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죽음에 대한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면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가 성도들이
옛 사람의 죽음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대하게 할 수 있는 핵심적인 열쇠입니다.
여기에서 ‘마지막 아담’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그러면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과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폭넓은 인식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속죄제물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 되신 예수님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아담에 대한 진리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하여
창조론을 참조하면서 연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어 에덴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원래 모든 만물과 우주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결과로 에덴낙원에서 추방을 당하고
저주를 받게 되었지요.
그러자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심령 속에는 마귀적인 성질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마귀는 저주받은 인간의 심령과 육체를 통해 활동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범죄하게 함으로써
지옥백성이 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크게 네 종류로 분류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해와 달과 별과 천체 모두가 있는 우주를 가리켜 말하며,
또 한 가지는 흙이나 광물, 동물, 식물 같은 것을 종합하여 말하는 만물이며,
나머지는 사람의 육체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기를
이 모든 피조물들이 ‘아담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에게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부속시켰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담’은 한 개인의 이름이 될 뿐만 아니라
우주와 만물 그리고 사람의 육체와 성격,
즉 모든 피조물들을 포괄적으로 담은 이름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한 개인으로만 보시지 않고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 포괄적이고
대표적인 이름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담’이라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고 저주를 받게 되자
모든 피조물들이 동시에 비참한 운명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된 우주만물 모두가 다 무가치하고
소용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존재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 안에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예수님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시해야 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표현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둘째 아담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아담’이라는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첫째 아담 안에서 저주받은 모든 피조물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우주만물이 없어질 때까지의 모든 피조물을 포함함)을
예수님 안에 담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주받은 모든 피조물을 담으신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께서는 33년 동안 사시다가
그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 안에 담겨진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예비해 놓으신 엄청난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 즉 혈기를 내고 욕을 잘하고 교만하고 음란하고 거짓말하고
아집적이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뭉쳐진 자신이
모두 마지막 아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 가운데 자신의 생활을 자세히 성찰해 보면,
여전히 죄를 범하기 쉬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악심이나 악행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악한 생활을 하도록 하는 옛사람,
즉 자기 자신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마지막 아담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억지로 믿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께서는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십자가의 도를 정확히 깨달은 다음에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세례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알고
세례를 받는 분은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옛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제거한 사실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현실 생활 가운데서는
죽지 않고 여러 가지 죄가 나타나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옛사람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 가운데 주관적인 경험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신학과 워치만 니 사상의 초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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