에서 만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중국의 북경까지 돌아 다녔다.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준 돈으로 나는 많은 교회를 세웠다. 우리는 그 당시 약 200불 정도면 시골에서 조그만 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 나는 김화에 돌과 타일로 된 지붕이 있는 조선식 교회를 지었다.

한흥복은 한 달에 두 번씩 한 여자 선교사를 대동하고 김화를 방문했다. 금요일 저녁, 그녀는 청년부 모임을 인도했고 토요일에는 여자들을 위한 모임을 인도했다. 내가 그녀에게 일요일에 독창을 해주기를 요청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기타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정남수는 김화에서 천막모임을 인도하였다. 그 때 그는 내가 한 젊은 여인을 좋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중에 한흥복이 아직 미혼이라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몇 몇 남자들이 그 당시 그녀와 결혼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그녀에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그 후 짧은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단순히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그 편지 내용의 전부였다. 나중에 그녀는, "주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김화에서 1938년 2월 12일에 결혼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조선에 보낸 지 만 10년 후의 일이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호화로운 결혼식으로 인해 빚을 지지 말 것을 충고하였기 때문에, 국수와 보리차로 결혼식을 치렀는데 단 10원이 들었을 뿐이었다.

흥복의 한 친구가 이화여대에서 우리를 찾아와서 조선잡지(Korean magazine)에 우리에 관한 기사를 잘 써주었다. 우리의 첫 딸이 1939년 8월 28일에 태어났다. 우리는 시편 84:11의 말씀에 따라 그 애의 이름을 영은이라고 지었다.

나는 항상 한국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1940년에 미국 정부는 임박한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고 곧 한국을 떠날 것을 충고했다. 당시 경찰들은 조선 사람들이 미국인과 같이 있는 것에 의심을 품었다. 미국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병석에 있었기에 우리가 미국에 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1941년에 우리는 슬픈 마음으로 한국을 떠나면서 곧 다시 돌아오게 되기를 희망했다.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우리의 귀환은 지연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아내 흥복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동란이 일어났다. 김화는 폐허가 되었다. 1955년까지 어떤 가족도 되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때까지 나는 어떤 선교단체와도 연락이 되질 않고 있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교회와 더불어 교회사역을 하고 있었다. 우리 자녀들은 이미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1976년 이화여대에서 개교 90주년 기념을 위해 우리를 초청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한 달 동안 즐거움을 만끽했다. 맹기영, 이호빈, 김광우, 한영선, 박창혁 박사, 그리고 김옥길과 같은 친구들이 우리를 왕과 왕비처럼 맞아 주었다. 장미꽃이 만발했고 한국의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국은 이전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1941년에 서울에는 14개의 교회가 있었다. 이제 400개 이상의 교회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한국을 기억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마치면서 이용도 목사의 자부와 손자들의 안부를 묻고 싶다.

 

 

1996년 가을에

피도수(皮道秀)

Victor Wellington Peters

 

<출처: 이용도목사의 영성과 예수운동,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 편, 성서연구사, 1998. 1-113쪽>

출처 : 청교도 도서관
글쓴이 : 천국 도서관장 원글보기
메모 :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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